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성경과 고대근동의 자료들 비교
1. 아곱의 아들들과 힉소스의 통치
창세기는 야곱의 아들들이 흉년을 당해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내려갔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이집트의 힉소스 통치기간 중(주전 1720-1580/ 1670-1570)이나 그 이전에 야곱의 자녀들이 이집트로 이주했음을 시사해 준다. 그 후에 아모시스(Amosis=아흐모세, 1550-1525)라는 사람이 일어나 힉소스 족을 물리치고 이집트 18왕조(주전 1550-1525/1570-1310)를 건설하여 이집트 국위를 떨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집트의 18왕조 말엽 아메노피스 4세(Amenophis IV=아멘호텝 4세, 1353-1335)가 종교혁명을 일으켜 이전에 섬기던 아문(Amun)신 대신에 아텐(Aten) 신을 섬기게 되었으며, 수도를 아마르나(Amarna)로 옮겼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나라가 어려워졌다.
2. 아마르나 시대
이 때를 아마르나 시대라고 부른다. 이 때 당시 발견된 아마르나 문서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가나안의 영주들이 ‘하비루/하피루’의 공격을 받고 이집트 왕에게 원병을 청한 문서이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하피루’가 아마도 애굽에서 탈출한 ‘히브리’ 민족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비루 가설
19세기 이집트의 엘-아마르나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주전 15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있어서 팔레스타인의 사회사와 정치사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350개 이상의 토판에 아카드어로 쓰인 이 문서들은 이집트의 왕실 서고들에서 나온 것으로서 주로 아메노피스 3세(주전 1417-1379년)와 아메노피스 4세(주전 1379-1362년)에게 보내진 서한들이다. 이 서한들의 상당수는 이집트에 종속되어 있던 시리아-팔레스타인 군주들이 보낸 것이거나 파라오가 이러한 군주들에게 보낸 서한들의 사본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지방 정부와 이집트 정부에 도전하면서 혼란과 소동을 일으키고 있던 집단들에 대한 언급들이 자주 나온다. 이 집단들 중의 하나가 하비루/하피루로 지칭되고 있는데, 이 명칭은 성경에서 말하는 “이브리”(ibri, 히브리)와 매우 유사하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이 하비루가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팔레스타인을 공략한 히브리인들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더 고대의 문헌들이 발견되면서 “하비루”는 여러 세기 동안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사회에서 소외된 여러 사람들과 집단들-고용된 이방인 종들과 용병들, 정부에 대항한 반대파들 등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용어였다고 생각되어졌다. 그러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의 관련성을 무시할 수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3.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과 출애굽 시기의 왕
이후에 세토스 1세(Sethos I, =세티 1세, 주전 1306-1290)가 나타나 이집트의 제19왕조를 건설하여 다시금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였다. 성서학자들은 세토스 1세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었으며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박해를 시작했고, 그의 아들 람세스 2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탈출했을 것이라고 본다.
람세스(Raamses)라는 이름은 이집트 제19왕조와 제20왕조의 파라오들(주전 1,320-1,085년)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이 시대의 몇몇 파라오들은 나일 강 삼각주 지대에 대규모 건설공사를 수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두 왕조 시대는 이집트의 히브리인들이 비돔과 라암셋이라는 두 국고 성을 건설하는 데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출애굽기 1장 11절 말씀의 확실한 배경이라고 학자들은 보았다. 일부학자들은 람세스 2세(주전 1,304-1,237년)가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집트 자료들에는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 체류하였다거나 건설 공사에 동원되었다거나 출애굽 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 체류했다는 증거들
(1) 카이로 남방 169마일 베니 하산(Beni Hasan)무덤 벽화에 37명의 아시아 상인들이 눈 화장을 하는 검은 물감을 가지고 왔다는 그림
(2) 아나츠타시 파피루스(Papyrus Anastasi VI)에 팔레스타인의 유목민이 이집트 국경을 넘었다는 변방 관리인의 보고
(3) 모세, 홉니, 비느하스 등 레위 지파 사람들 중에 이집트 이름을 가진 이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
5. 출애굽 연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연대는 요셉을 모르는 새로운 왕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출애굽기 1장 11절의 비돔과 라암셋이라는 두 도시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통하여 출애굽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많은 고고학자나 성서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연대를 주전 1280-1250년 사이로 추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에 따라 다양한 출애굽 연대가 제시되고 있다.
1) 주전 16세기 학설
주전 16세기의 학설은 마네토와 요세푸스의 주장처럼 힉소스의 이동과 이스라엘 조상들의 이동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힉소스 민족은 주전 1650-1550년 사이에 이집트의 아바리스(성서의 소안)를 중심으로 나일 강 하류지역의 하부 이집트에 거주하면서 남쪽의 헤르모폴리스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정치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집트 제18왕조의 아흐모세가 주전 1580년경부터 힉소스를 쫓아내기 시작하였으며, 이후에 아멘호텝, 투트모세 1세, 그리고 투트 모세 3세도 지속적으로 힉소스를 몰아냈다. 이처럼 힉소스가 애굽에서 추방당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함께 나왔다는 주장이다.
2) 주전 15세기 학설
이 학설은 열왕기상 6장 1절에 근거한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솔로몬이 961년에 왕이 되었고 그의 제위 4년은 958년이기에 480+958년은 1438년이 된다.
또한 사사기 11장 26절에 근거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마을들과 아르논 강가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주한 지 삼백 년이거늘 그 동안에 너희가 어찌하여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 (사사 입다 시대). 입다의 시대를 주전 1100년경으로 본다면 이미 1400년경에 요단 동편이 이스라엘에 정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입다의 시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다.
3) 주전 14세기 학설(고고학적 근거)
주전 14세기 학설은 1930년대 여리고를 발굴한 가르스탕(J. Garstang)이 여리고가 주전 14세기 초에 파괴되었다고 주장한 것을 바탕으로 출애굽이 주전 1350년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설이다. 이들은 기브온, 벧엘, 헤브론, 그리고 여리고 등이 아마르나 서신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이들 네 도시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정복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4) 주전 13세기 학설
이 학설은 출애굽기 1장 11절의 비돔과 라암셋이 람세스 2세가 페르 람세스와 비돔을 건설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왜냐하면 이집트 왕의 역사 가운데 라암셋이란 도시를 건축한 왕은 람세스 2세(주전 1290-1224)년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고학적으로 주전 13세기 가나안의 거대한 파괴의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학설은 19세기 중엽 레프시우스(R. Lepsius)에 의해 주장되었다.
또한 페트리(W. M. F. Petrie)는 ‘메르넵타(주전 1224-1214) 왕의 석비’를 근거로 람세스 2세의 후계자인 메르넵타 시대를 출애굽 연대로 추정한다. 메르넵타 석비에 나오는 이스라엘: 이집트의 파라오 메르넵타의 재위 5년, 대략 주전 1220년경에 세워진 석비에 이스라엘에 대한 유일한 언급이 있다. “방백들은 꿇어 엎드리며 ‘자비를!’이라고 외친다. 무릎 굻은 아홉 명 가운데서 머리들 드는 자가 하나도 없다.
테헤누는 황폐해졌고, 하티는 평정되었다. 온갖 악이 횡행하던 가나안은 약탈되었다. 아스글론은 사로잡혔고, 게셀은 장악되었다. 야노암은 아예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되었다. 이스라엘은 황무해졌고, 그 씨가 말랐다. 후루는 이집트를 위한 과부가 되었다. 온 땅이 평정되었다. 소요를 일으켰던 자들은 모두 결박되었다.” 따라서 만약 이것이 옳다면 출애굽은 1220년 이전에 행해졌다.
6. 출애굽 경로
출애굽의 연대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경로로 출애굽했는가 하는 것도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다. 출애굽기 12:37, 13:17-14:4가 민수기 33:5-8에 등장하는 몇 가지 지명을 근거로 경로를 추정할 뿐이다. 경로 가운데 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애굽에서 출발하여 가데쉬 바네아까지 도착하는데 어떤 경로를 사용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출애굽의 출발 장소는 대체로 라암셋(타니스 또는 칸티르)이며, 두 번째 장소인 숙곳(요셉 시대 고센 지역)은 나일 강에서 동쪽으로 가는 중요한 경로인 와디 투밀라트에 있는 데쿠, 오늘날 텔 엘-마스후타로 간주된다. 다음 장소인 에담, 비-하히롯, 믹돌은 정확히 알 수없다.
홍해와 시내산
한글 성경 ‘홍해’(출 15:4, 22)는 헬라어로 ‘eruthra thalasse’(에루뜨라 딸라쎄; ἐρυθρα θαλάσση)이며, 영어는 ‘Red Sea’이다. 그리고 히브리어로는 ‘yam suf’(얌 수프)이며 이것을 번역하면 ‘갈대 바다’이다. 갈대 바다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학자들의 의견은 각각 다르다. 히브리어 얌 수프의 후보지로는 전통적으로 ‘홍해’이지만 ‘만잘레 호수’(Manzaleh Lake)나 ‘시르보니스 호수’(Sirbonis Lake; 북방경로설), 혹은 남쪽의 ‘비터 호수’(Bitter Lake; 중앙 경로설)근처도 유력하다.
시내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제벨 무사’가 시내 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출애굽의 경로를 어디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제벨 엘-할랄’(Jebel al-Halal; 북방경로설), 제벨 신-비쉬르(Jebel Sinn-Bishir; 중앙경로설)도 시내산의 후보지에 속한다.
1) 북방경로설
람세스를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중해 쪽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이다. 이 경우 갈대 바다는 만잘레 호수이거나 혹은 시르보니스 호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갈대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시내 산을 거쳐 가데쉬 바네아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 경우 시내 산은 전통적인 제벨 무사가 아니라 가데쉬 바네아 옆에 있는 제벨 엘-할랄이 된다.
2) 중앙경로설
중앙경로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센 지역에서 바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비터 호수를 건너 수에즈 해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다시 북동쪽, 가데쉬 바네아로 향했다는 주장이다. 이 경우 시내 산은 제벨 신-비뤼르가 된다.
중앙경로설을 따르면서도 일부의 학자들은 시내 산은 시내 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엘랏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미디안 땅이나 엘랏 동쪽의 세일 산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창 14:6; 민 3:37; 신 33:2). 이러한 주장은 호렙 산과 바란 광야가 미디안 땅에 있기 때문이다(출 3:1; 4:27; 왕상 11:17-18).
3) 남방경로설
전통적인 출애굽 경로이다. 갈대 바다인 수에즈만을 건너 남하하여 제벨 무사를 거쳐 다시 북상하여 가데쉬 바네아로 향했다는 주장이다.
7. 시내 산의 위치
(1) 시내 산의 위치가 출애굽기 19장 16-19절의 화산의 모습일 것으로 보아 화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아카바만 동쪽 미디안 땅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집트에서 사흘 길이라는 설명에 비하면 너무 먼 곳이다.
(2) 또 메추라기가 지중해의 계절풍에 따라 땅에 떨어지고 아말렉 사람들과 충돌한 사건 등은 지중해 근처인 시내 반도 북쪽 가데스 지역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시내 산에서 가데스 까지 열하루 길이라는 설명에는 맞지 않는다고 본다.
(3) 그래서 시내 산의 위치는 전통적으로 지켜온 시내 반도 남부의 ‘예벨 무사(Jebel Musa)'라는 산으로 보이며, 출애굽 한 백성들은 아마도 그 근처에 있는 구리 광산 등에서 일하던 대장공들인 모세의 친척 켄족(Kenites)과 어울렸을 것으로 본다.
8. 출애굽과 자연재해들
(1) 재앙들과 바다가 갈라진 현상은 청동기 시대에 혜성 또는 혜성들이 지구 가까이 통과하면서 생겨난 사건들이었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2) 1450년경에 데라 섬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로 인해 방출된 화산재가 재앙들과 관련된 현상-어두움, 이상 강우를 일으켰을 것이다.
(3)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데라 섬의 일부가 가라앉으면서 엄청난 조류가 생겼으며 이것의 일부가 남동 지중해 해안선을 강타한 역류로써 이집트 군대를 수장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들은 성경의 기적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들의 신빙성 문제들을 불러일으킨다.
*결론: 고대 중동에서 나온 성경 외적인 문헌들과 팔레스타인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들을 통해 발견된 유물 증거들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등장한 일반적인 배경을 이해하는 데는 아주 유용하지만, 이스라엘과 유다의 구체적인 기원 문제를 추적하는 데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이 밝혀졌다. 성경 외적인 문헌들과 관련해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실체가 주전 13세기 말경에 팔레스타인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단 하나의 비문(메르넵타 석비)만이 사실상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기원과 초창기 역사에 관하여 구체적인 결론들을 이끌어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경 자료들, 특히 창세기-여호수아 설화를 토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