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혜성(彗星), 그가 돌아왔다
능풍마방(凌風馬房).
드넓은 뜨락 가득히 별빛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능풍마방은 낮과 밤의 구분이 없는 곳이다.
무수한 건마들이 매각(每刻)마다 능풍마방에서 쏟아져 나가고, 떼를 지어 마방 안으로 접어든다.
어디 그뿐이랴? 수우각(水牛角) 소리를 신호로 하여 회하(淮河)를 따라 움직이던 선박들이 돛을 내리고 올리며, 천하각지로 퍼져 나가는 표물들이 우람한 체격의 장사들에 의해 옮기어지고 있다.
한 명의 낭인청년, 그는 표물을 전달하는 총관(總官)이 머물러 있는 곳을 찾고 있었다.
그는 떠돌이 낭인으로 보이는지라 문전의 대접이 박하기 마련인데, 능풍마방의 인물들은 전혀 박대하지 않았다.
- 누구든 귀빈이다. 표물주는 왕(王)이다! 설사 그가 천만금(千萬金)의 이익을 주든, 단 일전(一錢)의 이익을 주든 간에!
능풍마방의 규율은 무림방파의 규율보다도 훨씬 엄했다.
천독목(天獨目)이라는 인물, 그는 마부(馬夫)와 수부(水夫)들의 대부(代父)로 불리우고 있다.
수륙표행계(水陸標行界)에서 행세를 하기 위해서는, 천독목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천독목 휘하에는 사십팔(四十八) 대표두가 있으며, 그들은 남북십삼성(南北十三省) 도처에 머물면서 천독목의 지시에 따라 하나의 지부를 경영한다.
결국 능풍마방은 대하(大河)를 따라, 관도(官道)를 따라,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는 방대한 조직망을 얻게 되었다.
현재 능풍마방의 이목(耳目)은 강호에서 가장 거대하다고 정평이 난 개방을 능가하고 있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나이 지긋한 중년인, 그는 능풍마방의 제이총관(第二總管) 지위를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휘하에 직속되어 있는 수하만 하더라도 칠백여, 그가 한달에 받는 급여는 거의 천 냥(千兩)에 육박한다.
그러나 그의 외모와 거동을 본다면, 그의 지위가 그렇듯 대단한 것임을 전혀 짐작할 수 없다.
늘 온화한 미소를 짓고 표물주를 대하는 제이총관.
그는 호주머니를 툭툭 털어 봤자 냄새나는 동전 한 닢 굴러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회삼청년을 앞에 두고도 지극히 공손히 대하고 있는 것이다.
팔짱을 낀 청년은 몹시 맑은 눈빛을 갖고 있었다.
제이총관은 표행업에 종사하며 거의 매일 오십여 명의 객을 맞이한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는 인물이었다.
하나, 지금 능풍마방의 접객소로 접어든 회삼청년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논평을 할 수 없었다.
초라한 옷차림이며, 봉두난발이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는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 그러한 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옮길 물건이 하나 있소."
잔잔한 어조이다. 몹시 맑고 상냥한 목소리, 세상 물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초야의 은사다운 목소리였다.
"그것이 무엇인지요?"
"약간 특이한 물건이오. 사실, 그 물건에 대한 것은 묻지 말아 주기 바라오."
"흠, 그것은 곤란한 말씀이십니다. 기실, 저희 마방에서는 도난사건에 대비해 표물의 가격을 미리 산정해 두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표행 가운데 표물을 도난당하게 된다면 사흘 안에 두 배 가격을 변상해 드리는 것이 저의 마방의 신조입니다. 물론, 도난당한 표물은 전혀 없었지만……."
능풍마방의 이름이 욱일승천하게 된 데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철저하게 신용을 지켜 왔기에, 오늘날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훗훗…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고 들었소."
"흐음……."
"이 일은 약간 중요한 일이오. 나는 능풍마방 사람들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여기고, 상당히 먼 곳에서 왔소."
"……."
"표물을 운송하는 비용 가운데 일부를 선금(先金)으로 내겠소. 내일 아침까지 연락해 주기 바라오. 나는 운향객잔(雲香客棧)에 거처를 두고 있소."
낭인풍의 청년은 총관에게 말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청년은 품에 손을 넣어 나무갑 하나를 꺼냈다.
그는 나무갑을 선탁 위에 툭 내던진 다음,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제이총관은 표물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고 무작정 표물비만 일부 맡기고 떠난다는 데 상당히 당혹해했다.
'체질적으로 오만한 자로군. 그러나 이상하게도 믿음직스럽지 않는가?'
제이총관은 청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조금 전까지 청년과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했었다.
한데 정작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자 한다면, 이목구비 가운데 어떠한 것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얼굴이 희고, 전체적으로 약간 마른 편이며, 키가 꽤 헌칠한 편이라는 것 정도만이 기억에 남을 뿐이다.
누구든 한 번 보면 머릿속에 깊이 기억하는 장기를 지닌 제이총관이었으나, 막 사라져 간 청년에 대한 것은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다.
"신비한 인물이다."
제이총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무갑을 손에 쥐었다.
"표물비의 선금으로 얼마를 내놓았을까? 정녕 중대한 표물이라면 오천 냥(五千兩)은 받아야 한다. 선금은 십분지일이 보통이니, 오백 냥 정도는……."
그는 나름대로 주판알을 퉁기며 나무갑을 열었다.
툭-!
나무갑은 힘없이 열렸다.
그리고 너무나도 강하고 맑은 칠채광(七彩光)이 뿜어져 나와 제이총관의 눈빛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용안만한 구슬 하나가 들어 있었다.
표면에 일곱 가지 빛깔의 안개가 서기(瑞氣)로 흐르고 있으며, 속이 보일 듯 말 듯 반투명한 가운데… 그것을 유심히 바라본다면 몽롱한 환각에 빠져들게 된다.
"이… 이럴 수가?"
제이총관의 입이 따악 벌어졌다.
"이것은 남해(南海)의 칠채영롱벽(七彩玲瓏壁)! 오오, 이 가치는 능히 일성을 살 정도이다. 한데, 이것을 선금으로 내놓고 가다니?"
제이총관은 소매섶으로 자신의 눈가를 닦고 또 닦았다.
하나, 칠채영롱벽은 환상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이, 이 일은 나의 손에서 처리하지 못할 일이다. 대부께 알려야 한다!"
천독목(天獨目).
그의 거처는 청강석으로 이루어졌다.
상당히 너른 석실이 다섯 개.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떠한 것도 치장되어 있지 않다.
천독목은 삐그덕거리는 나무 침상 하나와 누더기처럼 기운 이불 한 채를 소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하루에 단 두 시진 잠잘 뿐이며, 매일 백여 명의 인물과 접견하며 능풍마방의 대소사를 친히 관장한다.
식사는 수하들과 함께 하며, 너무나도 바쁜지라 가정을 이룰 짬조차 없다.
그것이 바로 천독목이라는 인물의 일과이며 생활이었다.
"산동(山東)과 하남(河南) 일대의 상권을 확장시키는 것이 하반기의 과제이니, 그 점에 주의해야 하네!"
천독목, 체력이 우람한 장한이다. 얼굴은 칼자국에 뒤덮여 있으며, 왼쪽 눈알은 검은 안대에 감추어져 있다.
그는 다섯 명의 서기(書記)에게 각 지부에 보내는 서찰을 대필시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의 매일 이십여 통의 서찰을 직접 작성해야 하며, 오백여 권의 장부를 세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기업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해 나가지 않는다면 능풍마방은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십칠만 수하들의 대부(代父)이다. 그가 패망한다면, 그들 모두 패망하게 된다.
천독목의 표정이 늘 근엄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운남지부(雲南支部)에 보내는 서찰에는 그 곳의 라마승들과 사이가 벌어지지 않는 데 주안점을 두라는 것을 적게."
머리가 다섯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철인(鐵人), 천독목은 일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 철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가 각처에 보내는 서찰을 작성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석옥 외부에서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석옥 안의 공기를 차게 얼어붙게 했다.
"중차대한 일이 아니면 불 수 없는 호각 소리인데?"
천독목의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나를 찾는 신호이다. 흐음, 내가 꼬옥 끼여 들어야 할 일이 없을 텐데… 경망스럽게 나를 불러내다니!"
그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신형을 틀었다.
'기업이 패망하면 수많은 사람이 다친다. 그러하기에, 단 일각이라도 황금처럼 써야 하는 것이다. 만에 하나, 사소한 일을 처리하지 못해 나를 불러 낸다면… 그 자가 누구이든 즉시 지위 강등이다.'
천독목은 성난 표정을 지으며 접빈소로 나갔다.
제이총관을 볼 때에도, 그가 누군가 왔다는 말을 할 때에도, 그리고 나무갑 하나를 주고 떠났다는 말을 할 때에도 천독목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잔뜩 화가 난 표정. 그는 제이총관이 무가치한 일로 자신을 불러냈다고 저으기 화를 내는 참이었다.
그러나 제이총관이 나무갑을 여는 찰나, 모든 것은 달라지고 말았다.
그는 칠채영롱벽을 보았으며… 바로 그 순간, 그의 얼굴색이 밀랍처럼 희어졌다.
"으으……!"
'그, 그가 왔단 말인가?'
그의 입은 쩌억 벌어져 주먹이 마음대로 들락날락거릴 수 있을 정도였다.
침묵, 천독목답지 않게 심각해져서 입술을 다물었다.
그는 나무갑 안의 보옥을 유심히 살피다가 제이총관을 바라봤다.
"앞으로 이틀 간, 나의 업무를 귀하가 대신해 주기 바라네."
"대, 대부! 그게 어인 말씀이십니까?"
"이틀 간 나의 지위를 대신 맡으라는 말이네."
천독목은 그렇게 말하며 창가로 걸어갔다.
지금 그의 눈빛은 타오르는 용암불처럼 강렬해지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삼엄한 예기(銳氣)가 토해져 나왔다.
'그가 당했다는 소문을 들었지. 그러나 믿지 않았었다. 당한다는 것은 그답지 않은 일이다.'
그는 창가에 섰으며, 어둠이 짙게 깔린 야공을 바라보았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天才), 그리고 그 누구도 마지막 모습을 알지 못하는 용(龍) 중(中) 용(龍)! 드디어…, 그가 돌아왔다.'
천독목은 천천히 손을 쳐들었다.
그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는 철환(鐵環)이 하나 끼워져 있었다.
그것은 수년 전부터 늘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것으로, 천독목의 상징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천독목은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철환을 빼어 냈으며, 그것을 슬쩍 허공으로 퉁기어 올렸다.
피잉-!
철환은 파공성을 끌며 삼십 장 허공으로 떠올랐다.
펑-!
일순, 철환은 폭화(爆火)로 화해 야음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 * *
운향객잔(雲香客棧).
일급도 아니고 싸구려도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며칠 묵어 가는 흔한 객잔이었다.
그는 객잔의 후원에 방 한 칸을 얻었으며… 진회하의 요화(妖花) 하나를 방 안으로 불러 줄 수 있다는 점소이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뜨락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서성거리다가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유성(流星) 하나가 긴 꼬리를 끌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중원의 저력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백도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온화한 가운데 기개가 서리어 있다.
'신화는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중원을 희롱했던 것이 철저하게 응징된다는 것을. 혜성(彗星)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부터 알려 주겠다.'
뒷짐 지고 뜨락을 오가는 청년. 그는 소림사의 아들이며, 은거하며 마도의 지배자들을 끌어 냈던 집요한 승부사이다.
혜성옥수(彗星玉手) 낭옥비(浪玉飛).
드디어 그가 돌아온 것이다. 그리운 강호의 대지로…….
자시(子時) 즈음해서, 운향객잔으로 상당히 많은 투숙객들이 모여들었다.
잡다한 신분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며 도합 열여섯 패거리로서, 그들이 모여 듬에 따라 운향객잔은 순식간에 만원이 되고 말았다.
어디 그뿐이랴?
운향객잔 북쪽의 취월담(醉月潭) 가에는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모를 낚시꾼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운향객잔 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진회하 검푸른 물결 위로 십팔 척의 쾌속선이 다가서고 있었다.
서쪽에서는 재인(才人) 무리가 다가섰으며, 동쪽으로는 기녀들이 다가섰다.
운향객잔을 향해 이동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모두 이천(二千).
그들은 조용히 모여들고 있는지라, 어지간히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똑같은 표적을 향해 다가서며 대라진(大羅陣)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자시에 나타난 이천 명의 강호인들, 그들은 낭옥비가 머물러 있는 장소를 축(軸)으로 삼는 차륜세(車輪勢)의 진식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명이 떨어지면 일제히 덮쳐라.'
'누가 나타났기에, 이천 비밀위사(秘密衛士)가 모두 나서야 했는지 모르겠군.'
이천 명의 강호인들, 그들은 누구 때문에 이동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낭옥비는 뜨락으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그는 탁자 곁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그가 점소이에게 심부름 값을 얹어 주고 주문한 주호와 술잔, 그리고 마른안주가 놓여 있다.
잔은 두 개, 낭옥비는 뜨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람한 체격의 애꾸 하나가 성큼 접어드는 것이 보였다.
"……!"
미소, 그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순간, 애꾸는 그를 바라보았으며… 그의 얼굴에는 말로는 형언하지 못할 복잡한 정서가 교차되어 지나갔다.
저벅- 저벅-!
그는 조심조심 낭옥비가 머무는 방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검게 그을린 얼굴 그득히 구슬 땀방울이 매달렸다.
한순간 그는 걸음을 멈추었으며, 낭옥비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접니다!"
"훗훗… 오랜만이네."
"마찬가지올시다."
그는 조심조심 방 안으로 접어들었다.
낭옥비는 그와 마찬가지로 만감이 교차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 번의 가을이 지나가고, 네 번째 가을이 도래하는 날… 만나게 되는군."
"그런가 하오."
"자, 일단 건배(乾杯)하세."
낭옥비가 그렇게 말할 때, 애꾸는 탁자 위에 손을 내밀어 잔(盞) 하나를 집었다.
눈처럼 흰 도자기 잔, 그가 잔에 술을 따르고자 할 때.
'설마… 설마……?'
그의 입가에는 경련이 일어났으며, 낭옥비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답지 않군?"
"아, 저답지 않다니요?"
애꾸는 멈칫하며 낭옥비를 바라봤다.
"자네가 언제부터 술 마시는 데 잔을 썼는가? 자네는 늘 주담자째로 술을 마시지 않았던가? 그리고 한 번 마시면, 열 주담자는 비웠지."
낭옥비가 미소 지으며 말할 때.
쨍그랑-!
자기 술잔은 그의 손아귀 안에서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는 우람한 몸뚱이를 낭옥비 앞에 내던지고, 외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진짜… 총표파자시군요. 아아, 만에 하나… 가짜일지 몰라 무엄히도 총표파자를 시험했습니다. 속하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사람아, 자네는 나를 알고 나는 자네를 알지 않는가. 다 아네. 자네의 그러한 치밀성으로 인해, 철혈십구로(鐵血十九路)가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운향객잔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천만대군이라 하더라도 운향객잔 안으로 들어설 수 없다.
또한 운향객잔 안에서 머물러 있던 과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르는 사이, 점혈되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모든 것은 이천 무사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그것을 암중에 명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능풍마방주 독안대부(獨眼代父).
그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낭옥비와 더불어 신화를 이룩했던 주역이며, 낭옥비가 강호에 안배해 둔 두 명의 심복 가운데 하나였다.
능풍검후 천몽룡(天夢龍).
풍강(風崗)에서 죽었다고 소문난 인물이다. 하나 그는 죽지 않았으며, 천독목으로 화신하여 마방을 확장하며 삼 년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천혈십구로는 죽지 않았다. 그들은 불사조(不死鳥)처럼 살아났다.
기실, 당세무림에 있어 낭옥비의 친위세력은 숫자나 규모에 있어 그 어떠한 세력에 비해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이 바로 진실이었다.
가장 독한 술을 밤을 세우며 마신다 하더라도, 마음속의 앙금이 녹아 버리지 못하리라.
철혈십구로(鐵血十九路).
지금은 잊혀진 이름이다. 그들은 무적의 신화를 이룩하였으며, 천하를 정복하고자 하였던 양대마세를 격파하며 중원을 위기에서 구했다.
하나 그들은 승리의 축배를 들기 이전에 기습당하였으며, 수천만 관의 화약이 터지는 가운데 철혈십구로의 무사들은 떼주검으로 화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당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다.
"도합 사십구(四十九)… 그들 모두 총표파자께서 돌아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의 휘하에서 대표두 노릇을 하고 있으며, 천하각지에 흩어져 있습니다."
"수고가 많았네."
"속하, 총표파자께서 진짜 살해되었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하기에, 의연하게 기다린 것입니다. 이제 전 세력을 모아 백도를 좀먹고 있는 의열천군맹(義烈天軍盟)을 괴멸시키는 일이 남았을 뿐입니다."
천몽룡이 비분강개해 말할 때.
"그들을 친다면, 지배자(支配者)라는 자에게 농락당하는 것이 되네."
"지, 지배자요?"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 훗훗, 그 자는 풍강을 폭발시킨 장본이기도 하네!"
"으음……."
"그 자의 정체는 알지 못했으되, 그가 천하에 퍼뜨린 남북십삼패(南北十三覇)의 정체를 알아냈네. 그것만 해도 거대한 수확이네."
남북십삼패.
그들은 도처에 피어난 악의 꽃이다.
그들은 백도인으로 위장하고 있으며, 입으로는 천하대의를 외치며 속으로는 천하정복을 꿈꾸고 있다.
그들 십삼 인, 그들이 바로 과거 철혈십구로를 괴멸시킨 장본인들이었다.
"상당히 많은 세력이 연관되어 있네."
"아……."
"내가 알아 낸 사실이 두려울 정도이네."
낭옥비는 상당히 크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문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낭옥비는 보이지 않는 강기의 벽을 쳐서, 음파가 외부로 흘러 나가는 것을 방지하고 있는 것이다.
주호가 잇따라 비워졌으나, 두 사람 가운데 취하는 사람은 없었다.
"구파일방의 대표적 방파에 마세(魔勢)가 스며 있으며, 놀랍게도 황실(皇室)에도 마세가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아냈네. 나를 암습한 자 가운데에는 황실무공을 쓴 자가 있었네."
"그, 그럴 수가……?"
천몽룡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때, 낭옥비는 품에 손을 넣어 한 장의 양피지를 꺼냈다.
그것이 쫘악 퍼지자, 천몽룡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다.
"지도군요?"
"그렇다네. 중원의 지도이네. 내가 만든 것이네. 여기 보면 핏빛 물감으로 발리어진 부분이 있네."
"그렇군요."
"도합 십삼 부위이네. 그 부위는 마세가 번지고 있는 부위이네."
낭옥비는 손가락으로 지도 위쪽을 가리켰다.
천목산(天目山), 동정군산(洞庭君山), 사라산(射羅山),
하수(河水), 태호(太湖), 항주(抗州),
사천(四川), 성도(成都), 공동산,
곤륜산(崑崙山)…….
낭옥비는 장소를 지적한 다음, 천몽룡을 바라봤다.
"현재 자네 휘하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십칠만(二十七萬)입니다."
"많군. 그 중 일류(一流)는?"
"일류무사(一流武士)는 오천 정도입니다. 그들 가운데 이천은 늘 이 근처에 상주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곳을 포위한 자들은 바로 그들입니다."
"오천!"
낭옥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나직이 벌어지며 이러한 말이 새어 나왔다.
"적군."
"적다니요?"
"훗훗… 격전이 벌어진다면, 세 시진도 버티지 못할 걸세."
"예… 에?"
"그들은 그 정도로 거대한 집단이네. 가히 고금제일의 세력이지. 중원천하가 모르는 가운데, 그렇듯 거대한 집단을 구축한 자가 누구인지 정말 궁금하네. 모름지기 그는 악마의 천재(天才)일 걸세!"
낭옥비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동시에, 그의 두 눈에서는 측량하기 힘든 지혜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과거, 천몽룡은 독보천하(獨步天下)하던 유랑무사였다.
그는 어느 날 우연히도 낭옥비를 만났으며, 낭옥비의 그러한 눈빛에 반해 그를 지존으로 섬기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
새벽이 다가선다.
칠흑같이 어두웠던 일대가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회하의 불야성(不夜城)은 빠른 속도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천몽룡은 오랜만에 술을 열다섯 병 쉬지 않고 마셨는지라, 어느 정도의 취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풍강 대회전 후, 낭옥비의 휘하세력 무사들은 모두 중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과거의 가공할 무공을 제대로 시전할 수 있는 상태의 사람은 열도 되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낭옥비는 삼절공자로 은둔해 살면서 의술(醫術)을 연구했던 것이다.
하나 그는 아직 신의(神醫)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였기에, 수하들의 상세를 모조리 구할 정도는 되지 못한 것이다.
"그 자들은 무맥(武脈)을 지배하고 상맥(商脈)을 지배하네. 그리고 관부마저 장악하고자 하네!"
"아……!"
"당세의 누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네. 사실, 절대자란 우연히 나타나는 존재가 아니네. 아마도 그는 상당히 유명한 존재일 걸세!"
창밖이 환히 타올랐다.
그 때, 천몽룡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속하가 여기기에, 암중에 천하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가(能力家)는 당세에 있어 오직 팔 인(八人)에 불과할 것입니다."
천몽룡은 강호정세에 지극히 해박하다.
낭옥비가 은거하는 사이, 그는 능풍마방을 일으키며 수륙(水陸)을 헤매었다.
그 결과 그는 어떠한 곳에 어떠한 방파가 있으며, 그 곳에 재산이 얼마이며, 몇 명의 인원이 머물러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낭옥비가 천몽룡을 통해 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낭옥비가 삼 년여 세월 동안 무림을 잊고 지냈으되 그가 거느리고 있는 극소수세력은 무림세력에서 경제세력으로 화하며 천하에서 가장 치밀하고 방대한 이목(耳目)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팔 인?"
낭옥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렇습니다. 오직 여덟에 불과합니다. 그들이야말로 천하를 구할 수도, 천하를 붕괴시킬 수도 있습니다."
강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인물들, 대체 그들은 어떠어떠한 인물들이란 말인가?
"첫째의 인물은 소림(少林)에 있습니다."
"아, 소림?"
"그 곳의 지배자 취불(醉佛) 장미법사(長眉法師). 훗훗, 그가 바란다면 천하는 그에게 굴복할 것입니다. 소림은 죽지 않았습니다. 죽었다고 여기는 것은 바보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실로 놀라운 판단이었다.
그는 낭옥비가 소림의 아들임을 모른다. 낭옥비는 그에게 소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한데, 그는 소림사의 힘이 여전히 가공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인물 역시, 은둔자(隱遁者)입니다."
"……."
"그 또한 바란다면, 천하를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인가?"
"천하제일문(天下第一文), 그리고 천하제일은(天下第一隱)! 바로 운중학림주(雲中學林主) 종리목(鍾里木)입니다."
종리목, 그는 뇌 중 뇌라 불리운다.
그의 나이 이제 사십 세 정도. 하나, 그의 지혜는 하늘과 땅을 관통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운중학림은 대대로 천재들을 배출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십 갑자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천재는 이 인(二人)이라 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현재 학림을 이끌고 있는 종리목이며, 또 하나의 인물은 종리목의 사제(師弟)이며 이제까지 학계에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자입니다. 그의 이름은 알아내는 데에도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
"그는 혼(魂)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의 자세한 정체를 아는 사람은 종리목에 불과합니다. 혼이라는 자는 학림을 떠난 상태인데,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흠……!"
"종리목이 그의 사제 혼과 더불어 천하정복을 시작한다면, 중원(中原) 구만 리(九萬里)를 정복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뇌 중 뇌 종리목, 그는 초야 은사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하나, 그에게 절대적인 힘이 있다는 것만은 부정하지 못할 일이었다.
"세 번째의 인물은 황실의 인물입니다."
"황실?"
"예, 그는 최근 들어 존재가 두드러진 자입니다. 이름하여, 구룡부마(九龍駙馬)입니다."
구룡부마.
관가 사람은 그 이름을 익히 알고 있다.
그는 구룡왕가(九龍王家)에 머물러 있으며, 그의 아내는 황제의 장중주(掌中珠)인 군옥공주(君玉公主)이다.
군옥공주는 황제의 외동딸이다. 그녀는 병약한 미녀인지라,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구룡부마 백무룡(白武龍).
그는 천하제일의 행운아로, 군옥공주의 눈에 선택되어 부마로 제수 받았다.
본시 부마도위(駙馬都尉)인 자는 대권을 이어 받을 수 없기 마련인데, 그는 그러한 예를 깨고 병권을 서서히 장악하고 있었다.
현재 그는 오백만 황군(皇軍) 가운데 백이십만 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엄청난 존재로 부각된 것이다.
그는 바람(風) 같은 인물이며, 그가 장차 어떠한 변수로 부각될지는 아무도 추측 못할 일이었다.
황실의 무예는 강호무예와 다르다. 하나, 그들의 진정한 무예는 강호의 무예를 능가한다.
천하구대검후 가운데 끼여 있는 무쌍검후 경조염(京兆閻).
그가 바로 황실 제일고수이며,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사집단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팔천(八千) 어황금의위(御皇錦衣衛)의 총영반(總領班)인 것이다.
만에 하나, 구룡부마가 경조염이 이끄는 어황금의위를 이끌고 강호에 나선다면… 여타 황실세력이 끼여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강호는 그들에 의해 철저히 짓밟힐 것이다.
그러한 일이 벌어져서는 아니 된다. 진심으로…….
"네 번째의 인물은 늘 위험한 인물로 부각되고 있는 자입니다."
"누구인가?"
"속하는 그가 마세와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고 늘 믿고 있습니다. 그는 거대한 세력을 이끌고 있는데, 속하가 아무리 조사하려 해도 그의 세력만은 노출되지 않고 있습니다."
"……."
"바로 살인회(殺人會)의 회주, 냉혈검후(冷血劍侯) 백리소천(百里宵天)입니다. 그라면, 능히 악마의 대업을 저지를 만한 자입니다."
살인회주 백일홍(百日紅)의 대표자이다.
전문적인 암살자들의 집단, 그들은 최근 들어 활약을 멈추고 있다. 그러하기에, 천몽룡은 그들에게 더욱 혐의를 두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살인회는 언제나 고립되어 있었기에, 늘 악마로 오인을 받고 있다.
만에 하나, 낭옥비가 백리소천을 알지 못했다면 천몽룡의 말에 동조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아니네. 내가 보장한다네.'
낭옥비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소심한 사람이고 독랄하나, 근본적으로 악인은 아니네. 사실 나는 당세무림을 구하는 일에 있어,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네. 그의 가슴 속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중원혼(中原魂)이 깨어나기를…….'
낭옥비는 잔을 조용히 비웠다.
천몽룡의 말이 이어졌다.
"다섯 번째의 인물은 북서(北西)의 총사입니다. 그는 여인이며, 지극히 젊고 표독스럽습니다."
"……."
"또한 총표파자와는 양립하지 못할 존재입니다."
천몽룡은 낭옥비를 힐끗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불안하게 흐트러졌다.
"그녀의 이름은 이화(梨花)! 그녀는 총표파자와 풍강에서 최후 격돌하다가 패한 나머지, 자결한 잠룡풍(潛龍風)의 친누이입니다."
"으음, 잠룡풍에게 동생이 있었던가?"
"예. 그녀는 잠룡풍보다 훨씬 강하며, 북천잠룡무가의 진전을 거의 다 이어 받았습니다. 그녀는 잠룡풍의 뒤를 이어 강호를 정복하고자 하며, 그 이전에 총표파자를 죽이려 합니다."
"그것은 알고 있지. 북서맹에서 나를 노리는 암살자가 있다는 것은!"
"아……!"
"그는 호접일랑(蝴蝶一郞) 사몽. 어디에도 없고, 바란다면 어디든 나타나는 자이지. 과거 잠룡풍에게 들은 바 있는 인물이지."
"아……!"
천몽룡은 사몽에 대한 말이 나오자, 얼굴빛이 희어졌다.
회색(灰色)의 그림자(影), 사냥개…….
사몽을 부르는 별명은 무수하다. 가장 집요한 추적자이며, 새북(塞北) 제일암살자(第一暗殺者)이기도 하다.
그가 낭옥비를 추적 살해하고자 한다면, 낭옥비는 늘 긴장감 속에서 생활해야 한다.
그런데 낭옥비는 사몽 이야기를 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하나, 사몽은 나를 잡지 못하네."
"왜요?"
"그는 빠른 인물(人物)이되… 훗훗, 유감스럽게도 나보다는 조금 느리다네. 사실 나는 여기 오기 이전, 진회하에서 그를 떼어 버렸다네."
낭옥비는 또 한 잔의 술을 들었다.
그는 소매섶으로 입가를 닦으면서 말을 이었다.
"북천잠룡무가와는 하나의 미결사(未決事)가 있지. 만에 하나, 그들이 나를 바라지 않았더라 하더라도… 내가 그들을 찾아 나섰을 걸세."
"예… 예? 미해결사라니요?"
"훗훗… 자네에게도 말해 주지 못할 일이네. 이해하기 바라네."
낭옥비는 여유 있는 웃음을 지었다.
북천잠룡무가.
새북에서 가장 위대한 가문이다. 그 가문은 변황무림의 영웅들을 천 년에 걸쳐 배출해 왔다.
낭옥비와 결투했던 잠룡풍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현재 북서맹(北西盟)을 일으킨 북극빙녀(北極氷女) 잠룡이화(潛龍梨花) 또한 북천잠룡무가의 영웅이었다.
그들과 풀지 못한 하나의 일, 그것이 무엇인지는 낭옥비만이 알 뿐이다.
어쨌든 천몽룡의 말이 이어졌다.
"여섯 번째의 인물은 대해(大海)를 쥐고 있는 자입니다. 그는 현재로 보아, 중원무림에 가장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가 중원출정을 명한다면, 칠십이군도(七十二群島)의 해왕검사(海王劍士)들이 대거 나설 것입니다."
"해왕(海王) 연백풍(燕伯豊)을 말하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그는 위험한 인물이지. 그리고 내가 꼭 만나야 할 인물 가운데 하나이지. 지극히 짧은 시간 안에."
또 웃음이다. 삼 년 못 본 사이, 낭옥비의 기세는 보다 거대해졌다.
하나, 천몽룡으로서는 과거 낭옥비에게서 느꼈던 절세검사 특유의 살기(殺氣)와 예기(銳氣)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기운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다시 말해, 더욱 강해졌다는 뜻이다. 총표파자는 만날 때마다 강해진다. 그것이 바로 총표파자의 집념이며 개성이다.'
천몽룡은 자신보다 훨씬 젊은 혜성옥수 낭옥비 앞에 설 때마다 안도감을 느꼈다.
젊은 거인(巨人).
당세에는 그와 같은 기세를 지닌 사람을 쉽게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피(血)와 땀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