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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장 회개에 대한 교훈, 안식일 여인 치유사건과 천국에 대한 비유 및 예루살렘을 위한 주의 애가(哀歌)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9:51-19:27까지 이어지는, 갈릴리 사역 이후 그리고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이전의, A.D. 29년 여름에서 A.D. 30년 초까지의 대략 6개월 남짓 사이에 유대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예수의 후기 사역을 보도한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특히 12:1-19:27까지는 예수님의 행동(action)보다는 죄로부터 순결하신 유일한 인자로서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에게 주시는 예수의 교훈(instruction)에 관한 기사가 더 많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의 내용을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절이 회개에 관한 교훈을, 10-17절이 또 하나의 안식일 논쟁 사건을, 18-21절이 천국에 대한 겨자씨와 누룩에 대한 두 비유를, 22-30절이 천국 구원을 얻을 자에 대한 자격과 실체에 대한 교훈을 끝으로 31-35절이 헤롯(HerodAntipas) 살해 음모를 전해들은 주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주심과 관련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애가(哀歌)를 발하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1-9절의 회개의 교훈을 보다 세분하면 첫 사람 아담 이래 만인이 다 죄인이므로(롬 3:10)
회개 또한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요청됨을 말하는 1-5절과 조속히 회개하지 않는 자의 심판(judgement)에 대한 경고를 말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인 6-9절로 나뉘어진다. 본문 말씀 자체가 직설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사소한 상대적 차이를 넘어서 인간 모두가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죄인인바 인간 모두에게 회개(repentance)가 요청된다. 또한 이는 그저 당위론적인 교훈일 뿐 아니라 그 여부에 따라 영생과 영벌이 가름되는 종말론적 명령이다. 따라서 바로 이시간 나부터 나의 죄된 모습을 깨닫고 진정한 회개에 동참해야 하겠다(행 3:19). 회개의 보편적 필요성과 그 종말성은 태초 아담의 타락이후부터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되는 구속사(redemptive history)의 원천적 동기(動機)이다.
10-17절은 또 하나의 안식일 치유 사건과 이로 인한 안식일 논쟁을 보도한다.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인 구약만을 그리고 구약 전체를 신본주의적(神本主意的) 자세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일부만을 발췌하고 거기에 유대인 자신들의 인본주의적(人本主意的)이요 민족주의적인 해석 과 아울러 자신들이 세운 인간적 전통까지 가미한 인본주의적 사상을 절대시함으로 근본적으로 왜곡 변질된 유대교는 자연히 형식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그중 안식일(sabbath)에 대해서 유대인의 형식주의적 율법이 집중되어 있었는바 자연히 안식일 문제를 두고 이를 인정치 않으시는 주님과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잦은 마찰을 야기했다(눅 6:1-11). 이때 앞서 설명했듯이 유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창조 사역과 역사 섭리의 원리에 따라 인간을 위해 세워주신 안식일 법의 본질은 무시하고 형식만 취하는 오류를 범했을 뿐 아니라 사실 안식일의 법을 세운 입법자였던 삼위 하나님 중 제 2위 하나님이긴 예수에게 안식일의 인위적 규범을 지킬
것을 강요하는 구속사적 오류와 아울러 독선적 오류까지 범한 것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여기서는 자신의 안식일 여인 치유 사역이 안식일의 참 본질을 왜곡시키지 않은 사랑의 사역임을 주로 강조하셨지만 여타 관련 구절에서는 자신이 안식일의 의무 조항에 저촉을 받는 자가 아니라 안식일 자체의 주인임도 분명히 천명(闡明)하셨다(눅 6:11).
성경의 각종 규례(規例)는 모두 다 구속사(救贖史)의 각 단계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攝理)와 사역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다. 따라서 어떤 규례든지 그 형식보다 거기에 담긴 목적과 원리가 더욱 중요한 것이므로 그 제정 목적과 원리를 생각하며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성경의 모든 규례는 이 땅위에서 구속사가 진행되는 동안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할 성도의 일생에 참 유익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과 교회의 규례를 형식적으로 아는데 그치지 말고 그 참 의미를 살펴서 이를 실천하여야 하겠다.
18-21절의 겨자씨와 누룩의 두 비유는 이제 예수님의 성육신(Incarnation)과 공생애 사역으로 개시된 천국의 도래(到來)가 당장에는 미약해 보이나 이제 도도한 물결처럼 온 땅위로 확산될 것을 암시하는 비유이다. 실로 주님으로부터 2000년의 세월이 지난 현대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이 말씀의 진정성을 깨닫게 된다. 예수의 승천 직후의 그 엄청난 로마제국의 초대 교회 박해, 2000년 교회사(敎會吏) 내내 한 번도 끊이지 않았던 각종 이단(heresy)과 세속 철학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은 전 세계에 퍼지게 되어 결국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가 확장되었으며 천국의 최종 도래의 확실성이 분명해 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더욱더 구속사적 확신을 새로이 하여야 한다.
한편 22-30절은 다음처럼 세분될 수 있다. 한 사람이 주께 구원 얻은 자의 많고 적음에 대하여 물은 사실(22-23절)에 대하여 주께서 구원 얻을 자의 양의 문제를 말씀하시기 건에 먼저 구얻을 자의 참 자격(24-28절) 곧 주의 말씀을 단순히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행한 자만이 종말론적 구원(salvation)을 얻을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금 당장에는 이런 자들이 적을 것 같으나 점점 더 이런 자들이 많아지게 될 것이며 또 이런 천국 시민(天國市民) 사이에서는 당장은 앞선 듯한 자가 결국은 뒤 떨어 지 는 경우가 있을 것임을 말씀(27-30절) 하셨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그 당시에 구약 계시를 그저 알기만 하는 혈통적 선민인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불문하고 참으로 이를 지키는 참 영적 선민이 구원 얻을 것에 관한 교훈이다. 이 교훈은 결국은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교회의 성도에게 적용되는 교훈이기도 하다. 즉 본문 말씀이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그대로 주의 말씀을 아는 자나, 다만 교회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오직 참으로 주를 믿고 따르는 자만 천국 구원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음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천국 대열에서는 인간적 관점에서 지금 당장 조금 앞서 있다 해도 그 순수성이 상실될 때에는 곧 뒤쳐질 것임을 깨달아 매순간을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세로 매진(適進)해야 하겠다는 구속사적 교훈을 새삼 확인한다.
마지막 단락인 31-35절은 당시 베레아 지역에서 사역하고 계신 주님을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가 체포하려고 하는 상황에 접하여 주님이 당신께서는 지금 헤롯에게가 아닐 훗날 예루살렘에서 처형당하실 사실을 예언하심과 아울러 이처럼 당신을 죽이고 세상 끝날 당신이 재림하실 그날까지 그 죄 값을 치루어야 할 예루살렘 곧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유대인 전체에 대한 예언적 애가를 발하신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주께서 예루살렘의 황폐뿐만 아니라 35절이 보여주듯이 재림에 임박하여 예루살렘 곧 유대인의 대 회개가 있을 것에 대해서도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롬 11:1-36).
본문에서 우리는 먼저 주님은 당신이 어떻게 죽으실 지에 대해서 그 구체적 내용을 미리 다 알고 계신 사실을 다시 발견한다. 이는 현대의 시점에 있는 우리에게 주께서 당하신 십자가 처형 수난은 주께서 힘이 없으셔서 졸지에 당하신 사건이 아니라 실로 모든 일을 미리 다 아시면서도 스스로 자청하신 것임을 다시 증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이 당신의 죽음을 죄의 흠 없이 완전하신 유일한 인자(벧전 1:19)로서 죄로 얼룩진 우리들을 위한 희생 대속의 수난이라고 거듭 밝히신 사실의 사실성도 새삼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우리의 죄가 주님의 피로 대속(代讀)되어 우리가 구원 얻을 수 있는 진리를 분명히 확인하는 동시에 이런 구속 수난을 자청하신 주님의 사랑에 뭉클한 가슴으로 머리 숙이게 된다. 한편 우리는 주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애가에서 주를 거부하고 지옥의 멸망을 자처하는 모든 죄인에 대한 주의 연민과 아울러 이런 주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자의 완악성을 거듭 확인하면서 바로 나 자신의 참 모습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유대인조차 민족적으로 회개시린 것을 섭리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의 무궁한 사랑과 오묘함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외울 말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내가 너회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만인의 타락과 회개의 필요성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마 18:24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열매 없는 무화과의 비유
6 〇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사 5:2; 마 21:19
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제 2차 안식일 논쟁
10 〇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십 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 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막 16:18; 행 9:17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것이니라 하거늘출 20 : 9
15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 하냐 눅 19:9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겨자씨의 비유
18 〇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 13:31; 막 4:30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누룩의 비유
20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마 13:33
구원얻을 자의 정체
22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마 9:35; 막 6:62
23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시 32:6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하리라 시 6:8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마 19:30; 20:16
헤롯의 예수 추격
31 〇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하라 눅 24:46; 행 10:40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을 위한 주의 애가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 23:37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렘 22:5; 시 118:26
본문 & 자료노트
원어연구-13:2,4, 죄
개역 성경에서 '죄'로 나와 있는 부분을 헬라어 원문을 통해 살펴보면 본문의 2절과 4절에 나타난 죄가 각각 서로 다른 헬라어로 쓰여졌음을 볼 수 있다.
먼저 2절에는 '하마르톨로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죄인'을 가리기는 용어로서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이며, 신약 성경에서는 47번이나 쓰였다. 그리고 '하마르톨로이'는 '하마르톨로스' 의 복수형으로서 그 뜻은 '죄인들'(sinners)이다. 또 '하마르톨로스'는 본래 '과녁을 맞히지 못하다'는 의미의 동사 '하마르타노'에서 유래하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종교적인 의미에서 율법의 기준, 곧 율법의 과녁을 벗어난 행위를 가리키는 듯하다. 따라서 '하마르톨로이'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율법을 어긴 자들을 가리킨다.
한편, 4절의 '죄'에는 '호페일레타이'가 쓰였는데 이것은 '채무자'(debtor), 곧 '빚진 자'(마 18:24; 롬 1:14)를 뜻하는 '호페일레테스'의 복수형으로서 그 의미는 '빚진 자들'이다.
그런데 4절에 나타난 '호페일레타이'는 문맥에 비추어 볼 때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빚진 자들'이라기 보다는 '하마르톨로이'의 의미처럼 '죄인들'로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예로서 신약성경 내에서 도합 7번 나오는 이 단어를 KJV역이 그 중 5번을 '채무자'(debtor)로 옮기고 있는데, 본 절에서 만은 '죄인들'(sinners)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KJV역이 '호페일레타이'의 쓰임새를 충분히 숙고하여 번역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호페일레타이'와 '하마르톨로이'는 동일하게 '죄인들' 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하마르톨로이'는 율법을 어겼다는 측면에서의 죄인들을 가리키는 반면, '호페일레타이'는 하나님께 대해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또는 하나님께서는 큰 은총을 베풀어주셨음에도 그에 보답하는 선행을 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의 죄인들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가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죄란 적극적으로는 율법에 어긋나게 잘못 행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나,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에 빚진 자들로서 해야 할 바를 하지 않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인물연구-13:1, 빌라도
마 27장 연구 자료 참조
주요 주제-13:6-9 예수의 비유의 이해
마 13장 연구 자료 참조
신학용어-13:10-17, 안식일
신 5장 자료 노트 참조
역사 배경-13:10 회당(Synagogue)의 이해
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 참조
보감-13:6-9 무화과 나무 비유를 통한 교훈
이 비유에서 무화과나무는 유대인을, 열매는 참된 회개를 각각 상징한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과원지기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결국 이 비유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에 참된 회개를 하여 돌이킬 것을 촉구하신 것이다. 그러나 비단 이 비유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될 것인가! 오늘날에도 이 비유를 듣고 깨달아야 할 성도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다음에서 이 비유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살펴보자.
1. 모든 사람들은 각각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함(마 3:8)
2. 열매를 맺기 위해 마음 밭을 잘 갈아 옥토같이 해야 함(마 13:23)
3.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으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음(행 14:17)
4.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때에 열매 맺어야 함(막 11:12-14)
5.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기간 동안에 열매를 맺어야 함(겔 33:11)
6.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 안에 열매 맺지 않는 자는 결국 징벌을 받음(마 3:10)
7. 열매 맺는 자만이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됨(마 21:43)
주요주제-13:10-17 바리새인과 예수의 안식일 논쟁
마 12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13:10-17 예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치유 이적들
요 9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갈 자의 7대 자세
1. 하나님의 뜻대로만 행해야 함(마 7:21-23)
2. 어떤 환난에도 끝까지 인내하며 견뎌야 함(마 24:13,14)
3. 늘 깨어서 기도하며 준비해야 함(마 24:32-44)
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써 노력함(눅 13:24; 롬 12:11)
5. 자신을 희생하고 끝까지 주께 충성해야 함(요 12:24-26)
6. 오직 믿음으로만 살려고 애써야 함(롬 1:8-17; 합 2:1-4)
7.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해야 함(히 13:8; 요일 3:18,19)
도표- 13:6-9 심판과 재림에 관한 예수의 비유들 비유
심판 1. 불의한 농부들(마 21:33-41)
2. 혼인 잔치 초청(마 22:2-4)
3. 양과 염소(마 25:31-36)
4.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눅 13:6-9)
재림 1. 싹난 무화과나무(막 13:28,29)
2. 열 처녀(마 25:1-13)
3. 도적의 침입(마 24:43)
4. 깨어 있는 문지기(막 13:24)
5. 깨어 있는 종(눅 12:35 -40)
6. 선한 청지기(눅 12:42-48)
보감-13:34,35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의 탄식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임 당하실 것을 예언하신 사실과 예루살렘으로 상징적으로 표현된 구약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예수 자신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여 결국 자신을 죽이게 될 것에 대해 아시고 그들을 향하여 탄식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의 탄식은 하나님으로서 끝까지 자신을 배척하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백성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자기 백성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에 대해서 만큼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었던 공의 사이에서 갈등하시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예루살렘은 좁게는 구약 선민인 육적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나 넓게는 그리스도를 믿는 영적 선민들인 현대의 모든 성도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의 탄식이 주는 교훈들을 한곳에 모아 보도록 하겠다.
1. 죄인은 사랑하시되 그 죄에 대해서는 미워하심(요 3:16)
2. 죄에 대한 심판 전에 죄인들이 먼저 회개하기를 원하심(마 4:17)
3. 죄인들이 범죄하는 것에 대해 슬퍼하심(창 6:5-7)
4. 죄인들의 회개 촉구를 위해 죄에 대한 심판을 미리 예고하심(눅 13:1-5)
5. 당신의 공의 실현을 위해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징벌하심(마 21:41)
6. 죄에 대해서 징벌하시는 중에도 죄인을 향한 사랑은 변치 않으심(요 13:1)
7. 당신의 택한 백성들은 죄에 대한 심판 후에라도 회복하실 것임(눅 15:22)
보감-13:24-30 성도의 길과 불신자의 길 비교
길(way)이란 한 인간이 갖는 삶의 방향과 목표, 그리고 자세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인간이 어떠한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인생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한편 본문은 인생은 신앙의 여부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의 길로, 혹은 그 반대인 멸망의 길로 갈 수 있음을 교훈한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된 자들은 이러한 교훈에 따라 올바른 성도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1. 성도들의 길
1) 말씀을 따르는 순종의 길(왕상 2:3)
2) 전심과 진실로 행하는 길(왕하 20:3)
3)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길(시 26:3)
4) 말씀의 빛을 따르는 길(시 119:105)
5) 십자가의 고난의 길(눅 9:23)
6) 의의 좁은 길(눅 13:24,27)
7) 새 생명의 길(롬 6:4)
8) 믿음으로 행하는 길(고후 5:7)
9) 성령이 인도하는 길(갈 5:16-18)
10) 사랑으로 행하는 길(엡 5:2)
11) 푯대를 향해 전진하는 길(빌 3:14)
12) 믿음의 길(딤후 4:7)
13) 선한 싸움의 길(딤후 4:7)
14) 나그네의 길(벧전 2:11)
15) 빛 가운데 행하는 길(요일 1:7)
16)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길(요일 2:6)
2. 불신자들의 길
1) 강퍅한 마음에 따른 길(신 29:19)
2) 불행악과 패역의 어둔 길(잠 2:13-15)
3) 궤사자의 길(잠 13:15)
4) 사망의 길(잠 14:12)
5) 공의와 평강이 없는 굽은 길(사 59:8)
6) 불순종한 악한 길(렘 7:24)
7) 하나님을 외면하는 길(렘 7:24)
8) 세상 풍속을 좇는 길(엡 2:2)
9) 음란하고 방탕한 길(벧전 4:3)
주요주제-13:18-21 하나님 나라의 이해
눅 서론 특별 자료 참조
역사배경-13:31 헤롯 가문의 가계
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역사적 배경' 참조
지도-13:31 세례 요한 및 예수 공생애 당시 분봉왕들의 통치 구역
눅 3장 연구 자료 참조
역사배경-13:34,35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언
눅 21장 자료 노트 참조
13:1-9 회개의 권면
예수께서는 전장 마지막 단락(12:54-59)에서 회개의 기회가 박탈당하는 종말의 때가 이르기 전에 회개할 것을 촉구한데 이어,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반드시 임할 것과 심판이 임하기 전에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바른 회개의 촉구를 위하여 그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 즉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을 학살한 사건(1절)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4절)을 예로써 설명하고 있다.
먼저, 빌라도가 행한 일이 어떤 것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로마에 항거하던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던 중 빌라도의 병사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 피가 제물에 섞인 사건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실로암 망대는 기혼에서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를 지키기 위해 역시 빌라도가 성전 자금을 유용하여 세워놓은 것으로 이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모든 재난을 죄의 결과로 인한 형벌로 보았다(욥 4:7; 요 9:2).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두 사건에서 죽은 사람들도 그들의 죄 때문에 벌을 받아서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유대인들의 그릇된 인과론적 형벌관을 지적하시면서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2-5절). 이를 예수께서 장차 있을 예루살렘 멸망(A.D. 70년)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예언은 유대인에게 국한된 예루살렘 멸망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으로서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최후의 심판' 때에 멸망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들고 계시다(6-9절). 이 비유를 보면 포도원 주인은 무화과나무가지가 자기의 기대에 어긋나게 열매를 맺지 못하자 찍어 버리려 한다. 그때 과원지기의 만류에 의해 주인은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주게 된다.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을,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열매는 참된 회개를, 과원지기는 예수님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 심판을 유보하시면서 당신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이러한 비유는 하나님은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심관을 연기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나, 심판은 결코 취소되지 않고 언젠가 반드시 임할 것임을 보여 준다(벧후 2:9,10). 결국 유대 종교지도자들로 보이는 자들은 예수를 궁지에 빠뜨리기 위해 정치성 있는 질문을 던졌지만(1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교한 계략을 간파하여 그들의 잘못된 형벌관을 깨뜨리시고 바른 회개를 촉구하는 기회로 삼으신 것이다.
한편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다른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 그것을 인과응보적으로 해석하여 그를 정죄하거나 비난할 것 이 아니라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오히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기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마 7:1-5).
② 우리들은 본래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었지만 오직 회개함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백하는 회개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13:1 그 때 마침. - 직역하면 '바로 그 때'로, 이는 예수께서 시대의 징조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하신(눅 12:54-59) 바로 그 때를 가리킨다.
빌라도가‥‥제물에 섞은 일. - 이는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빌라도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어느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혹자는 이 사건을 갈릴리 유다의 반란 사건(행 5:37)과 동일시하고. 또 다른 혹자는 헤롯과 빌라도가 원수가 되게 한 사건(눅 23:12)과 동일시하나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 사건은 예루살렘에 순례왔던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다가 빌라도의 명을 받은 로마인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었을 것이다. 당시 유대에 대한 로마의 통치를 반대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열심당원들은 유대독립을 위해 유월절과 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때에 자주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한 로마군의 탄압으로 본절에 나타난 것과 같은 사건이 흔히 발생했다.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어느 유월절에는 삼천 명의 유대인의 시체가 성전에 가득 찼고, 다른 어떤 유월절에는 이만 명의 유대인이 비슷하게 학살되었다고 한다. 한편 본절에는 이 사건을 두어 사람이 와서 예수께 보고하게 된 이유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그들의 보고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그들은 재앙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고 있던 차에 갈릴리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재앙을 당하자 혹 그들이 자신들의 악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진노하심을 얻어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알고자 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3:2 이 갈릴리 사람들이‥‥더 있는 줄 아느냐. - 유대인들은 모든 재난을 죄의 결과로 인한 형벌이라는 인과 응보적 관점에서 이해했다(요 9:2). 이러한 사실은 욥의 고난에 대한 그의 친구들의 판단에서도 잘 드러난다(욥 4:7; 8:20; 11:6; 22:5-10). 앞서 밝혔듯이 예수께 갈릴리 사람들이 당한 재앙을 보고한 사람들의 의도도 빌라도의 악함이나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동정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관념을 확인받고 싶어서였다. 이에 예수께서는 본절에서 이러한 그릇된 인과 응보적 형벌관을 지적하시고 누구든지 죄를 짓고도 참된 회개가 없으면 멸망할 것임을 경고하고 계신다(3-5절). 한편 기독교와 인과 응보적 사고와 관련해서는 욥기 서론 특별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13:3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이와 같이 망하리라. - 본절은 '이와 같이'(호모이오스)라는 말의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데 대개 다음 두 가지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첫째는 '이와 같이'가 '똑같은 방식' 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이다(Godet, Farrar). 이 견해를 따르면 본절 후반은 '똑같이 무서운 방식으로 망하리라'. 또는 '그처럼 갑작스럽게 망하리라'는 의미가 된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본절을 주후 70년 유월절에 있었던 유대인 대학살과 관련시킨다. 둘째는 '이와 같이'가 '역시'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이다(Hendriksen), 이 견해를 따르면 본절 후반은 '회개치 않으면 역시 망하리라'가 된다. 즉 갈릴리 사람뿐 아니라 회개치 않는 자는 누구든지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 문맥 속에서 예수의 강조점을 고려할 때 두 번째의 경우가 더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는 것은 인류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예수께서는 본절을 통해 유대인들의 인과 응보적 형벌관을 완전히 깨뜨리시고, 빌라도에게 죽임당한 갈릴리 사람들을 보고 상대적으로 자신들에게는 죄가 없음을 과시하려 했던 유대인들 역시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지적하심으로써 임박한 진노 앞에서 속히 회개하기를 촉구하고 계신다.
13:4 실로암‥‥더 있는 줄 아느냐. - 2절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원인을 개인의 죄악의 결과 때문이라고 보는 통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2절이 인위적이고 필연적인 사건이라면 본절은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사건이 다. 하여튼 실로암의 망대는 예루살렘 성의 동남편 성밖 담에 세워져 있는데. 이는 총독 빌라도가 성전 자금을 유용(流用)하여 만들었던 수로(氷賂)의 일부였다. 바로이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던 것이다. 이를 본 유대인들은 그들의 죽음을 그들이 죄가 더 많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와 관련한 에발트(Ewald)의 추측은 특이하다. 즉 본문의 '죄'가 2절의 '죄'에 해당하는 '하마르톨로이'가 아닌 '빚진 것'이란 뜻이 있는 '오페일레타이' 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유대인들은 그들의 죽음을 빌라도가 성전에서 빼앗은 돈으로 임 금을 받은 일꾼들이 성전의 돈을 다시 갚아야 할 빚으로 인하여 천벌을 받은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Spence, Barclay). 그러나 해석학상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항은 예수께서 그들의 죽음이 죄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회개하지 않음으로 이처럼 멸망받지 않도록 회개의 긴급성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13:5 만일 회개치‥‥이와 같이 망하리라. - 3절과 동일한 어구이다. 즉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망대가 무너져 죽은 18명과 같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이 미래시제의 조건문임을 주의해야 한다. 즉 회개치 아니하는 자는 장차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예언적인 말씀은 사십 년만인 A.D. 70년 예루살렘 전체가 파괴됨으로써 1차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궁극적으로 그와 같이 회개치 않는 자는 종말에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될 것이다.
13:6 한 사람이‥‥얻지 못한지라. - 본절에서부터 9절까지는 일명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 불리는 부분으로 앞선 두 비유(2-5절)가 회개치 않는 자에게 임할 심판을 강조함으로써 회개를 촉구했다면. 이제 본문은 지금이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는 때임을 강조함으로써 속히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비유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회개의 촉구로 보는 견해가 있다(Bengel, Farrar). 이는 구약에서 포도나무(시 80:8-11; 사 5:2)와 무화과
나무(렘 24:3; 호 9:10)가 종종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 21:19 주석 참조. 그러나 본문은 꼭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민족에 대한 회개의 촉구의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다(Hendriksen). 한편 무화과나무는 매년 4월에 잎이 나기 시작하여 5-6월에 겨울 무화과를, 8월말-9월에 여름 무화과를 내며 영양의 상태에 따라 9m높이까지도 자랄 수 있다. 그런데 당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으며. 이는 주인이 그 나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Hendriksen). 하여튼 무화과나무는 수확의 때에 열매 맺어야 하나 주인은 열매를 찾아내질 못했다. 여기서 '열매'는 문맥상 '회개'를,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여러 가지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의의 열매를 맺기를 기대했으나 이스라엘 민족은 때가 이르도록 의 의 열매를 맺지 못한으로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다.
13:7 삼 년을 와서‥‥얻지 못하니. - '삼 년'의 기간에 대해서는 ① 예수의 3년간의 공생애 기간(Bengel, Alford, Wieseler). ② 아브라함, 모세. 마리아(Ambrose), ③ 모세(율법). 사사, 선지자(Cyril). ④ 율법, 선지자, 그리스도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이 은혜 받은 기간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Plummer, Bruce. Gilmour), 포도원 주인은 3년이 지나도록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자 과원지기에게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도록 지시했다. 물론 여기서 3년은 무화과나무를 심은지 3년이 아니라 무화과가 정상적으로 과실을 맺을 수 있는 때로부터 3년이 지난 때를 가리킨다(Robertson). 하여튼 때가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하는 과실수는 땅만 차지할 뿐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그들에게서 의의 열매를 얻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와 배교만 일삼았을 뿐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할 처지에 이르렀던 것이다(마 3:10; 1 눅 3:9)
땅만 버리느냐. - 여기서 '버리다'(카타르게이)는 '못쓰게 하다'. '쓸모없게 되다'. '다 써버리다'의 뜻으로, 여기서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더 유용하게 사용될 수도 있는 땅을 차지해 버렸고. 또한 다른 식물에게 필요한 습기와 무기물까지 흡수해 버림으로써 오히려 큰 해악을 끼쳤음을 보여 준다. 때문에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찍어버리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화과나무를 심은 목적이 열매를 얻기 위함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의 열매를
맺도록 요구하심을 알아야 한다. 회개치 않는 것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땅만 버리듯이 자신만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암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13:8 주인이여‥‥거름을 주리니. -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회를 한 번 더 부여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과원지기의 간청은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라 할 수 있다(사 53:12; 눅 22:32; 요 17:9; 롬 8:34).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는 소돔성을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를 반영한다(창 18:22-32). 그러나 주께서는 중보 기도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거름을 주는 수고를 하시면서 회개의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인내하시며 끝까지 그들의 구원을 위해 애쓰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금년'이란 한정된 기간의 때가 회개해야할 마지막 기회임을 알아야 한다. 즉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특권을 가졌으나 회개치 않음으로 심판을 받은 것처럼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심판의 종말이 이르기 전에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13:9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 문장이 갑작스럽게 끊어지는 돈절법(類絶法, aposiopesis)과 '찍어버리소서'(엑콜세이스)라는 미래(의지) 능동태 직설법 2인칭 단수형으로 된 문장으로 미래에 있게 될 심판이 강조되고 있다. 이 심판은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죄인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받게될 불신자의 심판을 가리킨다. 결국 1-9절은 눅 12장에 이어 계속해서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심판을 앞둔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에 임할 진노(롬 2:5)를 받지 않기 위하여 심령의 완고함(시 95:8; 잠 29:1)과 무감각함(잠 23:35; 엡 4:19)을 버리고 통회함으로 구원받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시 34:18; 51:17).
13:10-17 두 번째 안식일 논쟁
앞 단락(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히 있을 것이므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본문은 눅 6:1-11에 이어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 사이에 안식일에 관한 두 번째 논쟁이 일어나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본문의 논쟁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여인을 고치신 데서 발단이 되었는데(10-13절), 예수께서는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 고치신 것을 비난하자 이를 계기로 유대인들의 그릇된 안식일 관념을 지적하시고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교훈하신다(14-16절). 이러한 안식일 논쟁과 관련해서는 마 12장 구속사적 개관 및 자료노트 '바리새인들과 예수의 안식일 논쟁'을 보다 참조하라. 아무튼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은 무리들에게 두 가지의 결과를 가져왔다. 즉 예수님을 대적하던 기득권층은 부끄러워했고, 민중은 기뻐한 것이다(17절). 이는 소외된 자를 위해 오신 인자의 모습이 잘 부각되는 사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능력을 베푸신 일이 본문을 끝으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박해로 인하여 이후로는 더 이상 회당을 이용하지 못한 까닭으로 여겨진다.
13:10 안식일에‥‥가르치실 때에. - 본절에서부터 17절까지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꼽추된 여인의 병을 고치시고 안식일의 참뜻을 가르치신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그 교훈의 내용은 눅 6:6-11 및 눅 14:1-6의 내용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본절의 사건의 장소와 시간은 분명치 않다. 다만 공생애 후반 유대 지역의 어느 회당에서 있었던 일이었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는 공생애 후반기에 회당에서 가르치신 경우의 유일한 경우에 해당한다(Plummer, Farrar).
13:11 십팔 년 동안을‥‥한 여자가 있더라. -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원문에는 '보라'라는 의미의 감탄사 '이두'( )가 본절 앞에 나타나 독자들의 분위기를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 관심의 대상은 바로 18년을 중병에 시달린 여인이었다. 이 여인은 귀신들려 앓을 뿐만 아니라 등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였다. 이 여인의 병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꼬부라져'에 해당하는 헬라어 '슁퀴프투사'가 척추가 이중으로 굽은 것을 나타내는 의학 용어인바 척추염에 의한 척추 비틀림 현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mdle). 하여튼 이 여인은 매우 큰 고통과 절망 가운데 생을 살았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회당에 출석했다는 것은 생의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했으며, 큰 믿음을 지녔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예수를 만나게 했으며, 바로 이러한 예수와의 만남이 그녀에게 엄청난 축복의 계기가 된 것이다.
13: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병든 여인이 치유를 간구하기 전에 먼저 그녀를 불러 주셨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병자를 부르신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요 15:16)이시다. 주님은 무리들을 동정하였을 뿐 아니라(마 9:36; 14:14; 15:32) 불쌍한 소경을 민망히 여기셨고(마 20:29-34),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다(눅 7:13). 즉 예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실 뿐만 아니라 연약함을 치료하여 주시는 분이다(사 58:7).
여자여‥‥놓였다. - 질병의 치유와 관련해 '네가 놓였다'(아폴렐뤼사이)는 말이 사용된 것은 이곳뿐으로, 이는 근육을 매었던 세력에서 그녀의 근육이 자유롭게 된 것을 나타낸다. 예수의 이 말씀은 그녀에게는 이제까지 들어본 말들 중에서 가장 놀라운 능력의 말씀이 된 것이다.
13:13 안수하시매‥‥곧 펴고. - 예수께서는 이 여인에 대해서는 다른 귀신들렸던 자들의 경우처럼 귀신을 꾸짖으심으로 질병을 고치시지 않고(눅 8:29; 9:42) 안수하심으로 고치셨다. 그러나 방법이야 어떠하든지 예수께서 능력으로 질병을 고치셨다는 것은 같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이 여인에게서 믿음을 보시고 사랑의 표시로 친히 안수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안수'는 수여자가 가진 무엇을 피수여자에게 전가한다는 의미를 갖는데, 이러한 안수에 대해서는 창 48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한편 '펴고'(아노르도데)라는 말은 '다시 바르게 하다'라는 의미의 '아노르도오'의 결과를 나타내는 제 1부정 과거 직설법으로 신체의 비정상이거나 탈난 부분을 바로 잡는 것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이다(Hobart). 이는 예수께서 신적 능력을 발휘하심으로 즉각적이며 완전하고도 영원하게 여인의 병이 치유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 '영광을 돌리다'(에독사젠)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동작의 계속을 뜻하는데, 이는 예수의 능력으로 병에서 완치된 여인이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영광을 돌렸음을 의미한다. 고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므로 그녀는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자유함을 받은 성도가 취해야할 자세는 하나님 께 영광을 지속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13:14 회당장이‥‥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 '회당장'(아르키쉬나고고스)은 성전 중심의 제사장과는 달리 평신도 계열의 사람이며 회당을 담당하고 있는 지방 장로회의 우두머리이다(Hendrik Sen), 그는 집회 인도, 회당 건물 유지, 보존, 운용의 책임을 맡았으며, 누구든지 율법(토라) 낭독이나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이 회당장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회당장이 분노한 것은 출 20:9-10의 안식일 준수의 문자적인 율법주의적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안식일 규정을 준수하려는 열의는 있었으나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당시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에 대한 랍비들의 견해는 긴급한 환자만 치료할 수 있고 이 병과 같이 만성적인 질병은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Spence). 회당장의 판단은 이와 같은 당시의 통념에 따른 것이며, 예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시키심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를 외식하는 자라고 꾸짖으신 것이다(15절). 우리는 여기서 율법의 내용을 문자적으로만 적용시켜 그 참된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하며, 나아가 율법을 이루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받게 된다.
13:15 외식하는 자들아‥‥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 '외식하는 자'(휘포크리타이)라는 말이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회당장과 그와 동조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이 이처럼 예수께 외식하는 자로 책망 받은 것은 안식일에 대한 그릇된 편견으로 인해 자신에게는 유리하게 적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불리하게 문자적으로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하여튼 예수께서는 당시 통념을 이용하여 동물과 인간을 대조시켜 외식하는 자들을 꾸짖고 동시에 안식일 준수의 참된 의미를 가르치신다.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동물의 등에 짐을 지우고 몰고 다니는 것과 물을 운반하는 것은 금지되었으나 동물에게 물을 먹이는 것은 허용되었다. 그렇다면 동물보다 더 중요한 인간에게 그 필요한 것을 어떠한 날이라도 언제든지 공급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Hendriksen).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이 외식하는 자들은 18년 동안이나 고통에 시달리던 여인의 참혹한 실상은 외면한 채 예수의 치유를 비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의 외식은 회당장과 바리새인들만이 범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형식적 신앙 행위만을 강조하면 이러한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13:16 십팔 년 동안‥‥합당치 아니하냐. - 15절의 동물과 본절의 하나님의 선민인 아브라함의 딸과의 대조를 통해 18년 동안 앓은 여인의 치료가 정당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동물에게 물 먹이는 것과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 몇 시간의 매임과 18년 동안의 매임, 마귀에서 풀어내는 것과 사탄의 올무에서 푸는 것을 대조시키면서 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예수께서 병든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로 표현한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택한 자녀로, 동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안식일 준수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를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신 5장 자료 노트 참조)임을 감안할 때 이 땅에서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을 보여 주는 표적인 예수의 축사 행위는 매우 정당한 것이라 할 것이다. 막 9장 자료 노트. '축사의 이해' 참조.
13:17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기뻐하니라. -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은 말씀을 듣는 그들에게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내게 했다. 즉 회당장과 그 추종세력은 부끄러워한 반면, 일반 무리들은 기뻐한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부끄러워하고'(카테스퀴논토)는 미완료 수동태로 '궁지에 몰려 수치로 얼굴을 붉히다'라는 뜻인데, 이는 예수의 교훈을 듣고 당황해 하는 외식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13:18-21 하나님 나라에 대한 두 비유
앞 단락(10-17절)에서 꼽추 여인을 고친데서 발단이 된 안식일 논쟁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알리신 예수님께서 본문에서는 겨자씨 비유(19절)와 누룩의 비유(21절)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가르쳐 주신다. 즉 이 두 가지 비유는 모두 공통적으로 처음에는 미약하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복음의 역동성으로 인해 크게 성장하고 확장될 것을 보여 준다. 먼저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처음에는 작고 연약하나 그 속에 생명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점차 확장되고 마침내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참 평안과 안식을 제공하게 될 것을 보여 준다. 또한 누룩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인 성숙을 가리키며 씨앗처럼 그 자체가 자라나는 것은 아니지만 누룩의 적은 양이 반죽한 밀가루 전체에 골고루 퍼져 부풀리듯이 천국 복음이 온 사회 전반에 투입되어 그 사회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영적인 확장을 해 나갈 것을 보여 준다.
이렇게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특별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어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는 모든 곳이 하나님의 나라로서 외적성 장과 내적 성숙이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그 날까지 계속해서 성장하고 확장되어 갈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으로 변화된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외적인 신앙의 성장과 내적인 인격의 성숙이 조화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동시에 자기가 속한 지역과 사회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삶을 갈아야 할 것이다.
13:18 그러므로‥‥하나님의 나라가‥‥무엇으로 비할꼬. - '그러므로'(운)가 시간적인 계속을 표시하는 접속사이므로, 본절은 앞절(17절)과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본절 이하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18-21절)는 회당에서 말씀하신 것이 된다. 그러나 마태의 병행 구절에는 이 비유를 해변에서 하신 것으로 나타난다(마 13:1). ① 아마도 예수께서는 같은 비유를 여러 차례에 걸쳐 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예수께서 병든 여인의 치유 사건과 연속하여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드신 것은 ? 하나님의 나라는 완악한 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급속하게 확대되어 가며, ② 하나님의 나라는 비천한 개개인의 구원에서부터 완성된다는 것을 교훈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한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눅 서른 특별 자료,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참조하라.
13:19 마치‥‥겨자씨 한 알 같으니. - 본절은 일명 '겨자씨 비유'라 불리는 부분으로 마 13:31,32과 병행을 이루는데,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급속한 외적 확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 여기서 '갖다'(라본)는 씨가 우연히 뿌려졌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쓰여졌다. 즉 씨는 밭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도 아니며 우연히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오랫동안 계획한 결과인 셈이다(딛 1:?; 벧전 1:20). 한편 겨자씨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겨자씨를 심은 사람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상징할 것이다. 겨자씨, 배추과의 1,2년생 식물로 그 씨는 맵고 향기로와 양념과 약재로 쓰고, 잎과 줄기는 식용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겨자씨는 '모든 씨앗보다 작은 것'(마 13:31)으로 묘사될 만큼 아주 작은 것이 특징인 반면, 나무는 보통 Im 정도로 크게 자라며 특히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약 3m까지 자라 마치 나무와 같아 보일 정도로 크고 무성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이 겨자씨에 비유된 것은 처음에는 미미하게 시작했으나 점차 급속도로 확장될 것을 암시한다. 사실 그리스도에 의해 뿌려진 천국 복음은 처음에는 미미하게 전파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온 세계를 변화시킬 만큼 널리 전파 되었다. 자라 나무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 완성된 때를 가리킨다.
공중의 새들. - 이 말은 나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외부 사람들이 이 나무의 보호 아래 나아오기를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영적으로 좀 더 확대 해석하면 '새들'이란 세계 도처에 있는 사람들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 평안과 안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참고로 겔 31:6: 단 4:12에서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속국들 곧 제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군소 나라들을 '공중에 나는 새'로 묘사하고 있다.
깃들였느니라. - 이 말은 '장막을 세우다', '진을 치다'의 의미로서 안전한 거처를 마련한다는 뜻이다. 즉 겨자나무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기로, 본절은 천국에 속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부로서 영속적인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민 14:30; 신 33:12; 시 16:9).
13:20,21 본문은 일명 '누룩 비유'라 불리는 부분으로 마 13:33과 병행을 이루는데,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발전 및 복음의 은밀한 영향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여자. - 이 여자는 본 비유의 중심인물로, 19절의 '사람'과 대구를 이룬다. 따라서 본절의 여자는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교회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실로 하나님의 복음은 교회에 위탁되어 있으며, 복음은 교회를 통해 사회 각 전반에 침투하여 그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결국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가루 서 말. - 이것은 한 번에 반죽하기에 알맞은 양으로 한 에바이다. 여기서 '말'(사타)은 에바의 1/3에 해당되는 '스아'와 같은 단어이다. 따라서 '서 말'은 '1 에바'에 해당한다. 한편 '1 에바'는 약 22L로, '가루 서 말'이란 10인 가족의 하루 식량으로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 1인에게 하루를 지낼 수 있는 양으로 1오멜(약 2.2L)을 주셨기 때문이다(출 16:33,36). 이에 대해서는 성경 총론, '성경 도량형 환산표'를 참조하라.
전부 부풀게. - 문자적으로 '그것이 전체 발효되기까지'이다. 이것은 복음의 영향력이 점점 퍼져서 결국에는 이 세상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추론하여 이 세상 전체가 주님 오실 때까지 점점 계속적으로 개선되어질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세상에서의 조용하고 자애로운 복음의 영향력을 서술하고 있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마침내 개심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룩. - 이것은 빵을 만들 때 반죽을 부풀게 하거나 술을 만들 때 알콜 성분을 발생케 하는 발효소를 가리킨다. 따라서 누룩의 비유적 의미는 점진적인 내적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작용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성경에서는 이 누룩이 보통 교만이나 욕망, 부패하고 썩게 하는 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막 8:15; 눅 12:1; 고전 5:6).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묘사할 때의 누룩은 위와 같은 내용이 아니라 어떤 결과를 낳게 하는 변화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부풀리듯이 복음은 은밀히 세상에 파고 들어가 사람들을 놀랍게 변화시킬 것이라는 말이다.
13:22-30 구원을 얻는 자
앞 단락 (18-21절)에서는 겨자씨 비유, 누룩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해 소개했다. 이어 본문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교훈이 계속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될 자를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어떤 사람의 질문으로 시작되는데(22,23절) 예수께서는 구원 얻을 자의 양이 얼마인지를 묻는 이 질문에는 직접적으로 답변하시지 않고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것인가'를 말씀하심으로 보다 궁극적인 문제를 다루고 계시다. 예수의 말씀을 정리해 보면 첫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이다(24절). 이는 구원 얻기 위해서는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고 회개와 성결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신 말씀이다. 둘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25절).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하게 있을 것이며(마 24:36)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도래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오직 준비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즉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비유(마 25:1-13)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으로 영적 준비를 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어린양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생각과 같이 외적인 요소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회개와 믿음에 있다는 것이다(26절). 즉 하나님 나라는 정기적으로 교회 출석을 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했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된 회개와 믿음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 나라는 혈연이나, 민족, 신분, 인종 등에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겸손히 수납하는 자가 차지하며, 복음을 배척한 자는 비록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28절).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선민사상을 가지고 무조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유대인들의 구원관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소망을 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받게 된다.
① 우리는 세상의 불의와 타협하고 악한 시대 조류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성경은 분명히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롬 12:1) 구별된 삶을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 삶의 기준은 하나님께 맞추어져야 하고 이럴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②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심판하실 것에 대한 올바른 종말 신앙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좇는 것이었는지에 따라 심판하신다(마 25:31-46).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도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행하는 성실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13:22 예수께서 …여행 하시더니. - 눅 9:51과 같은 여행을 가리킨다(Godet). 이때 예수께서는 아마도 베레아 지역을 여행하고 계셨을 것이다.
13:23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 질문자는 아마 제자가 아닌 일반 청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왜 이러한 질문을 하였는가는 분명치 않으나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① 당시 유대 문서에 근거하여 구원받을 자가 멸망 받을 자보다 훨씬 적을 것이라는 배타적인 정신에 기인했거나(외경 에스드라 2서 8:1; 9:15-16), ② 회개한 자만이 구원 얻는다는 예수의 엄격한 가르침이 당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은 모두 구원을 받게 된다고 생각한 유대인의 통념과 대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예수께서는 공론적 질문에 직접 대답하시지 않고 간접적으로 대답하셨다. 베드로의 질문(요 12:41-42)의 경우에 답한 것 같이 질문자의 자세를 시정시키면서 훨씬 더 중요한 문제를 가르치신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구원 얻을 자가 얼마냐를 묻는 질문에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대답하심으로써 보다 궁극적인 문제를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좁은 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마 7:13,14과 본절의 후반에 나타나는 '힘쓰라'라는 말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아마도 회개와 기도 및 성결, 그리고 인내 등을 의미할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여기서 '힘쓰라'(아고니제스데)는 현재 명령법으로 '싸우라', '전력을 기울이라'의 뜻이다. 현재 명령형인 점을 고려할 때, 구원을 얻기 위하여 성도는 지금 바로 이 시점에서 세상의 유혹과 사단의 권세와 싸워야 하며 나아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어야 할 것을 보여 준다. 특별히 이 용어는 운동 경기에 사용되는 전문 용어로 공중 경기에서 상급을 위해 힘쓰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성도는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을 가지고 날마다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서 싸워야 하고, 육신의 성욕을 피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좋아야 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엡 6:10-20).
들어가기를…자가 많으리라. - 미래형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구원의 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좁은 길을 택해야 하며, 기회가 지나가버리고 구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즉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것을 미래로 미루는 자는 결코 미래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요 7:34; 히 12:17). 따라서 우리는 은혜 받을 만한 때(고후 6:2)에 회개를 하고, 비록 그 길이 멀고 험하다 할지라도 믿음을 공고히 해야 할 것이다.
13:25 집주인이…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 전절에 계속하여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해야 함을 비유로 교훈하신 구절이다. 여기서 '집주인'은 심판주이신 그리스도를, '문'은 구원의 문을,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자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하지 않음으로 구원의 기회를 상실한 자를 가리킨다. 또한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는 집주인의 말은 준엄한 멸망의 선고라 할 수 있다(마 25:10-13).
13:26 그 때에 너희가…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 직접적 의미는 예수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던 당시의 무리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즉 주님 면전에서 가르치심을 받고 함께 식탁에 참여하였다(마 14:13-21; 15:32-39)고 하여 그것이 구원받을 조건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구원의 조건을 외적인 요소에서 찾으려 하나 주님은 중심에 회개하는 심령과 믿음을 보시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나 형식적으로 따르고,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지 아니하고, 주님의 전도 여정에 동참하나 구원의 조건에 합당치 아니하면 결코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이 시대의 우리들은 교회 출석과 신앙 행위를 한다고 자칭하나 중심에 회개와 믿음이 없는 위선의 요소는 없는가를 철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13:27 나는 너희가…나를 떠나가라. - 시 6:8의 인용이다. 주인의 '알지 못하노라'(우크오이다)라는 부정의 표현은 2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심판의 냉혹함을 강조하고 있다(Bengel). 이 말은 랍비들이 공회에서 추방할 때 사용되기도 했던 말로, 본절에서는 '그 때'와 연결되어 종말론적 심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한편 여기서 '행악하는 자들'(판테스 엘가타이 아디키아스)이란 표현은 '불의의 삯을 받고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즉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결국 악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실제로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인들은 불의의 종이 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악을 범했던 것이다.
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이를 갊이 있으리라. -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자들과 하나님 나라 밖에 쫓겨난 자들을 대조시키고 있다. 유대인의 이상은 '메시야의 왕국'에서 열조들과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사 25:6-9; 65:13,14). 따라서 메시야 왕국에서 쫓겨난다는 말은 영원한 절망과 심판의 비참함을 시사한다. 한편 여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표현은 본서에서는 유일한 기록이나 마태복음에는 매우 흔한 표현으로(마 8:12; 13:42,50; 22:13; 24:51; 25:30) 멸망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마 13:42 주석을 참조하라.
13: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잔치에 참여하리니. - '하나님의 나라 잔치'란 메시야 왕국의 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Expositor's Commentary) 장차 메시야 왕국에서 있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반영한 말이다(마 25:1-13; 계 19:7). 그런데 이때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은 승리와 기쁨으로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한편 이 연회석에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참여한다는 것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된 것을 의미한다(사 45:6; 49:12). 결국 본절은 예수를 배척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합당치 않게 된 유대인들 대신에 겸손하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엡 3:6). 이처럼 교만한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추방되고 이방인들이 구원 얻게 된다는 취지는 마 8:11,12에 보다 명백하게 언급되고 있다.
13: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있느니라. - '구원을 얻는 자'에 관해 질문한 데 대한(23절) 답변의 결론에 해당되는 구절이다. 이러한 본절은 '나중 될 자'와 '먼저 될 자'를 대조시키고 있는데, 이는 문맥상 이방인일지라도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유대인일지라도 교만과 불신으로 구원받기에 합당치 않으면 버림받게 될 것을 의미한다. 즉 본절은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한 법칙을 보여 주는 구절로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분이심을 나타내 준다.
13:31-35 예루살렘의 명망 예언
앞 단락(22-3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자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어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이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의 축음에 대해 예고하시고(31-33절)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는 면이 소개된다(34,35절). 이 가운데 31-35절은 누가 만이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예루살렘 멸망을 애통해 하신 동기에 해당된다. 본문과 병행을 이루는 마 23:37-39에서는 예루살렘 멸망예언이 바리새인에 대한 저주에 이어 주어졌다.
하여튼 여기서 헤롯은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던 헤롯 안디바(Elerod Antipats, B, C.4-A.D. 39)를 가리키는데, 누가는 세례 요한을 죽인 후 예수를 만나고 싶어 했던 헤롯이 다시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메시야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척이 더욱 가속화되어 수난의 시기가 임박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헤롯의 손에 죽게 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복음 사역을 수행하시다가 때가 이르면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제 삼일에 부활하심으로써 메시야 사역을 완성할 것을 말씀하셨다.
한편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선지자를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며 심지어는 메시야마저 죽이는 죄악의 결과로 필연적인 것임을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비단 예루살렘의 멸망만을 예언하실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암시하심으로써(35절) 자기를 죽일 자들까지도 사랑하시며 아끼시는 인자의 자비로우심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연한 결과나 정치적 희생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② 성도들은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에게까지 라도 끝까지 사랑을 베풀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③ 유대인들의 버림받음은 이방인의 충분한 수가 차기까지로 종말의 때에는 그들도 회개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롬 11:25,26).
13:31 곧 그 때에…죽이고자 하나이다. - '곧 그 때에'(엔 아우테 테 호라)는 일부 사본에는 '그 날에'로 되어있으나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바로 그 때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교훈하실 때(16-30절)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나아온 것이다. 한편 바리새인들의 권고에 대해서는 ① 악의에 의한 것(Alford, Plummer, Spence), ② 선의에 의한 것(Gilmour)이라는 상반된 견해가 있으나 본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의 냉정한 답변으로 미루어 보아 ①의 견해가 타당하다(Hendriksen). 즉 바리새인들은 헤롯의 사주를 받고 예수를 위협하여 헤롯의 영토에서 떠나도록 하기 위한 계략의 일환으로 예수에게 헤롯이 그를 죽이려 한다는 정보를 알려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와 바리새인, 그리고 헤롯의 미묘한 삼각관계를 볼 수 있는 바, 그것은 바리새인과 헤롯이 본래는 적대 관계에 있었으나 그들에게 공동으로 위험한 존재로 인식된 예수를 음해하기 위해 연합 작전을 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 22:16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3:32 저 여우. - 헤롯의 교활성을 지적하는 말이다(Hendikrsen). 전지하신 예수께서는 분명 헤롯과 바리새인들의 교활한 음모를 간파하셨을 것임에 틀림없다.
오늘과 내일‥‥제 삼 일에는. - 여기서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라는 말은 제 자 파송 시(눅 9:1; 10:9)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도록 권능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즉 본절은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성과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계속 사역하시겠다는 말씀이다. 한편 '오늘과 내일 제 삼 일'에 대한 해석은 난해한데, 이를 ① 문자적 3일간으로 헤롯의 관내를 떠나는 기간(Meyer, Bleek), ② 예수의 공생애 3년 기간, ③ 오늘은 현재,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역을 완성하실 때까지의 기간(Bengel, Farrar)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가운데 ③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즉 예수께서는 그의 모든 사역을 마치시기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제 삼 일은 예수가 부활한 날을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완전하여지리라'(텔레이오마이)는 말이 '끝맺는다', '완성하다'라는 뜻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그의 구속 사역을 완전하게 이루실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결국 본절은 헤롯의 어떠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속 사역을 온전히 이루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예수의 구속 사역은 헤롯의 일정표가 아닌 하나님의 일정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Hendriksen).
13:33 그러나 오늘과‥‥길을 가야 하리니. - 여기서 '갈 길을 가야'(포류에스다이)한다는 말 속에는 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낫게 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역과 ②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이르는 길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일 등의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모든 사역이 내포되어 있다. 이 주님의 길은 사람이 대신하거나. 주님 자신이 피해 갈 길이 아니었다. 헤롯의 위협과 바리새인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무리들이 배척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친히 걸어가셔야 하는 길이었다. 이처럼 주님은 자신의 사역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셨고 이를 이루기 위해 외부적 악영향에도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셨다. 선지자가‥‥죽는 법이 없느니라. - 역설적 표현이다. 즉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헤롯으로부터의 위험을 말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산헤드린 공회와 무리들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아 죽게 될 것과 동시에 예루살렘 밖인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의 영토에서는 결코 죽지 아니할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세례인 요한 및 예수 공생애 당시 분봉왕들의 통치구역에 대해서는 본서 눅 9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13:34 본절과 다음절은 유대인들에 대한 멸망의 선언으로 마 23:37,38과 문자적으로 일치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 예루살렘에 대한 개탄의 표현이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심장이요 중심이며, 나라의 정신이나 태도를 반영한다(Hendriksen). 그런데 이 거룩한 도시가 거룩과 공의를 저버리고 살인자들이 우글거리게 된 것이다(사 1:21). 반복적으로 부르는 표현(삼하 18:33; 렘 22:29; 눅 22:31)은 그 심정의 간절성을 극대화한 표현이다.
선지자들을 죽이고‥‥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예루살렘의 배신과 주님의 사랑이 대조를 이루면서 안타까움이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예루살렘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로 쳤다는 표현은 유대 민족이 진리를 거스려 대적하고 하나님을 배반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유대 사회에서 돌로 쳐 죽이는 형(刑)은 신성 모독(레 24:14-23)과 우상 숭배(신 13:6-11; 17:2-7), 몰렉에게 자식을 바치는 행위(레 20:2-5), 신접할 때(레 20:27), 안식일 어길 때(민 15:32-36), 간음(신 22:20-24), 불효(신 21:18-21), 성물 탈취(수 7:22-25) 등에 해당된 저주의 형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선지자들을 돌로 쳐서 죽였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진리 자체 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화인 맞은 자들로서 마땅히 진노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가장 거룩해야 할 공동체가 가장 패역한 무리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베푸신 극진한 사랑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비유이다. 이와 비슷한 비유는 구약 성경 곳곳에서 발견되는데(신32:11; 시 17:8; 57:1; 사 31:5).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신 사랑이 지속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와 회개의 외침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지 아니하고 여전히 완악하게 행하며 그리스도를 배척한 사실을 가리킨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제동 장치가 풀린 폭주 열차처럼 멸망의 길로 치닫는데 맹목적인 의지를 발동했던 것이다. 결국 본절은 앞으로 이스라엘에게 닥칠 심판이 그들의 행위에 따른 자업자득으로서 피할 방도가 전혀 없음을 시사한다.
13: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 메시야의 초청을 거부하고 메시야를 박해하였으며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등 조상들이 채우기 시작한 죄의 잔을 마무리하여 다 채운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께서 멸망의 선언으로, 이는 A.D. 70년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한편 여기서 '집'(오이코스)에 대해서는 ① 성전, ② 예루살렘, ③ 국가 등으로 볼 수 있는데, 성전이나 예루살렘이 황폐화되는 것은 곧 국가의 멸망을 상징하는 바 여기에 제시된 세 가지는 모두 한 가지 사실, 곧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 이 구절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환호하며 불렀던 찬송의 내용이다(눅 19:38). 동시에 예수께서 종말에 재림하실 때에 모든 백성들이 부를 찬송이기도 하다. 이 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이 인정할 것이며, 심지어 예수님을 박해한 유대인들조차도 본 구절의 찬송이 그분에게 합당한 것임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심판의 선언 가운데서도 회복에 대한 암시란 면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롬 11장).
나를 보지 못하리라. - 예수께서 지상에서의 공생애를 마치시고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재림하실 때까지 예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이후에도 그들이 예수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목수의 아들 예수를 보았을 뿐 메시야이신 예수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들이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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