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塞外三大門派
1
흑상문신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네... 네 놈은 대체 누구냐? 어떻게 혈악의 일을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느냐?"
"아니 귀는 두었다 뭘하는 거요? 조금 전에 백상문신이 말하지 않았소? 나는 엽단풍이라는 사람이오."
흑상문신은 그가 계속 엉뚱한 소리만 하자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그는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눈앞의 이 미치광이 녀석을 때려 눕히고 싶었지만 자신이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이미 뼈저리게 절감했는지라 감히 덤벼들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엽단풍이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당신이 이대로 돌아가도 목불에게 추궁을 당하지 않을 방법을 알려줄 테니 그대로 해 보겠소?"
흑상문신은 그의 난데없는 말에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로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정말 몰라서 묻는다면 당신은 무림사상 최고의 멍텅구리요. 당신이 곤경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알려 주겠다는 말이오."
물론 흑상문신이 엽단풍의 말뜻을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너무도 의외의 말에 반신반의했을 뿐이다.
혈악의 규칙은 엄하고도 무서워서 절대로 조금의 실패나 잘못도 용서하지 않았다.
흑상문신이 설사 엽단풍의 손에서 무사히 빠져나온다 해도 그는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엽단풍이 자기가 먼저 나서서 흑상문신이 무사히 돌아갈 방법을 알려 주겠다니 어찌 놀랍지 않은가?
엽단풍은 제법 심각한 안색으로 말을 계속했다.
"사실 당신이 이런 곤궁에 처하게 된 것은 모두 내가 갑자기 끼어들어 당신들의 일을 방해했기 때문이오. 그러니 내가 어찌 도의적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겠소?"
흑상문신은 그의 말에 웃을 수도 없고 울을 수도 없어 표정이 이상야릇하게 변했다.
엽단풍은 이제는 아주 다정한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당신은 제법 인상이 중후하고 위풍이 당당하여 백상문신보다 한결 사람다운데가 있소.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듣고 그대로 따라 한다면 당신에게는 아무런 해도 없다는 것을 내가 보장하겠소."
흑상문신은 이 자식이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나 한 번 들어나 보자는 심산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엽단풍의 음성은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당신이 이대로 돌아간다면 당신의 상전인 목불은 반드시 당신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흑상문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당신이 살려면 목불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오."
흑상문신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한 그대로요. 목불이 존재해 있는 한 당신은 도저히 그의 손을 벗어날 수 없소. 하지만 그가 사라져 준다면 누구도 당신이 일을 실패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오."
흑상문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엽단풍은 도리어 정색을 했다.
"왜 그렇게 앞뒤가 꽉 막혔소? 내 말대로 하는 길만이 당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거요?"
흑상문신의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엽단풍은 다시 타이르는 듯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저 나에게 지금 목불이 있는 곳만 알려주면 되오. 그러면 내가 당신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것을 제거해 주겠소. 이것은 당신에게는 전혀 해가 되지 않은 바람직한 일이니 당신은 심사숙고해서 결정하기 바라오."
흑상문신의 얼굴에 망설임의 표정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 같더니 생각해 볼수록 엽단풍의 제안은 확실히 그로서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을 담고 있었다.
그는 재빠르게 생각을 굴렸다.
'이 놈은 자신이 목불을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이걸 이용해도 되지 않을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이 놈이 목불을 죽이면 나는 모르는 척 혈악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고 예상대로 이 놈이 목불의 손에 죽으면....이 놈을 유인했다고 말하면 될 것이 아닌가?'
엽단풍은 그의 눈이 이리저리 구르는 것을 보고 눈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나쁜 놈들은 저게 문제야. 꼭 혼자서만 약은 척을 한다니까.'
흑상문신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음을 굳힌 듯 엽단풍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하지만 네 놈은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한다."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염려 마시오. 당신이 목불의 행방을 알려주기만 하면 반드시 그 목불을 사불(死佛)로 만들어 버리겠소."
흑상문신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목불이 어떤 인물인데 너 같은 애송이가 그를 없앨 수 있겠느냐? 목불을 우리와 비슷한 고수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거야말로 스스로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냐?'
흑상문신은 속으로는 냉소가 흘러나왔으나 겉으로는 짐짓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노부의 신분으로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는다만... 네 말을 한 번 믿어 보기로 하겠다."
엽단풍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 끄덕거렸다.
"어련하시겠소. 당신의 애통한 마음은 내가 깊이깊이 새겨 두겠으니 어서 말해 주시구려."
흑상문신은 조금 망설이는 표정을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불은 사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거야 아무리 멍청한 인간도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니오?"
"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얼레?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목불은 성격이 괴팍해서 절대로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당신도 그 자의 거처를 모른다는 뜻이오?"
"그렇다."
"그런데 어떻게 나에게 목불이 있는 곳을 가리켜 준다고 했소?"
흑상문신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목불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지는 알고 있다."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의 말은 이번 일을 해결하면 어떤 장소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는 말이오?"
흑상문신의 몸이 움찔했다.
'이 놈은 덩치하고는 어울리지 않게 눈치가 무척 빠르구나.'
그는 문득 엽단풍이 겉으로 드러난 인상과는 달리 그렇게 우둔한 인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렇다."
"그곳이 어디요?"
흑상문신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혹시 자신의 이 자의 꼬임에 빠져 커다란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닐까 잠깐 불안해 졌다. 하나 이제 와서 뒤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금릉의 우화대(雨花臺)다. 우리는 이 달 그믐까지 영호해상을 사로잡아 우화대로 오라는 밀명을 받았다."
"우화대라...."
엽단풍은 속으로 뇌까리며 잠시 침음하다가 이내 흑상문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과연 생긴 것대로 앞뒤가 탁 트인 대장부구려. 나도 약속을 지킬 테니 당신은 그만 가보시오."
흑상문신은 막상 그가 이토록 쉽게 자신을 놓아주자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정말 가도 되겠느냐?"
"그야 이를 말이오? 당신은 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이 많은 것 같지도 않은데 당신을 붙잡고 있어 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소? 그러니 어서 갈 길로 가 보시오."
흑상문신은 한동안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바닥에 있는 백상문신의 시체를 들쳐 메더니 휭하니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곧 그의 신형은 저 멀리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영호해상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아무래도 불안한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저 자를 저렇게 마음대로 가도록 내버려두어도 괜찮아요?"
엽단풍은 그녀를 내려 보며 피식 웃었다.
"네가 설마 그런 노인네를 좋아할 줄은 몰랐구나. 그렇게 그 자가 마음에 있다면 쫓아가서 붙잡지 그러느냐?"
영호해상의 입 꼬리가 삐쭉하더니 샐쭉한 표정이 떠올랐다.
"당신은 정말 사람 속을 벅벅 긁는 소리를 잘하는군요. 항상 그렇게 남을 약올리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나요?"
"취미랄 것까지는 없고 그냥 습관이지. 그건 그렇고 너는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들에게 쫓기는 것이냐? 보아하니 네게 청혼을 하려고 쫓아온 것 같지는 않던데."
영호해상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뾰로통한 표정이었으나 그의 물음을 듣자 눈가에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녀는 갑자기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당신이 틀렸어요."
엽단풍은 흠칫 놀랐다.
"아니 그럼 그 노인네들이 너와 결혼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녔단 말이냐? 원 노인네들도 주책이군. 그 나이에 손녀뻘 되는 여자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다니."
영호해상은 소리를 빽 질렀다.
"누가 그들이 나와 결혼하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엽단풍은 커다란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벼 팠다.
"거참 목청 하나는 끝내 주는군. 방금 네 입으로 그들이 청혼하기 위해서 쫓아왔다고 말했지 않았느냐?"
"그들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청혼하러 온 거란 말이에요."
엽단풍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럼 그들을 시켜 너에게 청혼한 자는 누구냐?"
영호해상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유동립(兪冬笠)이란 사람이에요."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동립? 그는 어떤 사람이냐?"
"나도 잘 몰라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결혼하려고 했단 말이냐?"
영호해상은 고운 아미를 치켜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누가 그 사람하고 결혼한다고 했어요? 그냥 그 자가 일방적으로 사람을 보내 청혼한 거란 말이에요!"
"내 귀는 그런 대로 쓸 만하니 너는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결혼하기 싫으면 거절하면 될 텐데 왜 이 먼 곳까지 쫓겨왔단 말이냐?"
영호해상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영호해상은 발랄한 생기가 감돌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원래 안 된다고 딱 부러지게 말하려고 했지만 할아버지께서 찾아온 흑백상문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선뜻 거절하지 못하셨어요."
"그럼 네 할아버지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시키려고 했단 말이냐?"
"할아버지는 거절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승낙도 하지 않으셨어요. 할아버지는 그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요."
"그럼 네 할아버지의 위세로도 그들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했단 말이냐?"
영호해상은 풀이 잔뜩 죽은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생전 누구를 두려워한 적이 없으셨는데.... 웬 일인지 그들만은 몹시 꺼려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엽단풍을 응시했다.
"그런데 당신은 내 할아버지를 알아요?"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네 할아버지는 동해요인도(東海妖人島)의 도주(島主)인 영호덕조(令狐德操)가 아니냐?"
영호해상의 눈에 모처럼 생기가 감돌았다.
"그래요. 당신은 참 견문이 해박하군요."
엽단풍은 껄껄 웃었다.
"하하....무림인 중에서 어찌 동해노사(東海老邪)
영호덕조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느냐?"
영호해상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유명한 분이신가요?"
"너는 동해요인도에서만 살아서 잘 모르는 모양이다만 네 할아버지는 새외삼대문파(塞外三大門派)중 하나의 주인이니 당연히 당금무림에서 위명이 자자한 인물이지."
영호해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도(本島)가 새외삼대문파 중의 하나라면 다른 두 문파는 무엇이지요?"
"그건 서천의 벽요궁과 북산(北山) 신녀문(神女門)이다."
"그렇군요."
영호해상은 요인도가 그렇게 쟁쟁한 이름을 날리고 있다는데 고무된 듯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하나 사실 요인도의 명성은 그녀의 생각보다 한층 더 대단한 것이었다.
요인도와 벽요궁, 신녀문의 새외삼대문파는 비록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천하의 어느 누구도 무시 못할 막강한 세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요인도는 기이한 사술(邪術)과 암기(暗器), 용독(用毒)의 고수들이 즐비해 요인도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림인들의 안색이 변할 정도로 두려운 존재들이었다.
더구나 요인도주인 동해노사 영호덕조는 그야말로 사파(邪派)의 일대종사(一大宗師)라 할 수 있는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 동해노사가 내키지 않는 청혼조차 거절하지 못하다니...
영호해상은 아직도 할아버지가 청혼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를 알지 못해 언짢은 마음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할아버지 몰래 요인도를 빠져나와 중원으로 건너온 것도 할아버지가 청혼을 선뜻 거절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오는 도중 그녀는 요인도를 찾아왔던 흑백상문신이 자신을 뒤쫓고 있는 것을 알고 알고 있는 온갖 사술과 기지를 동원하여 간신히 그들의 추적을 피해 여기까지 도망쳐 왔던 것이다.
엽단풍은 그녀의 할아버지가 그 청혼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영호덕조의 실력으로 흑백상문신이 무서워서 청혼을 거절하지 못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단지 영호덕조는 흑백상문신의 뒤에 있는 배경이 두려웠던 것이다.
흑백상문신의 뒤에는 하나의 거대무비한 세력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혈악이었다.
혈악!
그 정체가 대체 무엇이기에 강호무림에서 누구도 두려워 마지않는 동해노사 영호덕조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사랑하는 손녀의 혼사(婚事)마저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것일까?
2
'이거 기이하군. 벽요궁에서도 공손단경이 냉우빙의 억지 청혼을 받았는데 요인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다니....과연 이 자들이 슬슬 무림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일까?'
엽단풍은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영호해상을 쳐다보았다.
영호해상은 두 눈을 초랑초랑하게 빛낸 채 엽단풍을 빤히 주시하고 있다가 그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자 얼굴이 빨개지며 급히 고개를 돌렸다.
엽단풍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무얼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느냐? 내 얼굴이 그렇게 잘생겼느냐?"
영호해상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이 잘생겼다고 한다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거예요."
확실히 엽단풍은 자신이 생각해도 그렇게 미남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느냐?"
영호해상은 잠시 눈을 뗑구르르 굴리다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엽단풍은 빙그레 웃을 뿐 더 이상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전혀 다른 것을 물어 보았다.
"그런데 너는 정말 섬으로 돌아가지 않을 셈이냐?"
영호해상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그것 참 잘 생각했다. 사실 너같이 예쁘고 생기발랄한 아가씨가 그렇게 좁고 답답한 섬에서만 지낸다는 것은 너무도 아까운 일이지."
엽단풍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를 잔뜩 치켜세워 주었다.
그녀는 아직도 새침한 표정이었으나 눈가에는 벌써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엽단풍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긴 네 할아버지야 조금 어려운 지경에 빠지겠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영호해상은 귀가 번쩍 뜨여 날카롭게 그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엽단풍은 일부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말이냐?"
영호해상은 다시 표독한 성질이 발동했는지 눈썹을 있는 대로 치켜 뜨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방금 할아버지가 어려운 지경에 빠지겠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아! 그거. 그냥 나 혼자 중얼거린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라."
엽단풍이 능청을 떨자 영호해상은 더욱 성질이 나서 소리쳤다.
"빨리 말하지 못하겠어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엽단풍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으쓱거렸다.
"네가 그렇게 할아버지를 끔찍이 생각하는 줄 몰랐구나.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 지금쯤 네 할아버지가 그 자들에게 호된 꼴을 당하고 있지 않을까 해서 그냥 해본 소리다."
영호해상의 안색이 싹 변했다.
"할...할아버지가 호된 꼴을 당하다니요?"
"너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 아니냐? 그 자들이 너에게 청혼을 했는데 당사자인 네가 도망쳐 버렸으니 틀림없이 네 할아버지를 다그칠게 아니냐?"
"......"
"네 할아버지는 그들이 두려워 청혼을 거절하지도 못했는데 너마저 없어져 버렸으니 무슨 수로 그들의 성화를 감당하겠느냐?"
영호해상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저...정말 그럴까요?"
엽단풍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암. 그거야 삼척 동자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 모르긴 해도 그들이 화가 나서 네 할아버지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그럼 어쩌지요?"
영호해상은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한 게 금세라도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엽단풍은 더 있다가는 그녀가 다시 울음보를 터뜨릴게 두려웠던지 급히 그녀를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무리 그래도 그들은 청혼을 하러 온 자들인데 설마 할아버지를 심하게 다루기야 하겠느냐? 기껏해야 팔다리나 하나씩 자르고 말겠지."
그 말에 영호해상이 까무러치게 놀랐다.
"파....팔 다리를 자르다니요?"
엽단풍은 자신이 말을 잘못했음을 깨닫고 재빨리 다시 말했다.
"내 말은 네 할아버지가 죽지는 않을 거란 얘기다. 팔다리가 하나 정도 없는 병신이 된다고 해도 죽은 시체보다야 낫지 않겠느냐?"
영호해상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벼...병신..? 시...시체?"
엽단풍은 다시 자기가 실언(失言)을 했음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고쳤다.
"병신이 아니라...그렇지! 반신불수다. 반신불수! 어차피 네 할아버지 연배 정도 되면 죽는 건 시간문제인데 반신불수로 그친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영호해상은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떤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엽단풍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제법 자상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리 네 할아버지가 반신불수가 되어 거동을 못해도 너는 여자니까 시집을 가 버리면 그 수발을 들지 않아도 된다. 만약 네가 며느리라면 그건 정말 불행한 일이지만 손녀이니 이것도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느냐?"
영호해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엽단풍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무슨 여자가 갈수록 목청이 커지냐? 보고도 모르느냐? 나는 지금 너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지 않느냐?"
영호해상은 있는 대로 악을 썼다.
"그게 지금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당신은 정말 내가 심장이 터져 죽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엽단풍은 억울하다는 듯 양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것 참. 나는 좋은 뜻에서 말한 건데...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할아버지가 어쩌냐고 물어봤을 때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 건데."
영호해상은 정말 이 자식이 때려 주고 싶도록 얄미웠다. 하지만 또한 할아버지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화도 나고 속상해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자 그제서야 엽단풍은 진짜로 다급해졌다.
'이거 내가 장난이 너무 지나쳤나? 아까처럼 또 울고불고하면 어쩌지?'
하나 걱정과는 달리 그녀는 잠깐 눈물을 흘렸을 뿐 곧 눈물을 그치고 힘없는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엽단풍은 급히 그녀를 불렀다.
"어디를 가는 거냐?"
그녀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할아버지에게 돌아가겠어요."
엽단풍은 그녀의 심정을 환히 꿰뚫어 본 듯 웃었다.
"하지만 네가 돌아간다고 무슨 뾰쪽한 수가 생기겠느냐? 잘못하면 그 유동립인가 하는 녀석과 정말로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 말에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쩌지....어쩌면 좋지....?"
돌아가자니 내키지도 않는 결혼을 하게 생겼고 그렇다고 돌아가지 않자니 엽단풍의 말마따나 할아버지가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계속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채 어쩌지 어쩌지 하고 중얼거리고 있을 때 밉살스런 엽단풍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그런데 나는 참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그녀는 이 자식이 또 무슨 소리를 하나하고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엽단풍은 고개를 갸우뚱거린 채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는 바로 옆에 시냇물이 흘러가는데도 목이 마르다고 투덜거리고 있구나. 대체 고민할게 뭐가 있느냐?"
그 말에 영호해상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엽단풍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 말뜻을 잘 생각해 보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영호해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당신 말은 당신이 그 자들을 물리쳐 주겠다는 것인가요?"
엽단풍은 껄껄 웃었다.
"이제야 그 생각이 나다니 너답지 않구나."
영호해상은 구세주를 만난 듯 안색이 활짝 펴졌다.
"정말 당신이 그 자들을 물리칠 수 있단 말이에요?"
엽단풍은 짐짓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부탁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구나."
영호해상은 표정이 풀어지며 입가에 다시 앙증맞은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부탁하겠어요. 그러니 빨리 대답해 주세요. 정말 그들을 물리칠 자신이 있어요?"
엽단풍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음...그 자들은 흉신악살보다 더욱 무서운 사람들인데...내가 아무 관계도 없는 여자를 위해 그런 무시무시한 고수들을 건드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녀는 급히 말했다.
"당신은 그렇게 비겁한 소리를 하면 안돼요. 옳지 못한 일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면 어찌 당당한 사내대장부라고 할 수가 있겠어요?"
엽단풍은 시큰둥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내 대장부도 좋지만 나는 아직 장가도 못간 상태에서 죽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그런다고 나에게 무슨 이득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영호해상의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다.
"당신은 이런 일에도 이득을 따진단 말이에요?"
"나도 그러고 싶지 않다만 이게 내 천성(天性)인걸 어쩌겠느냐? 나는 예전부터 술이 없으면 제사상에도 가지 않는 성미다."
영호해상은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말했다.
"그럼 내가 당신에게 술을 실컷 사주겠어요."
엽단풍은 정색을 했다.
"어허! 사내 대장부가 어찌 술 몇 잔에 이런 중대한 일을 결정하겠느냐?"
영호해상은 마음이 급해져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면 당신은 원하는 것을 말하세요. 내가 무엇이든 들어드릴게요."
그 말에 엽단풍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정말이냐?"
영호해상은 그의 얼굴 표정이 이상함을 깨닫고 몸을 움찔하다가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원래 그런 말은 여자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과연 엽단풍은 입가에 음산한 미소를 떠올리며 한 발 한 발 그녀에게 다가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준다고 했지?"
"다...당신은...."
영호해상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엽단풍은 입가에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너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느냐?"
그녀의 얼굴에 두려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다....당신은 설마...."
"흐흐....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엽단풍은 그녀의 코앞으로 다가오며 그녀의 전신을 쓰윽 훑어보았다.
그녀는 와들와들 떨며 그 다음 일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내가 말 한 마디를 잘못해서 까딱하면 천추(千秋)의 한(恨)을 남기게 되었구나...'
그녀는 후회막급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있어도 엽단풍의 손길이 닿는 느낌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상해서 한쪽 눈을 살짝 떠보았다.
엽단풍은 저만큼 떨어진 채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는 왜 그렇게 떨고 있는 거냐?"
영호해상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엽단풍은 빙긋 웃었다.
"나는 네게 술 한 잔 얻어먹기로 하고 네 할아버지를 도와주러 가기로 했는데 너는 빨리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왜 그곳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거냐?"
영호해상은 그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든 듯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엽단풍은 히죽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술이 있어야 제사상에도 가고 힘도 나는 사람이다. 네가 술 한 잔만 사준다면 그깟 놈들을 때려눕히는 일쯤이야 못하겠느냐?"
영호해상은 그제서야 그가 조금 전 자신을 놀렸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삐쭉거렸다.
하나 다음 순간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그에게로 뛰어왔다.
"호호....그렇군요. 과연 당신은 내 짐작대로 정신이 올바로 박힌 사람이었어요."
엽단풍은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너는 이제야 그걸 알았느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정신을 가진 비범한 사람이다."
영호해상은 혀를 낼름거렸다.
"피.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너는 아직도 모르는구나. 원래 나는 얼굴 가죽이 두꺼워 그보다 더한 말도 잘한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자기 입으로 얼굴 가죽이 두껍다고 하다니...당신은 정말 괴팍한 사람이에요."
"이런 제길. 내가 괴팍하다는 것까지 알아내다니...이러다가는 내 비밀이 송두리째 드러나겠군."
엽단풍은 중얼중얼거리더니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자."
영호해상은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그에게 손을 잡힌 채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가 멍하니 있는 사이 그는 그녀의 몸을 반 강제로 끌다시피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어딜 가는 거예요?"
엽단풍은 그녀를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어디긴. 일을 해결하러 가야지."
그녀의 눈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그러면 요인도로 가자는 말이에요?"
"하하....일에는 선후(先後)가 있는 법이다. 요인도로 가기 전에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소리쳤다.
"알았어요. 그 목불인지 금불(金佛)인지 하는 자를 만나러 가는군요."
엽단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자를 만나는 것은 그리 급하지 않다."
그녀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럼 대체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거예요?"
"천하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그가 대체 누군가요?"
엽단풍은 한동안 묵묵히 앞을 바라본 채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답지 않게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고월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