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2년 조령진鳥嶺鎭 설치
조령에 설진한 기록은 주흘관에 게첨 된 조령편람(烏嶺便覧 정묘(丁卯 1927) 9月에 정규원(鄭圭瑗) 문경군수가 지은 현판)에 의하면 1572년(선조 5)에 설진하여 570 여명을 배치(設鎮 - 李朝宣祖五年壬申(元龜三年) 別將, 將校, 鎮吏, 知印, 鎮奴, 守堞軍官 等 五百七十餘 名配置) 하였다고 하나 선조실록이며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설진내용이 없을 뿐 아니라 조령 편람을 게첨한 것이 일제 침략기이고 원귀 3년(元龜三年)이라는 일본의 연호가 있는 점으로 보아 선조 5년부터 설진한 천험의 요세를 임란에 방어하지 못했음을 강조하기 위한 기록으로 보인다.
북벌론(北伐論)이 대두하자 국가 관방(関防)에 관심을 둔 1673년(현종 14) 2월 수어사(守察使) 이완(李浣)이 조령에 영진(営鎮)을 두고 산성을 쌓아 남한산성 소속 충주군 3900여명으로 지키게 하자고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은 내용이 현종실록 21권에 전한다.
1751년(영조 27)에 별장(別將)을 두어 문경 함창 2군의 군사를 전속시켰다는 기록이 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렸고 상주진(尚州鎮)에 속한 것을 1752년(壬申:영조 28)에 설진 하여 현감이 수성장을 겸하고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2인 천종(千摠) 1인 파총 (把摠) 2인 지곡관(知穀官) 2인 초관(哨官) 7인 군관(軍官) 50인 기패관(祺牌官) 27인 아전(衙前) 32인 지인(知印) 14인 사령(使令) 15인 군뢰軍牢 30명 관노(官奴) 19구(口) 관비(官婢) 18구(口)를 둔 기록(知舊録 邑誌 官職條)이 있다.
또한 문경 현지에도 영조 임신년에 조령진 설치 등의 기록으로 보아 1752년에 설진하여 음관 6품(陰官六品)인 문경현감이 수성장을 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령별장은 무관 4품(武官四品) 이고 군관(軍官) 2인 군기감관(軍器監官) 1인 수첩군관(守堞軍官) 300인 진리(鎮吏) 4인 지인(知印) 4인 사령(使令) 7명 노(奴) 8구(ㅁ) 를 두었다.
관방유지(關防維持)를 위해 문경현지 관직 조령별장조에 별장(別將)이 정조조에 잡인의 통행 을 단속 통제하나 그 후 조령진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별장은 1886년(고종 23)까지도 있었으나 1871년에 이필제가 조령에서 난을 일으킬 정도로 방어가 허술하였다. <참고 ; 지구록 조령편람 현종실록 문경현지 조령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