고산도서관 수필쓰기 강좌 –11차시 (2022년 6월 29일 수)
창작 실기-원고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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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삭 및 협의회
1. 졸업식날의 해프닝 / 권삼국
저녁 뉴스에 내일 새벽 눈 예보가 있었다.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다. 내일이 졸업식인데 많이 오면 출근길이 막힌다. 50km가 넘는 먼 길인데 걱정이 앞섰다.
뒤늦게 장학금 지급 의사를 밝힌 기관도 있었고, 표창장을 전하고 싶다고 전화 온 곳도 있었다. 학사보고서도 수정해야 하고 상장도 새로 만들려면 평소보다 1시간은 더 일찍 가야 하는데, 제발 눈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잠이 깨자마자 창문부터 열었다. 온통 눈 세상이 되었다. 불안하고 화가 났다. 아침밥을 몇 숟갈 뜨고 평소보다 1시간 반이나 당겨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자동차 바퀴에 체인을 감고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그렇게 1시간 가까이 속도를 줄인 탓으로 시간은 늦어 졌지만, 마음은 좀 편안해졌다.
와촌을 지나 청통에 진입하면서 속도를 좀 내기 시작했다. 불안했던 마음도 살아지고 자신감도 생겼다. 송천 다리 위를 지날 때 바퀴가 미끄러지면서 난간을 박고 맞은편에서 오던 트럭과 부딪히고 말았다. 긴장한 탓인지 몸은 큰 충격은 느끼지 못했으나 정신이 몽룡했다. 트럭 운전수에게 다가가 몸은 괜찮은지 물어보고 차도 살펴보았다. 인상을 찡그리며 허리를 잡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랬어요” “ 난 바쁜 사람인데 어떻게 하실래요”. 라며 고함부터 질렀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경찰을 부를게요?’ 하고 대답했더니. 힘들게 하지 말고 성주에 9시까지 가야 한다며 현금으로 20만원을 달라고 했다. 2차 사고로 내 차는 범퍼가 내려앉고 앞쪽이 많이 찌그려졌지만, 상대방과 차는 멀쩡했는데 바가지 씌우겠다는 의도라는 의심은 갔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전화번호를 주고 받으며 헤어졌다.
차는 보기 흉할 정도로 부셔젔지만, 운전은 가능했다. 혹시나 아는 사람이 볼까 봐 가능한 빨리 달려 학교의 가장 외진 곳인 숙직실 뒤편에 세워 두었다.
옆 반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졸업식을 무사히 마치고, 애써 웃으며 학부모, 아이들과 사진도 찍고 학생들을 돌려보내고 나니 기진맥진 쓸어질 것만 같았다.
학교 앞 식당에서 점심 식사가 있다며 일은 갔다 와서 하자며 교무가 손을 끌었다. 차가 신경 쓰여서 배가 고픈 줄도 모르겠는데 자리는 메워야 하겠기에 따라 나셨다.
학교 직원들, 학부모와 둘러앉아 식사 겸 술자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인사나 하고 밥만 먹고 가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1년 동안 수고했다며 여기저기서 술잔이 날아들었다. 난감했다. 국그릇을 비우고 재빨리 식탁 밑에 감추었다. 술잔을 입에 대었다가 빈 그릇에 부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하기가 힘이 들었다.
교무에게 학교에 급한 일 때문에 간다고 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행정실 직원에게 일이 있어 일찍 좀 나갔다고 나중에 교무에게 얘기하라고 부탁하고 털털거리는 차를 몰고 대구로 향했다.
평소 다니던 집 부근 정비소에 가 자초지정을 얘기했다. 부서진 차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차라리 새 차를 사는 것이 더 좋겠다고 했다. 걱정이 앞선다. 집에 가서 또 무슨 얘기를 들은 지. 채 3년이 지나지도 않는 차를 또 사야 하나܁܁܁. 조심스럽지 못한 행동에 서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아침이면 등굣길을 밝혀주던 아이, 수업이 끝나고 나오면 복도 어디선가 나타나 반가움을 표현했던 너희들이 있었기에 쌓였던 피로가 가시고 새로운 힘을 얻기도 했다. 때로는 너희들이 나의 제자이자 스승이기도 하였기에 더욱 기쁜 오늘이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좀 더디어도 좀 서러워도 한 길을 가자. 바른길을 가자.
흠뻑 내린 눈이 나에겐 차를 잃은 불운의 날이었지만, 오늘 학교를 떠나는 너희들에겐 흰 눈처럼 깨끗하고 평온한 세상이 펼쳐지는 행운의 날이 되기를 기원했다.
2. 이석증 /김을수
1. 한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 일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려는데 머리가 흔들거렸다. 그대로 다시 누웠다. 살며시 몸을 일으켜 보지만 어지러움과 함께 눈앞이 빙빙 돈다. 그 자리서 꼼짝할 수 없다. 벽도 천정도 머리와 함께 빙글빙글 돈다. 눈을 감고 벽 쪽으로 몸을 세우고 눕는다.
집안 묘사를 앞 둔 아침이었다. 어제 시골에 가서 묘사준비를 하고 돌아 온 터 라 멀쩡했던 사람이 밤새 안녕이란 말이 이런 건가. 황망해 하는 남편을 재촉해 혼자 가게 했다. 일요일이라 병원에 갈 수도 없는 처지라 두통약으로 하루를 견뎌보기로 했다. 꼼짝 못하고 누운 채로 하루를 보냈다.
2. 동네 신경내과에 갔더니 머리를 좌우로 탁 탁 돌렸다. 확대안경을 통해 눈동자의 흔들림을 주시하였는데 어지러움 증세는 오른쪽으로 갈 때 더 심했다. 오른쪽 귀에 달팽이관에 돌이 빠졌다며 왼쪽으로 몇 시간을 누워있게 하였다. 귀 뒤에 드릴 가는 소리를 몇 분마다 드르륵 거렸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차도가 없다. 나 같은 환자는 일 년에 한명 정도 온다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뢰서를 들고 종합병원으로 갔다. 어지럼치료는 치료선생님이 비슷한 방법으로 하였다. 유능한 선생님은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말했다.
"이석증 맞고요. 돌은 집어넣었으니 내일 와서 다시 결과 봅시다. 집에 가서 왼쪽으로 5시간 누워있으시고." 하룻밤을 조심조심 왼쪽 귀가 눌리도록 줄기차게 몇 시간을 누워 있었다.
그다음 날에 결과 보러 가니 어제의 그 어지럼 치료 선생님이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는데 돌이 들어갔단다. 보이지도 않는 돌 이야기를 반복한다.
"돌이 자리를 잡았네요. 이젠 괜찮을 겁니다." 오늘도 왼쪽으로 6시간 누워있고요. 당분간 오른쪽으로 눕지 마세요."
'근데 선생님.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움이 아직 있는데요?'.
"지진이 나면 여진이 있는 것처럼 그럴 수도 있지요. 차차 없어질 겁니다."
그 말에 고개 숙여 감사하고 돌아왔다. 빙빙 도는 어지럼은 줄어든 것 같으나 고개를 앞으로 숙이거나 옆으로 돌리면 어질어질하였다. 머리를 맘 놓고 돌리지 못하니 사람이 멍해지는 것을 조절할 수 없다.
3. 그런 상태가 2주일이 계속되던 날 다시 어지러움과 두통이 심해졌다. 좌우 어느 쪽을 돌려도 마찬가지로 눈앞이 빙빙 돌아서 움직일 수가 없다. 처음으로 119에 도움을 청했다.
마침 동네 가까이에 있는 소방서에서 금방 와 주었다. 젊은 두 명의 구급대원의 부축으로 응급실로 향했다. 남편은 자기도 평소 지병이 있는 환자라 너무 당황해서 바쁜 사람들께 도움을 청해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그들은 아니라고 잘하셨노라고 위로해주며 신속하고 친절하게 병원까지 실어다 주었다. 마침 담당 선생님이 진료 중인 날이라 또다시 어지럼 치료실, MRI실, 끌려 다니면서 검사를 했다.
4. 종일 병원서 기다리고 지친 남편은 다리가 풀린다고 나보다 더 쓰러질 듯하였다. 다행히 돌이 제대로 들어갔다는 결과가 나오고 두통은 조금씩 진정되었다. 이번에 또 알게 된 것은 우리가 가만히 한쪽으로 누워있으면 귓속 돌도 지구의 중력에 의해 제자리로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의사 선생님이 오른쪽이 떨어졌으니, 왼쪽으로 누워 하루 5-6시간을 누워있으라고 강조하신 것도 그런 의미다.
5. 후유증은 한참 더 지속되었다. 침대에 누울때도 몸을 왼쪽부터 누인뒤 반듯하게 눕고 일어날때도 왼쪽으로 돌려 일어나야했다. 쇼파에 앉아 왼쪽으로 쿵 기울였다. 오른쪽으로 쿵 기울였다를 반복하는 운동을 날마다 해야했다. 이쪽저쪽 균형잡기 훈련이라지만 깊은산 벌목반의 톱질에 툭툭 넘어지는 나무둥치가 된 듯 하였다.
6. 이석증 소동으로 12월의 계획들이 틀어졌다. 배추 30포기를 미리 주문해 놓은 김장이 문제가 난감했다. 부산에 사는 손위 시누님에게 구원 요청했다. 흔쾌히 승낙하며 곧장 올라오셨다.
시누님은 나를 천사 올케라고 부른다. 남편의 두 살 위 누나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부산 사는 시누님은 가정에 힘든 일이 생겨, 방 2개인 우리 집으로 피신을 온 적이 있다. 시누님께 방 한 개를 내주고, 우리 식구 4명이 같이 사용했다. 마주 보고 있는 방문을 열면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좁은 아파트였다. 시누님은 넓은 형제 집도 있는데 남편이 가장 편했는지 우리 집에 있기를 원했다. 나 역시 아무런 불만 없이 그냥 받아들였다. 빠듯한 서울 살림살이에도 불평도, 갈등도 없이 일 년을 함께 살았다.
6. 그 후 가정문제가 잘 해결되어 시누님은 부산 본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일을 고마워하시며 나를 천사 올케라 부르며 여동생처럼 아껴주신다.
7. 시누님이 오셔서 김장을 제집 일처럼 해주셨다. 벽에 머리를 대고 가만히 앉아 말로만 이래저래 하라는 내 요구를 기꺼이 들어주셨다. 간보기 김치를 손으로 말아 입에 넣어주니 어머니 손길 같았다. 김치 통을 닦고 넣고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해줬다. 집안을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닦아주고 돌아가셨다.
8. 이석증이 귀속의 돌과 중력이라는 연결고리가 있듯이 모든 관계에도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가 있다. 내가 했던 작은 일에, 큰 보답으로 돌아오는 시누님과의 좋은 관계 또한 그러하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그 연결고리로 이어지고 더불어 살아간다.
3. 눈깔방망이 /김형윤
1. 얼굴은 그 사람의 생각과 기분을 잘 드러내 준다. 그중에서 눈은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의 지나온 삶의 무게와 의지를 가늠해 보기도 한다. 눈으로 보이는 그 사람의 이미지는 다른 어떤 것보다 강렬했다.
2. 어렸을 때 내 별명은 ‘눈깔방망이’였다. 여름철 냇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작은 물고기의 이름이었다. 눈이 유난히 커서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눈깔방망이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 별명을 생각하면 냇가 근처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 후에도 내 별명은 주로 눈과 관련되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세 글자로 통했다. ‘눈 큰 애’.
3. 눈이 작아서 고민이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눈이 큰 것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내 큰 눈을 바라보기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내 눈을 피하며 대화를 했던 사람도 있었다. 소의 큰 눈을 보는 것 같아 당황스럽다고 했는데 나는 그때 멍청하게 보이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나는 소를 영리한 동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건 소의 눈이 큰 탓이라고 여겼다. 나는 눈깔방망이보다 차라리 눈이 작은 ‘단추 구멍’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바보처럼 보이는 것이 싫었으므로 나는 늘 눈을 조심했다. 혹시라도 맹하게 보일까봐 눈에 힘을 주었다. 야무지게 보이기 위해 눈을 자주 찡그리기도 했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작은 눈으로 위장하기 위해 실눈을 뜨기도 하고 쌍꺼풀을 밑으로 잡아당기기도 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5. 결혼식이 있던 아침, 명동의 유명한 미용실에서 나는 신부 화장을 하였다. 미용사는 내 눈이 “유행이 지난 눈”이라고 했다. 요즘은 길쭉하게 생긴 눈이 유행이란다. 나처럼 땡그란 눈은 한물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혼식을 앞둔 신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얼굴을 맡긴 채 누워있는 나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모든 굴욕을 참고 유행이 지난 눈만 껌뻑거렸다.
6. 눈이 큰 것도 부담이었는데 유행까지 지났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런데 결혼 초 시어머니의 말은 뜻밖이었다. 눈이 크면 단명을 한다고 해서 나를 위해 불공을 드리고 왔다고 하셨다. 하도 진지하게 하시는 말이라 나는 반박을 할 수도 없었다. 갑자기 내가 결격 사유가 있는 며느리가 돼버린 것 같아 씁쓸했다.
7. 눈깔방망이 시절, 나는 엄마를 원망한 적이 있다.
“네 눈이 얼마나 예쁜데. 너는 눈이 예뻐서 이다음에 예쁘게 살 거야.”
그래도 입을 삐죽거리며 나는 엄마의 말에 수긍하지 않았다. 남의 눈만 쳐다보고 살았다. 잘되지 않는 일은 여전히 눈 탓을 했다.
8. 그동안 나는 눈이 크기 때문에 스스로 소심하다고 생각해왔다. 어쩌면 큰 눈 때문에 내 감정의 변화를 금세 들키고 상대에게 쉽게 기선을 제압당하는지도 모른다. 우유부단해서 판단이 빠르지 못하고 쉽게 남들의 의견에 따라갔다. 소극적이고 무력한 성격이 형성되었는지 모른다. 눈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다고 생각했다.
9. 멍청해 보이는 것을 경계했던 것은 내가 멍청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똑똑했다면 외모상 어떻게 보이든 중요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자 모든 게 별 게 아니었고 뾰족했던 마음도 무디어졌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10. 눈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감정이나 의지를 담고 있는 소통의 통로이다. 눈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눈은 더 그렇다. 불혹을 넘긴 후 나는 생각을 얼마나 예쁘게 담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1. 나는 얼마나 예쁘게 살려고 노력했는가.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내가 잘 아는 눈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사물을 아름답게 보고 세상을 따뜻하게 보듬는 시선이다. 오래전 엄마의 말이 내게 남겨진 귀한 자산처럼 생각되었다.
4. 부부란(夫婦卵)? / 남병웅
1. “여보, 이거 보고 세 글자로 표현하면 뭘까요?”
아침 식사 준비를 하던 아내가 묻는다.
무슨일인가 싶어서 보니 계란프라이 2개를 담은 접시를 가리키며 넌센스 퀴즈를 낸 거였다.
정답은? ? ? “부부란” 이란다.
와 멋진 표현이다. 듣고 보니 마치 부부가 다정하게 같이 있는 모습인것 같아 보인다. “그럼 다정란? 이라고 해도 되겠네” 하고 되 받으니 그래도 되겠다며 동의한다.
2. 식사후 집에서 나오는 길에 아파트 화단에서 본 노오란 민들레 꽃 두 송이도 마찬 가지 느낌이 든다. 계란프라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보니 혹시 부부화? 또는 다정화? 라고 불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면 외로울텐데 둘이라서 사이좋고 다정해 보이니까 말이다.
3.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근로자의 날,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이 들어있는 달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5월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가정의 달 5월에 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정한 법정 기념일이다. 아침 반찬으로 나온 계란프라이를 보고 부부란?과 다정란, 화단에 핀 민들레 꽃을 보고 부부화, 다정화라는 이름을 붙여보면서 바람직한 부부생활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4. 부부의 날에 대한 검색을 해보다가 세계부부의 날 위원회 홈페이지에서 2017년 5월에 제정한 ‘부부 백년해로(百年佛老) 헌장’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부부의날위원회에서 제공한 일명, 부부 롱런 헌장이라고도 한다.
<부부 백년해로(百年佛老) 헌장>
- 인내하며 다툼을 피하라, 참는 것이 이기는 것 <인내- 한약>
- 칭찬에 인색지 말라 <칭찬- 귀로 먹는 보약>
- 웃음과 여유를 가지고 대하라 <웃음- 명약>
- 서로 기뻐할 일을 만들라 <기쁨- 신약>
- 사랑을 적극 '표현'하라<사랑표현- 만병통치약>
- 같이 즐기는 오락이나 취미를 만들라<부부스포츠, 여행 산행 등>
- 폭력, 과도한 음주·흡연·컴퓨터게임 등을 금하라- 건강해야 장수한다.
- 부부싸움을 않거나, 잘 하라- 나만의 부부싸움 극복 비결을 익히자.
- 서로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라 - 경제적, 심리적으로 적당히 독립하라
- 기념일(결혼기념일, 부부의날, 배우지 생일 등)을 지키자<부부 프로그램 참여>
나는 과연 몇 개나 해당되는지 살펴보니 다행히 8개 항목은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아서 스스로 양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5. 우리나라도 평균수명이 점차 늘어나면서 바야흐로 100세시대가 도래했다. 부부가 결혼 후 무려 70여년을 같이 살게 된다. 일반적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인 60대부터 40여년은 노후 생활이다. 은퇴남편 증후군이라는 바람직 하지 않은 용어도 있고, 황혼이혼이 늘어간다는 안타까운 소리도 들린다. 노후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내기 위하여는 부부가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즐겁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웃음, 건강, 행복 강의를 할 때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강조하고 있다.
6. 가화만사성을 위한 ‘부부 10계명'과 같은 유사한 내용들이 카톡이나 인터넷으로 여러 가지 버전이 돌아다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2014년 부부의 날을 앞두고 매일신문 이화섭 기자가 인터넷에 떠도는 많은 부부 10계명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내용만 모아서 보도한 것이 있다. ‘[의미있는 부부의 날을 위하여] '화목의 조건' 부부 10계명’ 이란 제목의 기사가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이 가는 내용이라서 소개해 드린다. 이기자는 ‘정리해보니 부부 간에 가장 중요한 덕목은 역시 화합과 소통이었다.’고 했다.
◆칭찬하고 격려하라
◆웃음과 여유를 가지고 서로를 대하라
◆서로 기뻐할 일을 만들어라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라
◆같이 즐기는 것들을 많이 만들어라
◆건강을 지켜라
◆매일 한 끼는 같이 식사하라
◆서로에게 편지를 써라
◆인내하고 용서하라
여기서도 두가지 계명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어서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7 .이외에도 화목한 부부가 되기 위한 10계명, 부부생활을 위한 10계명, 부부행복 10계명 등 유사한 내용들로 구성된 좋은 계명들이 넘쳐나지만 실제 살아가면서는 지키기가 쉽지 않은 것 또한 현실이다. 내용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살다보면 마음먹은 대로 그대로 실행이 잘 안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우리네 인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함께 부부란과 다정란처럼 정답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즐겁고 행복한 노후를 만들어 가기 위해 더욱 소통하며 사랑과 배려를 실천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5. 마음속에 남아있는 싸리버섯 향기가 / 박송애
자인리 계정 숲은 이팝나무와 참나무로 가득하다. 숲길을 걷노라니 발밑은 축축하게 젖어온다. 벌써 떨어진 잎들이 수북이 쌓였고, 이따금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투둑투둑 거린다.
꿀밤 갓들은 알맹이를 상실한 채 파랗게 때론 갈색으로 엎어져 나 뒹굴고, 어떤 것들은 밟혀 찌그러져 굴러다닌다. 누군가의 삶도 저렇게 찌그러질 수 있을까? 소복이 떨어진 껍데기들이 노숙자들처럼 불쌍하고 처량하게 보인다. 비 온 뒤의 싸늘한 날씨 탓인지.
입구엔 어르신들이 습관처럼 나와 계시고 공공 근로하는 사람들이 주변 꽃길을 단장하고 있다. 지난번엔 자인 팔광대소리를 들을 수 있어 참 좋았고 오늘은 예상 밖의 일에 놀라 혼자 자지러졌다.
‘나 참,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발밑에 우윳빛으로 뾰족뾰족 올라오는 게 보인다. 자세히 보니 싸리버섯 같다. 산도 아닌 이 숲길에, 그것도 사람들 산책하는 길섶에 싸리버섯이라니, 눈을 의심했다. 하나 뜯어 향을 맡아봐도 싸리버섯이고 생김새도 어릴 때 보았던 그 버섯이다. 도망이라도 갈 것 같아 꿈속에서 돈다발 줍듯이 허겁지겁 뜯었다. 어린 날 추억을 캔 것처럼 흥분했다. 온 집안 가득 퍼지던 그 향기가 지금 눈앞에 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이맘때면 아버진 들일을 마치고 지게 바소쿠리에 소 풀을 가득 지고 오거나, 철마다 먹을거리를 가득 싣고 오셨다. 싸리버섯은 거의 매일 따 오셨고, 간혹 송이버섯을 따 올 때도 있었다. 부채처럼 반원으로 가득 퍼진 싸리버섯, 그 향은 얼마나 깊고 그윽하던지, 깊어가는 가을마당 가에 가을 향을 잔뜩 부려 놓으신 아버지. 그 아버지가 내 앞에 있는 듯 여겨진다.
철마다 먹거리가 있으면 포기째, 덩굴째 가져와서 식구 많은 마당에 부려 놓으신 아버지, 딸이 많아서일까? 눈물도 많으셨던 아버지, 다섯 딸을 시집보내면서 눈시울이 젖지 않았을 때가 없도록 정이 많고 어진 분이셨다.
어머니는 그 버섯을 잘 손질하여 살짝 데쳐 물에 우려 두었다가 애호박을 반달 모양으로 썰어 버섯이랑 달달 볶아 물을 자작하니 부어 맛있는 요리를 해 주셨다. 마음은 벌써 버섯요리를 하고 있다.
로또 당첨된 것보다 더 기쁘게 버섯을 땄는데 100퍼센트 확신이 가지 않는다.
”할머니 이것 싸리버섯 맞아요?”
“내사 모르겠니더, 안 무거 봐서“
들고 오는 중에도 향을 맡아보며, 실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집에 와서 버섯에 묻은 티를 발라내고, 흙을 털어내고, 씻어 채반에 받쳤다가 살짝 데치기까지 했는데 조리까지는 걱정이다. 독버섯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 버섯을 만난 기쁨과 뜯을 때의 달떴던 기분이면 충분할 것 같다. 어린 날 마당 가에 아버지가 쏟아붓던 싸리버섯 향이 내 가슴에 들어 왔다가 오래도록 머문다. 추억은 이렇게 향으로도 남아 과거를 기억하게 하나 보다. 마음속에 남아있는 유년의 그 향기가.
6. EF소나타와 성차별 /이문자
우리 아버지가 그럴 줄 몰랐다. 정말 몰랐다.
지지난여름. 곧 폐차해야 할 프라이드를 몰고 다니는 여동생이 아버지한테 며칠 차를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가족끼리 휴가를 가려는데 차가 너무 낡아서 이런저런 궁리끝에 도움을 청한 것이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동승할 때 단 한 번도 운전대를 넘기지 않았다. 딱 한 번만 몰아보자고 통 사정을 해도 대답은 언제나 단호했다. 좋은 차에 길 들면 그 작고 낡은 차를 어찌 타겠느냐는 것이 차키를 건네지 않는 이유였다. 거의 이십 년간 무사고 운전인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핑계는 달랐다. 내게는, 몸이 약해서, 빈혈이 너무 심해서 미덥잖다고 핑계를 댔다.
그랬는데, 남동생에게는 언제나 흔쾌히 차키를 내어준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동생이 잠이 부족해서 눈이 충혈되었을 때조차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말이다.
충격! 왕충격!
자랄 때 그토록 심하게 차별했으면 됐지, 지금도 이러나 싶은 맘이 심하게 든다.
그러더니 영영 눈을 감으면서도 심하게 차별했다. 딸들이 준 용돈을 모으고 모아서 아들에게 손자에게 아낌없이 주는 부성을 어찌해야 할까?
지금 창밖에 비가 내리는데도 속이 상한다. 너무 상한다
7. 비상/이영혜
1) 베틀은 ‘지짜, 지짜, 지짜...,’하고 ‘북실, 북실, 북실...,’ 베을 짜는 북은 실을 감은 체 1.5미터 남짓되는 베틀에 끼일세라 쏜살같이 왔다 갔다 하면서 소리친다. 베틀은 수만 가닥의 얇은 실들이 사이사이 끼인체로 두 팔을 쫙 펴고 올렸다 내렸다 하는 로봇처럼 움직인다. 이런 기계들 수십대가 종과 횡으로 나열되어 있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365일 ‘지짜, 지짜, 지짜...,’, ‘북실, 북실, 북실...,’ 하면서 살아있음을 알린다.
기계가 조용해지고 빨간색 등에 불이 켜지면 죽었음을 알린다. 그러면 어디에도 보이지 않던 여공이 나타나서 베틀과 북을 만져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살아난다.
2) 엄마는 몸이 좋지 않았고 아버지 혼자 벌이로는 어려운 가정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너무 사랑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술을 친구삼아 자신을 위로하였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사랑받는 것 같지만, 결국 스스로 날개짓 해서 날아 올라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3)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학교 다녔으나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공납금 때문에 늘 교무실에 불려갔다. 입학할 때 한번 내고 그 후로 한 번도 내지 않아 3년 공부해도 졸업장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교무실에 가면 부모님 모셔오라는 말에 귀를 접어 얼굴을 감싸고 알 수 없는 깊은 바닥에 빠져들어 헤매고 있었다.
결국 졸업사진은 찍었으나 졸업장과 앨범은 받지 못하게 되었다. 밀린 공납금을 한꺼번에 내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4)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가야겠다고 부모님께 말했다. 의지하던 딸이 도시로 간다는 말에 엄마는 눈물 흘리며 자신의 부족함을 원망하였고 아버지는 영리한 딸을 공부시켜야 한다며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하였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엄마와 동생들도 팽개치고 돈 벌겠다고 친척이 있는 대구로 왔다.
5) 무작정 돈 벌겠다고 집을 나왔으나 너무 어렸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대구에는 직물 공장이 많다면서 친척이 베 짜는 공장을 소개해주었다. 주야로 12시간씩 2교대로 일하고 가끔 잔업도 했는데 그때는 18시간씩 일했다.
‘지짜, 지짜...,’, ‘북실, 북실...,’ 소리내며 밤낮없이 베 짜는 소리는 딱따구리가 귀에 대고 쫓는 것 같았다. 어떤 여공은 노랫소리로 들린다고도 했지만 나는 적응 되지 않았다. 겨우 아침 이슬 한 방울 먹고 고개 내민 가녀린 풀잎이 한낮에는 맥없이 바닥에 달라붙는 것처럼 중력은 나의 머리를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갈색병 음료 한 병 마시면 아침이슬 먹은 풀잎처럼 서서히 일어섰다. 여공들은 모두 같은 환경에서 기계처럼 일했고 누구 하나 일어서지 않아도 관심 없었다. 하루하루 사선에 선 것처럼 위태로운 날을 보냈다.
6) 결국 다른 일을 찾기 위해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학원은 학생들만 다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자격증 취득하기 위한 학원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학원에 등록하고 12시간에서 18시간씩 일하고 짬을 내어 학원에 다녔다. 학원에는 주로 남자들이 주를 이루었고 여자들은 몇 안 되는데 그중에서도 여공은 나 혼자였다. 자격증만 따면 사무직으로 옮길 수 있다는 원장의 말에 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다녔다.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통신에 관련된 자격증을 취득했다.
7) 자격증을 취득하고 막상 사무직에 원서를 내려고 하니 최소 중졸이거나 고졸을 원하는 곳이 많았다. 그래서 그동안 벌어놓은 돈이 있어 다니던 중학교에 전화해서 밀린 등록금을 납부하겠으니 졸업장을 부탁했다. 그러나 쉽게 내주지 않았다. 마지막 한 달을 더 다녀야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통 사정을 해도 허락되지 않았다. 제도가 많이 바뀌었다는 대답만 되돌아왔다.
8)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어 학원 원장님에게 취업부터 알선해달라고 사정했다. 다행히 자격증만으로 취직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공장 여공이 사무직에 취직하게 되어 가족들은 자랑스러워했고 관심 없던 여공들도 부러워했다. 나도 기뻤으나 표현하지 않았다. 미운 오리 새끼가 이제 털갈이 한번 했을 뿐이었다.
9) 사무실 다니면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였다. 그는 경영학을 공부하여 사업하고 있었다. 남편은 내가 공부하고 싶다고 하니 학교 가지 않고 중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취득하는 검정고시가 있다고 했다. 아무도 모르게 입시학원에 등록해서 낮에 일하고 밤에 학원을 다녔다. 1년 만에 중고등학교 모두 졸업을 인정하는 합격증을 받았다. 그러나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나만의 성취였기에 나의 노고를 다른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할 것 같았다.
10)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는 증서를 받고 보니 대학도 가고 싶었다. 내가 시골에 있었다면 꿈에도 들어보지 못한 ‘대학교’라는 이름이다. 내가 남편을 선택한 것도 대학 졸업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고등학교까지 공부한 사람과 달랐다. 그만의 여유로움을 가지고 있었고 다방면으로 모르는 것이 없었다. 나도 그것을 느껴보고 싶었다.
11) 일을 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물색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가 제격이었다. 가장 인기 있고 미래에 전망 있는 유아교육 학과를 선택했다. 기대와 긴장 속에 당당히 합격했고 4년 내내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졸업식 날 온 가족이 참석해서 축하했다. 네모 모양의 각이 있고 한쪽에 수술을 길게 내린 학사모를 쓰고 사진도 찍었다. 엄마와 언니는 처음 보는 학사모를 쓰고 사진 찍으며 감격을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했다. 남편도 오랜만에 다시 써보는 학사모라며 기뻐했다.
12) 졸업과 동시에 유치원 정교사와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어린이집에 취직해 선생님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자였고 직물 공장 여공이었다. 이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마치고 아이들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과 지내다 보니 교육에 대해 좀 더 깊고 폭넓은 교육의 연계성이 필요한 것을 느꼈다.
13) 남편은 사업 부진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함께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평소 남편이 영어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기에 영문학과를 진학하고 나는 교육학과에 진학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남편은 흥쾌히 승낙했다. 부부가 함께 방송통신대학교에 합격과 동시에 집에서 영어와 수학 과외교습을 시작했다.
13) 그동안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은 내가 수학이라는 과목에 대해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문제를 밤새워 풀면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검정고시 시험에서도 수학이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었다.
학생들과 수학 문제를 풀 때 “이렇게 쉬운 걸 못 풀어!”가 아니라 아이들의 입장으로 접근했다. 학생들의 좋은 결과는 입소문이 나서 학생들이 대기하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그 속에 내 아들과 딸도 있었다. 어떤 학생은 학교에서 전교권에서 놀았고, 어떤 학생은 전국 수학 경시대회에서 1%에 속하는 상패를 받아 오기도 했다. 그 학생은 “선생님! 잘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하며 상패를 나에게 주었다. 상패는 교습소의 자랑이었고 나의 자랑이었다. 내 아이들도 수능에서 수학 1등급의 성적을 받아 공대에 진학하여 장학생으로 졸업하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14) 학생들은 처음 입소하여 짧게는 몇 개월도 있었지만 대부분 3년에서 7~8년을 함께 했다. 그런 속에 남편과 함께 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하면서 평생교육사 자격증 취득과 함께 두 번째 학사모를 썼다. 남편은 영어에 전문가가 되었고 나는 유아교육부터 교육까지 교육의 전문가가 되었다. 이제 미운 오리 새끼가 날개 손질을 끝내고 이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15)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니면서 알게 된 것은 공부하고 싶지만, 형편과 사정이 맞지 않아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고 또한 연령이 높아지고 있었다.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교육의 부재와 인재 육성을 위해 교육을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교육부에서 발표했는데 사이버대학이라는 것이었다. 학교도 가지 않고 인터넷을 이용하여 온라인으로 학습하고 시험도 온라인으로 치는 학습이었다. 형편에 따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양한 직업과 진로를 선택할 수 있고 좀 더 보람되고 새로운 자신의 개발을 위해 선택하는 장이 마련된 것이었다.
16) 여동생은 간호학원에서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 동생에게 사이버대학을 권유하여 영진사이버대학 1회 졸업자가 되었다. 그리고 언니는 같은 학교 5회 졸업자가 되었다. 지금은 각자 대학에서 배운 전공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 자매는 모두 대학 졸업자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성취감과 직장에 인재가 되어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 또한 삼육대학교 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여 부모와 노인에 대해 이해하고 사회의 취약계층에 대해 알게 되었다.
17) 미운 오리 새끼는 거대한 날개를 펴고 비상하기 시작했다. 선택한 것은 대구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이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대학원 마지막 석사 논문을 눈앞에 두고 논문 자료를 찾으면서 과거에 빠지곤 한다. 논문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지나온 시간은 한 컷도 버릴 것 없이 영사기 필름에 저장된 듯 기억 저편에 있다. 필름 중간중간 잡음이 생기면 가끔 베틀소리가 들리기도 하지만 그 소리는 딱따구리가 쪼아대는 소리가 아니었다. 부리가 무뎌져 여공들처럼 노랫소리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17)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을 건졌잖소! 음, 음, 음, 어, 허허!’ 노랫말이 생각난다.
옷 한 벌만으로 산다는 건 좋다는데 나는 좋은 남자를 만났고, 딸과 아들을 낳았고 배움으로써 지혜를 건졌으며, 가족과 부모를 돌볼 수 있는 능력을 건졌다. 부자는 아니지만, 집도 한 채 건졌으니 수입의 10%는 초록우산, 유니세프, 굿네이버스 등에 후원도 하게 되었다.
18) 나의 비상은 배움으로 시작했다. 공부 시작할 때 친구들에게 함께 하자고 권유했으나 두려워했고 그럴 시간이 없다고 했다. 배움은 두려운 것이 아니었고 없는 시간도 만들어 냈다. 넓은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과 아량을 주었고 큰 지혜를 주어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여유도 주었다. 정서적 안정과 마음의 낭만을 주었다.
100세 인생에 반평생의 배움은 할 일이 무궁무진함을 배웠기에 기쁨과 즐거움이 함께했다. 석사과정을 마치면 박사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나의 비상은 평생의 배움이요, 그 배움은 사람들에게 나누고자 함에 있다.
8. 백병전白兵戰, 백병전百病展 / 이장희
1)아내가 건네는 헝겊 가방을 든다. 뭣이든 넣고 다니기 편한 그 안에는 핸드폰, 지갑, 보온병, 먹던 약과 양치도구가 들었다. 별도의 옷 보퉁이에 외투와 목도리, 스웨터, 실내화까지 챙겼다. 칼과 창, 총 따위의 무기는 아니지만 아내가 병원에서 며칠 견뎌내려면 필요한 장비였다. 백병전白兵戰에 임하는 것 못지않은 결의와 굳센 마음가짐을 가져 보았다.
2)아내는 무릎 관절 수술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큰 수술이 아닌데도 자못 비장한 생각에 이가 꽉 물렸다. 건물 뒤편에 어렵사리 주차해 놓고 입원수순을 밟았다. 입원실은 숨이 막히도록 병상들이 꽉 찼다. 하나같이 여성들인데 대략 일흔은 됨직하고 여든 넘은 노파도 보였다.
3)우리를 반가이 맞은 사람은 인공관절을 해 넣었다는 옆 침대의 환자였다. 이번에 두 번째라는 분도 자신의 병증을 소개했다. 그때 주사를 맞고 들어서던 한 분이 통증을 못 이겨 찡그리며 울음을 삼킨 채 쓰러졌다. 병실이 금세 적막강산이 되었다. 환자도 병문하는 이도 우연인지 바깥노인은 별반 보이지 않았다. 피붙이로 보이는 젊은이들만 가끔 다녀갈 뿐이었다.
4)신神은 여성들 무릎에 참지 못할 형벌을 내려야 꼭 속이 시원한가. 이것은 심히 불공정한 창조행위가 아닌가! 여성들은 예로부터 편할 날이 드물었다. 주위의 친척이나 이웃, 어디를 둘러봐도 그랬다. 밥 짓기와 쓸고 닦는 청소며 자식들 씻기고 입혀 학교 보내랴 가족 뒷바라지에 숨이 턱까지 찼다.
5)어디 그런 일 뿐인가? 소가 있으면 있는 대로, 경운기나 탈곡기 같은 기계 힘을 빌리면 빌리는 대로 농사는 한도 끝도 없는 관절운동이 아니던가. 어촌은 어촌대로, 상업에 종사하는 집은 그들대로, 바쁠 때는 잠시 눈 붙일 틈이 없지 않았던가. 장보기, 장 담그기와 김장에 제사, 어른 모시기까지가 다 여자들 몫이었다. 꼭두새벽이나 늦은 밤까지도, 달마다 해마다 수 천, 수만 번 아니 무한대로 팔꿈치와 무릎을 폈다 굽히기를 거듭해야 하는 것이 여성의 숙명이었다.
6)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신기한 가전제품들이 쏟아져 나와 청소와 세탁, 요리의 일손을 덜고 힘든 주부의 육체활동을 줄여준다. 애처롭게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시 끼니에 중참까지 주방장과 배달꾼을 겸하느라 허리 한번 펼 새 없었던 게 여인의 삶이었다. 누가 아프면 의사, 약사, 물리치료사가 따로 없었다. 미장이나 도배사 일에, 차력사, 마술사 노릇도 해야 안주인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총무, 회계, 지배인 역할은 다 그녀들의 몫이었다.
7)아내가 아파 거동이 불편해지니 어린애가 따로 없다. 주름진 얼굴에 맥이 빠진 듯 병상에 누운 아내를 보자니 애잔한 마음이 들어 괜스레 미안해진다. 아내는 젖먹이처럼 나의 보살핌을 간곡히 기다리는 눈길을 보내고 있다. 아니, 아내는 임산부나 다름없다. 평소에 담백하게 먹는데 며칠 전부터 찾지 않던 낯선 음식을 원한다. 입원 며칠 전에 갈치를 찾더니 느닷없이 소 불고기감을 사오라고 했었다. 짭조름한 반찬, 입에 짝 달라붙는 음식, 입맛 확 당기는 요리 등 별스런 요청에 신경이 곤두선다.
8)아내의 입장에서는 성치 않은 몸을 아끼려하다 보니 늘 조심하느라 내게 기대려는 생각이 간절한가 보다. 남자가 대신 시장을 봐 반찬을 만들다보면 꿩 대신 닭이 되고 냉장고 안에 묵은 식재료가 잠자기도 한다.
9)식성 까다로운 임산부 비위를 맞추기 힘든 것처럼 아픈 아내의 입맛을 챙기려 애써보지만 갈수록 신경 쓰임은 어쩔 수 없다.
잠시 밖에 나온 사이 또 아내로부터 연락이 온다. 이번에는 길거리의 붕어빵이 먹고 싶단다. 며칠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지냈건만 잠시 떨어지면 칼처럼 찾으니 운신이 힘들다. 줄을 얽어놓고 망보는 거미처럼 구는 통에 내 행동반경이 턱없이 좁아진다.
10)아내가 아프면 아플수록 제대로 돌봐야할 텐데 하며 완쾌할 때까지 어린애처럼 대해주려고 다짐한다.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면 그저 아쓰러운 마음에 내가 못 할 게 무어냐 싶다. 그러다가 몸이 좀 수월해져서 그녀가 잠시 나다니면 금방 미운 일곱 살 개구쟁이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11)아픈 아내 때문에 며칠 주도적으로 주방 살림을 해보니 집안일의 대강은 파악이 되었다. 다시마와 다진 마늘의 위치도 알고 무릎 통증에 쓰는 냉찜질 팩은 몇 분 만에 냉동실에서 꺼내야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뿐인가, 반찬 조릴 때 환풍기 가동시키는 일이며, 수세미도 제마다 쓰임새가 다르다는 것까지 알게 됐다. 또 밥이 끓는 사이 숭늉을 끓여 바로 보온병에 채워 둔다. 물 끓일 때 넣는 무말랭이, 돼지감자, 수수가 든 비닐봉투의 행방도 알았다. 물 국수는 비닐 포장 속 밀가루를 털어내고 삶으라는 훈수 역시 잊지 않는다.
12)그러나 아내는 내 의중이나 결과물에 답답해하며 흠결을 찾아 참견한다. 습관이 배지 않아 돌아서면 잊는 나의 실수 탓이다. 그러면 내 태도와 관점이 바뀌곤 한다. 개구쟁이가 다 뭔가? 아내는 손녀에서 성난 노파로, 임산부에서 마귀로 돌변해 보인다. 계속 병든 아내의 즐거운 간병인으로 지낼지, 덜 아픈 마누라의 불편한 남편으로 살아갈지 택일을 강요받는 기분이다.
13)아내의 치과 진료가 이번 일보다 먼저 약정돼 있었다. 달포 전 바쁘게 수술한 무릎의 실밥을 뺴기도 전에 탈난 어금니의 재진료 날짜가 눈앞에 닥친 것이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의 치과인데도 다리 아픈 아내를 위해 차를 대기시킨다. 주차할 곳이 마땅찮아 다른 건물 앞에 세워놓고 들어가니 괜히 신경 쓰인다. 며칠 후 다시 올 치과인데 그날 다른 일이 있어 진료 날짜를 바꿔야겠고 주차마저 우려된다. 아내 때문에 은근히 부담이 되는 것 같다.
14)건강한 간병인인 나 자신이 영웅처럼 자랑스럽다. 아픈 데가 숱한 아내의 행복지수 늘여줄 보호자가 나 말고는 없어서이다. 가사와 자녀교육에 수십 년 반복된 백병전白兵戰을 치열하게 이겨낸 그녀가 변함없이 내게는 소중하다. 하지만 요절할 천재는 아닌 그녀가 이러다가 혹여 백병전百病展을 펼치는 것은 아닐까. 가슴 조마조마한 보호자로서 요즘의 황폐한 심정을 숨길 수 없다. -수필사랑 27호에서
9. 창 밖의 남자 /차갑희
1.50여 년 만의 봄 가뭄이 길게 이어졌다. 작은 불꽃은 바람을 타고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어 울진, 삼척의 금강송 보호구역에까지 이르렀다.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어버린 삶의 터전을 떠나 임시 보호소에서 생활하는 이재민들을 바라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화마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의 잔 불씨 제거도 중요한 작업이다.
2.매캐한 연기가 텔레비전 화면을 뚫고 나오는 것만 같다. 간절한 마음들이 하늘에 닿았는지 기다리던 봄비가 내려 불길이 잡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3.아파트 마당에 발을 디뎠다. 하루에도 여러 번 환기를 시키면서 갇혀지내길 여러 날. 밖에서 들어오는 공기보다 온몸에 휘감겨오는 상큼한 봄내음에 아찔한 현깃증이 일어난다.
4.1년 전, 주무시듯이 하늘나라로 떠났던 형부의 첫 기일이 다가왔다. 아직도 마음을 다 잡지 못한 언니는 숱하게 우리 집을 드나들며 혼자의 시간을 피해왔었다. 살아생전 깔끔한 모습 그대로 나타나 아무 걱정 하지 말라며 내 등을 토닥거린 꿈 이야기를 들려줌일까? 형부의 체취가 남은 곳에서의 생활이 두려워서일까? 언니는 더 자주 우리 집에서 머물다가 지하철 첫 차를 타고 직장으로 나섰다.
5.지리산 자락의 작은 암자에 모셔진 형부를 만나러 가기로 한 날, 껌딱지가 되어 버린 손자와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병원 업무에 묶인 딸과 손자는 첫 생이별이 되었다. 고속버스를 처음 타보는 녀석의 설렘과는 달리 하룻밤 혼자 지내야 하는 딸의 불안감이 눈에 들어왔다. 차창 밖에서 눈물이 그렁한 에미는 안중에도 없이 씩씩하게 손 흔들고 있는 여섯 살 꼬마의 미소에 마음이 뒤섞여졌다.
6.눈꽃이 흩날리던 작년 첫 만남과는 달리 꽃망울만 품어 안은 벚꽃 100리길은 퍼레이드를 펼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만 있었다. 형부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오래 묵은 동백나무 앞에서 언니는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무자식이 상팔자라고들 하지만 갑자기 혼자가 된 혈육을 바라보니 오래 함께 손을 맞잡고 가야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7.언니에게는 위로자로 손자에게는 기억에 남을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날 심한 몸살이 찾아왔다. 첫째 날 음성이었던 자가키트는 둘쨋날 양성을 나타내었다. 고열과 근육통으로 씨름하는 내 몸보다 남편의 도시락 걱정이 앞섰다. 오랫동안 꾸려온 가게의 규모를 줄이느라 1년이 넘도록 밖에서 생활하던 그이가 아니었던가. 미접종자인 남편은 한 주 동안 더 가게에서 머루르고 배달음식에 의지하게 되었다.
8. “어떤 아버지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나처럼 행동했을 겁니다”
딸과 손자를 구하러 우크라 사선을 넘은 미국인 아버지의 기사가 떴다. 딸 에이슬린은 유학차 우크라이나에 머물게 되면서 갑작스런 러시아의 무차별 폭격으로 발이 묶여 있었다. 아버지 허버드는 딸의 출국을 돕기 위해 몇 번이나 우크라이나행을 강행하다가 드디어 딸과 손자를 데리고 탈출했다. 그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전했다.
9.모든 아버지의 가족애에 관한 기사를 접할 때 마다 남편의 일상이 크로즈업된다. 20대 중반에 서로 만나 부모보다 더 오래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온 지난 세월이 격세지감이다. 일찍이 홀로되신 어머님께 효자노릇을 하느라 친정 부모님껜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휘말린적도 있었다.
10.두 딸이 여학교를 다닐 무렵엔 친정나들이가 자연스러워졌다. 명절 전날부터 당일까지 꼬박 시댁에 머물다가 잠시 친정에 다니러 갈때였다. 오후에도 다시 시댁에 가야할 상황이라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밍기적거리고 있는 남편에게 그동안 쌓인 섭섭함이 폭발하고 말았다. 딸은 나의 대변인양 내편이 되어 주었지만 처음 본 남편의 눈물과 처진 어깨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작은 사회로 불리어지는 한 가정의 버팀목으로 그가 짊어져 가야만 하는 고충을 헤아리기까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박수는 함께 손뼉을 쳐야 소리가 난다. 내가 힘들었던 만큼 중간 역할이 버거웠던 그이의 노고에 고개가 숙여진다.
11.아이들이 결혼하게 되면서 시댁으로 향하는 발걸음 또한 자연스레 뜸해졌다. 아이들 세대만큼은 부모에게 묶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명절 방문 조차 기대치 않을 터이니 둘만의 시간을 즐기라고 남편은 누누이 이야기를 전한다.
12.자가격리가 해제 되기 며칠 전, 함께 살고 있는 손자가, 이제는 딸아이까지 양성이 나왔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한 달이 정체되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란 마음으로 조급해지지 않아야겠다. 창밖의 남자가 좋아하는 따뜻한 된장국과 봄나물 풍성한 식탁을 하루빨리 차려주고 싶다.
10. 종착지에 와서도 여전히 길이 멀다 /한외근
1. 아버지가 호흡을 고르고 계신다. 아흔다섯 해 질고의 삶 종점을 향하고 있다. 연세를 드시면서 우리 집에 산 귀신 두 사람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가 숨 쉬는 모습이 힘들어 보인다. 살이 많이 빠져서 그런지 크지도 않은 키가 더 작아 보인다.
2. 당신이 누울 자리 가묘를 조성하였는지도 15년이 넘었다. 무엇이 그리 급하셨는지 여든이 되시기도 전에 마을 안 골짜기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고 석축까지 쌓아 놓으셨던 어른이시다. 그뿐만 아니라 저승 가실 때 입을 옷도 수백만 원을 들어 미리 준비해 두셨다. 수의를 담은 검은색 가방 색깔이 부옇게 변했다. 자식들 고생 덜겠다는 배려이시겠지만 쓸데없는 일인걸.
3. 아버지는 지난해까지도 읍내 경로당에 가서 시간을 보내셨다. 79살까지도 경로당에서 ’알라 취급받았다‘라며 지금은 가까운 친구들도 거의 떠나고 없다고 하셨다. 경로당에 가실 때는 자전거를 이용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함을 느껴서 왼쪽 다리는 페달에 그냥 얹어두고 오른쪽 발로 페달을 밟으면서도 잘도 타셨다. 찻길에 위험하다고 말씀드려도 괜찮다고 하셨다
4. 지난해 가을이 되면서부터 활동량이 줄었다. 집에서 시간 죽이기 지겹다 했다. 재미있는 것이라고는 티브이 외에 가끔 화투패 따기가 전부이어서 그럴 만도 하다. 문을 나서면 당신 손길이 필요한 논밭이 기다렸다. 젊어서부터 술은 입에 대지도 못해서 힘든 농사일을 하느라 더 힘들었을 테다. 담배는 즐기셨다. 새벽에 일어나서 소죽을 끓이면서 담배를 피우셨다. 기침을 쿨룩쿨룩하면서도 피셨다. 어머니의 기침 걱정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호흡이 가빠졌음에도 담배를 끊지 않았다. 병원에서 진찰 결과 폐기종 증세가 보여 그렇다고 해도 계속 하셨다. 걱정되어 후배 의사에게 물어보았더니 ’이제 사시면 얼마나 사신다고 본인이 좋아하면 그냥 그대로 피게 하는 게 낫다’ 했다. 그게 벌써 십여 년 전 일이다.
5.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골 동생에게서 아버지가 안동병원에 입원했다면서 전화가 왔다.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내게 짜증을 내는 말투다. 속이 안 좋아서 읍내 병원에 이틀 입원했다가 통증이 심해서 안동병원으로 급하게 이송했다는 것이다. 수술하려고 개복했더니 위암 말기 증세가 확인되어 그대로 덮었다 했다. 처음부터 위암인 줄 알았으면 수술하는 고생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노인네가 얼마나 고통이 심하셨겠나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다.
6. 병실 침대에 눈을 감고 계셨다. 산소호흡기며 영양 주사제 등 각종 호스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침대 옆 체크 기록지에 혈압이 70~120으로 아주 정상이다. 젊은 사람 못지않게 혈압은 아직도 건강하다. 6개월여 살 수 있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이제 6개월밖에 살 수 없으시구나. 갑자기 가슴 한 쪽이 시려왔다.
7. 면회하러 온 친지 한 분이 말했다.
“ 자식들 보고 싶으면 오라고 하시지 병원에 계시냐?”
그 바람에 전국에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우르르 몰려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8. 며칠에 한 번씩 병실에 들르면서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겠지.‘라는 불안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병간호는 마침 병원 인근에 살고 있던 질부가 주로 하고 간병인도 도왔다. 병원에서 2주 만에 퇴원하셨다. 퇴원 후에는 식사도 잘하셨다. 휠체어로 동네 바람도 쐬고 지팡이를 짚고 집 밖으로 산책도 하게 되었다. ’이제 눈감았다는 소식 있거든 오고 그만 오란다.' 매일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나쁜 소식인가 놀랐다. 2주일 뒤 아침에 제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제부터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졌다는 것이다. '정신 있을 때 보시러 오는 게 좋겠다. 라는 전갈이었다.
9. 부랴부랴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누워 계셨다. 틀니를 뺀 입이 더 합죽해 보인다.
“ 아버지 주무세요?”
하고 손을 잡고 흔들자 눈을 뜨고서
“왔구나...?“
한마디 하시고 곧 눈을 감는다. 조금 있다가 눈을 뜨면서
”이틀간 죽었다가 왜 또 살아났나! 죽는 것도 힘들다.“
라며 또 눈을 감는다. 자주 입을 오물거리시고 숨을 조금씩 내뿜는다. 제수씨가
”이틀간 정신을 못 차리시더니 형님 오시니까 눈을 떴네.“
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10. 병원에서 퇴원할 때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용케도 그보다 2개월 이상 더 버티셨다. 늙은 게 죽지 않는다고 투정하셨지만 죽음이 얼마나 두렵고 불안하셨을까? 또 통증이 얼마나 심하셨을 텐데도 가족들 걱정할까 봐 내색도 하지 않으셨겠지. 지난 시간이 촉촉이 젖은 채로 아버지의 눈가로 눈물이 고여 휘돈다. 평생을 살다 가는 임종의 길은 멀기만 하다.
11. 그래도 뒷집 아지매가
”요양병원에 가지 않으신 것도 영감 복이“ 이라는 말이나
”죽을 때까지 치매 걸리지 않고 정신이 말짱한 것도 복“
이실까? 늘 그곳에 계실 것만 같았던 아버지와의 긴 이별의 준비에 안타까움 잠재운 슬픔이 스멀스멀 밀려 나온다.
12. 아,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