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죽음은 산자에게 무었을 남기는가
1.유골 (遺骨)
"시신을 안고 올 수가 없어서……."
대사형의 유골이 담긴 작은 단지를 들고 돌아온 검학은 말라붙은 입술을 억지로 떼어 그 한마디를 뱉어놓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그대로 장백의 바위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추위 때문에 새어나온 하얀 김이 침묵의 공간 사이로 떠다녔다.
대사형이 죽었다…….
한 자루 장검을 메고 산을 내려갔던 대사형은, 지금 좁고 캄캄한 작은 단지 안에 담겨 되돌아왔다.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 만물을 삼켜버리는 죽음의 잔인한 실체인 한 줌의 초라한 유골이 되어 사형제들 앞으로 돌아온 것이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누구도 큰 소리로 통곡하며 절규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한다면, 그것이 바로 대사형의 죽음을 인정해버리는 행위가 된다는 듯이 그들은 모두 석상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가장 아끼던 제자를 먼저 떠나보낸 사부도, 시신을 인수해온 장본인인 셋째 검학도, 언젠가는 대사형을 이기고야 말겠다고 늘 안달복달하던 넷째 검매도, 대사형이 강호를 주유할 때 그 오른편에 서고 싶다던 다섯째 검웅도, 열여덟 살이 되면 대사형에게 시집가겠다고 노래하던 여섯째 검란도, 할 수만 있다면 대사형의 그림자가 되고 싶어 했던 막내 검표도…….
모두가 입을 꽉 다물었다. 모두가 눈물을 안으로 삼켰다. 그들의 귀에는 벌떼들이 춤을 추듯 윙윙대는 기묘한 울림만이 들려왔고, 그들의 눈에는 끝없이 펼쳐진 장백의 높고 낮은 산자락들만이 보였다.
장백쾌검문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바로 코 앞에 있는 대사형의 유골단지를 바라보지 않았다. 누구도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백짓장처럼 변해버린 그들의 머리 속에는 오직 한 가지 말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대사형이 죽었다!
장백쾌검문의 희망이었고, 모두가 우러러 보았던 대사형, 고검룡이 죽었다!
- 대사형! 나 대사형한테 시집갈래요.
- 우리 아란이 열여덟 살이 되면 허락해 주지.
검란의 머리 속에 언젠가 대사형과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건 꿈이야. 현실이 아니야.
웃기 위해 숨을 토해낸 순간 갑자기 하늘의 빛깔이 변해버렸다. 눈 쌓인 산기슭보다 더욱 창백해진 검란이 이마에 손을 대며 휘청거렸다. 그리고 작은 탄식과 함께 그녀는 쓰러져버렸다. 뒤늦게 검웅이 손을 뻗어 그녀를 잡으려 했으나, 그녀의 몸은 이미 차가운 눈 속에 파묻히고 있었다.
평화롭던 장백쾌검문의 악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아란은?"
사부의 물음에 검매가 대답했다.
"방에 눕혀 두었습니다. 한동안 쉬어야할 것 같습니다……."
그토록 다부지던 검매의 말끝이 힘없이 흐려졌다. 그러나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인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갑절이나 늙어버린 것 같은 고운행의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오랜 여행과 충격으로 반쯤 넋이 나가버린 듯한 검학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검학의 눈은 더 이상 총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검란처럼 쓰러져버리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학,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검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동안의 일을 자세히 말해보아라."
사부의 명이 떨어지자, 침통하게 떨구어져있던 제자들의 고개가 하나둘씩 들려졌다. 그들은 모두 안타까운 눈빛으로 검학을 바라보았다. 대체 왜 대사형이 죽었는지? 무엇이 그들로부터 소중한 대사형을 빼앗아갔는지? 그들은 알고 싶었다. 알아야만 했다. 알아야 원한을 갚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검학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피로와 충격 때문에 말이 정리되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대사형을 죽인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힘겹게 열리는 그의 입술도 손처럼 떨리고 있었다.
"대사형은……."
갈라진 검학의 목소리가 작은 방안에 미약하게 흩어졌다.
"비무대회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금릉에 도착해서 비무대회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다가…… 며칠이 지나서……."
비록 맥없는 음성일지라도 언제나 핵심만을 찔러 일목요연하게 말하던 검학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너무나 달랐다. 그는 말을 더듬었고, 핵심을 피해 에둘러가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한마디 한마디 뱉는 것을 무척이나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금릉에 도착해서도…… 대사형은 건강했습니다. 비무대회 전날 무척 기분이 좋았던지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서 잠이 들었는데…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대사형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검학을 바라보던 사형제들의 눈은 불신으로 가득 찼다.
"의원의 말로는…… 너무 긴장하고…… 술을 마셔서…… 심장에 이상이 온 것이라고……!"
누군가의 입에서 비통한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것은 곧 참담한 흐느낌이 되었다.
대사형은 죽었다. 그것도 비무대 위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침상에서. 펼쳐보지도 못한 꿈을 그대로 가지고 취중에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대사형의 죽음은 사형제들의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의 꿈이 대사형과 함께 죽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검학에게 묻지 않았다. 모두 입술을 떨고 눈을 감았다.
고운행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제자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는 볼 수 있었다. 제자들의 얼굴 가득히 차 오르는 절망의 표정을. 얼마 전까지는 미래의 꿈과 희망에 젖어 있던 그 철없는 얼굴들에 떠오르는 절망을. 절망이란 지극한 슬픔보다도 더욱 암담한 것이었다.
차라리 대사형이 악한(惡漢)들과 싸우다가 죽었다면…….
그렇다면 제자들은 분노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쪽이 남은 사람들에게는 더 나았을 것이다. 분노는 사람을 일어서게 하지만, 절망은 사람을 죽여버리기 때문이다.
이제 고운행에게는 무거운 짐이 남았다. 그는 죽어 가는 제자들을 살려야했다. 검룡의 죽음을 슬퍼만 하고 있다보면, 그는 남은 제자들마저 다 잃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고운행은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아호가 안 보이는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중요한 자리에는 늘 없는 것이 당연한게 검호였다. 아마 오늘도 아침부터 어디에선가 게으름을 피우며 뒹굴고 있을 것이다. 장백쾌검문의 사람들 중에 대사형의 죽음을 모르는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한심한 일이지만, 고운행은 그 외의 방법은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모두들 내 말을 듣거라."
고운행은 말했고, 수그려졌던 제자들의 고개가 들려졌다.
세상에는 참을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것들이 많기도 할 것이고, 적기도 할 것이다. 검표는 적은 편에 속했다. 그는 먹이를 노리는 표범처럼 인내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그는 참을 수 없는 일을 연거푸 당했다. 대사형이 죽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검표는 칼로 자기 목을 그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방금 사부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정말이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숭배하던 사람의 자리에 가장 경멸하는 사람이 앉는다는데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그는 참을 수 없는 일은 참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무기력하게 늘어져있던 검표의 몸이 갑자기 벌떡 일으켜졌다.
"안 됩니다!"
고운행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늙고 휘어진 사부의 등이 드높은 담처럼 느껴졌다. 사부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뭐가 안 된다는 거냐?"
"대, 대사, 대사, 대사형……!"
검표는 말을 더듬었다.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분노가 그에게서 말을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대사형은 하나뿐입니다!"
그는 간신히 그 짧은 한마디 말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애쓴 한마디에 대한 사부의 대답은 더욱 짧았다.
"아룡은 죽었다!"
그리고 연속적으로 날아오는 매운 주먹처럼 잇단 호통이 그의 귀를 때렸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한 사람이 죽고 자리가 비면 누군가 그 자리를 채워야 하는 것이고! 둘째가 첫째의 뒤를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검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가 들이마신 것은 한 모금의 공기가 아니라 뜨거운 분노였다.
"으아!"
쾅!
별안간 검표가 퉁기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가 버렸다.
끼이익……, 끼이익…….
검표가 밀고 나간 방문이 구슬픈 소리를 내며 삐걱거렸다. 다시 물 속같은 침묵이 방 안에 감돌았다. 검매도 검웅도 검학도 몸을 움츠리고 사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운행은 알 수 있었다. 누구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지만, 누구도 그의 결정을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해야 했다.
"아매, 나가서 검호를 찾아오너라."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