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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위치: 오스트레일리아 남동쪽
인구: 5,300,000명 (2022년 추계)
수도: 웰링턴
면적: 270,692㎢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New Zealand
기후: 서안해양성기후
민족 구성: 유럽계 백인(70%), 마오리족(8%), 태평양제도인
언어: 마오리어,영어
정부/의회형태: 입헌군주제 / 단원제
종교: 성공회(15%), 로마가톨릭(12%), 장로교 (20%)
화폐: 뉴질랜드 달러 (NZD) 환율계산기
국화: 회화나무
대륙: 오세아니아
국가번호: 64
GDP: USD 220,888,000,000
인구밀도: 18명/㎢
전압: 230V, 240V / 50Hz
도메인: .nz
뉴질랜드와 한국과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 교류·교민 현황
요약
수도는 웰링턴이다. 국토는 2개의 주요 섬과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다수 국민이 유럽계이고, 공용어는 영어와 마오리어이다. 종교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구성된 그리스도교가 많다. 단원제를 기반으로 한 입헌군주국이다. 국가원수는 영국 국왕이고 총독이 대표한다. 뉴질랜드의 문화는 유럽풍이 강하면서도 마오리족의 전통 문화와 예술을 되살린 복합적 요소를 갖는다.
스트레일리아에서 동남쪽으로 약 1,600km 떨어져 있으며 남위 33~53°사이(남북 길이 1,600km), 서경 162~173°사이(동서 길이 450km)에 있다. 폭 32km의 쿡 해협을 끼고 있는 2개의 주요 섬인 노스·사우스 섬과 기타 많은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스 섬과 사우스 섬은 남부의 산들과 북부의 구릉지대로 양분된다. 대다수 국민이 유럽계이고, 약 10%를 차지하는 마오리족과 태평양 도서군 원주민·화교들이 소수 집단을 이룬다. 공용어는 영어와 마오리어이다. 종교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구성된 그리스도교가 많지만 불교·힌두교 신자도 있다. 화폐단위는 뉴질랜드달러(New Zealand dollar/NZ$)이다.
지리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동떨어져 있어서 사회적·문화적·경제적으로 특징 있는 발전을 이룩했다. 뉴질랜드 경제는 농업·중소기업·서비스업에 기반을 둔 선진적 시장경제이다. 농업은 특히 목양업이 발달했다. 단원제를 기반으로 한 입헌군주국이다. 국가원수는 영국 국왕이고 총독이 대표한다.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폴리네시아인들이 뉴질랜드에 정착한 것은 AD 1000년경부터이다. 1642년 네덜란드 항해가 아벨 타스만에 의해 주요 섬들이 처음 발견되었고, 1769년 제임스 쿡 선장은 이 섬들의 지도를 만들었다. 1840년 영국 직할식민지가 된 이 지역에서는 1860년대 내내 마오리족 원주민과 점령자들 간의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1865년 수도를 오클랜드에서 웰링턴으로 옮겼고, 1907년 뉴질랜드 자치령의 지위를 얻었다.
뉴질랜드는 1919~62년 서사모아를 위임통치했고 제1·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1970년대 초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EEC) 가입은 뉴질랜드 경제에 인플레이션 급등과 실업의 증가라는 악영향을 미쳤다. 뉴질랜드 정부는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출시장을 확대하고 경제를 다각화했다. 또한 뉴질랜드는 외교관계에서도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고, 핵무기 확산 반대 입장을 강하게 견지했다. 문맹률은 거의 0%다.
뉴질랜드의 문화적 환경은 유럽 풍이 강하면서도 마오리족의 전통 문화와 예술을 되살린 복합적 요소를 갖는다. 20세기 후반 이후 마오리족의 사회·경제적 활동 범위가 넓어지면서 뉴질랜드 정치 발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자연환경
노스 섬과 사우스 섬은 모두 남부의 산들과 북부의 구릉지대로 양분된다. 노스 섬의 약 18%, 사우스 섬의 70%가 산악지대이다.
사우스 섬의 서부에 있는 서던알프스 산맥은 길이 480km에 이르는 긴 습곡산맥으로, 뉴질랜드에서 가장 높은 산인 쿡 산(3,764m) 외에 높이 3,000m 이상의 봉우리 22개를 거느리고 있다. 서던알프스 산맥의 비그늘(rain-shadow) 효과로 생긴 목축지는 메리노 양모를 비롯한 양질의 뉴질랜드 양모를 많이 생산하는 대단위 지역으로 발전했다.
반면 섬 동부의 구릉들 가운데 높이가 1,800m를 넘는 것은 찾기 어렵고 캔터베리 평원 쪽으로 경사져 있다. 사우스 섬 북부의 구릉지대도 기복이 덜하다.
노스 섬은 사우스 섬보다 훨씬 완만하다. 섬 중부는 화산지대와 주변의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목양과 낙농이 행해진다. 일부 화산지대에 산림이 우거져 있으며, 노스오클랜드 반도에는 아열대 산림이 있다.
뉴질랜드의 강은 대부분 길이가 짧고 물살이 빨라 수력발전에 중요하게 쓰이는데, 가장 긴 강은 노스 섬에 있는 425km의 와이카토 강이다. 토양은 대부분 점토질로서 일반적으로 농업에 적합하지 않지만, 계곡의 저지대 곳곳에 비옥한 충적토 지대가 있다. 한편 지진과 화산폭발이 빈번하다.
연강우량은 635~1,525㎜로 풍부하며 해발 610m 이상 되는 곳에서는 눈이 많이 내린다. 해수면의 평균기온은 북쪽 끝이 15℃, 남쪽 끝이 9℃로 변화폭이 크다. 연평균기온은 10℃ 정도이며 연중 고르다.
한때 국토의 약 2/3를 덮었던 삼림은 재식림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현재 국토의 1/3 정도로 줄어들었다. 뉴질랜드 원산의 육지동물은 도마뱀·개구리·박쥐뿐인데, 유럽인들이 붉은 사슴과 오스트레일리아산 주머니쥐, 토끼 등의 많은 가축과 동물을 들여왔다. 날지 못하는 키위와 흰눈썹뜸부기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조류가 있으며, 참치·물퉁돔·대구·가자미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물고기가 연안에 서식한다.
석탄·사철·금이 상당량 채굴되고 있으나 뉴질랜드 경제에서 광물자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높지 않고, 수력·지열(地熱) 등의 재생 에너지 자원이 뉴질랜드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국민
국민의 약 82%가 유럽계(그중 대부분은 영국계임)이며 폴리네시아 토착 원주민인 마오리족이 약 9%, 그리고 태평양 도서군 원주민들과 화교, 인디언들이 나머지 소수집단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다민족 사회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인종 갈등은 피할 수 없으나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 비해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다수의 유럽계 국민과 마찬가지로 법 앞에서는 평등하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마우리족은 자신들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면서 뉴질랜드의 유럽형 사회에서 자리를 잡기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다.
인구의 자연증가율은 상대적으로 낮고, 출생률과 사망률은 알맞은 수준이다. 2023년 추계인구는 492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86%가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전체 인구 구성의 20%는 15세 이하의 유소년층이다. 국민 보건 수준은 매우 높고, 평균수명도 남자 80세, 여자 84세로 상대적으로 높다(2020). 국내 이주의 대부분은 도시간 이주이다. 사우스 섬에서 가장 큰 도시는 크라이스트처치이며,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은 노스 섬에는 마누카우·오클랜드·웰링턴 등의 대도시가 있다.
언어
공용어는 영어와 마오리어이지만 주로 영어가 사용된다. 사실상 모든 마오리족이 영어를 사용하며, 그중 약 1/3은 마오리어도 사용한다. 많은 학교에서 마오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영어와 마오리어 외의 주요 언어는 일부 국민이 사용하는 사모아어이다.
문화
뉴질랜드의 문화 환경은 복합적이다. 매우 유럽적일 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민족, 특히 마오리족의 문화적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유럽적 생활에 동화된 반면 통가족·사모아족을 비롯한 대다수의 태평양 도서군 종족은 여전히 전통적 관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마오리족은 유럽적 환경으로의 동화 압력과 전통 문화의 보존 욕구 사이에서 갈등을 겪어 왔다. 마오리족의 정치적 구조는 19세기에 대부분의 토지를 상실함으로써 약화되었고 많은 구성원이 대거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전통 종교마저 폐기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들의 문학·예술은 유럽인들이 들어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장식도안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구전에 의존해 상당 부분이 유실되었다. 그러나 특히 20세기 후반에 마오리족의 예술적·사회적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졌다. 그 결과 목각과 베짜기, 그리고 그들의 회합 장소인 '와레 와카이로'의 건축에서 르네상스기를 맞았고, 마오리족의 춤과 노래가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점차 유행하게 되었다. 엄밀히 고증을 받은 옛 개회사와 함께 전통 의상 차림의 전통 회합과 장례식이 거행되기도 한다. 또한 마오리족의 예술작품은 많은 화랑·박물관에 전시되어 일반 대중에게 낯익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시와 산문은 물론 새로운 노래와 주문(呪文)들도 마오리어로 기록되고 있다.
뉴질랜드의 유럽적 문화는 20세기 초부터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뉴질랜드 역사상 최초의 토착 작가인 캐서린 맨스필드와 R. A. K. 메이슨이 나타난 것은 1920년대의 일이었다. 뉴질랜드의 문학·예술은 캐서린 맨스필드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듯이 뉴질랜드의 독특한 역사를 서술하는 것으로부터 개인의 성격 분석이나 자기 성찰에 관한 작품을 창작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인으로는 J. K. 백스터와 K. 스미시먼 등이, 소설가로는 재닛 프레임, 케리 흄 등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뉴질랜드는 1940년대부터 예술 지원 정책을 펴 왔다.
20세기 후반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예술위원회'가 연극·음악·현대무용·발레·오페라 발전을 위해 매년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뉴질랜드 도서관 기금'은 출판사·작가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또한 도서관 대여 도서에 대한 작가의 인세를 벌충해 주기 위한 기금을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도입했다. 정부는 뉴질랜드방송회사를 통해 국립교향악단과 주간 문화지 〈뉴질랜드 리스너즈 New Zealand Listeners〉를 지원하고, 또한 점점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영화 산업에 지원금을 제공하고 있다.
국민 대부분이 여가시간에 스포츠를 즐기는데 특히 럭비는 가장 많은 저변 인구를 갖고 있으며, 경마에 많은 인파가 몰린다. 기후와 다양한 지형의 특성상 연중 많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역사
폴리네시아인들이 뉴질랜드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늦어도 1000년경이었으며, 그보다 2~3세기 전의 일 가능성이 크다.
폴리네시아 시대 말기인 18세기에는 약 10~20만 명의 마오리족들이 사우스 섬과 노스 섬에서 살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항해가 아벨 타스만이 이끄는 탐험대가 1642년 12월 웨스틀랜드 해안을 발견하고 사우스 섬에 상륙하려고 했지만 마오리족과 충돌이 일어났다. 1769~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사우스 섬과 노스 섬 주위를 항해한 후 지도를 만들었다.
쿡 선장도 처음에는 마오리족과 충돌이 있었으나 다시 와서 접촉할 때는 보다 협조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유럽인의 초기 뉴질랜드 정착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고래잡이와 그밖에 다른 활동들의 부산물이었다. 즉 오스트레일리아 회사들이 사우스 섬과 노스 섬의 해안 주위에 고래잡이 기지로 작은 부락들을 건설한 것이다. 1839~41년 뉴질랜드는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에 속해 있었다.
1840년 마오리족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뉴질랜드의 통치권을 영국에 양도했으며 그들의 토지소유권을 보장했다. 그러나 마오리족과의 간헐적인 전투는 1847년 식민주의자들이 마오리족을 완전히 굴복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1852년 뉴질랜드 헌법에 따라 식민지는 6개 주로 나뉘고 뉴질랜드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마오리족이 중요한 땅을 팔지 않으려 하자 정착민들과 마오리족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1860년 백인들이 강제로 매각한 땅에서 마오리족을 쫓아내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자 전쟁이 일어나 거의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영국 군대와 민병대 그리고 정부편에 선 마오리족이 연합하여 토지매각에 반대하던 부족들을 패배시켰다.
19세기 중반 금의 발견은 이 식민지에 번영을 가져왔고 그리고 더 많은 유럽인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노스 섬의 경제성장은 마오리 전쟁으로 지장을 받았다. 1880년대 초 냉동선 개발로 농부들이 영국으로 버터·치즈·육류를 출하할 수 있게 되자 농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가 정착하게 되었다.
1891~1912년 집권한 자유당은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고(1898), 노동조합 결성을 장려했으며(1892~96) 성공적인 토지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기간의 대부분을 리처드 존 세든이 총리로 활약했다.
1912년 자유당은 개혁당에 밀려났으며, 개혁당의 당수 윌리엄 퍼거슨 매시는 1925년까지 총리로 집권했다. 1920년대 개혁당 정부는 생산자와 국가가 권한을 함께 가지고 있는 수출판매대리제도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뉴질랜드의 유제품 및 다른 제품들에 대한 판매 협조 체제가 확립되었다.
뉴질랜드는 제1·2차 세계대전 동안 군대·양모·식량을 제공하여 영국을 지원했다. 뉴질랜드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은 수출무역을 크게 신장시켰으나 막대한 인명손실도 가져왔다. 뉴질랜드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유럽의 전쟁터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41년 이후 일본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면서 뉴질랜드는 태평양 전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1907년 뉴질랜드는 대영제국 내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받았고 1931년 웨스트민스터 법에 따라 자치정부의 수립이 허용되었으나 자치국으로서의 정식 인정은 1947년에 이루어졌다.
독립 이후 노동당이 몇 차례 집권했을 뿐 주로 국민당이 집권했다(뉴질랜드 국민당). 뉴질랜드는 1970~80년대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970년대 초 에너지 비용의 상승과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은 인플레이션의 급등과 실업의 증가로 나타났고,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국민당 정부는 강력한 개입을 통해 경제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1980년대 초 임금·가격 동결 및 이자율 제한 등의 조치는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가져왔다.
그 영향으로 1984년 선거에서 승리한 노동당 정부는 정책을 급선회하여 기업활동 규제 철폐, 농업보조금 폐지, 소득세 삭감, 임금·가격·이자율 등에 대한 규제 완화 등의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핵무기 확산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노동당은 이러한 정책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어 1987년 재집권하게 되었지만, 정책을 둘러싼 갈등으로 총리와 장관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90년 총선에서 짐 볼저가 이끄는 국민당은 사회복지 예산의 삭감과 의무적 노동조합 가입 등의 노동 관행의 폐지를 공약으로 제시하는 한편 핵무기 확산 문제에 대해서는 노동당 정부와 마찬가지로 반대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국민당은 1996년 총선에서도 재집권에 성공했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영국의 역할이 줄고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축소됨에 따라 독자적 입장이 강화되었고, 주변국들과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종교
뉴질랜드는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교 국가이다. 성공회, 장로교, 로마 가톨릭교, 감리교 신자가 인구의 약 3/5에 이르고, 다른 개신교 종파들과 동방정교회, 유대교회, 그리고 마우리족에게 전래된 그리스도교인 라타나교회와 링카투교회의 신자도 상당수에 이르기 때문이다. 신자 수는 성공회, 장로교, 로마 가톨릭교 순으로 많다. 그러나 인구의 약 1/4은 어떤 종교도 갖고 있지 않다.
뉴질랜드와 한국과의 관계
외교
뉴질랜드와 한국이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은 1962년 3월이었다. 그 이전부터 뉴질랜드는 1949년 7월에 한국을 정식 승인한 후, 1950년 6·25전쟁 때는 군인 6,020명을 파병한 바 있으며 1951년 가평전투에서는 뉴질랜드 포병대의 지원으로 중공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외교관계 수립 후 1971년 6월에 주한 뉴질랜드 대사관과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고, 1973년에는 코트라(KOTRA) 오클랜드 무역관이 개설되었다.
정상외교로는 1999년 김대중 대통령, 2006년 노무현 대통령,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이 뉴질랜드를 방문했으며 뉴질랜드의 역대 총리들도 1976년 로버트 멀둔(Robert Muldon) 총리부터 2013년 존 키(John Key) 총리까지 꾸준히 방한하여 양국 관계를 논의해왔다. 2014년에는 양국간 전방위적 협력 관계를 보다 긴밀히 하고자 견고한 동반자 관계 심화 방안을 협의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한국의 대뉴질랜드 주요 수출품으로는 자동차, 석유화학, 건설중장비, 철강, 기계류 등이 있으며 수입품으로는 원목, 낙농, 육류, 알루미늄, 채소류 등이 있다. 2016년 기준 한국의 대뉴질랜드 수출액은 13억 511만 달러이며, 수입액은 10억 9,826만 달러이다. 양국은 대사급 수교 이후 무역경제기술 협력협정(1967. 7), 어업협정(1978. 3), 이중과세 방지협정(1981. 11), 방산물자 품질보증약정(2000. 11), 영화공동제작 약정(2005. 11), 관세상호인정협정(2011. 6), 자유무역협정(FTA)(2015. 3) 등의 협정들을 체결해왔다.
문화 교류·교민 현황
2016년부터 주뉴질랜드 대한민국 대사관이 아시아뉴질랜드재단과 공동으로 개발한 한국 관련 수업교재가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한국의 문화와 양국 간 문화 차이를 뉴질랜드에 알리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뉴질랜드와 한국은 2015년 자유무역협정 체결 후 다방면에 걸쳐 문화교류와 인적교류를 확대해왔다. 2017년 기준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는 재외동포는 3만 3,403명이며,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뉴질랜드 국적의 등록외국인은 2016년 기준 774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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