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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데살로니가 및 베뢰아 사역과 아덴에서의 아레오바고 설교 등의 사역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13:1-21:16까지 이어지는 바울을 중심으로 한 전 3차의 이방전도 여행 일련기사, 그리고 좁게는 15:36-18:22에 기록된 바울을 중심으로 한 제 2차 전도여행(A.D. 49-52년)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 바울의 전 3회에 걸친 전도 여행 기사는 과거 철저한 유대주의자로서 열렬히 예수의 복음을 탄압하던 바울을 회심시키시고 바로 그를 이제는 정반대로 순교(殉敎)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보여 준다. 또한 이제 사도 바울의 그야말로 생명을 던진 철저한 헌신으로 주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명령(commision)과 동시에 약속(promise)으로 남기셨던 말씀 곧 성령이 강림한 후에는 성령의 주도로 주의 사도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말씀을 증언함으로 복음이 세계 만민에게 전달되리라던 말씀(행 1:8)이 분명히 그리고 강력하게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 사역의 일환으로 유럽 동남단의 옛 마게도니아와 헬라 땅의 주요 도시들에서 사역한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특히 본장은 이제 우리 주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 구속 사역의 성취와 부활 승천으로 구속사의 시대가 구약 시대(時代)에서 신약시대로 갓 이전된 시기에, 당시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후손인 유대인들의 종교였으면서도 구약성경을 인본주의적이고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곡해한 유대교(Judaism)와 투쟁하면서 동시에 그 당시 로마 제국의 헬레니즘(Hellenism) 문화와도 투쟁하면서 전도 사역을 수행했던 사실을 응축적으로 보여 준다. 즉 본장은 초대 교회 당시의 양대 문화적 배경 집단이었던 유대교 및 헬레니즘과 초대 교회와의 관계를 한 장 안에 동시에 극명하게 담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지리적 관점에서는 데살로니가 전도(1-9절), 베뢰아 전도(10-15절), 그리고 아덴 전도(16-34절)로 나뉜다. 그러나 그 내용상으로는 데살로니가 및 베뢰아 사역은 이방 선교에 나선 초대 교회와 이방 땅에서 기존하던 유대교주의자들과의 갈등을 보여 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는 바 이를 전반부로 크게 묶고 이제 헬레니즘 문화와 초대 교회와의 만남과 갈등을 보여 주는 아덴(Athens)사역을 후반부로 나뉘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 후자의 관점에서 그 구속사적 의의를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전반부의 초대 교회의 전도 사역과 이로인한 데살로니가 및 베뢰아(Beroea)에서의 유대주의자들과의 갈등은 본 문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의 승천 이후 계속된 초대 교회의 최대 현안의 하나였다. 따라서 본 문단은 개별적으로 고찰하기 보다는 사도행전 및 서신서에서 거듭 반복된 동일 사안(事案)들을 다룬 여타 본문들과 함께 구속사가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갓 이전된 초대 교회 당시의 전반적인 배경 상황에 대한 입체적 이해를 전제하고 포괄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한 바 이에 대해서는 각각 본 주석 서신서 개론을 보라. 그리고 이와 관련된 주제의 하나인 신약 시대에 이르러 구속사가 이스라엘에서 세계 만민으로 확장된 문제에 대해서는 롬 제 11장 연구자료를 보라.
후반부 16-34절의 아레오바고 설교를 중심한 바울의 아덴 전도 사역이 바울의 끝없는 열정과 지식을 중시하는 그들의 성향에 맞춘 효율적 전도 방법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타 지역에 비해 크게 못미치는 성과를 거두었음을 보도한 아덴 사역 기사는 우리에게 깊은 구속사적 시사를 던져준다.
물론 이 당시 제국의 정치적 수도는 로마(Rome)였다. 그러나 아덴(Athens)은 로마 제국 문화의 본류였던 헬레니즘의 발원지요 중심지였다. 이들은 특히 철학(哲學)을 위시한 각종 이론 과학에 심취하여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세속적 허영과 지적 교만에 잡힌 아덴에서 바울의 복음 전도는 그야말로 비합리적인 다신론 또는 범신론 나아가서는 무신론적 사고에 편향되어 있으면서도 지적 교만을 고수하였던 이들로부터 여러 잡다한 종교의 포교(布敎) 활동의 하나라는 선입관의 벽을 허물지 못한 채 다만 지적 유희(遊戱)나 조롱의 대상으로만 치부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절대성을 결여한 인본주의적 편견과 교만에 사로잡힌 자들이 절대 유일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물론 조롱까지 하는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어리석음과 악행을 자행한 것이었다. 한편 본문의 아덴에서 뿐 아니라 세계사 내내 겸허하고 진지한 열린 마음과 자기 성찰이 없는 채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단편적 지식에 얽매인 자들은 복음에 대하여 이런 잘못된 자세를 가져왔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에서 우리는 먼저 세속적 허영과 지적 교만을 가진 자들은 복음을 순수하고 뜨거이 받아들일 영혼의 순수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냉정히 직시하여야 한다(마 19:16-22). 그리고 그런 자들에게 대항하여 기실은 그들이야 말로 오히려 인간이 가져야 할 근본적인 인식 곧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고 운영되는 전우주와 역사에 대한 존재론적 진리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음을 더욱 효과있게 논증하기 위하여 기독교 사상에 대한 학문적 성찰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사 54:13; 딛 1:9). 특히 어차피 사탄에 의하여 오염된 이 세상에서 이런 세속적 허영과 지적 교만에 빠진 자들의 영향력은 중대한 바(딤전 1:3-11; 4:1-5; 6:3-5) 이들의 실체와 그 허구성을 직시하고 그들을 도덕과 사랑으로써는 물론 논리적으로도 설복시킬 능력을 구비하는 것의 중요성은 매우 심대하다 하겠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은 진리 그 자체에 의거한 바 그 어떤 학문도 그것이 참으로 옳고 바르다면 결국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에 대한 성경 계시에 승복할 것이며 또 실질적으로도 세속 학문을 통해서도 참으로 진정한 이치에 도달한 사람들이 이에 순복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지적 허영과 교만은 멀리하더라도 학문 자체는 경원(敬遠)하지 말고 오히려 이에 임하는 인간의 근본적 관계를 전제한 범위 내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한편 아레오바고(Areopagus) 설교를 중심한 아덴 사떡 기사의 세부 내용의 이해에 대해서는 해당 강해주석을 보라.
외울 말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
바울의 데살로니가 사역
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바울의 베뢰아 사역
10 ○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바울의 아덴 사역
16 ○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 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본문 & 자료노트
지도-17:1-16 바울의 마게도냐 지역 전도 사역 여정
도표-17:10-14 베뢰아 교회의 특징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 복음을 전한 베뢰아 교회는 바울이 그전에 복음을 전한 어떤 교회보다 더 성공적이었으며 데살로니가 교회보다 복음을 더 잘 받아들었다. 그 결과 그곳에서는 풍성한 결실이 맺히게 되었는데 이같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원인을 살펴보자.
1. 간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음(11절)
2.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 연구함(11절)
3.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며 즐거워함(11절)
4.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이 맡음(12절)
5. 신분 고하에 관계없이 말씀에 순종함(12절)
고고학-17:16-34 아덴(Athens)
아덴은 현대 그리이스의 수도인 아테네의 한글 개역 성경에서의 명칭이다. 그리이스 신화의 여신 아테네(Atene)에서 그 명칭이 유래된 이 도시는 세계사에서 고대 민주주의와 헬레니즘 문화의 온상지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도시, 아덴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였다.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A.D. 49-52)시 방문하여 복음을 전한 이 도시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다.
1. 지리적 배경
아덴은 에게해에서 약 8km 정도 떨어져 있는 2,580km 면적의 세모형 반도인 '아티카'(Attics) 반도의 서편에 위치해 있다. 신약 시대 당시에는 그곳에 '피래우스'(Piraeus)라는 유명 한 항구'가 있었다. 연간 강수량이 40cm정도로 헬라 지역에서 가장 거칠고 메마른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덴은 도기 제작에 유용한 점토층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대리석, 은과 주석이 많아 산업이 크게 번성하였다.
2. 역사 및 관련 기사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아덴은 세계 최초의 민주적인 도시국가를 형성한 곳으로서 세계사에서 매우 자주 언급된다. 아덴인들은 B,C. 6C경에 도시국가를 형성하고 B.C. 6C 후반에는 민주제도를 정착시켰다. 그리고 한때 페르시아 제국의 공격으로 도시가 부분적으로 황폐되는 전란도 겪었으나 아덴 사람들은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여 아덴 최고의 황금기라 할만한 '페리플레스'(Pericles)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 시대에 아덴에서는 문화적으로 맡은 신전과 공공건물들이 건축되었고 예슬이 장려되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솔론(Solon)과 피시스트라투스(Pisistratus)에 의해서 시작된 민주주의가 정립되었다. 하지만 이후 아덴은 펠로폰네소스 전쟁(B.C. 71-474)에서 스파르타에게 패한 뒤 사양길을 걷다가 드디어는 B.C. 86년경 로마에 의해 완전히 함락되었다. 신약 시대에 아덴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으나 학문과 건축, 예술의 중심지로서 여전히 로마 제국 전역에 영향을 주었다. 성경에 나타난 바 A.D. 1C 초에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당시 아덴은 헬라 철학이 매우 융성하고 각종 우상들을 섬기는 종교성이 매우 많은 도시로서 나타나고 있다.
3. 고고학적 발굴
1931년 이후에 '아메리칸 고전 연구학회'(the American School of Classtoical Studies)에 의해 광범위한 발굴이 진행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유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아크로폴리스(Acropolis): 이 곳에서 발굴된 신석기 시대의 질그릇이나, 석기시대 말기의 집단 주거지, 그리고 후기 헬라 문명 시대의 요새화진 성벽과 바울 이전 시대로 추정되는 대극장의 흔적 등은 아덴이 고대로부터 훌륭한 문명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바울이 말한 '손으로 지은 전'(24절)은 아마 이 지역의 아름다운 건물과 신전을 가리키는 듯하다.
② 아고라(Agora): 아크로폴리스의 입구 바깥쪽에 있는 이곳에서는 아크로 폴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짐작되는 공공 건물들과 신전의 기초들이 발굴되었는데, 특히 회의 장소로 추정되는 '불류테리온'(Bauleuterion)과 아폴로 신전은 유명하다. 바울은 아덴에서 바로 이 아고라를 따라 남동쪽으로 전도 여행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바을 이 말한 '알지 못하는 신'(23절)의 제단은 아덴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한편 버가모에서 발견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쳐진 제단은 본장의 삽화를 참조하라.
삽화-17:23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쳐진 제단
아래 삽화는 버가모에서 발견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쳐진 제단이다.
원어연구-17:22 종교성이 많도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데이시다이모네스테루스'인데. 이것은 '데이도'와 '다이몬'의 합성어인 '데이시다이몬'의 비교급이다.
여기서 '데이도'는 '두려움'을 뜻하는 '데오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두려위하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다이몬'은 일반 헬라어 용법에서는 '(나쁜 종류의) 귀신'이나 '(좋은)신'을 막론하고 '모든 초자연적인 영'을 통칭 한다. 그래서 '데이시다이몬' 역시 긍정적, 부징적인 의미를 동시 함축한다.
즉 좋은 의미에서는 '신들을 경외하다', '경건하다' 등의 뜻을 갖는 만면, 나쁜 의미에서는 '미신적이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신약 성경에서 '다이몬'은 항상 나쁜 영 즉, '귀신'을 뜻하는데(마 8:31; 막 5:13), 이는 이 단어가 구약과 후기 유대교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이방신들을 지칭하는 경멸적인 용어로 사용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천사들에게까지도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사자'(messenger)라는 의미를 갖는 '앙겔로스'를 대신 사응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데이시다이모네스테루스'는 이방인들의 어리석은 미신에 대한 경멸적인 용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종교심'(宗敎心)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참된 신이신 석호와 하나텀을 알지 못하고 각종 우상들을 섬기기에만 열심인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있다. 그들 즉, 아덴 사람들은 어떤 다른 도시보다도 더욱 헛된 우상을 두려워하고 그것들을 섬기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무지한 종교성이 많지는 않은가? 헛된 것을 두려워하거나 또 무익한 것들을 추구하며 그것들을 섬기듯이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미신적이며 어리석은 것이 되고 만다. 오직 우리는 한 분 하나님만 섬기고 그를 경외하는 성도가 되자.
도표-17:24-31 아덴에서의 바울 설교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10대 속성
1. 우주와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24절)
2.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24절)
3. 무소부재하신 하나님(24절)
4. 아무 것도 부족지 않으신 하나님(25절)
5. 만민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25절)
6. 온 인류를 섭리하시는 하나님(26절)
7. 당신을 찾기 원하시는 하나님(27절)
8. 각 사람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27절)
9.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37절)
10. 종말에 천하를 심판하실 하나님(31절)
신학용어-17:31 최후의 심판
본서 1권 성경교리 '종말론' 참조
주요주제-17:31,32 성도의 부활
고전 15장 자료노트 참조
17:1-9 바울의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 사역
빌립보에서 사역 도중 투옥되었다가 명예롭게 풀려난 바울과 실라(행 16:11-40)는 빌림보에서 남서쪽으로 약 160km 떨어져 있는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되는데 본문은 바로 그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로서 상당히 큰 상권을 형성하였고 그만큼 교통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유럽에 확산시키기에는 전략적으로 매우 알맞은 곳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이 도시를 복음화 시키고자 한 것이다. 한편 바울의 전도 사역은 전도와 박해의 반복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복음이 확산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한 모습은 데살로니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이 복음을 영접했던 반면(1-4절), 유대인들은 오히려 바울을 시기하여 해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5-9절).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본문의 내용을 좀더 세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바울의 전도 방법과 그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1-3절). 바울은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행 13:46; 롬 1:16)라는 그의 전도 원칙에 따라 안식일에 유대인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그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함으로써 그가 구세주되심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본서에 나타나는 모든 설교는 사실 설교자나 그 상황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역시 그 주된 핵심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선포이다.
다음으로 복음을 들은 자들의 반옹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4-9절). 바울의 복음 전깍는 무리들에게 두 가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즉 바울의 복음 전파는 많은 이방인들을 회개하고 주께 들아오게 했다. 그러나 반대로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고 해하려했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바울이 가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복음은 항시 두 가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생명을 얻는 기쁜 소식이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심판의 소식이 될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한 박해자들의 고소 죄목이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라는 것이다(6절; 행 16:20,21). 이는 복음 전파가 박해를 공식화할 수 있는 죄목이 될 수 없음을 입중한다. 특별히 애수 그리스도의 처형 죄목도 정치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은 사탄의 권세가주로 세상 권력을 이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하겠다.
한편 바울과 실라를 숨겨 주었던 야손과 그 형제들은 읍장들 앞에 끌려가 큰 곤욕을 치룬 끝에 바울과 접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 났는데 바울은 이것을 가리 켜 후에 사탄의 방해로 그가 다시 데살로니가에 돌아가지 못한 이유로 설명한다(살전 2:15). 그러나 이러한 박해 중에서도 데살로니가에 전파된 복음의 씨앗은 크게 성장하여 열매를 맺고 유럽 전역에 복음이 확산리는 기초가 된다(살전 1:1-10).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생명력 있는 역동성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17:1 저희가. - 바울과 실라를 가리킨다. 행 16:40 주석에서 살펴보았듯 이때 본서 저자 누가는 빌립보 교회에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때 디모네(행 16:1-3)가 바울과 실라와 계속 동행하였는지 빌립보 교회에 누가와 함께 남아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행 16:3 주석 참조.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 - '암비볼리'(Amphipolis)는 빌립보에서 서남쪽으로 52km지점에 위치한다. 이 도시는 넷으로 나뉜 마게도냐의 네 지역 중 북부 지역의 수도이다. 행 16:12 주석 참조. B.C. 357년에 마게도냐의 필립 왕에게 정복당했으며 B.C. 168년 이후에는 로마에 정복당하였다. 다음으로 '아볼로니아'(Apollonia)는 암비볼리에서 서남쪽으로 4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 오늘날에는 '폴리노'로 불리우고 있다. 이 두 도시에서 바울과 실라는 별로 활동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의 위치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바울의 마게도냐 지역 전도 사역 여정'을 보다 참조하라.
데살로니가. - 이 도시는 아볼로니아에서 남서쪽으로 60krn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살로니가(Salonika) 만의 윗 부분에 위치하여 정치 ․ 교통 ․ 무역의 중심지였다. 옛날에는 테르마(Therma)라고 불리웠는데. 이는 '테르마'가 '온천'이라는 뜻으로 그 이름과 같이 온천이 많은 지대였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Thessalonica)라는 이름은 빌립 왕의 양자인 카산더(Cassander)가 B.C. 315년에 이곳을 재건하고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누이이자 자신의 아내의 이름을 따 명명한 데서 비롯되었다. 로마 식민지 시대 이전에는 분열된 마게도냐의 두번째 지방의 수도였으나 B.C. 146년 로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부터 마게도냐 전지역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B.C. 42년 빌립보 전쟁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를 도왔기 때문에 자유시의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A.D. 904년에는 사라센에게 점령되었고. 1184년에는 십자군이 점령했다가, 1430년에 터어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살로니가(Salonika)라고 불리우며 주민의 절반이 유대인이다. 옛부터 데살로니가(Thessalonica)는 마게도냐 대륙에 있는 비옥한 평야 지대의 농산물을 각지에 연결시키는 요충지 역할을 하였으며, 정치 ․ 경제의 중심지였으므로 많은 인구를 소유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바울은 이 도시를 복음으로 공략하려고 했던 것 같다. 데살로니가에 대해서는 살전 서론 특별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유대인의 회당. - 바울과 실라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에서 별로 지체하지 않고 이곳 데살로니가로 직행해 온 이유는 데살로니가의 요충지적 중요성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Lenski). 즉 선교지에 처음 도착하면 우선 보다 효율적으로 전도할 수 있는 곳이라고 판단한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던 바울은(행 13:14; 14:1; 16:13) 이번에도 회당을 복음 전파의 중요 기점으로 삼은 것이다. 한편 회당에 대해서는 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참조 하라.
17:2 자기의 규례대로. - '규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오도스'는 '습관'이나 '버릇'을 의미한다. 즉 바울은 새로운 선교지에 도착하면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일상의 습관화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살라미에서도(행 13:5),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행 13:14), 이고니온에서도(행 14:1), 베뢰아에서도(10절). 아덴에서도(17절) 유대인 회당에서 활동하였다. 아마도 바울은 낯선 곳에서 같은 유대인으로서 접근하기 쉽고, 또 동족에게 특별한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었으므로(롬 9:1-5)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안식일에 그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하며 그리스도의 도를 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보다 자연스럽게 이방인들에게까지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세 안식일'이란 세 번의 안식일을 의미한다. 바울은 3주 동안 계속해서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성경을 강론한 것이다. 여기서 '성경'은 물론 구약 성경을 말한다.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바울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쳤던 것이다. 이처럼 바울이 다른 무엇이 아닌.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 성경에 근거하여 예수를 증거한 것은 저들로 하여금 복음을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정당한 복음 전파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친히 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에 관해 증거하셨듯이(요 5:39,46,47) 구약 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성육신(成肉身)하신 예수로 말미암아 온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17:3 뜻을 풀어…증명하고. - 구약 성경을 가지고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서 강론하면서(2절) 바울은 마치 빌립이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풀어 성경을 가르치며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듯이(행 8:26 -35),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또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풀어 설명해 준구약 성경 예언된 메시야가 곧 자신이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풀어 설명해 줄 때에는 증명하는 형식을 취하다가도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에는 선포하는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이시요 인류의 구세주이시니 그를 믿으라는 말은 권유로 끝나지 않고 선포되어야 한다. 즉 이 구원의 메시지는 듣는 자의 신 . 불신에 상관없이 모든 자들에게 널리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다(겔 33:6,7).
17:4 경건한 헬라인…귀부인도…좋으나. - 바울이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를 풀어 가르치고, 증명한 후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하자(2-3절)이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여기서 '경건한 헬라인'이란 헬라인으로 유대교에 귀의하여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러한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은 유대인들의 율법에 따라 경건하게 살았으며, 안식일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그러던 중 회당을 찾은 바울로부터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선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귀부인'들도 적지 않게 회심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마게도냐 지방에서는 타지방보다 더 한층 상류 계급의 부인의 위치가 존중되었었다(행 16:13 주석 참조). 따라서 데살로니가의 귀부인들은 타인의 간섭을 덜 받는 가운데 자의(自意)로 쉽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며, 교회내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17: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 여기서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하여 배타적임은 물론 예수를 추종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하여서도 시기하고 대적하기를 서슴지 않던 광신적인 유대교도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들은 바울과 실라의 전도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이를 시기하며 훼방하기 위하여 비시디아 안디옥(행 13:50,51)과 이고니온(행 14:1-6)의 유대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군중들을 선동하고 폭력을 동원한 것이다.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 - 이들은 '저자'(아고라), 즉 도시 한복판의 중앙 광장(행 16:19 주석 참조)에서 활동하던 폭력배들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단순히 마움과 실라를 시기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무뢰한들의 힘을 빌며 또한 군중들을 신통하여 마음과 신라를 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야손. - '예수' 또는 '여호수아'의 헬라음이다. 이 사람은 유대인인 가능성이 높으며 유대인이 아니라면 기독교로 개종한 헬라인(4건) 중 한 사람인 것이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과 실라는 이 야손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본문의 야손이 롬 16:21에 언급되고 있는 야술(Jason)과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다.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 '백성'에 해당하는 '데몬'은 '자유시민'이란 뜻이다. 이 말에서 '민주주의'라는 뜻의 영어 '데모크라시'(Democracy)가 파생되었다. 즉 이들은 로마통치하에서 자유시민 특권을 부여받은 데살로니가 시민들을 가리킨다. 1절 주석 참조.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였던 때의 수법과 동일하게(마 27:20-26) 이들 시민들을 충동질하여 흥분시키고 그렇게 선동된 시민들의 힘을 빌려 바울과 실라를 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17:6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 여기서 '형제'는 혈육상의 친형제가 아닌 믿음의 형제들을 가리킨다. 야손과 이들은 아마도 유대인과 폭력배들의 소동 소식을 듣고선 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먼저 바울과 실라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을 것이다. 이에 바울과 실라를 찾다가 찾지 못하자 유대인과 괴악한 자들은 바울을 자신의 집에 묵게 한 야손과 그 야손의 집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대신 잡아 끌고 갔다. 아마도 불한당들은 저들을 협박하여 바울과 실라의 도피처를 알아내고자 했거나 아니면 저들에게 대신 화풀이를 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읍장들. - 이 말에 해당하는 '폴리타르카스'는 다른 문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B.C. 2세기부터 A.D. 3세기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비석에 이 용어가 새겨진 것이 19세기 말에 데살로니가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이 말은 마게도냐 지방에서 사용된 특수한 용어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 말은 로마 식민지 내에서 자치 도시의 행정을 담당한 관리를 의미하는 것 같다. 데살로니가는 자치 도시였으므로(1절 주석 참조)이 행정 장관이 다스렸던 것이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 - 여기서 '천하'는 당시 로마의 지배 영역에 있던 모든 지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어지럽게 하다'는 말은 자신들이 지금껏 접해 보지 못한 새로운 도(道)로써 백성들을 미혹한다는 의미이다. 빌립보에서의 바울의 전도 활동과 옥중에서 있었던 일(행 16장)에 대한 소문은 마게도냐 지방의 중심지였던 데살로니가(1절 주석 참조)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그러한 소문을 바탕으로 본문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17:7 야손이 들였도다. - 바울과 실라를 찾기 위해 유대인과 괴악한 자들은 야손의 집에 쳐들어갔었다(5절). 이는 바울과 실라가 야손의 집을 거처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절은 단순히 손이 바울과 실라에게 숙소를 제공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이에는 손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자들(6절)과 작당하여 불순한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있다.
다른 임금 곧 예수. - 로마의 식민지하에서는 로마의 황제 이외에 다른 황제가 있을 수 없었으며 그리할 경우에는 대역죄에 해당하였다. 이에 유대인들은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 나라와 우주의 주권자되시는 예수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한 것을 트집잡아 로마 황제 이외의 다른 왕을 들먹였다고 모함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에 대한 불경죄와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모함하여 죽이더니(마26:65; 27:11) 이번에는 예수의 제자들을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고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진리에 관해 전파하는 자들을 도리어 종교적 · 정치적 술수로 죽이고 음해하려는 자들의 사악한 면모를 여실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다.
17:8 무리와 읍장들이…소동하여. - 로마법상 반역죄는 매우 엄하게 다스려졌으며 결코 허용될 수 없었다. 그러한 연유로 데살로니가의 관리들은 사악한 유대인들의 근거 없는 고자질에 넘어가 야손과 형제들을 엄히 다루었다(9절). 즉 저들은 유대인들의 악하고 교활한 계략에 미혹되어 저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만 것이다.
17:9 보를 받고. - 이 말은 '돈이나 값진 물건 등으로보증을 받고'라는 말로 오늘날의 식으로 하면 보석금을 받은 다음 그것을 보증으로 하여 어떤 확약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즉 읍장들은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한 야손과 교회의 형제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그것을 보증으로 하여 앞으로 바울과 실라를 데살로니가에서 떠나게 한 다음에 더 이상 데살로니가 지방의 영역 안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그런 소요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풀어주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 여러 가지 위협과 장애에 부딪혔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서신을 띄우면서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 2:18)라고 자신의 데살로니가 행(行)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였다. 바울은 이처럼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의 행동을 사단의 행동으로 보았다. 실제로누가의 기록은 사단이 폭력배를 동원하기까지 하여(5절) 바울과 실라와 데살로니가에 있는 주님의 추종자들을 괴롭혔던 것을 실감나게 묘사해 주고 있다. 사단은 주님의 생명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을 격렬하게 방해하였으며 종교적 편견과 자기 이익에 열광이었던 유대교도들은 그러한 사단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그러한 사단의 위협과 방해가 무서워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문으로 말미암아 형제들이 받을 고난을 생각하여 데살로니가 방문을 삼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바울이 유대인들의 위협 때문에 주님의 형제들이 있는 곳에 가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행 15:26; 20:24).
17:10-15 베뢰아에서의 전도 사역
지난 달라(1-9절)에서는 데살로니가에서의 바울의 전도 사역과 유대인들의 배척으로 인해 바울이 사끼시를 베뢰아로 옮기게 된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어 부문은 베뢰아 기방에서의 바울의 전도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데살로니가를 떠난 바울 일행은 베뢰아 지방으로 향하였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남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진 소도시로 그다지 중요한 도시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베레아 사람들의 신사적인 태도와 유대인들의 완악한 모습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본문의 중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베뢰아 사람의 신사적인 태도이다(10-12절).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곳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인들보다 더 복음을 편견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열심 있게 받아들였다. 즉 이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과 구약의 말씀을 진지하게 고찰한 후 객관적으로 복음을 옳다 인정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이다. 이러한 베뢰아인들의 복음과 말씀 연구에 대한 열의와 겸손은 오늘날 모든 성도들이 지녀야 할 아름다운 태도이다.
둘째, 유대인들의 박해이다(13-15절). 즉 바울이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이곳이 데살로니가에서 약 80km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쫓아와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전도사역을 방해한 것이다.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의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쫓아와서 박해한 것과 같은 집요한 모습을 보여 준다(행 14:19,20).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이들이 복음에 대한 핍박과 박해가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열심인 양 착각한 데 그 원인이있다. 하여튼 이런 유대인들의 완악한 태도는 복음에 대한 오해와 영적 무지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을 저지르게 되는가 하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엡 4:17-20). 한편 유대인들의 거듭된 박해는 오히려 복음을 신속하게 여러 지방으로 전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는데, 이것도 복음 전파를 위한 성령의 섭리라 할 수 있다.
17:10 밤에 형제들이…보내니. - 인적이 뜸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밤이 되자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은 바로 바울과 실라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바울은 마게도냐의 중심지인 데살로니가에서 오랫 동안 활동하고 싶어 했으나 자신으로 인해 데살로니가 형제들이 당할 고난을 생각하여 형제들이 권유하는 대로 결국 데살로니가를 떠났다. 그리고 이후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방문을 하지 못했으며(살전 2:17-20), 자신이 못가는 대신 디모데를 보냈다(살전 3:2).
베뢰아. - 데살로니가 서남쪽으로 약 75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마게도냐 평원 남쪽에 있는 올림푸스 산맥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조용한 전원 도시이다. 오늘날에는 베리아(Verria)로 불리우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외떨어진 곳에 있어 정치적 중요도가 적었으며 상업적으로 그리 번성하지 못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은 이곳을 바울의 피신처로 선택한 것같다. 베뢰아의 위치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지도를보다 참조하라.
17:11 더 신사적이어서, - '신사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게레스테로이'는 '좋다'는 뜻의 접두어 '유'와 '생' 이라는 뜻의 '케네스'의 합성어로 풀이하면 출신이 좋은' 또는 '가문이 좋은', '고귀한', '고상한' 이라는 의미이다. 헬라어 고전(古典)에서는 '문빌이 좋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본문에서는 '고상한'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거친 정치적 성향이나 투박한 학문적 자세보다는 순수한 인간적 성품과 세련된 학문적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 고상하고 세련되며 진지한 경향이 있는 베뢰아 사람들은 낯선 기독교의 도를 무작정 받아들이거나 허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진지하게 고찰한 후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베뢰아 사람들의 신중하고도 진지한 종교적·학문적 자세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한가하여. - '말씀이 과연 받아들일 만큼 타당한가 하여'라는 뜻으로, 이는 베뢰아 사람들이 학문적 · 철학적 사고와 지성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즉 베뢰아 사람들은 철학적 성향을 지니고 있어 성경 말씀에 관해서도 회의적인 방법으로 탐구하려는 자세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부정(否定)을 위한 회의가 아니라 보다 정확하고 참된 진리로 나아가려는 검증 방법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세는 진지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는 지성적인 자세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누구나 성경을 객관적으로 고찰한다고 해서 다 믿음에 이르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믿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 뜻에 따라 주고자 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엡 2:8). 그러나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책으로서 살아 운동력이 있으니 읽는 자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딤후 3:16; 히 4:12).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날마다'와 '상고하다'는 말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성경의 진실성을 탐구하되 '날마다'하였으며, 하되 '상고하였다'. 즉 베뢰아 사람들은 진정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도를 대하고 검토하되 '부지런히' 검토하였으며, 또한 깊이 탐구하였던 것이다. 이는 참으로 아름답고 본받을 만한 성경 공부 자세할 아니할 수 없다.
17:12 그 중에…많고…적지 아니하나. - 뒤이어 따로 헬라인들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는 말 중 '믿는 사람'은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 같다. 즉 바울은 베뢰아로 피신해 그의 습관대로(2절주석 참조) 유대인의 회당으로 갔으며 거기서 유대인들에게 전도한 결과, 그들 중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겨난 것이다. 또한 유대인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에서처럼(4절) 적지 않은 헬라인과 귀부인들도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이들은 일찍이 유대교로 개종해 있던 자들일 수도 있다. 한편 바울의 아시아 전도 여행때 함께 동행했던 소바더(행 20:4)도 이때 회심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바울이 베뢰아에서 많은 회심자를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바울의 노고와 베뢰아 사람들의 진지하고도 깊이 있는 성경 공부 자세 덕분이었다.
17: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알고…소통케 하거늘. -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전도에 성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데살로니가의 사악한 유대인들(5절)은 마치 일거리라도 만났다는 듯이 데살로니가에서 약 75km나 떨어진 베뢰아까지 지체없이 달려 갔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전형적인 수법인(8절 주석 참조) 군중 선동과 폭력배의 힘을 빌어 베뢰아를 발칵 뒤집어 놓았을 것이다. 실로 악한 일에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집요하게 열심을 다하는 어리석고 사악한 유대 종교주의자들과 정치꾼들의 형태를 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광경이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는 저들의 배후에 할 수만 있으면 택한 백성이라도 미혹하려 날뛰는 사단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벧전 5:8).
17:14 바울을…바다까지 가게 하되. - 시내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는 본문대로 '바다로 가게 하였다'(on his way to the sea, RSV)로 되어 있다. 그러나 기타 몇몇 사본 등에는 '바다로 가는 것 같이'(to go as it were to the sea, KJV)로 되어 있다. 전자는 그대로 해로로 갔다는 것이며(Meyer, Hervey, Knowling), 후자는 해로로 가는 것처럼 하며 육로로 갔다는 뜻이 된다(Ramsay, Bruce, Bengel). 그러나 추측컨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극악하게 설친 점으로 보아 바울은 육로보다 잡힐 위험이 더 적은 해로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 본절에 의하면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의 표적은 바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바울의 뛰어난 변론술과 그의 능력이 특출하여 유대인들은 어떻게든 바울을 제거하려 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바울만 잡아 없애면 기독교의 선교 활동이 소멸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베뢰아의 형제들은 우선 급한 대로 바울부터 먼저 피신시키고, 나중에 실라와 디모데까지 피신시킨 것이다(15절).
17:15 바울을…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 베뢰아에서 아덴까지는 육로로 320km 거리이다. 그러나 바울 일행은 해로로(14절) 지중해변을 따라 그리이스 남단의 아덴으로 항해했으므로 육로로 가는 것 보다 훨씬 빨리갔을 것이다. 아무튼 마게도냐 지방에서의 위험을 피하게 하기 위해 베뢰아의 형제들은 멀리 떨어진 아덴까지 바울과 동행하였다. 이는 바울의 신변을 진정으로 염려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애의 실천이 아닐 수 없다.
명을 받고. - 바울은 아덴에 도착한 후 베뢰아에 남아 있던 실라와 디모데를(14절) 속히 데려 오도록 그와 동행했던 베뢰아의 형제들에게 부탁하였다. 그런데 행 18:5에 의하면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를 만난 곳은 고린도였으며, 살전 3:1,2에 의하면 바울은 아덴에 혼자 남았고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냈다.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구절은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오히려 실라와 디모데의 행적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즉 ① 베뢰아에서 형제들의 안내와 보호로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동행했던 베뢰아의 형제들에게 실라와 디모데를 속히 데려오도록 부탁했다(14,15절). ② 신라와 디모데가 곧 아덴으로 왔다(살전 3:1). ③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만난 바울은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살전 3:2) 그리고 실라를 빌립보로(빌 4:15) 각각 보낸다. ④ 디모데와 실라를 보낸 후 바울은 홀로 고린도로 갔다(행 18:1). 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바울이 있는 고린도로 갔으며 거기서 바울과 상봉했다(행 18:5; 살전 3:6). 아마도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의 보고를 듣고 데살로니가에 첫 편지를 띄웠을 것이다. 서신서 개론 특별자료 '바울의 연대기' 참조.
17:16-34 아덴에서의 전도 사역
본문은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소동을 피해 배를 타고 아덴에 이르러 그곳에서 전도 사역을 펼치는 바울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아덴은 아가야 지방에 있던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학문과 철학, 예술로 유명한 곳이었다. 특별히 철학적으로는 인간의 쾌락을 최고의 덕으로 삼는 에비구레오(Epicurus) 학파와 정해진 운명에 따라 냉철한 이성에 바탕을 둔 도덕적 삶을 강조하는 스도이고(Store) 학파가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그러나 학문과 철학 등에 대해서는 유명했던 그곳이 종교적으로는 매우 미신적이고 불경건했다. 또한 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아덴에는 무려 300개의 공식화된 우상과 3만여개의 신상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아덴은 헬레니즘의 최고봉에 달할만큼 문화적으로 번창했던 반면, 영적으로는 심히 부패해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아덴 사람들의 모습을 분개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이해시키기 위해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논쟁을 벌였다(16-21절). 이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적절하게 복음을 증거하려는 바울의 전도 전략의 일환이었다. 아덴인들의 철학적 경향에 따라 복음을 논리적으로 변증하고자 한 바울의 소위 '아레오바고의 설교'는 대략 다음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하나님께서 참신이심을 밝힌다(22-25절). 즉 바울은 아덴의 종교성을 지적하면서 아덴 사람들이 섬기는 신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창조자요 만유의 주재이시며 완전하신 신이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아덴 사람들은 헬라적 신관에 따라 온갖 신을 섬겼으며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기므로 바울은 다른 신들은 모두 거짓되거나 피조된 우상에 불과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만유의 주재와 유일하신 신임을 증거한 것이다. ②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밝힌다(26-28절). 아덴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티카(Attic) 본토의 흙으로 창조되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마치 유대인의 선민 의식을 연상케 하는 이들의 인간관에 대하여 바울은 온 인류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한 혈통임을 강조하면서 오직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증거한다. 여기서 바울은 크레타(Creta)의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 B.C. 6세기)의 4행시 '크레티카'(Cretica)를 인용하여(28절) 아덴 사람들에게 익숙한 말씀으로 주의 복음을 전한다. 그러나 바울이 헬라의 지식을 복음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했어도 복음의 핵심은 정확하게 전달하였다. ③ 회개에의 촉구이다(29-31절). 바울은 우상 숭배를 허탄한 것으로 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심판을 선포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신도는 지적 교만으로 인해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헬라인들의 배타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소수의 사람에게만 감동을 주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을 뿐 큰 효과를 기울 수 없었다(32-34절). 이는 철학과 같은 초등학문으로는 진리를 바로 알 수 없으며, 진리를 알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이 없이는 결코 진리를 수용할 수 없음을 깨준다. 사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주관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지 세상의 학문이나 인간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마 18:3; 고전 1:18). 결국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교만과 자신의 사변적 설교의 한계를 통감하고 아덴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고린도로 행선지를 바꾸고 만다(행 18:1). 뿐만 아니라 그는 사변적 설교를 통한 복음전파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고린도에서는 오직 '십자가의 도'(고전 2:2) 만을 전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17:16 아덴. - '아덴'(Athens)은 헬라의 수도이며, 헬라 문화의 중심지이다.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세계 3대 도시 중 하나였다. 에게 해의 샤론 만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파르네스 산, 펜텔리쿠스 산, 히멧투 산으로 둘러 쌓인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 도시는 아티카(Attica)의 영웅 데세우스가 건설하였으며, 아테나(Athena)라는 여신의 이름을 따서 아덴(Athens)이라고 명명되었다. 페리클레스(Pericles, B.C. 459-429년)가 지배할 당시 정치적, 문화적으로 황금기를 맞이하였는 바 이때 파르테논(Parthenon)과 에레크테움(Erechtheum) 신전을 비롯한 여러 공공 건물 및 많은 건축물이 세워졌다. 또한 이 도시는 철학, 수사학, 문학, 과학 등의 학문을 꽃피웠다. 그래서 '헬라의 눈', '모든 지혜의 본 고장'으로 불리웠을 만큼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으니 서양 문명과 더 나아가서는 세계 문명의 발상지였다.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이기도 하며, 에피큐로스, 스토아 학파도 이곳에서 활동하였다(18절). 아덴은 또 학문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고장으로 자유 시민 사회를 발전시켰으며, 헬라의 찬란한 도시 국가 연맹의 맹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전성기가 쇠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게 패한 뒤(B.C. 431-404) 쇠퇴하기 시작하여 마게도냐의 빌립 대왕에게 정복되었으며(B.C. 338) 결국에는 로마에게 정복당하였다(B.C. 86). 그럼에도 아덴의 문화적 지배력은 계속 살아 있어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였으며, 사도 바울 당시에도 옛 영화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아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분하여. - 아덴은 신전의 도시였다. 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사원들로 가득했으며, 그 외에도 셀 수 없는 각종 신들과 우상을 위한 신상들이 거리, 광장, 마을마다 널려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역사적 관점에서는 세계를 지배하는 찬란한 문명의 걸작품들로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울의 눈에는 헛되고도 어리석은 우상들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분명히 바울은 우상이 가득한 아덴 시를 보면서 '나 외에도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20:3,4)는 하나님의 계명을 상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의문이 일어나 영적으로 무지하기 그지없던 아덴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못견뎌했을 것이다.
17:17 회당에서는…저자에서는 변론하니. - 의문에 받친 바울(16절)의 열성적 전도 활동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바울은 유대인들의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의 경건한 사람들에게 진도했으며, 저자에서는 매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습관대로(2절 주석 참조) 낯선 아덴에서 유대인의 회당을 찾았으며, 또한 헬라 문명사회에서의 생활 중심지였던 '저자'(5절 주석 참조)에서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다. 당시 아덴은 헬라 문명의 중심지였고 특히 '저자'는 학문 강의와 대화, 토론의 중심지였기도 하니 바울이 아덴 사람들과 기독교의 진리에 관해 강론하기에 적당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바울은 어려서부터 유대인으로서의 율법 교육과 로마 시민으로서의 필요한 소양을 모두 터득하였는 바(행 22:3) 헬라 철학자들과 논쟁하는 데에도 하등 지식이나 웅변술이 딸리지 않았을 것이다(18절).
17:18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 - '에비구레오'는 '에피큐로스 학파'(Epicureans)를, '스도이고'는 '스토아 학파'(Stoics)를 지칭한다. 에비구레오는 사모스(Samos)섬 출신의 에피큐로스(Epicurus, B.C. 342-270)가 창설한 학파로 그의 이름을 따라 에피큐로스 학파로 불리웠다. '쾌락'을 인생의 최고의 목표로 삼았는데 그 쾌락은 육체적 쾌락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평정, 즉 아타락시아(ataraxia)를 통한 쾌락이다. 종교적으로는 자연신론의 경향을 띠고 있었는 바 신은 있으나 인간과는 별개의 존재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주의는 점차 육욕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다음으로 스토아 학파는 키디움(Cytium) 출신의 제노(Zeno, B.C. 340-265)가 창설한 학파로, 회당에서 제노가 강의하였기 때문에 회당이라는 뜻의 헬라어 '스토아'라는 말에 따라 그 추종 무리를 스토아 학파라고 명명하였다. 그들은 엄격한 금욕주의를 주장하였는 바 에피큐로스 학파와 대립되는 학문을 발전시켰다. 또한 이성을 강조하며 청빈과 자연에 따른 생활, 만민 평등 사상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고상한 사상 때문에 로마의 황제나 박식한 고관들이 많이 추종하였다. 이 스토아 학파의 종교관은 범신론이었는 바 최고의 신이 곧 세계 정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말장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페르몰로고스'로 원의(原意)는 '씨앗을 줍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학문적으로는 '잡다한 지식을 주워 모아 동냥 지식을 쌓는 자'라는 멸시의 의미로 쓰인다(Bruce). 결국 헬라의 철학자들은 바울을 형편없는 잡지식인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 - 에피큐로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바울을 동냥 지식꾼으로 보았고, 저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싸움을 또 다른 새로운 신을 전하는 자로 보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육체의 부활을 전했는데 헬라 사상에서 육체의 부활을 가르치는 철학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덴에서는 끝없이 새로운 신들을 만들고 전하고 신상들을 세웠는데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와 하나님도 그런 신들의 하나로 여겼던 것이다. 더욱이 아덴 사람들은 바울이 말한 '부활'(다나스타시스)을 질병에서 부터의 회복(Bruce)이나 예수란 신의 배우자인 또 다른 신의 이름 정도로 이해했을 수도 있다(Longeneker).
17:19 아레오바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레이온 파곤'은 '화성'을 뜻하는 '아레이오스'와 '언덕'이라는 뜻의 '파고스'의 합성어로 직역하면 '화성의 언덕'이란 말이다. 이 언덕은 아덴의 중앙 광장 북편, 아크로폴리스의 서편에 있는 평평한 바위 광장이다. 희랍 신화에 '아레스'('화성'이라는 뜻의 신)가 그의 아들넵투네(Neptune)를 살해한 범인을 이곳에서 재판하였다고 하여 종종 공개 재판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소크라테스도 바로 이곳에서 재판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덴 사람들이 바울을 붙들어 이 언덕으로 데려간 것은 공개 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공식 석상에서 바울의 말을 들어 보고자 해서였다.
17:20 이상한 것을…알고자 하노라. - '이상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세니존타'는 '놀라게 하는 것'이란 뜻이다(Robertson).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의 내용은 아덴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이었으며 새로운 것에 강한 호기심을 보이던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다. 특히 육체의 부활을 말한 것이(18절) 그들에게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놀라운 것으로 비추인 것 같다.
17:21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 - '아덴에 살고 있던 외국인'을 가리킨다(공동번역). 이들은 아덴의 문화, 풍습 등에 동화되어 아덴 사람들과 별다른 마찰없이 생활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가장 새로 되는 것…외에…않음이더라. - 당시 아덴 사람들의 생활과 지적 태도를 분명히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아덴 사람들은 끝없이 새로운 것을 찾았으며, 그러한 면모 때문에 세계를 지배하는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지나치게 새로운 것만을 원해 과거의 좋은 것조차 이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하였으니 저들은 모든 것에 너무 빨리 식상해 하였다. 즉 지나치게 새로운 것만을 찾게 된 아덴 사람들은 점차 지적인 면에 있어 피상적으로 되었으며, 그것이 그들의 사고 방식을 얄팍하게 만들어 결국 아덴을 쇠약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17:22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 '아레오바고'는 헬레니즘(Hellenism)을 대표하고 상징하던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곳의 한 가운데 서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이다. 즉 사도 바울은 협회 단신으로 이방 문화의한 중심지에서 그리스도의 도를 최초로 설파한 것이다.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 일부 번역본은 본질을 '너무미 신적이다'(too superstitious)로 번역하여 나쁜 의미로 보았고(KIV, Vulgate), 또 다른 번역본은 '종교심이강하다'(very religious)로 번역하여 비교적 좋은 의미로 보았다(RSV, NIV), 칼빈(Calvin)과 루터(Luther)는 이중 전자의 견해를 취했으나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브루스(Bruce)는 후자의 견해를 취했다. 그러나 어쩌면 바울은 양자의 의미를 다 내포하는 말로써 했을 수 있다. 즉 바울은 아덴인들이 현상(現像)을 초월하는 영적인 것들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것에 대하여서는 높이 평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관심이 각양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섬기는 미신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던 것(23절)에 대하여서는 질책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7:23 알지 못하는 신에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그노스토 데오'로 대개 대문자로 기록되어 있다(Nestle). 이 말이 유래하게 된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3세기 때 기록된 문헌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B.C. 6세기에 아레오바고(19절 주석 참조)에 큰 질병이 만연하여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때 구레네 사람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가 와서 이 병고로부터 구해주고 많은 신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그때 그는 혹 감사의 대상에서 빠진 신이 있을까 염려하여 제물을 놓고 그 위에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라는 제단을 쌓았다고 한다(DiogenesLeartius). 또 2세기 때의 지리학자였던 판사니아스(Pansanias)는 아덴으로 여행하는 도중에 '이름은 있으나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라는 비문이 새겨진 제단을 보았다고 한다(Bruce). 본장 자료노트의 삽화를 참조하라. 이러한 내용들로 보아 아덴 사람들은 모든 신들을 섬기려고 했으며, 그래서 불식간에 알지 못하는 신들을 섬기지 못해 그들로부터 저주와 재앙을 받을까 염려하여 알지 못하는 신들을 위한 제사까지도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이러한 아덴 사람들의 미신적인 어리석음을 보고 분노하였을 뿐 아니라(16절) 저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감추지 못하였으니 아덴 사람들의 종교적 성향을 접촉점으로 삼아 전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당시 헬라 · 로마의 12주신에 대해서는 행 14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17:24 만유를 지으신 신. -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혹 계시는데 자신들이 알지 못하여 섬기지 못하고 있는 신이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둔 사실(23절)에서 '너희들이 모르는 참 신이 계신데 그 신이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끄집어 내고 그 하나님이 어떠한 신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설명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 사항이 바로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라는 점이다. 즉 헬라 철학자들은 '만물'(판타)의 근원을 물, 불. 공기 등과 같은 물질에서 찾았으나 바울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요 주재자이심을 선포한 것이다.
천지의 주재시니. -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곧 자신의 피조계의 주재자(主宰者), 즉 주인이시요 섭리자이시다. 즉 헬라인들이 신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여 만물이 생성. 소멸된다고 보았으나 하나님은 유일하신 절대자로서 자신이 지은 온 우주와 세계를 친히 지배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랜드 종합교리, '신론' 참조.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 '스스로 있는 하나님'(출 3:14)은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지은 신전에 거하시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께서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처'였을뿐이지 진정한 하나님의 처소는 될 수 없었다. 바울은 이러한 언급을 하면서 헬라인들의 파르테논 신전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시사하였을 것이다(왕상 8:27: 행 7:48).
17:25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 자신 이외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필요 없는 존재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피조물로부터 섬김을 받아야만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다. 헬라인들은 신들을 사람들로부터 섬김과 제물을 받으며 희로애락(喜怒哀樂)하는 존재로 이해하였으나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모세의 율법을 통해 제사와 제물을 요구하신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백성을 위함이었지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었다(신 28:1-14).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 -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무엇을 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사 그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필요한 물건들을 친히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다. 즉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생명을 주셨으며(창 2:7) 그 생명이 유지되도록 호흡할 수 있는 자연적인 조건과, 일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제공하셨다. 자연신론자들은 신이 있더라도 인간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였으나 하나님은 지금도 친히 인간을 돌보고 계시는 것이다.
17:26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 유대인들이 선민(選民)임을 자랑하듯 민족적 우월함을 주장하거나 자랑하는 경향은 헬라인들에게도 있었다(Longeneker). 그러나 바울은 모든 인류가 한 사람 아담의 후예임을 증거하면서(창 1:27-30) 그러한 민족적 차별과 우월주의가 허망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의 모든 족속'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불문하고 그 창조주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 모든 인간의 마땅한 본분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다(27-31절; 전 12:13).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대로 내어 두시지 아니하시고 인류의 시 · 공간적인 모든 것에 관려하시어 섭리하신다. 인간의 수명과 나라와 열방의 기간을 친히 정하실 뿐만 아니라 그 각 인간과 나라들과 열방들의 영토의 범위까지도 나누시며 세밀하게 관여하신다(신 32:8; 시 74:17; 115:14; 욥 12:23; 단 2:21). 그리고 종국에는 만국을 심판하실 것이다(계 6:10). 무신론자들은 신이 없다 하며, 자연신론자들은 신이 인간과 무관하다고 하며, 과학 우선주의자들은 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나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 가운데서 지금도 친히 역사하시고 섭리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17:27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 -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우주를 연구하고, 역사의 흐름을 보고, 인체의 신비스런 기능을 보며 이러한 것들을 만드시고 섭리하시는 존재자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다른 이들보다는 쉽게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곤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온 우주와 세계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어 자연을 보고도 하나님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과 역사만으로는 하나님을 분명히 알 수 없다. 아덴 사람들이 신을 찾아 헤매었지만 정작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 채 각종 우상을 섬긴 경우가 이를 잘 증거해 준다(22,23절). 사실 하나님의 분명한 자기 계시인 성경과 복음을 접하지 아니하고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더욱이 모든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통해서만(롬 5:9)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고 그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17:28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 본절은 크레타사람 에피메니데스(Epimenides, B.C. 600년경)의 4행시인 '크레티카'(Cretica)에도 나온다(Bruce, Longeneker). 바울은 당시 많은 헬라인들이 알고 있던 이 시를 인용하는 가운데 모든 인간이 태초부터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고'(27절) 우리 가운데 내재하시어 일반 은총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신다(25절; 행 14:17).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이 인간과 만유 속에 내재하셔서 역사하신다고 하여 자연신론 또는 범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자연신론 또는 범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자연 또는 만물그 자체가 신이라는 것임에 반해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천지의 주재자께서 자연과 만물을 주재하시는데 그것들을 인간들에게 필요에 따라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 이와 같은 문구는 스토아 철학자 중 바울과 동향 사람인 길리기아의 아라투스(Aratus, B.C. 270년경)의 시 '페노메나'(Phenomena)와 무시아의 클레안데스(Cleanthes, B.C. 300년경)의 시 '힘누스투 제우스'(Hymnus to Zeus, 제우스 신에게 바치는 노래)에도 나온다. 당시 희랍 학문이나 문학에도 박식했던 마음은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렇게 헬라시인의 시를 정확히 인용하여 하나님의 창조주되심과 인간의 피조물됨을 역설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이방의 선교자로 선택하신(행 9:15)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즉 바울은 당시의 모든 학문에 정통했었으니(Bruce) 헬레니즘의 중심지였던 유럽의 아덴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데 하등의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17:29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 바울은 이미 28절에서 헬라 문학가들의 말을 인용하여 '신의 소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28절 주석 참조). 그러나 그 의미는 헬라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때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창 1:26)을 따라 만들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곧 '하나님의 소생' 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하나님의 소생'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신의 소생'처럼 신과 동일시되거나 신에 동화되어가는 자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자신의 피조물됨을 인정하여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하나님의 소생'은 자기 자신보다 못한 피조물인 자연물을 신으로 섬기거나 아니면 흙이나 돌, 나무, 금속 따위로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인간보다 귀할 수 없으며(마 16:26),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보다 존귀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4;12; 롬 9:19,20). 그런데도 인간보다 못한 금이나 은이나 돌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보다 못한 버러지의 형상(롬 1:23)으로 낮추는 죄악이며, 더욱이 하나님 외에 있지도 않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 또한 어리석음의 극치이자 신성 모독 죄인 것이다.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 이제 바울의 말은 결론에 이르고 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24절) 바울은 드디어 복음의 정수(精髓)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해 증거한다(31절). 그리하여 바울은 아덴인들에게 우상 숭배에서 떠나 참신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결단을 촉구한다. 즉 바울은 먼저, 이제까지는 그리스도가 오시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연과 역사를 통하여 어렴풋이 자신을 알 수 있도록하셨는 바(17절) 비록 사람들이 우상을 섬겨도 간과하셨음을 지적한다(행 14:16; 롬 3:25). 그리고 이어서는 이제 확실한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셨으므로 더 이상 변명하지 못하게 되었으니(롬 1:17-20)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야 할 따름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다만 믿지 않던 자가 복음을 영접할 경우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때의 허물을 묻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사실 회개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자비롭고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인간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고 계시며(벧후 3:9) 친히 그 길을 예비해 놓으셨다(민진 3:18). 그래서 마음은 이방신을 섬기며(16절)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는 아덴인들에게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한 것이다.
17:31 정하신 사람. -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지칭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성육신(肉身)하신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셨거니와(마 8:20; 9:6; 10:23; 막 8:31; 눅 9:26; 12:8; 17:24; 요 1:51; 3:13, 14; 5:27 등)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또한 완전한 인간이셨다. 한편 바울은 '몸의 부활'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 즉 만일 예수님이 인간이 아닌 존재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후 부활하셨다면 그 부활은 ‘사람의 몸의 부활'이 아니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부활의 소망도 없을 것이다(고전 15:14).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 하나님께서 그의 일꾼들을 통하여 각처의 사람들에게 다 회개하라고 명하시는 이유는 바로 본문의 말씀처럼 '정해진 심판의 날'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유대인에게나(행 13:38-41), 다른 이방인에게나(행 24:25) 세상 끝날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전하였듯이 그리스도는 장차 오셔서 반드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요 5:22-30; 9:39; 계 20:4). 비록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사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만(30절 주석 참조) 그 기회의 날에도 정한 기간이 있으니 때가 차면 결국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 -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저를 믿는 자들에게는 자신도 부활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되는 영생의 보장이 된다. 그러나 저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고전 1:18). 왜냐하면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선 장차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마 25:31-46).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 하나님 자신이자(요 10:30) 하나님의 아들이신(막 1: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마 27:38,50) 부활하시어(마 28:6) 대속사역을 다 이루어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게 하셨으므로(요 3:16) 이제 인간들은 더 이상 구원의 방도가 없다고 핑계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의 날에 무어라고 항거하지 못하게 된다. 즉 바울이 말하는 본서의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며 기롱하던 자들 역시 훗날 심판의 날에 영원한 형벌을 받아도 변명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17:32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다시 듣겠다 하니. - 헬라인들도 영혼 불멸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영은 전하기만 육신은 가한 것이라는 이원론적 사상에 빠져 있던 그들은 육신의 함께 대하여서는 생각조차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증기하자 아옌인들은 대부분 실망의 빛을 띤 채 바울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주 당시 에피큐로스 학파는 사람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다가 죽느냐 하는 것에 최고의 관심을 기울였으며 스토아 학파는 인간이 죽으면 자연이라는 신으로 흡수되니 부활은 없다고 보았듯이(18절 주석 참조) 당시 헬라의 풍토는 인간의 부활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덴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기롱하며 자리를 떴던 것이다. 그러나 일부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다시 듣고자 하는 진지성을 보이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마침내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다(34절). 혹자는 본절의 '다시 듣겠다'하는 말도 바울에 대한 비아냥거림으로 해석하나 (Meyer) 아레오바고의 관원이나 몇몇 아덴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것으로 보아(34절) 메이어의 견해는 정당치 못하다(Calvin, Alford, Knowling, Weiss). 즉 비록 소수이긴 하나 바울은 아덴에서도 복음의 열매를 수확한 것이다.
17: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 몇몇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경청하였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농담조로 기롱하며 진지하게 듣지 아니하였다(32절). 그래서 바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아레오바고를 떠났다.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전토하러 보내실 때에 복음을 전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마을에서 속히 떠나고 떠날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라고 말씀하셨다(마 10:14; 막 6:11; 눅 9:5). 꼭 그같은 말씀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떠난 것이다. 어쩌면 바울의 눈에는 그러한 아덴 사람들이 '이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서 종 노릇하는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갈 4:3). 사실 바울은 철학과 같은 세상 학문의 어리석음과 위험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고 권면하였으며,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고전 2:2).
17:34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 아덴에서의 전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복음의 씨는 뿌려졌다. 그리하여 비록 소수였지만 하나님을 믿는 제자를 얻게 되었다. 그중 아마도 가장 큰 수확은 아레오바고의 관원인 디오누시오(Dionysius)의 회심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덴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디오누시오. - 아덴에는 12인으로 구성된 재판위원회가 있었다. 디오누시오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아덴에서의 그의 지위는 상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에 의하면 그는 최초의 아덴 감독이 되었으며 후에는 고린도의 감독으로 있다가 95년경 도미시안(Domitianus, A.D. 81-96) 황제 때에 순교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학자는 디오누시오를 몽마르뜨 광장에서 참수(新首)당한 프랑스의 성자 데니스(Denys)와 동일 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Gregory).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 - '다마리'(Damaris)라고 하는 이 여자가 디오누시오의 아내라는 추측도 있고(Chrysostom), 아덴을 방문한 나그네라는 설도 있으나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 그녀에 관한 증거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없는 대신 디오누시오와 더불어 특별히 그녀의 이름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녀는 아덴에서 왜나 알려진 귀부인이었던 것 같다.
연구자료
실라-복음 전파의 충실한 조력자
1. 인적 사항
① 실라는 '생각'이라는 뜻으로 로마식 이름은 '실루아노'(살후 1:1; 벧전 5:7).
② 로마의 시민권을 소유(행 16:37).
③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행 15:22).
2. 시대적 배경
A.D. 1세기 중반경에 주로 활동함. 이 시기는 이방인의 사도 바울을 비롯한 많은 전도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 제국 전역에 전파되고 곳곳마다 교회가 설립되는 초대 교회의 확장기였다. 이 시기에 실라는 바울과 함께 오늘날 유럽에 해당하는 마게도냐 지역의 복음 전파 사역에 몸바쳐 헌신하였다.
3. 주요 생애
1) 전도 여행 이전
① 출생 - -
②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됨 - 행 15:22
③ 예루살렘 교회이 사절로 뽑힘 AD. 49년 행 15:22
④ 안디옥에서 사역함 AD. 49년 행 15:23-33
⑤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에 동행 AD. 49-52년 행 15:40
2) 전도 여행 이후
① 빌립보 감옥에 투옥됨 AD. 49-52년 행 16:19-24
② 찬송 중에 감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함 AD. 49-52년 행 16:26
③ 간수에게 복음울 전파함 AD. 49-52년 행 16:27-34
④ 핍박을 인해 베뢰아로 피신함 AD. 49-52년 행 17:1-10
⑤ 베뢰아에서 디모데와 동역함 AD. 49-52년 행 17:13,14
⑥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함 AD. 55-56년 고후 1:19
⑦ 베드로의 디필자로 봉사함 AD. 64년경 벧전 5:12
⑧ 죽음 - -
4. 성품
① 이방인 구원 문제와 같은 중요한 사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의 사절단으로 뽑힌 것으로 보아 책임감과 신뢰감이 있고 지도자적 자질이 뛰어난 자(행 15:22).
②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며,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보아 말씀의 능력과 화해 도모의 능력이 뛰어난 자(행 15:32).
③ 사역 기간 내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봉사한 것으로 보아 매우 겸손한 자(행 16:26)
④ 바울, 베드로 등과 동역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아 화목을 도모하고, 원만한 성격을 소유한 자(행 15:40; 벧전 5:12).
⑤ 빌립보 옥중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드린 것으로 보아 끈기 있고 강직한 신앙을 소유한 자(행 16:26).
5. 구속사적 지위
①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지도자 중 하나(행 15:22).
② 전숭에 의하면 예수의 70인 제자 파송시 그 일원이었다고 함(눅 10:1).
③ 바울의 동역자로서, 또 베드로의 동역자로서 일하면서도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항상 두 번째 위치에서 겸손히 섬겼던 섬기는 자의 참 자세를 보인 자(행 15:40; 벧전 5:12).
6. 평가 및 교훈
① 실라는 바울과 비교할 때 그리 비중 있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헌신과 열심이 없었다면 바울의 사역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행 16:1-34). 이처럼 앞장 서서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역의 이면에서 동료 사역자를 묵묵히 돕는 일 또한 중요한 것이다. 실로 동역자들 간의 이러한 겸손과 협동이야말로 복음 전파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라 하겠다(벧전 5:6).
②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찬송과 기도로 주께 영광을 돌렸다(행 16:23-25). 이같은 실라의 신실한 태도는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불평하는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성도들이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통은 장차 누릴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조차 없다(엡 3:13). 이에 환난을 당해도 실라와 같이 소망 중에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것이다.
③ 실라는 바울과 함께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개종한 자들의 연약한 믿음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양육하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행 17:13,14). 이와 같이 성도는 전도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성숙한 신앙인이 될 때까지 잘 보살피고 양육하는 역할도 감당해야 한다. 이에 우리 성도들은 내가 전도한 영흔이 굳건한 신앙을 소유할 때까지 어머니와 같은 심정으로 그들의 성장을 도을 수 있어야 하겠다.
④ 발은 착고에 채워지고 몸은 매를 맞아 타박상도 입었을 법한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를 생각해 보라. 그들은 이러한 암담한 상황속에서 좌절과 분노가 아닌 용기와 기뽑으로써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곧 그들은 감옥을 천국으로 만든 것이다. 진정 기도와 찬송을 통해 환경이 극적으로 변화되었고, 이에 감명받은 간수와 그 가족의 구원도 이뤄졌다. 이렇듯 어떠한 상황에서도 성도의 찬송과 기도가 끊어지지만 않는다면 무거운 심령은 기쁨으로 바꾸어질 것이며 이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분명 있을 것이다.
7. 핵심 성구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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