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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목자와 양의 비유 및 예수의 신성에 대한 자기 증거와 유대인들의 예수 배척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예수께서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절대 신성(神性)을 가지신 존재였으나 하나님이 태초부터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임을 입증함으로써 결국 예수의 그리스도직과 예수 안에서와 우리의 구원의 절대성을 확증하기 위하여 기록된 요한복음의 전반부에서 먼저 예수 공생애의 여러 사건 중에서도 이상의 사실을 잘 입증하는 여러 자료들 곧 예수의 관련자들의 증언들과 예수 자신이 행한 표적들과 자기 계시를 제시하는 1:19-12:50까지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1:19-12:50은 예수의 공생애 개시 기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공식 입성하시어 이제 곧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 전날 밤인 최후의 만찬 직전까지의 사건 중 이상의 진리를 입증할 수 있는 주요 기사들을 대략 연대순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본장 1-21절은 초막 절기 중에 있었던 사건의 기록이다. 이 무렵에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이 상당히 진행되었으나 전 우주의 구속주(救贖主)이신 메시야(Messiah)로서 오신 예수의 구속 사역을 다만 편협한 민족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입장에서 곡해한 유대인 가운데 한편으로는 민중들이 예수를 정치적 해방자로 추앙하는가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 ․ 종교 기득권자들이 예수를 정적(政敵)으로 여기고 무조건 배척하는 양상이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던 때였다.
또한 본장 22-42절은 유대 종교력으로는 9월 태양력으로는 12월경에 있는 수전절(修殿節)에 있었던 사건으로서 예수 십자가 수난을 4개월 남짓 남긴 때이다. 이때에는 유대인의 예수 배척 양상이 더욱 심화되어 예수께서 자기를 잡으려는 유대 지도자들을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마무리하시기까지 피해야만 하는 급박한 상황이 자주 연출되곤 하였다.
이런 배경 하에 본장은 예수께서 장차 유대인들의 배척에 의해 죽임을 당하실 것을 아시고, 자신의 죽음이 양들을 위한 선한 목자로서의 죽음이며, 그 죽음은 당신이 마땅히 죽어야 할 죄가 있거나 혹은 연약해서가 아니라 태초부터 있어온 하나님의 뜻과 구속의 원리에 따라 그분의 섭리(Providence)대로 작정된 것이며 또한 선한 목자로서 우리 주님이 자발적으로 순종, 헌신하신 결과임을 교훈하고 있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 내용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반부(1-21절)에서 1-6절은 목자와 양의 비유를 7-18절은 거짓 목자와 선한 목자의 특성과 사역의 대조점을 19-21절은 예수의 교훈을 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그의 교훈의 진정성 여부를 두고 논쟁을 벌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45절)고 말씀하시면서 참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됨을 강조했다. 한편 참 목자가 양을 위해 생명을 희생해야만 하는 까닭은 하나님과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언약을 맺으면서 이를 어길 경우 정녕 죽을 것이고 지킬 때에는 생명과 축복을 보장해 주기로 한 약속과 관계된다. 즉 인간은 이를 어겼고 그래서 인간의 죽음은 필연적이었다. 이에 하나님은 절대 거룩한 당신이 세우신 법은 일단 지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 책임은 지게 하면서도 그 죄를 범한 인간 자체만은 회개를 전제로 살려주시기 원하셔서 새로이 구속 계획을 세우셨다. 그리고 이 구속 계획에 따라 인간을 대신하여 다른 존재가 죽어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사 인간 자체는 살리시는 구속의 원리, 곧 대속(代贖)의 원리를 세우셨다. 그런데 그 대속 희생을 할 자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인간이어야 했고, 또 인류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보증할 수 있는 자이어야 했다. 고로 이런 존재는 아담의 죄의 혈통을 통해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며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밖에 없다.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막 10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따라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점도 흠도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서(벧전 1:19) 인간의 죄를 대속하사 자기 목숨을 내어 준 자가 바로 우리의 참 목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에 의해서만 참 생명과 영원한 축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바로 제 2위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우리의 참 목자라는 사실은 그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 수난을 받으신 사건을 통하여 명백하게 입증이 되었다. 이제 그를 참 목자로 모시고 그를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 하는 선택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리고 선택은 자유이되 그것의 결과는 우리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생명의 선택인가 사망의 선택인가?
후반부(22-42절)에서는 예수께서 예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참 목자에게 속한 양과 그렇지 않은 양의 속성에 관해 교훈하신 사실(22-30절)과 참 목자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가지고 계신 자신의 신성에 대한 자기 증거와 유대인들의 예수 배척(31-39절), 그리고 과거세례인 요한의 증거를 믿은 자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믿은 사실을(40-42절)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측면 중 그의 신성(神性)을 강조함으로써 그가 원래 절대 무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택한 죄인들을 대속하기 위해 성육신하셨을 때 절대 순결한 인간이 될 수 있었고 십자가 수난을 받으사 구속 사역을 성취하실 수 있었음을 증거하는 책이다. 이런 요한복음의 기록 의도 때문에 본서에는 자주 예수의 신성에 관한 자기 증지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하되 주로 신성 모독자로 몰아 배척한 사실을 기록한다. 이에 유대인의 예수 배척에 관한 전반적인 사실에 관해서는 막 12장 연구 자료를 참조토록 하고 여기서는 유대인이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를 배척한 사실이 갖는 구속사적 의의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유대인의 예수 배척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장하시는 삼위 하나님 중 제 2위 성자 하나님에 대한 배척이었다는 점에서 그들 오류의 심각성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는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태초부터 예비된 우리의 구주(救主)이셨다. 또한 예수는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잠시 유보하시고 택한 죄인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대속의 원리를 성취하는 십자가 수난을 당하신 절대 유일한 우리의 구속주(救贖主)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과가 확실하며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예수께서 약속하신 영생과 천국의 축복이 반드시 주어지리라 확신하는 것은 그분이 그 모든 것을 보증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은 곧 구원의 유일한 방편이며 또 구원의 확실한 보증자(保證者)이신 성자 하나님을 배척한 셈이 된 것이다. 그러한 그들에게 멸망이 닥침은 필연적이라 하겠다.
외울 말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목자와 양의 비유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거짓 목자와 선한 목자 비교
7 〇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의 교훈에 대한 유대인들의 논쟁
19 〇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참 목자의 양들의 축복
22 〇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의 예수 배척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39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세례 요한의 증거를 받은 자들의 믿음
40 〇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본문 & 자료노트
풍습-10:1-5, 양 우리
1. 형태
성경시대에 있어서 유목 생활이 큰 비중을 차지한 만큼 팔레스틴 들판 곳곳에는 양과 염소들을 몰아 둘 수 있는 양 우리가 많았다.
양 우리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먼저 집에서 멀리 떠나 있거나 산간 지방에 있을 때 목자들이 임시로 억센 가지 등으로 울타리를 세워 양들이 야숙(野宿)할 수 있도록 만든 임시 우리가 있다. 또 이런 단순한 임시 우리 외에 보다 영구적인 우리가 있는데, 팔레스틴에는 천연적으로 동굴이 많았던 만큼 이 동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돌을 쌓아 둥글게 울타리를 만들어 동굴과 연결시킴으로써, 폭풍이 치는 날이나 밤에 양들을 동굴에 들어가 있도록 하였다. 또한 동굴이 필요 없는 곳에서는 양을 보호하는 요새로서 양 우리를 지었는데, 돌을 쌓아 벽을 만들고,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붕을 만들어 덮었다. 이런 양 우리의 경우에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아아치 형의 문이 있고, 바깥쪽에 넓은 울타리를 하나 더 세웠다. 그리고 벽 꼭대기에는 강도나 다른 들짐승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날카로운 가시덤불을 세웠다. 그래서 날씨가 좋을 때는 밖의 울타리 안에 양들을 모으고, 혹 날씨가 흐리거나 추운 밤에는 지붕과 벽이 있는 우리 안으로 양들을 몰아 보호하였다.
한편 양 우리에는 별도로 문을 만들어 세우지 않았고, 보통 아아치 형의 출입구만을 만들었다. 그래서 야숙(宿)할 경우에는 목자들이 대신 출입구에 누워 양 우리를 지켰다. 또한 양 우리에 들어갈 때도 양들이 빽빽하게 모였을 때 목자는 양 우리 출입구에 서서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들여보냄으로써 낙오자가 없는가를 다시금 확인했다. 이렇듯 양들은 목자를 통해서만 양 우리를 출입할 수 있었다.
2. 의의
이상과 같이 예수님은 목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양 우리를 출입할 수 없었던 당시 팔레스틴의 낯익은 양 우리와 목자의 역할을 들어 '나는…이다'라고 선언하셨다. 이렇듯 예수님은 당시 백성들과,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구원의 진리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실생활 속의 관습을 비유로 사용하신 것이다.
보감-10:1-18 주님의 선한 목자로서의 사역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어린 양들인 우리 성도들을(시 100:3) 예수님이 친히 맡아 기르시고 다스리시며 이끄심을 암시한다. 다음에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들인 우리 성도들을 어떻게 이끄시는지를 살펴보자.
1. 양들을 아심(요 10:14)
2. 각각 양들의 이름을 부르심(요 10:3)
3. 양들을 한데 모으심(요 10:16)
4. 길을 인도하심(요 10:3,4)
5. 풍성히 먹이심(요 10:10)
6. 품에 안으심(사 40:11)
7. 보호하고 지켜주심(요 10:28)
8. 구원하심(요 10:9)
9. 우리 안으로 들어가 쉬게 함(요 10:9)
10. 잃은 양을 찾으심(눅 15:3-6)
11. 양들을 위해 대신 죽으심(요 10:15)
12. 영생을 주심(요 10:28)
신학용어-10:1, 진실로 진실로
요 6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10:1-18 선한 목자와 거짓 목자의 특징 비교
1. 선한목자
1)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감 (1절)
2)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음 (4절)
3) 양들이 그를 따름(4절)
4)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함(10절)
5) 양을 위해 목숨까지 버림(11절)
2. 거짓 목자
1) 양 우리의 다른 데로 넘어감(1절)
2)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모름(5절)
3) 양들이 따르지 않고 도망감(5절)
4) 양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킴(10절)
5) 위험이 닥치면 양을 버리고 달아남(12절)
원어 연구-10:24 의혹케 하려나이까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이레이스'이다. 이는 '취하다'(take up), '들어 올리다'(lift), '가져가다'(carry), '파멸시키다'(destroy)라는 뜻의 동사 아이로'의 2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형이다.
여기서 '아이로'는 일차적으로는 땅에 떨어진 물건을 집어 올리거나 운반하는 것, 또는 취하여 가져가는 것, 제거해 버리는 것을 뜻한다(막 16:18; 요 8:59; 11:39). 그리고 이것은 정신적인 측면에서 두려움, 희망, 기쁨, 혹은 슬픔 등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다(눅 17:13; 행 4:24), 또는 죄를 지고 가다(요 1:29), 죄를 제거하다(요일 3:5)라는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본절에서 '아이레이스'는 '마음을 흥분케 하다', '기대에 부풀게 하다' 등의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본절의 상황을 설명해 보면, 예수께서 수전절에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 그 가르침을 듣던 유대인들이 그의 가르침에 크게 놀란 나머지 마음이 흥분되어 예수가 스스로 속 시원하게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밝혀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이 그렇게 요구한 것은 저들이 예수를 참 메시야로 믿고자함이 아니라 어찌 해서든지 예수를 스스로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신성 모독자로 만들어 제거하고자 함이었다. 이에서 우리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풍습-10:22 수전절
1. 명칭
수전절(Feast of Dedication)은 마카비 축제(Feast of Maccabeus), 광명절(Feast of illumination), 재 헌신제(festival of Rededication)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또한 이 축제 동안 축제일 첫날부터 하루에 촛불 한 개씩을 밝혀가서 결국 촛불 8개를 밝히는 의식으로 인하여 '촛불절'(Feast of Lights)로도 알려졌다.
2. 기원
수전절(히, 하누카)의 기원은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us)가 성전을 정결케 하고 재 봉헌한 B.C. 164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곧 시리아의 통치자인 안티오쿠스 4세가 B.C. 167년 침략하여 성전을 모욕하고 약탈 또한 자기의 방식대로 예배를 바꿔 놓았다. 그리고는 그가 태어난
날에 맞춰 매달 25일에 성전에서 이방 제사를 드리도록 했으며,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버리든지, 아니면 죽음을 택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던 중 안티오쿠스 4세가 전쟁으로 외유하게 되었고, 이를 틈타 유대인들은 마카피를 필두로 하여 헬라화 정책에 대한 반대 혁명을 일으켰다. 그 후 유대인들은 평화 협정을 맺어 성전을 되찾게 되었고, 이에 그 동안 헬라인들이 성전을 더럽혔으므로 특별히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을 새로 쌓아 B.C. 164년 성전을 재 봉헌했다. 이것이 오늘날 보통 '하누카'(Hanukkah)로 알려진 연례적인 봉헌축제일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3. 시기
보통 이 절기는 오늘날의 11,12월에 해당하는 유대력 기슬르월 25일부터 8일 동안 계속된다. 이렇듯 축제를 8일간 계속하는 것도 남유다 제 13대 왕이었던 히스기야 왕이 성전을 8일 동안
성결하게 한 사실과 연관되기도 한다(대하 29:17).
4. 축제 관습
성전에서 수전절을 지내게 될 때 유대인들은 할렐(Mallel)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는 시 혹은 노래, 시 120-134편)을 부르며 기뻐하게 된다. 그러나 수전절은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절기를 지켜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방에서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이 축제를 지 켰다.
이날은 악의 세력으로부터 광명을 되찾은 승리의 날이요 즐거운 날이었으므로 많은 유대인들은 창문에 특별한 등불을 걸어 놓고. 거리에서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며 즐겁게 보내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는 슬퍼하는 것이 금지되었던 만큼 기쁜 시간을 가져야 했다.
특히 전설에 의하면 새 기름을 봉헌할 때까지 유다 마카비가 갖고 있던 하루 정도 불을 켤 수 있는 적은 양의 성전 기름이 기적적으로 8일간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전설에 기초하여 8일간의 축제 기간 동안 등불을 피웠는데, 후에는 이것이 축제일 동안 하루에 양초 하나씩을 피워 결국에는 촛불 8개를 밝히는 것으로 바뀌었다.
5. 의의
중간시대 때 하나님의 성전을 귀중히 여겨 재건하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여 8일 동안 축제로서 지키게 된 본 수전절(修展節) 구약의 예물 봉헌(민 7:10). 솔로몬 성전의 단 봉헌(대하 7:9).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느 12:27) 등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이는 결국 신약시대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성전된 성도 각자가 몸의 성결을 힘써야함을 증거한다(고전 3:16,17).
지도-10:40-42 요단 강 건너편에서의 예수 사역
10:1-21 선한 목자이신 예수
본장의 첫머리를 열고 있는 본문을 본서에 소개되는 예수님의 중요 강화(요 3:1-21; 4:1-26; 5:19-47; 6:22-59; 7:10-53; 8:12-59; 10:1-21; 13:34-14:31) 중에서 일곱 번째 강화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앞장 마지막 단락(요 9:35-41)에서 언급된 바 있는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유대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을 영적 소경에 비유하셨던 예수께서는 그들이 결코 자신처럼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가 아니며 단지 절도나 강도 혹은 삯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가르침에서 알 수 있듯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절도나 강도 흑은 삯꾼에 불과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① 양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 안으로 들어가느냐(2절), 아니면 양들을 해치거나 도적질하기 위해 우리 안으로 들어가느냐(1절)이다.
② 양들을 위해 맹수와 맞서 싸우며 심지어 목숨마저 버리느냐(11절), 아니면 자신의 안위(安慰)만 도모하려고 양들을 버리고 도망치느냐(12,13절)이다. 즉 진정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며 또한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탄의 권세와 맞서 싸우셨으며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맛보시기까지 했다. 하지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무지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율법의 멍에를 씌웠으며 자신들에게 맡겨진 의무는 행치 않는 악한 목자의 모습만을 보인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로 비유하신 이유는 목축에 익숙한 유대인들의 풍습을 배경으로 하여, 영적인 진리를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인데, 구약 성경의 에스겔 선지자 역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한바 있다(겔 34:7-16). 따라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야 말로 참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우리에 들어가게 하는 양의 문이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목자이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가 구약 성경에 예언된(렘 23:1-4) 참 목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본문은 우리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점을 반성케 한다.
① 우리는 선한 목자를 따라가는 선한 양들인가?
② 하나님께서 맡기신 많은 양들을 보살피고 위로하는 직분들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③ 목자의 음성을 듣기 위해 성경 말씀을 늘 상고하는가?
④ 주께서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핑개치 않으시고 양들을 구원한 참 사랑을 보이셨건만, 그러한 은혜를 받은 우리는 과연 묵묵히 주의 발자취를 따르며 주님께서 보이신 참 사랑을 이웃들에게 증거하고 있는가? 진정 주님은 자신이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심을 골고다 십자가 언덕에서 보혈의 피를 흘리심으로 증거하셨다. 만일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지 못하다면 정녕 이제라도 돌이켜 주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마땅히 행할 바를 감당해 나가야 할 것이다(마 18:33).
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말의 진실성과 신적 권위를 더하여 주는 엄숙한 선언체이다. 요 1:51 주석 참조.
양의 우리에. -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 볼 수 있던 일반적인 양의 우리는 지붕이 없는 형태였다. 그것은 사방으로 돌아가며 울퉁불퉁한 돌을 쌓거나 진흙으로된 거친 벽돌들을 둘러가며 친 어설픈 형태의 것이었다. 한편 본장에서 이것이 특별히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유일한 '양의 문'이라고 표현하신 말씀과 연관해서이다(7절 주석 참조). 이러한 상징성과 결부하여 이 이야기가 비유(6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칼빈이나 루터가 이 '양의 우리'를 각각 신약 시대의 '교회'나 예수로 말미암아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 '양의 문'은 양의 우리에 오직 하나 뿐인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더구나 그 문에는 목자가 누워서 지키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문을 통하지 않고 양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우리를 기어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절도며 강도요. - 이 단어들은 강조적인 의미로 반복된 것으로 보이나 이 두 단어의 의미가 정확하게 동일한 것은 아니다. 본서 안에서 이 단어들은 구분되어 남의 것을 몰래 훔치는 '절도'(클레프테스)는 가룟 유다에게(요 12:6). 폭력으로 남의 것을 강탈하는 약탈자를 뜻하는 '강도'(레스테스)는 바라바에게(요 18:40) 적용되었다(A. Robertson). 그러나 양자 모두 재물을 손에 넣기 위해 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므로 예수를 대적하며 왜곡된 비진리로써 그의 택한 백성들을 사망의 길로 인도하던 잘못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적용되기에는 이 단어들이 적절한 표현들이다(마 23:15).
10: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 '목자'라는 단어(포이멘) 앞에 관사가 없기에 이 '목자'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보내셨던 수많은 선지자들과 주의 종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Hendriksen).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킨 것이 거의 틀림없다(16절). 그러기에 신약 저자들도 종종 그리스도에게 이 표현을 적용한다(히 13:20; 벧전 2:25). 한편 이 표현이 초대 교회에서 활동하였던 '전도자'(엡 4:11; 벧전 5:2), '장로들'(행 20:28)에게도 사용된 예들이 있으니 참조하라(A.Robertson), 결론적으로 1,2절에서 비유적으로 적용된 각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양'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즉 성도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양의 목자' 또는 '양 우리의 문'(1,7절)은 그 양들을 돌보도록 위임받은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양의 주인'은 곧 성부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 통상 규모가 작은 목장에서는 밤 동안 양의 문을 목자가 지키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규모가 큰 목장의 경우, 밤 동안 양들을 지키는 일을 위해 '문지기'를 고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유대인들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경우를 들어 이야기하시는 예수의 의도는 청중들에게 친숙한 것을 통해 보다 심오한 진리를 들려주시기 위함이었다. 마 13장 연구자료, '예수의 '비유의 이해' 참조. 한편 예수께서 자신을 '양의 목자'로 언급하신 것에 비추어(2절) 그렇다면 '문지기'는 누구를 의미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이에 학자들 간에는 '문지기'가 상징하는 바가 '하나님'(Calvin), '세례인 요한'(Godet). '성령'(Alford, Lange) '모세'(Chrysostom) 등이라고 다양하게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의도하신 바를 넘어선 과도한 해석이다. 즉 여기서 '문지기'는 비유로써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나가기 위하여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은 채 사용한 보족어(補足語)일 수 있다. 따라서 이 단어에 너무 집착하여 예수께서 의미하시는 바 전체 비유의 요지를 흔동하는 것은 금물이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 실제로 양치는 자들이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기억하고 있으며 늘 듣던 그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고 따른다고 한다.
그가 자기의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 근동 지방에서는 목자들이 양의 특성에 따라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들을 일일이 부름으로써 양들을 불러 모으는 경우를 목격하는 것이 그리 드물지 않다고 한다. 그 이름의 예를 들면 '흰코쟁이'(White-nose), '긴 귀'(Long-ears) 등 신체적 특징이나 독특한 습관에 따라 붙여진 것들이다(C.T Willson). 이렇게 양들의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은 양들에 대한 목자의 개별적인 관심과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와 관련 예수께서도 자신의 제자인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보아너게'란 이름을 붙여 주신 사실(막 3:16,17)을 기억함은 매우 흥미롭다.
10: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 팔레스틴에서는 때때로 여러 목자에게 속한 양떼가 한 우리 속에서 밤을 지낼 때도 있었는데(Hendriksen). 밤을 지내고 난 후에 목자들은 자신에게 속한 양들을 빼놓지 않고 전부 구별하여 우리 밖으로 끌어낸다고 한다. 여기서 '내어 놓은'에 해당하는 '에크발로'는 '강제로 몰아내다'라는 뜻을 가지는 단어로 양들이 나오기 싫어해도 억지로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의 행동을 묘사하는 데에 일차적인 강조점이 있다(Morris, Brown). 그런데 이 '에크발로'가 전장에서 소경이었던 자를 유대인들이 '쫓아낸 것'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요 9:34)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사실은 그릇된 지도자들과 진정한 목자이신 예수의 행위를 같은 단어로 비교하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는 정반대임을 나타내 준다.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 드넓은 평원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서양의 경우, 대개 가축 몰이는 여러 몰이꾼이 말을 타고서 가축들 후미에서 모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목초지는 대개가 산간 지역이므로 험한 곳을 지날 때 목자가 양 떼의 선두에 서서 길을 인도한다. 이때 양들은 목자의 모습과 특히 음성을 확인하여 자신의 목자를 따른다고 한다. 이러한 목자와 양의 관계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기본적인 양상을 암시해 준다(G.Beasley-Murray). 즉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르며 다른 곳에 눈을 돌려서는 안된다.
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 여기서 '타인'이란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가리켜 말하는 진정한 목자와 구별되는 자들을 의미한다. 즉 이는 예수 자신이 아니라 1절의 '절도', '강도'와 더불어 12절의 '삯꾼 목자'로 상징화되는 존재의 실체, 다시 말해서 당시 백성들의 지도자라 자처하면서도 그들을 잘못 인도한 유대교 지도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Brown).
10: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 이에 해당하는 '파로이미아'는 공관복음에 자주 나타나는 '비유'(파라볼레)란 단어(마 13:3; 막 12:12; 눅 18:1)와 유사한 단어로 '파라'(옆에)와 '오이모느'(길)의 합성어이다. 통상 이 두 단어는 '속담'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나 문맥에 따라 '뎃대어서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요 16:25,29). 특히 후자의 뜻으로는 본서에서와 벧후 2:22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한편 예수께서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들어서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사람 이외에는 그 말씀을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마 13장 연구자료, '예수의 비유의 이해'를 참조하라.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 여기서 '저희'란 예수의 제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 특히 9장에서 예수를 대적한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유대인 무리를 가리킨다(19절).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 예수께서 청중들에게 말씀하셨던 비유(1-6절)를 다시금 풀어서 설명하고 계심을 나타내 주는 구절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예수의 독특한 자기 선언적 형식, 즉 '나는~이다'(에고 에이미)는 표현이 또다시 사용된 부분이다. 이에 관해서는 요 6:35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양(들)의 문'이란 '뒤라 톤 프로바톤'으로서 '양들이 들어가는 문'이므로 정확히는 '양의 우리의 문'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의 비유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는 생소한 개념이다. 하지만 이 표현은 이 비유에서 핵심적인 말씀인 '나는 선한 목자'라는 말씀과(14절)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다. 과거에 팔레스틴에서 보통 볼 수 있었던 소규모 목장에서는 밤을 지낼 때 양의 우리의 문에 문짝을 달지 않고 목자가 그 문 입구에 누워서 밤을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목자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든 양의 우리를 넘나들 수가 없었다. 따라서 목자들은 자신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즉 이 표현은 목자가 자신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을 사히딕 역(The Sahidir version)은 '양의 문'대신에 '목자'라는 독법(reading)으로 반영하는데, 이것은 일부 파피루스 사본의 지지를 받는다(Brown).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 여기서 예수보다 먼저 온 자 곧 '절도'나 '강도'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 '구약의 선지자'라는 주장은(C. Barrett) 신빙성이 적다. 오히려 이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 출현했던 거짓 메시야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더 일리가 있다(행 5:36,37). 하지만 1절과 연결하여 볼 때 이는 예수께서 현재 비판하고 계신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1차적으로 지적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Hendriksen). '절도요 강도니'라는 구절에서 '~이다'(에이시)란 동사가 현재형인 사실이 이러한 동시대성을 입증해 준다(L.Morris). 한편 실제로 양들은 다른 가축에 비해 청각이 발달되어 있으므로 늘 들어오던 음성을 지닌 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접근하여 데리고 가려 할 때 그 목소리가 다른 것을 알고는 놀라서 흩어진다고 한다.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 본절은 궁극적으로 예수가 온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나타내 준다(요 14:6). 이러한 본절 속에는 다음과 같은 구원론적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① 구원의 보편성: '누구든지'라는 표현 속에는 구원의 문이 '열린 문'으로서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자들에게 제공된다는(요 7:17) 사실이 제시되고 있다. 요 3:16의 '세상'이라는 용어의 개념도 이 같은 사상을 반영한다. ② 계시의 절대적 배타성: '나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디 에무'는 강조적 위치에 놓여서 진리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 예수임을 강조해 준다(A.Robertson, L.Morris). 사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문'을 통해서만 구원의 '우리'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③ 구원의 전인격적 측면: '구원을 얻고'에 해당하는 '소데세타이'는 '안전하고 견고한' 흑은 '건강한(Well)을 의미하는 '소스'( )에서 유래한 '소조' 동사의 미래형이다. 이 표현은 단순히 영적인 측면만을 의미하지 않고 육체적인 측면까지 포함한 전인격적 구원을 의미한다.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 '들어가며 나오며'라는 표현은 양의 문이 '우리'의 유일한 입구이며 또한 출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히브리적 용법(Semitism)으로서 단회적으로 들어가는 행위와 나가는 행위 그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대신 이는 이 두 행위를 가지고 일상적인 삶 전체를 나타내는 일종의 제유법(提喩法)이다(신 28:6,19). 즉 한 사람이 들어가며 나가는 행위는 하루의 생활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이것은 나아가서 그 사람의 삶 자체를 뜻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꼴'(노메)이란 용어는 요한이 일관되게 구원론적 문맥에서 표현해 온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 4:14), '생명의 떡'(요 6:35)과 연결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C.Barrets). 즉 이 모든 비유적 표현들은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의 축복을 상징함이 분명하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본절의 '꼴'은 '들어가며 나가며'라는 표현과 함께 현재적 삶 속에서 누리는 구원론적 축복의 일상적이며 지속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는 말씀을 연상시켜 주는 구절이다. 사실 예수 당시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백성들을 그릇 인도하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저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 영적 살인자요 파괴자였다(마 23:15).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예수께서 이 땅에 강림하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구절이다. 즉 예수께선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며 또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하늘로부터 임하는 영적인 은사들을 풍성히 누리게 하시고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버리고 성육신(成肉身)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를 알지 못한 채 예수를 배척하였으니 이에 예수께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눅 13:34)라고 탄식하신 것이다.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선한 목자'로 지칭되었고(시 23:1; 95:7; 사 40:11; 렘 31:10) 다윗이나(시 78:70-72) 모세(사 63:11)와 같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도 이 명칭이 부분적으로 적용되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예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지칭하신 것은 예수 자신이 온 인류의 구원자이시며(겔 37:24) 동시에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목숨을 버리거니와'에 해당하는 원어 '프쉬켄 아우투 티데신'은 마가의 '목숨을 준다'(두나이 텐 프쉬켄)는 표현과(막 10:45) 유사한 요한의 독특한 표현이다(17,18절; 요 13:37; 19:13; 요일 3:16, Brown). 즉 이는 예수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으심이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임을 강조해 준다. 그 같은 죽으심은 또한 성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한 것이었기도 하다(18절; 요 17:4; 18:11).
10: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 '삯군'에 해당하는 '미스도토스'는 '삯', '세'를 뜻하는 '미스도스'에서 파생한 매우 오래된 단어로 신약에서는 막 1:20과 본절에만 나오는 드문 단어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도 대규모로 목축할 경우 주인인 목자 외에 따로 고용인을 두었는데 바로 이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삯군'이 목자가 아니라는 말은 그는 단지 일꾼일 뿐 양의 소유주가 아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목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율법 해설서인 미쉬나(Mishnah)는 이러한 고용된 삯군의 법적 책임 한계를 정해 놓았다. 그 규정에 의하면 한 마리의 이리가 공격할 경우 반드시 그 공격을 막아야 하고 만약 양 무리에 피해가 있으면 보상해야 했다. 하지만 두 마리 이상의 이리가 예측 못한 공격을 해 온다면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하여 양들을 보호하지 못했어도 책임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Morsis). 이러한 고용된 삯군들의 책임의 한계를 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자신의 소유가 아닌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당연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에서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삯군이 아닌 목자와 양들 간의 친밀하고 불가분리적인 관계임을 유념해야 한다(13-15절).
10:13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원문상 문두에 나오는 '호티', 즉 '왜냐하면'은 본절이 12절의 추가적인 설명이라는 사실과 아울러(Brown) 삯군의 행동의 원리에 대해서 밝혀 주는 것임을 나타낸다(Robertson).
달아나는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 삯군은 일정한 보수를 받고 양들을 돌보기 위해 고용된 자이므로 양들과의 인격적이며 친밀한 관계가 요구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위험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걸고 양을 돌보지는 않는다. 이는 그의 일차적 관심이 양들의 안전이 아닌 그것들을 돌보는 대가로 받는 임금(wages)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적으로 증명되었는바 간혹 목자가 자신의 양을 위해 목숨을 잃는 경우는 있었지만 삯군이 그러했던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 진정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15절) 이유가 본절에 제시되어 있다. 그 이유는 목자이신 예수와 양들 간의 친밀한 관계성으로서 본절에는 그 관계성이 이중으로 강조되어 있다. ① '내 양'이라고 말씀하시 는 것은 예수에게 소속된 양들의 존재를 단적으로 반영해 준다. 이렇게 예수께서 양들을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 양들을 주셨기 때문이다(요 6:37,44,65; 17:6,7). ② 목자와 양이 '서로를 안다'는 말씀은 예수와 성도들 간의 친밀성을 강조해 준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알고 그들을 개별적으로 부르며(3절)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른다(4절). 여기서 '안다'(기노스코)는 표현이 대구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예수와 성도들 간의 진정한 관계가 단순히 직관적이며 순간적인 지식(오이다)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지속적인 지식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강조해 준다.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 14절에서 예수께서는 삯군이 아닌 목자와 양들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서로를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본절에서는 '같으니'(카도스)라는 표현으로 그 목자와 양 간의 앎을 성부와 성자 간의 상호 이해 혹은 상호 지식과 비교하고 있다. 후에 중보자로서의 기도(요 17장)에서도 밝히시듯이 '아버지께서 내(예수)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요 17:21)것은 본서에서 특징적으로 강조하는 성
부와 성자간의 본질적 동질성(essential equality)을 나타내는 것으로, 성부와 성자 간의 상호 지식은 바로 이 동질성에 근거한다. 한편 실상 연약한 본성을 지닌 우리는 성부와 성자 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완전한 교제나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대신 예수께서 자신과 성부간의 그 확고한 친밀성으로 자신과 우리 성도들 간의 친밀함을 보증해 주시니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이다(요 15:4).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사실 목자와 양들 간의 친밀함의 확실성은 목자의 이 같은 헌신적 행동에 의해 가장 잘 입증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11절의 말씀을 다시금 반복하시는 예수께서는 당시에 목자들이 양을 지키다가 맹수에 의해 목숨을 잃기도 하는 실제적인 일을 염두에 두시며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한편 요 15:13에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가장 큰 사랑'에 관해 말씀하신 것과 더불어 이 '목자의 희생적 죽음'에 관한 말씀은 예수 자신이 곧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을 예시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요 16:16).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 본절의 '우리'란 개념을 1절과는 다른 개념으로 보아 보다 좁은 뜻으로 이해하는 자들도 있다(Barrett, Brown). 즉 본절은 한 목자가 가진 양의 규모와 그 양들이 거하는 공간을 뜻하고 1절의 '우리'는 그러한 목자들 여럿이 모여 보다 확장된 영역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1절과 본절에서 '우리'라는 개념의 차이는 '영역적'이라기보다는 '시간적'이다. 왜냐하면 이 우리 속에 '아직' 들지 않은 다른 양들도 목자이신 예수의 인도를 받아서 곧 '한 무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양들'이라는 말은 '유대인'이라는 혈통의 범위를 넘어서 장차 예수를 영접하게 될 이방인 신자들(L.Morris)을 의미한다(행 11:1; 15:6-11; 롬 1:16). 사실 웨스트콧(Westcott)의 말대로 예수의 양 무리들은 팔레스틴, 혹은 다른 곳이라는 우리 속에 둘러싸인 한정된 지역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영역은 오고 오는 모든 시대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포괄한다(마 8:ll; 눅 13:28; 요 11:52; 12:32). 즉 참된 목자되시는 예수의 죽음은 아직은 그의 음성을 알지 못하지만 끝내 알게 될 우리 밖의 양들도 포함한 모든 양들을 위한 것이다(요 3:16; 6:51; 11:50-52; 12:20,24,31,32, G.Beasley-Murray).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 이는 장차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서 예수를 믿게될 것을 뜻한다(요 18:37).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 '한 무리가 되어'에서 '무리'에 해당하는 '포임네'는 '양 무리'(sheep herd) 혹은 '떼'( )라는 뜻으로 '목자'라는 말(포이멘)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절대적인 '한 무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 무리'내에 유기적인 연관을 가지는 '여러 무리들의 모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제름(Jerome)은 벌게이트역(Vulgate)에서 이 단어를 번역하면서 1절과 16절에 나타나는 '우리'(fold)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울레'와 같은 뜻을 지닌 라틴어 '오일레'(Ouile)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번역은 카톨릭의 '한 교회 한 교황'이라는 역설적인 교리를 위한 근거를 제공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한 우리 안의 한 무리'를 의도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 우리에 있더라도 한 무리'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카톨릭 교회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Bernard). 물론 그렇다고 하여 오늘날 개신교의 분파주의가 옹호될 근거로 이 본문이 사용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분열만을 일삼는 기독교(divided christianity) 역시 주님께서 원하신 바는 아니다(Brown). 한편 '한 목자'라는 표현은 겔 34:23; 37:24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한 목자였던 다윗왕으로 묘사된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상기시켜 주는데 이렇게 예수를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양 무리의 목자라고 규정하는 사상은 신약 성경의 기록자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마 2:6; 벧전 2:25; 5:4; 계 7:17).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 한글 개역성경은 생략하고 있지만 헬라어 본문에서 본절을 시작하는 '디아 투토'는 '이 때문에', 혹은 '이를 인하여'라는 뜻으로 이어 나오는 '호티'절에 연결된다(A.Robertson). 즉 본절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내가 목숨을 버리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 목숨을 다시 얻으려는 것이다'라고 볼 수 있다(새번역, 공동번역 ).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 양들을 위해 목자가 기꺼이 죽을 수 있다는 말씀은 이미 11,15절에 언급되었지만, 여기서 예수께서는 목자의 전원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목양적(pastoral) 이미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곧 당하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실제적 사건을 예견하면서 다시 한 번 죽음에 관해 말씀하신다(f. Beasley-Murray). 즉 비유적 말씀에서는 양을 지키던 목자의 죽음이 단지 양을 사랑하는 헌신적 사랑 때문이라고만 말씀하셨지만 이제 비유를 결론지으면서 예수께서 그의 죽음이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역설적 진리를 선포하고 계신다(Bernard). 즉 자신의 죽음은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 또한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사 영생의 보장(고전 15:12-19)이 되기 위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10:18 이를 네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 예수께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한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는 구절이다. 11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러한 예수의 죽음의 자발성은 우리 인류의 구원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즉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께서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면 온 인류에 대한 대속적(代贖的) 효력을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Hendriksen). 그러나 예수께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벧전 2:24) 하셨다. 한편 예수의 이 자발성은 요 5:19의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틀림없이 성부께서는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고자 하는 자발성을 지니신 성자를(5:8) 우리들에게 주셨기(요 3:16) 때문이다.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 '빼앗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로' 알렉산드리아 사본
(A). 베자사본(D), 모스코사본(K), 레기우스사본(L)등에서는 현재형인 '아이레이'로 나와 있다. 그러나 프리얼 사본(W), 바티칸 사본(B), 시리아 역본 등이 취하는 부정과거 시제 '에렌'이 보다 본래의 형태일 것이다(Westcott, Hort, Bernard, Robertson, Brown, Hendriksen, Morris). 왜냐하면 이 부정 과거 시제는 예수께서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기적으로(Proleptically) 성취된 것으로 보고 계심을 나타내주는 용법이기 때문이다(Robertson, Morris). 더욱이 이러한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로 묘사하는 부정과거 시제를 사용한 예기적 표현(Proleptic, expression)은 본서 저자 요한에게 있어서는 특징적인 필치이기도 하다(요 3:16; 17:2,4).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 ‘권세’에 해당하는 엑수시아는 ‘권세, 능력, 특권, 권리, 자유, 세력’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예수께서 지니신 ‘신적 권능’이나 ‘영광’ 혹은 ‘구속주로서의 고유한 사역’을 의미한다(Hendriksen). 그런데 공동번역은 이를 ‘목숨을 바칠 권리’와 ‘다시 얻을 권리’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버릴 권세’나 ‘다시 얻을 권세’라는 말씀은 양들을 위한 예수의 죽음이 자발적인 것이며 예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구속 사역의 자발성과 고유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해 준다(Bernard, Lagrange).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 여기서 ‘계명’(엔톨레)는 ‘명령, 사명’ 또는 “책무, 권세‘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인류 구원 사역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성육하신 것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함이었다(요 4:34).
10:19,20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 '분쟁'(스키스마)은 서로 의견이 나뉘어 논쟁을 벌이는 것을 가리킨다. 요 7:43 주석 참조. 이 분쟁은 20절과 21절에 각각 묘사된 두 부류의 사람들 간에 발생했는데, 21절에서 예수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요 8:31에 나오는 예수를 믿은 사람들과 요 9:16에서 소경을 치료하신 예수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바리새인들과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인 것으로 보인다(Robertson). 그러나 이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으며 나머지 대다수는 예수를 불신하여 저가 귀신들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난은 이미 본서에서도 여러 차례 있었고(요 7:20; 8:48,52) 공관복음에도 나타난다(막 3:21). 그런데 이처럼 '귀신들려 미쳤거늘' 이라는 비난은 귀신들림이 미침(정신이상)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던 당시 유대인들의 사상을 드러내 준다.
10:21 혹은 말하되. - '혹은'에 해당하는 '알로이'는 직역하면 '다른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20
절의 '많은 사람'(폴로이)과 대조되는 소수(小數)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 예수에게 감동받은 사람들의 확신은 바로 이처럼 예수께서 하신 말씀 자체에서 얻어진 것이다. 즉 그들은 예수께서 하신 비유의 말씀(1-8절)을 듣고서는 그 말씀 속에 귀신들린 자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논리와 영력이 들어 있음과 또한 무엇보다 예수께서 지금껏 행하신 이적(요 9:1-12)등이 그 말씀의 권위를 더욱 확고히 해주는 것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수많은 반대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들에게 담대히 질문한다. 즉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는 '아니오'라는 답변을 기대하는 '메'라는 부정어가 사용된 문장으로 예수는 결코 귀신들리지 않았다는 강한 신앙적 확신을 담고 있는 반문을 한 것이다. 사실 귀신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영적 소경이 되게 하는 사탄의 하수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본절과 같은 반문(反問)은 정당하다.
10:22-39 솔로몬 행각에서 가르치신 예수
앞 부분(요 7:1-10:21)에서는 초막절 절기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배척당하셨음에 관해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제 본문에서는 그로부터 2달 이상이 지난 수전절 절기에 예수께서 또다시 유대 군중들로부터 배척당하셨음이 언급되어 있다. 수전절(修殿節)이란 신구약 중간시대(B.C. 164년)에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us)가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이방신 제사로 더럽혔던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한 사건을 기념하는 유대인들의 명절이다. 수전절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본문은 바로 그 절기 중에 솔로몬 행각에서 벌어진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즉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에워싼 채 과연 그가 메시야인지 분명히 밝히라고 요구했다(22-24절), 그러한 그들의 요구는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께서 거듭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깨닫지 못한 영적 무지의 소산이었다. 더욱이 그 이면에는 신앙의 확신을 얻기 위해서이기보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정죄할 목적으로 예수님의 약점만을 잡기 위한 의도가 감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이러한 사악한 의도를 간파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해 자신과 하나님은 한분으로서 동등하며 자신이 행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고 계시다고 대답하셨다(25-30절).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대인들은 신성 모독죄를 적용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는데, 이미 영적으로 완악해진 마음을 가진 그들로서는 예수님의 그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31-33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위협에 전혀 동요되지 않으시고. 오히려 구약 성경(시 82:6)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셨다. 다시 말해서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대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리하던 자들이 신'(神)이라고 일컬어지기조차 했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초자연적인 표적과 권세를 수없이 드러내신 바 있는 예수님 자신이 어찌하여 '신'(神)이라고 일컬어질 수 없겠느냐는 반론을 펼치신 것이다(34-39절).
한편 이처럼 결정적인 때에 예수께서 구약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의 가르침이 구약과도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신 경우는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구약 성경이 바로 자신에 관하여 예언하고 증거하고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누누이 강조하셨다(요 5:39,46). 따라서 오늘날 많은 이단들이 성경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가감하여 진리를 왜곡하는 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결코 구약 성경과 모순됨 없이 일치함으로 참되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요 3:14; 5:45-47; 6:32; 7:19-24; 8:56).
10: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 '수전절'(the Feast of Dedication)이란 본절에서처럼 '엥카이니아' ( ) 혹은 '하누카'(Hanukkah)라고 불리는 유대인들의 절기로 유대 종교력 9월(태양력으로 11~12월) 25일부터 8일간 지킨다. 이 절기의 유래는 B.C. 164년경 당시 시리아의 폭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더럽힌 예루살렘 성전을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us)가 주동이 되어 회복하고 다시 하나님께 봉헌하게 된 것을 기념한 데서 비롯되었다(외경 마카비상 4:59). 그런데 이 절기 기간 동안 각 가정에서는 깨끗한 기름으로 호롱불을 밝혔기에 일명 '빛의 축제'로도 불리웠다. 수전절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한편 본절을 통해 우리는 22-39절의 사건과 1-21절의 사건들 사이에는 약 3개월 정도의 시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요 7:37에 언급된 초막절과 본절에 언급된 수전절 사이의 기간에 근거한 것이다.
10: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 '행각'(스토아)이란 양쪽으로 줄줄이 늘어선 기둥들 위에 지붕이 덮여 있으면서 벽이 없는 복도인 '주랑'(柱廊)을 말한다(Edersheim). 이 솔로몬 행각은 예루살렘 성전의 동쪽 경내에 있었는데 솔로몬이 B.C. 959년경에 완공한 성전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부분이라고 전해진다(Hendriksen). 유대 사가(史家)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이 행각은 A.D. 70년 디도(Titus)가 성전을 파괴할 때에도 파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고 한다(Antiq. ⅩⅩ. 9:7). 한편 예수께서 이 행각 안에서 잠시나마 지내신 이유는 겨울철인 관계로(22절) 날씨가 추우며 비가 오는 때가 많았으며 또한 수전절 절기를 맞아 상경한 유대인들도 역시 그곳에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그곳은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적합했었던 것이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이 행각은 사도들에 의해 말씀 선포와 토론의 마당으로도 애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행 3:11; 5:12).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 여기서 '에워싸다'는 말은 아마도 적의(敵意)를 가지고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포위한 상태를 의미하는 듯하다(행 14:20). 물론 수전절을 맞아 상경한 인파들 가운데는 예수께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모여든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책잡는 일을 주동하는 인물들이 있었을 터이니 곧 예수에 의해 '절도, 강도. 삯군' 등이라고 불리운 사실(1-18절)에 앙심을 품은 유대교 지도자들이다(Robertson, Hendriksen).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의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 '마음을 의혹케 하다'에 해당하는 '프쉬켄 아이레이스'는 직역하면 '영혼을 들어 올리다'로서 그 뜻이 다소 애매하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의미는 '마음을 졸이게 하다'(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난하주, 표준 신약전서, 천주교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 Hendriksen. G.Beasley-hurray)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는 곧 예수께 대한 유대인들의 의심과 불만을 토로하는 항의조의 말이다.
그리스도이어든 밝히 말하시오. - 유대인들의 고민과 의혹은 바로 예수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한 것이었다. 비록 예수께서는 과거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밝히셨지만(요 4:25,26) 대중 앞에서는 공식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선언을 하신바가 없었다. 따라서 그의 권위 있는 말씀과 이적 등을 통해서는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지만(20절) 유대인들의 율법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말씀과 행동, 즉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된 자라고 말하고(요 5:17) 안식일을 범하는 등의 행동(요 9:14)을 고려한다면 도저히 예수를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그들이 예수를 자신들이 기대하는 메시야라고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갈릴리인들에게서 보았듯(요 6:14,15) 정치적인 차원에서 자신들을 외세의 압제 하에서 해방시켜 줄 해방자로서의 메시야를 심중(心中)에 바라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바로 그러한 메시야로서 자신들의 욕구를 채워줄 자인가를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의 이면에는 실상 예수를 책잡으려는 간계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 즉 이들은 만약에 예수가 자신이 '그리스도'임과 더불어 또다시 '하나님의 아들'(요 5:17,18; 8:54)이라고 주장하면 신성모독의 죄와 아울러 로마에 대한 모반의 혐의를 씌워 죽이려는 흉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마 26:63-66; 막 14:61-64). 하지만 예수께서는 결코 그들의 흉계를 간파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하여 또다시 증거하기를 주저치 아니하셨는데(25-30절) 아직은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는바 그 누구도 자신을 해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이다(요 7:30).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 도다. - 비록 예수께선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 대신 이미 자신이 참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서 생명의 떡, 세상의 떡, 영원한 생수, 참 목자 되심 등을 말씀하신 바 있다(요 5:17-47; 6:29,35,51-65; 7:37-39; 8:12-20,28,29, 42,56-58; 10:7-18). 그것은 곧 자신이 온 인류의 메시야이심을 달리 표현하신 자기 증거였다. 그런데도 그러한 예수의 진술들을 유대인들은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저들에게 영적인 이해, 즉 믿음이 없기 때문이었다(마 13:14,15). 즉 진리의 말씀을 수납할 수 있는 영적 귀가 열려 있지 못한 그들은 인간적인 기준으로만 예수를 판단하여 예수께 대한 불 신앙적 태도를 끝내 버리지 못한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 예수의 말씀은 단순히 말만이 아닌 행위에 의해 그 진실성이 입증되는 것들이었다.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 보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요 5:20,36; 9:31-33).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을 부정하는 유대인들은 신명기에 기록된 선지자의 구별법조차 무시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는 선지자들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신 18:22). 하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이 ① 증거하는 바도 ② 예수의 말씀도 ③ 예수의 이적도 믿지 않았다. 저들의 이러한 철저한 불신앙의 이유가 바로 다음 절에 제시되어 있다.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 - 단호하게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철저한 불신앙의 원인이 하나님의 예정, 즉 선택과 유기(遺棄)에 기인함을 선언하신다. 즉 믿음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도 바울의 사상은(엡 2:8,9) 본서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양만이 참된 양이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29절; 요 6:39,44). 따라서 이들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선민(選民)인 양 행세했으나 사실은 마귀의 자식들이었다(요 8:44). 그러나 장차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도래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들 유대인의 후손들을 돌이켜 구원에 이르게 하리라는 약속이 성경에 주어져 있다(롬 11:25-32). 이는 실로 일찌기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창 17:7)을 저버리지 아니 하사 저들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긍휼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즉 과거에 출애굽 후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는 와중에도 '남은 자'를 남겨 구원하셨듯이(민 14:27-38)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대적한 유대인들 중에서도 '남은 자'를 보존하실 터인 것이다.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고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 '따르다'(아콜루데오)는 말이 현재 진행형임은 참된 성도는 지금껏 예수를 따라 왔고 지금도 따르고 있듯 앞으로도 계속해서 예수를 따를 것임을 나타내 준다. 이러한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4,14절에서 자세히 살펴보았으니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 '영생'에 대해서는 요 6:40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주다'(디도미)는 말이 현재형인 것은 예수를 믿는 자마다 이 세상에서 이미 영생을 보장받는 것을 나타내 준다. 즉 그 완전한 성취는 장차 최후 심판 시에 이루어질 것이지만(마 25:31-46) 예수를 믿는 자는 이미 그 순간에 영원한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에로 옮기움 받은 것이다. 요 5:24 주석 참조. 이 영생의 특권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들에게 보장해 주시는 신적 축복으로서 취소나 탈취가 불가능하다.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우 메 아폴론타이)라는 표현에는 가정법을 수반한 이중적 부정어의 사용으로 '결단코 ~하지 아니하다'는 확고성이 반영되어 있다(요 3:16; 17:12; 18:9). 실제로 마귀는 하나님의 허용하심에 따라서 '자신의 양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요 8:44; 고후 11:3; 히 2:14) 하나님께서 성자에게 주신 양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는 것이다(요 6:37,39).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졌다(고후 4:7-10; 골 3:3)고 말하는 것이다.
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 각기 다른 사본들이 존재하고 있는 탓에 본절의 관계대명사가 '호스'(남성형)인지 '호'(중성형)인지 논란이 되고 있다. 전자는 알렉산드리아 사본(A), 모스코 사본(K) 등의 독법으로 '호스' 이하가 문두(文頭)의 '호 파테르' 즉 '아버지'와 연결되어 개역성경과 같은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이라는 번역이 가능하게 한다. 반면 후자는 시내산 사본(א), 바티칸 사본(B), 베자사본(D), 레기우스 사본(L)등의 독법으로 '호 파테르'가 독립주격이 되어 '내 아버지로 말하자면 그가 내게 주신 것은 만유보다 더 크다'라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본문은 '~이다'란 서술어 '에스틴'의 주어는 '호스' 이하가 수반된 '호 파테르'로 또는 것이 자연스럽다(Robertson). 왜냐하면 그래야 전절에서 강조한 대로 '아버지께서 주신 양들'이 영원히 멸망치 않을 근거로서의 위대하신 성부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자의 독법대로 본절의 관계대명사는 남성형 '호스'로 보는 것이 좋다. 한편 이곳에서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것은('우리'가 아니라) 성자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되심(sonship)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요 1:14의 '아버지의 독생자'(요 3:16)라는 표현을 참조하라.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28절 주석 참조.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하나'가 남성인 '에이스'가 아닌 중성의 '헨'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즉 이는 성부와 성자가 한 본질(essence), 한 본체이심을 적절히 표현해 준다.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요 5:18에서 이미 주장하신 성부와 자신간의 존재론적 동질성(essential equality)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어거스틴(Augustine)의 입장을 따르는 벵겔(Bengel)은 본절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 같이 말한다. 즉 '~이다'에 해당하는 '에스멘'이 1인칭 복수인 것은 A.D. 3세기의 '사벨리안 이단'(Sabellianism)의 주장을 반박해 준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성부와 성자, 성령에 대하여 '한 하나님'이 세 가지 양태(樣態)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곳의 복수 동사는 성부와 성자가 본질에 있어서는 한 본체이시나 위격(person)에 있어서는 서로 독립된 존재임을 나타내 준다. 또 '헨'이란 표현의 중성은 A.D. 4세기의 '아리안주의'(Arianism)의 이단적 사상을 분쇄한다. 그들은 성자가 만물 중 가장 뛰어난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나 '헨'이란 표현은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체임을(빌 2:6) 증거해 준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랜드 종합 교리 신론, '삼위 일체 교리의 진술과 변증' 부분을 참조하라.
10: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 '하나님과 동등됨'을 주장한 예수를 신성 모독죄를 범한 자로 정죄하는 장면이다. 요 5:17,18 주석 참조.
10: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 '아버지께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에크 투 파트로스'에서 '에크' 전치사는 '유래'(由來)를 뜻한다(요 6:65; 16:28). 즉 이는 예수께서 지금껏 행하신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한 것임을 의미한다. 요 4:34; 5:19 주석 참조.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 이에 해당하는 '리다제테'는 '돌로 치려고 애쓰느냐' 혹은 '~시도하느냐'라는 의미의 의지적 현재 능동태(conative present active)이다(Robertson, Hendriksen). 즉 유대인들은 거의 예수를 향해 돌을 던지려는 찰나에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의 때'가 차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었다(요 7:6).
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예수와 대화하며 찾아낸 혐의점들의(요 5:17,19; 8:58,59; 10:30,31) 핵심이 본절에 표현되어 있다. 본서에서 한 번만 나타나는 단어인 '참람함'(블라스페미아)은 영어의 '신성모독'을 뜻하는 'blasphemy'의 어원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야훼)을 입 밖으로 발설하기만 해도 신성모독이라고 규정하는 미쉬나(Mishnah)에 비추어 보면.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한 것은 가장 심각한 참람 행위임에 틀림없었고 율법의 규정대로 따져도 사형에 해당했다(레 24:16). 하지만 유대인들이 한 가지 근본적인 사실을 간과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를 한낱 인간으로만 본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전제가 틀렸으므로 이후의 여하한 논리도 소용이 없는 것임은 당연할 이치이다.
10: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 자신을 '사람'으로만 보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입관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들이 최상의 권위를 부여하는 율법의 권위로서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다. '율법'(노모스)은 대개 모세 오경을 의미하지만 때때로 본절과 같이 성경 전체를 말하기도 한다(요 12:34; 15:25; 롬 3:19). 사실 여기서 예수께서 인용하신 성경은 시 82:6이다. 한편 본절 초두의 '너희'라는 말은 '너희가 그것을 중히 여기는'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Hendriksen). 따라서 일부 사본(P45, W, D, θ, Syrsin) 등과 터툴리안(Tertullian), 키프리안(Cyprian). 유세비우스(Eusebius), 힐라리우스(Hilarius) 등의 독법과 같이 본절에서 굳이 '너희'를 생략할 필요가 없다. 예수의 이 말씀은 마치 자신들만이 구약의 율법에 정통한 양 독단에 빠졌던 율법주의자들을 비난하시는 표현이므로(Brown) 이것을 빠뜨린 독법(reading)은 서기관적 수정(scribal improvement)임에 분명하다. 한편 시 82:6에서 '신들'(gods)이라 함은 신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으로 여겨진 재판관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를 더 의미 확대시켜 35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대표하여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그리고 36절에서는 직접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이렇게 구약 인용이 구약의 문맥에 구애되지 않고 신약에서 새롭게 확대된 의미를 부여받는 경향은 그리 드물지 않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모든 구약적 진리를 새롭게 재조명하신 율법의 완성자이므로 이러한 권세를 지니시는 것이다(마 5:17).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 여기서 '성경'(그라페)이라는 말은 34절의 '노모스', 즉 '율법'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므로 절대적 권위를 지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공동번역은 본절을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본서 저자 요한은 성경의 완전성과(마 5:17) 영구불변성(사 40:8)과 관련하여 계시되어 성경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더 이상 권위 있는 말씀이 없으며 이의 가감이 불가능하다는 '계시의 종결성'을 강조하였다(계 22:18,19).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란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계시의 말씀을 전달받아 사람들에게 전하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이들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소명 받은 자들이니 예수께선 성경의 전례에 비추어(시 82:6) 이들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뜻을 전하는 자들이란 의미에서 '신들'이라 부를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선지자의 대표격으로서 우리는 구약 시대의 모세(신 34:10)와 이사야, 예레미야는 물론 신약 시대의 세례인 요한(요 1:23)과 예수 그리스도를 들 수 있다.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 참람죄, 즉 신성 모독죄의 혐의를 덮어씌우는 유대인들을(33절) 반박하시는 예수의 논증의 결론이 두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① '신들'이라고 불리운 재판관들(34절)이나 말씀의 종들(35절)은 모두 다른 사람들과 꼭 같은 출생의 경로를 밟은 '인간'일 뿐이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보냄을 받은(요 3:2) 신(神)이다. ② 재판관들이나 말씀의 종들은 단순히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역하는 자라는 일반적인 의미로서만 '신들'이라 불리울 테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입장에서 본질적인 신이시다(요 1:14,18; 3:16). 한편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휘오스 투 데우 에이미)에서 '휘오스', 즉 '아들'에 관사가 붙지 않은 것을 문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러한 문제 제기는 옳지 않다. 그 이유로는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① 히 1:2 등에서는 아들의 '인격'(person)에 주의를 집중하기에 관사가 있으나 본절에서는 아들의 본성 혹은 본질(being)에 관한 표현이기에 관사가 없을 수 있다(Westcott, Robertson). ② 본절은 술부(述部)가 뒤로 가고(본절에서는 '에이미', 즉 '~이다'가 문미에 있음) 앞서게 된 주부(主部)의 명사는 관사가 생략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예(例)이다(요 1:1, Morris). 다음으로 '거룩하게 하사'(헤기아센)라는 표현은 단순히 더러움에서 구별된다는 뜻의 '카다리조' 동사(요 15:2)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하나님께 성별된다'는 개념이다. 이 헬라어 동사는 민 7:1의 70인역(LⅩⅩ)에서 성막을 '거룩히 구별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0:37,38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 유대인들과의 논쟁을 마무리하시면서 이미 결론을 말씀하신(36절)후 예수께서는 다시 25-27절의 말씀과 유사한 내용을 부언(附言)하심으로써 당시 유대인들의 영적 무지를 드러내신다. 한편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점은 '믿지'에 해당하는 '피스튜오' 동사가 37,38절에서 각각 부정과 긍정으로 대구를 이루면서 현재 명령형으로 쓰이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본절은 불신앙의 계속적(durative) 상태. 즉 습관적인 불신앙의 자세에서 벗어나 진실되고도 영원한 신앙의 자리에로 지금 즉시 들어올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26절에서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라고 말씀하신 동일한 대상에게 하셨다는 점에서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고(벧후 3:9) 아울러 어떠한 대상에게라도 계속적인 전도의 발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딤후 4:2)는 교훈을 주는 말씀이니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10:39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 예수께서 어떻게 자기를 둘러싼 무리(24절)의 틈바구니를 벗어나셨는지 분명치 않다. 혹자는 예수께서 이적적인 방법으로 홀연히 저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을 것으로도 추측하나(Barrett) 신빙성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직은 예수께서 죽임 당하실 때가 아니므로 유대인들의 노골적인 적대 행위 가운데서도 무사하실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요 7:30; 8:59 주석 참조.
10:40-42 베레아로 피신하신 예수
앞 단락에서는 솔로몬 행각에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선언한 예수님께 대하여 유대인들이 신성 모독죄를 적용하여 돌을 들어 치려한 사실을 살펴보았다(22-39절). 이제 그에 이은 본문은 그러한 유대인들의 격렬한 배척에 직면하신 예수님께서 잠시 베레아 지방으로 피신하시는 장면이다. 이는 아직 예수께서 저들의 손에 체포당하실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자각하고 계셨음을 뜻하는데 때가 되면 예수께서는 자진하여 체포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의 구속(救贖) 사역을 완성하실 것이다(요 18:11).
한편 예수님께서 잠시 피신하셨던 베레아 지방은 세례 요한이 사역의 중심지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대한 그의 증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40,41절; 요 1:19-34; 3: 22-36). 그래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다(42절).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레아 지방에서 특별한 표적을 행하셨다는 사실이 본문에서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의 신앙은 이적에 근거한 믿음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서의 저자가 베레아 사람들의 이와 같은 신앙을 소개한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표적을 목격하고도 믿음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퍅하게 되어 예수님을 끝내 배척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의 태도를 간접적으로 책망하려는 의도에서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베레아 사람들의 대조되는 양상을 통해 우리는 과연 참다운 믿음은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지를 교훈 받을 수 있다. 베레아인들은 결코 표적을 보고 신앙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의 말씀을 참이라 여기며 주님을 영접했다. 이것은 오늘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성경에 계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비적인 은사나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성경 말씀보다 표적을 더 앞세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신앙이 되지 못함을 교훈해 준다(요 20:24-31).
10:40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 아마도 이곳은 요단강 건너편 베레아 지방의 베다니일 것이다(요 1:28).
거기 거하시니. - '거하시니'에 해당하는 '에메이넨'은 미완료 과거시제로서 계속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아마도 이곳에서 예수 일행은 얼마 동안 머무른 듯하다.
10:41,42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 '많은 사람'이란 본서가 대체로 예수에 대해 적대적으로 언급하는 '유대인'들과는 다소 구분되는 군중으로 보인다(요 7:20 주석 참조). 적어도 그들은 베레아의 외진 지역에 머물고 계신 예수를 찾아온, 즉 그중 일부는 요단강을 건너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찾아온 열심 있는 사람들이었다. 전에 헤롯은 예수의 명성이 퍼지는 것을 보고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공포에 떤 적이 있다(막 6:16). 이러한 두려움은 세례인 요한이 평소에 능력을 행한 증거로도 볼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세례인 요한은 세상의 참빛이신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요 1:7)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막 1:3)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에게 주어진 사역을 잘 감당했고 그의 죽음 이후에도 그가 했던 말을 근거로 예수를 믿는 자가 많았다. 한편 비록 본절에서 '믿었다'는 말이 완벽한 믿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요 8:30 주석 참조) 본서 저자 요한의 관점에 있어서 이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는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지지해야 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는 예수께서 도리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에 처한 반면, 은거하시는 곳에서는 환영받고 많은 믿는 자들이 생겼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Morris). 더군다나 이것은 이제 곧 본서의 마지막이요 최대의 표적이 될 '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한 유대인들의 믿음(요 11:45; 12:9,17-19)의 전주곡(prelude)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Schnackenburg, G. Beasley-hurray). 이처럼 진정한 믿음은 인간적인 평가로 있을 법한 곳에서 보다는 오히려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서 더욱 자주 발생한다. 이는 믿음이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서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일 것이다(엡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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