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하루 종일 울던 우이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았다. 객잔 식구들은 모두 그런 우이를 걱정스럽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우이의 울음에 대해 비웃을 만도 했고 의문을 가질 만도 했건만 아무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떤 일에 부정적인 비난이나 조롱을 가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 일에 있어서 제삼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다. 객잔 식구들은 모두 그날의 당사자들이었지 제삼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 며칠간이었지만 그동안 우이에 대해 쌓인 정(情)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느꼈다. 한평생의 정도 첫날의 정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하루의 정이 평생의 정보다 더 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날의 눈물은 우이를 더욱 친밀한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눈물은 언제나 그들의 위로해 주는 친구였지 비웃음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날 우이가 왜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지 이유는 몰랐지만 그 눈물 속에 담긴 슬픔은 모두에게 전해졌다. 그가 빨리 충격에서 벗어나 깨어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날 영춘은 책임감 강한 우이가 공연히 그들에게 대들어 사고가 일어날까 걱정했었다. 그렇게 된다면 봉변을 당하는 쪽은 우이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이는 울고 말았다. 영춘은 보기보다 마음이 여린 청년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이 아닌가 싶어 내심 걱정이 되었다. 우이를 고용한 것은 주사꾼들이나 상대하라는 것이었지 혈랑조를 상대하라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모두의 걱정은 사흘 만에 우이에게 전해졌나 보다. 사흘째 되던 날 저녁, 잠에서 깨어난 우이가 주방에 머리를 들이밀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한마디. "배고파." 그런 우이을 보며 아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요리를 시작했다. 왜 눈물이 나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연은 기쁘기만 했다. 다른 객잔 식구들 역시 그런 우이를 보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달호는 자신이 직접 요리해 주겠다고 부산을 떨었다. 황제가 먹는 음식을 해주겠다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아, 재료만 있었어도'라는 말로써 자신의 엉터리 호언장담을 마무리 지었다. 아평은 그 순진한 눈을 반짝이며 어린아이답지 못한 재미없는 수다를 떨었고 영춘은 장사 하자며 고함을 질렀지만 표정은 밝았다. 이 노인은 말없이 우이의 어깨를 두드려 줬고 다만 그날 오줌을 싼 복대만이 다소 침울한 표정이었다. 우이는 조금 말라 보이는 것 외에는 별로 달라진 점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정작 변한 건 그의 마음이었다. 지난 사흘간 그는 지독한 심마(心魔)와 싸워야 했다. 처음에는 죽은 아버지가 나타났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보표가 되거라." "싫어요! 전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남 뒤치닥꺼리만 하면서 살고 싶진 않다구요!" 자신이 죽였던 살수들도 나타났다. "왜 우릴 죽였지?" "그건 내 일이었어." "결국 이렇게 도망쳐 버릴 일?" "그건……." "살인마는 바로 너야!" 이번에는 소향과 철무가 나타났다. "당신은 우릴 버렸어." "난 너희를 버린 게 아냐. 다만……." "아마 당신 때문에 우린 모두 죽게 될 거야." "……." 도끼에 아연의 머리가 갈라졌다. 갈라진 머리통이 우이를 보며 말했다. "왜 날 지켜주지 않았나요?" "난, 난 무공을 사용하고 싶지 않아." "왜죠?"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까." "처음부터 당신은 잘못된 길로 들어섰군요." 반쪽 난 아연이 슬프게 말하자 그는 그곳을 벗어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를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두로부터 도망친 그는 세상의 끝에서 사부를 만났다. 사부는 처음 만난 그때처럼 따뜻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부님?" "힘이 드는 게로구나." "전, 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이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모르는 것을 두려워 말아라." 사부가 다정스럽게 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느새 우이는 맨발이 되었다. 사부도 맨발이 되었다. 둘이 길을 걸었다. 우이가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것 같기도 했고 전혀 새로운 길인 것 같기도 했다. "어떠하냐?" "흙이 따뜻합니다." "좋으냐?" "네." "참된 삶이 어디에 있냐 했더냐? 참(眞)이란 도(道)와 같아 참을 참이라 하면 이미 그것은 참이 아니게 되거늘 누가 참된 삶을 알 수 있겠느냐? 다만 삶이란 것이 네 실타래 같은 머리통 속에는 숨어 있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네 두 발 밑에서 그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부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이는 깨어날 수 있었다. 영원히 깨지 못할 것만 같았던 심연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바보." 아연의 눈물이 잔뜩 들어간 요리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우이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 '왜 그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일까?' 아연은 지난 사흘 내내 그 생각만 했다. '혹시 그를 사랑하게 된 걸까? 단 며칠 본 것에 불과한데……. 그럼 단지 동정심? 아니면 그들의 불의한 폭력에 대한 분노였을까?' 아연은 그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전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모두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한 가지 사실은 그때 그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바람이 그녀에게 죽음과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고마웠어." '그는 무엇을 고마워하는 것일까? 목숨을 살려준 것을? 울고 있던 자신을 안아준 것을? 아니면 지금 먹은 음식을?' 생각은 복잡했지만 아연은 그 한마디에 만족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친 그는 밀린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그의 행동은 태연했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이 노인이 말했다. "꿈속에서 나무꾼이라도 만나고 온 겐가?" 그 말에 우이는 자신이 패놓은 장작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예전과는 달랐다. 이전에 장작을 팼을 때는 매끄럽고 완벽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칠고 투박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훨씬 자연스러웠다. 반 토막이 난 장작이었지만 원래 이렇게 생긴 나뭇조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장작은 자연스럽게 잘라져 있었던 것이다. 우이는 분명 자신의 몸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이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우이는 좀 더 자유롭고 성숙한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흑오파(黑烏派)가 영춘객잔을 찾은 것은 혈랑조(血狼組)가 다녀간 지 육 일 후, 그러니까 우이가 깨어난 날로부터 다시 사흘이 지난 날이었다. 그사이 우이는 영춘으로부터 혈랑조와 흑오파 간의 세력 다툼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태호의 하촌(下村) 거리에 기생하는 폭력 조직(暴力組織)들이었다. 작은 주점이나 행상들에게 보호비(保護費)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는 것부터 각종 불법적인 이권(利權)에 개입하거나 청부 폭력(請負暴力)까지 일삼는 불한당(不汗黨)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물론 그들도 원칙은 있었다. 구파일방이나 사대세가가 관련된 곳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간혹 눈앞의 욕심에 금기(禁忌)를 깨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었다. 크게 한탕 하고 멀리 달아나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겠지만 강호는 구파일방의 것이었다. 평소에는 그토록 서로 의견이 다른 그들이었지만 자신들의 영역이나 권위를 침범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날한시에 나온 쌍둥이마냥 뜻이 잘 맞았다. 그들은 악을 응징하고 협을 세운다는 대의명분 아래 손발이 척척 맞았으며 결국 구파일방이나 사대세가를 건드린 간 큰 한탕주의자들은 청해성(靑海省)의 옥문관(玉門關)을 채 넘어보기도 전에 손발이 잘려 폐인이 되거나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문제는 강호가 구파일방의 것이라면 적어도 영춘객잔은 자신들의 것이라는 생각을 혈랑조와 흑오파가 동시에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래 태호의 뒷골목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혈랑조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흑오파가 야금야금 혈랑조의 세력을 갉아먹기 시작해 결국 그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하촌의 뒷골목 여기저기에서는 연일 칼부림이 일어났다. 혈랑조의 세력은 흑오파의 세 배가 넘었다. 모두들 혈랑조의 압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굴러들어 온 돌은 생각 밖으로 단단했다. 비록 박힌 돌을 뽑아내지는 못했지만 그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흑오파를 이끄는 흑오(黑烏)의 뛰어난 무공에 혈랑조는 연일 깨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하촌 뒷골목의 이권을 반 이상 내주고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혈랑조와 새로운 신생 조직인 흑오파가 영춘객잔을 사이에 두고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흑오파가 이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흑오의 뛰어난 실력 때문이었다. 흑오는 남경(南京)의 한 퇴기(退妓)의 자식이었다.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것이라곤 주먹질에 오입질뿐이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적혈자(赤血子) 한송(罕松)과 의형제를 맺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전환기를 맞게 된다. 한송은 공동파의 적전제자(嫡傳弟子)였는데 여염집 처녀를 강간(强姦)하고 도망친 자였다. 단지 조금 어긋난 애정의 결과였다고 한송은 생각했지만 그 결과 그의 인생은 크게 어긋났다. 공동파에서 그를 파문(破門)하고 무공을 폐지한 이후 일벌백계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줄행랑을 친 이후였다. 그때부터 그를 잡아들이려는 공동파 제자들과 일단 살고 보자는 한송 사이의 끈질긴 추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흑오가 도망 중인 그를 숨겨주면서 그들은 의형제를 맺으며 의기투합하게 된다. 한송은 그에게 공동파의 절기인 비봉수(飛鳳手)를 전수해 주었다. 비봉수는 공동파의 독문수공(獨門手功)으로 함부로 유출되어서는 안 될 비기(秘技)였지만 이미 도망 중에 몇 명의 동문 사형제를 살해한 그는 이미 절벽 끝까지 몰린 셈이었다. 후에 한송은 결국 공동파 문도의 손에 잡혀 죽게 되고 흑오는 혹여 불똥이라도 튈까 야반도주하다시피 태호로 도망쳐 왔다. 한 일 년을 쥐 죽은 듯이 비봉수만을 수련하며 지내던 흑오는 한송의 일이 웬만큼 잊혀지자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인근의 불한당들을 규합한 후 자신의 이름을 따 흑오파라는 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비봉수는 천하에 둘도 없는 절예였고 그 오의(奧義)를 채 반의 반도 깨닫지 못한 흑오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런 조직들 간의 싸움이란 게 원래 머릿수 싸움이거나 아니면 기세 싸움이었다. 부족한 머릿수를 흑오는 어렸을 때부터 키워온 눈치와 깡다구, 그리고 어설픈 비봉수로 버텨 나갔던 것이다. 오늘 영춘객잔을 찾아온 자는 바로 그 흑오의 오른팔이라고 알려져 있는 오대발(吳大髮)이었다. 그를 처음 본 사람은 아무리 담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비명부터 지르며 물러섰다. 그가 비명을 질러야 할 만큼 잘생긴 옥기린(玉麒麟)이었다면 세상은 실로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인간이 이런 짓을'이라는 탄식과 보이지 않는 모든 손가락질을 한몸에 받고 사는 그를 그나마 잘생긴 얼굴이 보완해 주는 셈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은 불행히도 그 반대의 경우였다. 그의 얼굴은 야차(夜叉)를 아무렇게나 주물러 놓은 듯한 반죽에 다시 작대기로 아무렇게나 구멍을 뚫어 만든 얼굴이었다. 게다가 하늘로 승천할 것 같은 그의 찢어진 두 눈은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야비하고 잔인해 보였다. 더러운 인상만으로 고수를 가린다면 가히 천하십대고수 안에 들어갈 만한 얼굴이었다. 그런 대발이 사내 몇을 달고 영춘객잔으로 들어섰으니 굳이 그들의 흉험한 기세가 아니더라도 식사를 하던 몇몇 손님들은 알아서 자리를 피했다. 덕분에 북적이던 객잔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마침 영춘은 아연과 복대를 데리고 물건을 사러 나간 사이였고 우이와 아평만이 객잔을 지키고 있던 때였다. 그 모습을 보고 우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대발은 자신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는 사람을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이전에 그런 표정을 지었던 자들은 다들 병신이 되었거나 어디론가 줄행랑을 친 이후였으니까. "지금 날 보고 인상을 쓴 것이냐?" "그렇소." "죽고 싶으면 산이나 강으로 갈 것이지 왜 내게 죽으려느냐?" "당신의 더러운 인상 때문에 손님들이 모두 나가 버렸으니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살고 싶겠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평은 기겁했다. 며칠 전에 혈랑조와 그 난리를 치르고 지금 또 우이가 사고를 치고 있는 것이다. 아평이 무서움을 참고 쪼르르 달려가 대발에게 무엇인가를 얘기하려 했지만 대발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아평을 밀어냈다. 그리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넌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 "당신들은 그 흑오파의 사람 아니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넌 도대체 누구냐?" 이때 대발의 뒤에 있던 사내가 대발에게 무엇인가 귓속말을 건넸다. 말을 듣고 있던 대발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혹시 며칠 전에 주방에서 일하는 여자 애의 등 뒤에 숨어 울음을 터뜨렸다는 녀석이 너냐?" 대발의 말에 우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것 같소." "이런 미친놈,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 "당신의 두목인 흑오란 사람을 만나고 싶소." "크하하!" 오랜만에 보는 미친놈이어서 그런지 대발은 마음껏 웃었다. 그러나 대발은 끝까지 웃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우이가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던 것이다. 두 눈 뻔히 뜨고 손목을 잡힌 대발은 갑자기 온몸의 힘이 쑥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잡아끄는 대로 몸이 이끌리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 봐서는 절친한 두 사람이 어디론가 손을 잡고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녀석의 머리통을 박살 내어야 마땅하지만 무슨 조화인지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대발은 덜컥 겁이 났다. 이런 경우를 한 번도 당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우이와 대발이 객잔 밖으로 나오자 대발을 따라왔던 사내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따라 나왔다. 그러나 설마 대발이 우이에게 제압당했다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 하오?" 우이의 눈을 마주 본 대발은 그제야 상대가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림고수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 대발은 그러잖아도 심난한 인상을 더욱 구기며 흑오에게로 돌아갔다. 우이의 손을 다정히 잡고서 말이다. 요즘 태호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흑오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대발이 흑오파의 임시 거처인 춘화루의 별채로 돌아오면서부터였다. 흑오는 영춘객잔이 혈랑조에게 박살 났다는 소리에 적당히 달래줄 요량으로 대발을 보냈다. 보호비는 이쪽에서 받았는데 그걸 빌미로 혈랑조 놈들이 난장(亂場)을 피웠던 것이다. 돌아올 시간이 아니었는데 대발이 이상한 놈을 하나 달고 돌아왔다. 그것도 다정히 손까지 잡고 말이다. 그때까지도 흑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새로 들어온 놈인가 했다. 생김새가 곱상한 것이 혹시 대발이 드디어 남색(男色)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긴 저 더러운 인상에 어느 여자가 붙어 있을까?' 흑오는 그런 추측을 했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지만 제법 잘생겼는데?' 흑오가 즐거운 상상에 혼자 킬킬거리고 있는데 대발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가리켰다. 그리고 같이 온 사내놈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건넸다. 흑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저 미친놈이 지금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거야?' 흑오의 악몽(惡夢)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사내가 성큼성큼 흑오에게로 걸어왔다. "당신이 흑오파의 두목이오?" 어이가 없어 황당히 대발을 쳐다보았지만 놈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뭐지?' 흑오는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한줄기 한기(寒氣)! '혹시 이놈에게 당한 건가?' 흑오는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대발은 그 더러운 인상만큼이나 제법 쓸 만한 완력(腕力)을 지니고 있었다. 대발을 제압할 정도면 한가닥 하는 놈일 것이다. 게다가 단신으로 이곳까지 찾아올 정도라면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을 터. 그 짧은 순간에 흑오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그렇… 소. 내가 바로 흑오요." 원래대로였다면 흑오의 말은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뭐라고 했어?'였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할 정도로 잘 참고 있었다. 일단 상대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흑오의 타고난 눈치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거리에 당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오?" "……?" 흑오는 두 눈만 껌벅거릴 수밖에 없었다. 순간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흑오파를 해산하고 떠나시오." 흑오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인데도 사내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때서야 흑오는 사태를 파악했다. 흑오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 옆에서 우물쭈물하던 대발을 흑오가 무섭게 노려보았다. 눈앞의 사내보다 대발에게 더욱 화가 치밀었다. '적을 데리고 여기까지 졸랑졸랑 왔단 말이지? 손까지 다정하게 잡고서?'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흑오의 발길질이 대발의 복부를 강타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흑오의 발길질은 대발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혹여 불똥이 튈세라 수하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흑오가 대발을 두들긴 것은 멍청한 대발에게 화가 나기도 했지만 사내의 기를 꺾어놓기 위함도 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적당히 몸도 풀 수 있었고 이래저래 일석삼조(一石三鳥)의 효과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자신만의 생각이었다. 사내는 그런 그의 모습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혹시 혈랑조에서 오셨소?" 일단 침착해야 했다. 흑오는 입 안의 침이 바싹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와중에도 한편으로는 눈짓을 보내 애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 이곳에 있는 수하들만 해도 족히 서른 명은 될 것이다. "흑오파를 해산하고 떠나라고 했소." "건방진 놈." 하나둘씩 모여든 부하들은 서른이 넘었고 흑오는 더 이상 겁을 낼 필요가 없어졌다. 상대의 여유가 부담스러웠지만 어차피 부하들 앞이었다. 깨질 때 깨지더라도 더 이상 기세가 눌리면 앞으로 누가 자신의 명령을 따르겠는가? 어차피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 누가 불쑥 찾아온 정체 모를 사내의 몇 마디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면서 자신의 소중한 기업(基業)을 무너뜨리겠는가? 부하들이 사내를 포위한 채 도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병장기에서 반사되는 빛이 흉흉한 눈빛과 함께 어울려 살기를 뿜어냈다. 보통의 담력으로는 그곳에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형세가 되고 보니 흑오는 마음이 한결 진정되었다. 별거 아닌 놈에게 괜히 기가 죽은 게 아니었나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여전히 사내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지만 흑오는 한쪽 손을 들어 부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신호는 공격 신호가 아니라 악몽의 시작을 알리는 손짓이 되었다. 서른 명이나 되는 부하들이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그가 무슨 수를 썼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손짓 한 번에 팔 척 장정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서른 명이나 되는 부하들이 일제히 숨겨둔 지병(持病)이라도 꺼내놓듯이 차례대로 쓰러졌다. 죽진 않았지만 움직이지도 못했다. 너무 놀라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흑오는 온 힘을 다해 두 손을 휘둘렀다. 흑오의 손이 매의 발톱 모양이 되어 사내의 가슴을 후려쳤다. 비봉수 중 그가 가장 자신있게 구사할 수 있는 응조수(鷹爪手)였다. 그러나 사내는 마치 첫날밤 신부의 손을 맞잡듯 부드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흑오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강맹한 매의 발톱이 한순간에 가냘픈 아녀자의 섬섬옥수(纖纖玉手)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믿고 있었던 비봉수가 단 한 수에 꺾인 것이다. "비봉수? 공동파 제자이시오?" 사내의 말에 흑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내가 한눈에 자신의 절기를 알아본 것이다. 흑오파를 해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정 안 되면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새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공동파의 절기를 한송으로부터 배웠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런 흑오의 불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가 말했다. "난 당신들 같은 부류를 잘 압니다.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하지만 한 번의 기회를 드리겠소. 흑오파를 해산하고 사흘 안으로 떠나시오." 돌아서려던 사내가 한마디 덧붙였다. "사실 당신들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소. 미안한 얘기지만 떠날 것을 약속하겠소?" 흑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자 쓰러졌던 수하들이 일어났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자신들이 왜 쓰러졌는지조차 모르는 표정이었다. 흑오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사내는 강호의 일류고수임에 틀림없다. 잘 나가던 그가 드디어 임자를 만난 것이다. 분명 혈랑조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고수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도 없고 자신들의 일을 참견할 까닭도 없었다. '혈랑조 놈들은 어디서 저런 고수를 구했을까?' 최악의 순간에는 부하들을 데리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갈 수도 있었다. 그중에 반 정도는 흩어지겠지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부하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역 조직들의 텃세를 뚫고 자리를 잡기가 얼마나 힘든지 익히 아는 흑오였다. 그러나 정작 흑오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혈랑조의 해산이 아니라 자신이 비봉수를 익히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두고두고 화근이 될 만한 문제였다. 그때, 흑오의 머리 속을 무엇인가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궁하면 통한다는 원칙으로 살아온 지난 세월이었다. 그가 순간적으로 생각해 낸 사람은 바로 신도방의 추월이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꼬박꼬박 돈을 바친 게 아니던가? 이제 그 대가를 돌려받을 때가 된 것이다. '그들이 이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신도방은 백 명도 넘는 무림고수들이 모여 있는 태호 제일의 방파가 아니던가? 생각을 굳힌 흑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연은 무작정 달렸다. 그녀의 목적지는 바로 흑오가 살고 있는 춘화루(春花樓)였다. 언젠가 얼핏 그들이 그곳을 본거지로 삼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영춘과 함께 객잔으로 돌아왔을 때 아평은 두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우이가 대발에게 끌려간 이야기를 했다. 대발에게 끌려가는 우이를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 죄책감에 영춘과 아연이 돌아올 때까지 울고 있었던 것이다. 만류하는 영춘의 손을 뿌리치고 아연이 객잔을 달려나온 것이 방금 전의 일이었다. 일단 급한 마음에 달려나오기는 했지만 춘화루가 가까워 올수록 그녀의 심장은 점점 더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상 춘화루 입구에 도착하자 아연은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 무작정 들어갔다가 어떤 봉변이라도 당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솟아올랐다. 흑오파 사내들의 음흉하고 비열한 얼굴들이 떠올랐다. '돌아갈까?' 하지만 처녀가 오줌까지 지리면서 살린 사내다. 한 번 살렸는데 두 번은 못 살리랴. "후읍!" 그녀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등을 살짝 두드렸다. "엄마야!" 그녀가 기겁을 하며 놀랐다. 자지러지듯 놀란 아연이 돌아보니 우이가 그녀의 등 뒤에서 웃고 서 있었다. "여자들도 이런 데 다녀?" 농담까지 던지는 것을 보니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반갑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긴장이 풀리자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옆에 우이가 쪼그려 앉아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런 우이의 품에 안겨 그녀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이번엔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 한참을 울던 그녀가 울음을 그쳤다. 우이를 슬며시 보며 그에게 안겼던 것이 부끄러웠던지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우이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한 여인이 또다시 자신을 구하려고 달려온 것이다. 눈물이 범벅되어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이었지만 세상의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연을 보면 죽은 어머니가 떠올랐다.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객잔을 향해 걸었다. 갑자기 그녀가 손을 슬며시 뺐다. 저 멀리서 객잔 식구들이 뛰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숙수인 달호의 손에는 또다시 식칼이, 영춘의 손에는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아마 아연이 봉변이라도 당할까 하는 급한 마음에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저런 것으로 흑오파를 상대할 수 있었다면 애초부터 당하지도 않았으리라. 그 뒤로 아평과 복대의 모습까지 보이는 것으로 봐서 객잔을 지키는 이 노인을 제외하고 또다시 객잔 식구들이 총출동한 것이다. '이들과 평생을 함께 살 수 있는 행운(幸運)이 내게 남아 있을까?' 우이는 그 소망을 이루어줄 자그마한 행운이라도 자신에게 남아 있길 바랐다. 소박한 소원일수록 이루기 힘든 경우도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무사한 것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영춘의 말에 모두들 궁금한 얼굴로 우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만두겠다더군요." "뭘?" 뜬금없는 우이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궁금증이 더해졌다. "흑오파를요." "누가?" "흑오가요. 참, 그리고 전 잠시 다녀올 데가 있습니다." 모두들 무슨 소리인가 하는 어리둥절한 얼굴들이 되었으나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우이가 어디론가 다시 달려갔다. "이보게! 기다려! 흑오가 흑오파를 그만둔다는 게 무슨 소리야?" 영춘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다 문득 이곳이 흑오파의 본거지인 춘화루 앞이라는 것을 깨닫고 황망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흑오파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아요." 달호가 영춘의 귀에 대고 속삭이자 영춘은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한 젊은이의 인생을 망쳐 놓은 게 틀림없다는 자책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 * * 신도방(神刀幇)의 중방(中房) 책임자인 추월(秋月)이 흑오를 만난 것은 이른 저녁을 막 끝낸 유시(酉時) 무렵이었다. 그는 상방(上房)의 백리준(白狸晙)이 경성에 다녀오면서 어렵게 구해준 용정차 향을 음미하며 기분 좋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용정차는 청나라 건륭제 때에는 황실에서만 마셨다고 전해질 만큼 상질(上質)의 차로 그 가치가 같은 무게의 황금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귀한 차였다. 열다섯에 무림에 뛰어들어 어느덧 그의 나이 내년이면 불혹을 바라보게 된 추월. 그가 신도방의 중방 책임자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고된 시련들을 겪어야 했던가?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위기를 무사히 넘겨 여기까지 왔다. 용정차 향을 음미하며 이런 사치라도 부릴 수 있는 것도 모두 지난 투쟁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대가였다. 추월은 스스로가 대견했다. 강호에서 이 나이까지 살아남는다는 것은 운이 좋은 삼(三)에 포함된다는 말이었다. 나머지 칠(七)은 마흔이 되기 전에 죽기 때문이었다. 흑오는 그런 그의 말년의 삶을 더욱 풍족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존재였다. 뒤를 봐주는 대가로 매달 상납(上納)되는 흑오의 뇌물(賂物)은 만족스러웠고 그런 그였기에 저녁 휴식을 방해한 그의 방문은 용서해 줄 만했다. "굳이 일류고수가 아니라도 자네들 정도를 제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이야기를 다 들은 추월은 그다지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나라도 자네들을 제압하는 데 채 반 각의 시간도 걸리지 않을 거네." 그의 말에 흑오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늘어놓는 그에게 내심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결코 내색은 하지 않았다. 궁한 쪽은 이쪽이었고 추월은 충분히 자신을 무시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추월은 추월대로 짜증이 나 있었다. 흑오의 말에 의하면 그 사내의 손짓 몇 번에 서른 명이 그대로 쓰러졌다고 했다. 그러한 경지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아마 그는 다수가 한 사람에게 제압당한 것이 부끄러운 나머지 상대를 과장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흑오의 그 허풍과 과장이 짜증스러웠던 것이다. 눈치가 빠른 흑오였다. "추 대협께서 나서주시면 그깟 혈랑조 따위야 문제가 아닙지요." 추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도방은 백이문(百二門)과 함께 태호의 가장 큰 두 개의 세력 중 하나였다. 신도방이 태호의 동쪽을, 백이문은 서쪽을 장악한 상태였고 그 경계 지점인 하촌(下村)의 뒷골목을 두고 흑오파와 혈랑조가 서로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신도방이나 백이문에게 있어서 하촌 뒷골목은 먹기에는 부담스럽고 상대에게 주자니 아까운 그런 계륵(鷄肋)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러던 차에 흑오파와 혈랑조라는 삼류조직들이 그곳을 두고 힘 싸움을 벌였고 신도방과 백이문은 각각 한쪽을 지원하며 대리전(代理戰)을 펼쳐 왔던 것이다. 흑오가 이렇게 놀라 달려온 것을 보니 백이문에서 고수를 파견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여태껏 두 세력 간의 마찰을 줄여주는 일종의 완충(緩衝) 역할을 하던 곳이었는데 이제 그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걱정 말게. 곧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네." 흑오를 돌려보내고 신도방주를 만나러 가는 추월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백이문이 이렇게 노골적인 행사를 해온 이상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 * 흑오가 옆집 형에게 얻어맞고 자기 큰형을 부르려고 뛰어간 꼬마 놈 신세가 되었을 때 사실 그 원망의 대상인 혈랑조 역시 비슷한 실정이었다. 혈랑조의 두목인 종대(宗大)는 흑오보다 더 비참한 상태였다. 시커멓게 멍이 든 눈으로 부러진 채 덜렁거리는 왼팔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원인은 조금 전 찾아온 어떤 미친놈 때문이었다. 그 미친놈에게 가장 먼저 당한 것은 혈랑조의 돌격조장(突擊組長) 윤배였다. 다짜고짜 찾아온 그는 골패(骨牌)를 돌리던 윤배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모두 멍하니 보고만 있다 그들이 말리려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윤배는 예전의 윤배가 아니었다. 그의 이빨은 모두 부러졌고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올랐던 것이다. 사십여 명이나 되는 혈랑조들이 그를 포위했을 때는 이미 그의 자랑거리인 얼굴의 긴 칼 자국은 퉁퉁 부어오른 살덩이 속에 파묻혔고 몇 안 남은 이빨마저 흔들리는 것으로 봐서 평생을 죽만 먹고 살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으버버, 너, 너는… 영춘……." 자신을 복날 개 패듯 두들긴 사내를 본 윤배는 놀람이 가득한 얼굴로 무엇인가를 애기하려고 했지만 입에서는 말 대신 부러진 이(齒)만 나왔다. 사내를 둘러싼 혈랑조원들은 혹시 윤배가 저 사내의 부모라도 죽인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아닐까 추측했다. 평소 윤배의 난폭한 성격으로 보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들 생각하면서 이제 곧 이곳에서 비참하게 죽어나갈 사내를 동정하였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고 해도 이곳은 혈랑조의 본거지가 아닌가? 몇몇 혈랑조원들은 그의 얼굴이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분명 본 사내인데 기억이 도통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몇 명의 공통점이 모두 피떡이 돼서 구르고 있는 윤배를 따라 영춘객잔에 갔던 이들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저 이 뜻밖의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상황을 보고받은 종대가 달려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평소 혈랑조원들이 대기하고 휴식하는 이곳, 혈랑청(血狼廳)이라고 불리는 이 더러운 창고 안으로 종대가 들어왔다. 피떡이 된 윤배의 몰골을 본 종대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도 사람을 패고 살아가는 인생이지만 어찌 저리 모질게 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 개를 잡았으면 개 값을 치러야겠지?" 사실 종대는 이곳에 오지 않았어야 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이죽거리지도 않았어야 했다. 하긴 그가 아직 윤배를 두들겨 팬 사내의 분이 채 다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는 걸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인간이란 반 각 후의 일도 예상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을. 사내가 성큼성큼 종대를 향해 걸어오자 순간 사내를 막아서려는 혈랑조 사내들이 픽픽 쓰러졌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종대는 기절할 만큼 놀랐다. 하지만 아무리 삼류라지만 그도 엄연한 조직의 우두머리가 아닌가? 다가오는 사내를 향해 그는 그가 펼칠 수 있는 가장 매서운 수단을 펼쳤는데, 그것은 바로 세 자루의 비도(飛刀)를 동시에 날리는 것이었다. 삼룡출세(三龍出世)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이 초식은 사실 초식이랄 것도 없었지만 그가 지난 십 년간 뒷골목 싸움을 통해 익힌 일종의 비도술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던지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나름대로 부단한 노력을 했다. 결국 나이 서른이 되었을 무렵에는 세 자루의 비수를 동시에 던져 그중 두 자루를 적중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초식의 가장 중요한 점은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것이라고 매번 부하들에게 강조했지만 기습 공격에 대한 비겁함을 감추는 변명이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어쨌든 세 자루의 비수는 사내를 향해 날아갔고 종대의 말마따나 분명 상대의 방심을 노린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비수는 정확히 사내에게 적중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내의 몸에 박혀야 할 비수가 사내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데 있었다. "아!" 종대의 입에서 외마디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자신의 공격이 실패했다는 좌절이 아니라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감탄이었다. 비수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사내는 비수를 보고는 무엇인가 슬픈 추억에 잠긴 게 틀림없었다. 종대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사내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흥!" 그는 이 한마디 콧소리와 함께 종대를 패기 시작했다. 종대의 입에서 살려달라는 간절한 애원이 나오고서야 사내는 손짓을 멈췄다. 사내는 갑자기 정신을 번쩍 차린 사람의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여태껏 실컷 두들겨 맞은 종대의 입장에선 너무나 어이없고 가증스런 말을 던졌다. "이러려고 온 건 아닌데… 미안합니다." 이미 종대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두 눈가가 시커멓게 멍들어 있었다. "혈랑조를 해산하고 떠나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전하려고 왔는데 좀 때려줘야 할 자를 보는 바람에 흥분했군요." 때려줘야 할 자란 바로 칼자국 윤배임이 틀림없었다. "흑오파에서 오셨습니까?" 종대 역시 원래 같으면 '네놈의 정체가 뭐냐?' 내지는 '흑오파에서 보낸 놈이냐?'라고 말해야 했었다. 하지만 이미 신나게 맞고 난 후였다. "참, 공평하게 사흘의 기한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사내는 동문서답을 하고는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공평하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종대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사내가 떠나자 쓰러졌던 혈랑조원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어났다. 사내는 종대가 지금껏 하촌 골목에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고수였다. 야금야금 자신의 영역을 갉아먹던 흑오파에서 드디어 고수를 영입한 것이다. 더러운 까마귀 놈이 이런 고수를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신도방이 개입한 것이 틀림없다고 심증을 굳힌 종대는 덜렁거리는 팔을 흔들며 백이문(百二門)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