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장 교회의 성적 타락에 대한 책망과 음행자의 추방 명령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사도 바을이 스스로 파악한 고린도 교회의 여러 현안 문제들에 대하여 권고한 말씀을 보도하는 1:10-6:20까지의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의 내용은 교회 내에서 일어난 근친 상간(近親相姦) 등의 음행 사건과 이를 미온적으로 방치하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책망(1-8절)과일벌 백계(一罰百戒)를 위하여 음행자를 단호히 추방할 것을 지시한 명령(9-13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략 A.D. 55년 전후의 본서 기록 당시 고린도시는 확고한 안정을 구축한 로마 제국 치하의 번성하던 항구 도시요 상업 도시였다. 이런 고린도시는 물질적 번영을 배경으로 쾌락과 방종을 쫓는 세속 문화가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런 문화적 배경의 영향을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성도가 된 이후에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여 심각한 성적 타락이 교회 내에서도 자행되었고 또 여타 교우들도 이를 미온적으로 방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성도가 된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질서에 따라 선하고 바른 신앙 윤리(信仰倫理)가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바 이에 신앙 윤리를 심각히 훼손한 것은 물론 여타 성도에게도 심각히 영향을 끼친 교회 내의 음행에 대하여 단호히 책망하는 동시에 음행자의 추방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이런 본문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할 때에 우리는 먼저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인 성도 각자를 위하여 나아가서는 타락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교회가 가져야 할 순결한 신앙 윤리의 중요성에 대하여 새로이 인식하게 된다. 교회(헬, 에클레시아)란 이미 천국 시민권을 가졌으나 아직 세상 끝날까지는 이 땅에서 더 살아야 하는 성도들이 이 땅 위에 구성한 신앙 공동체이다. 이 교회를 통하여 성도는 복음을 계승받는 것이며 또 이를 중심으로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파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앙인으로서 의 모든 일상 생활을 교회를 중심으로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먼저는 공동체의 구성원인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신앙 공동체로서의 여러 역할을 은전히 수행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 위에 근거한 바른 교리, 그리스도의 박애 정신에 기인한 사랑과 봉사와 아울러 성숙하고도 순결한 신앙 윤리를 유지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우 중에 비단 음행 뿐만 아니라 명백히 성경의 교훈에 위배되는 중대한 범죄가 발생하였을 때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물론 그 죄를 자행한 교우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 범죄 사실을 단호히 지적하여야 한다. 그리고 실수를 범한 교우가 명백히 그 범죄와 단절하지 않을 경우 그를 마침내는 축출까지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 윤리에 대한 교회의 확고한 의지와 실천은 영적으로 볼 때 본문 당시의 고린도 교회보다 더욱더 타락한 시대 배경하에서 살아야 하는 현대의 우리에게 더욱 요청된다 하겠다.
외울 말씀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5:4,5)
고린도 교회의 성적 타락에 대한 책망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음행자 추방 명령
9 ○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5:1,2 본서에 나타난 고린도 교회의 8대 부패상
고전 1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 주제-5:1,2 고린도 시와 고린도 교회
고전 서론 특별 자료 참조
원어 연구-5:8, 순전함
여기에 쓰인 헬라어는 '에일리크리네이아'인데, 이 단어의 기원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① '태양빛'을 뜻하는 '헤일레' 혹은 '헬레'와 '판단하다' 또는 '시험하다'라는 뜻의 '크리노'의 합성어로 보는 견해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단어는 어떤 물건을 태양빛에 드러내어 명료하게 조사하여 본 결과 불순한 것이 전혀 섞여 있지 않은 순수한 상태로 판명된 것을 가리킨다.
② '에일로스' 또는 '에릴레오'(굴리다)에 기초하여 형성된 단어로서 본래 빠르게 움직이게 하거나 이리저리 굴려 체질함으로써 깨끗케 하였다는 의미에서 '순수한', 혹은 비유적으로 '결백한'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에일리크리네이아'는 전자의 견해에 따를 때 밝은 태양빛 아래에서 보더라도 전혀 불순한 것이 없는 본래의 순수한 상태를 가리키며, 후자의 견해에 따를 때는 본래는 순수하지 않았으나 체질에 의해 순수하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마을은 고린도 교회가 그들 안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행위를 척결토록 권면하는 문맥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후자의 견해가 더 적절한 것 같다. 그러나 불순한 상태의 발견은 밝은 태양빛 아래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전자의 견해도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이렇게 '에일리크리네이아'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수용할 때 본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서 항상 불순한 것을 골라낼 때만이 교회의 순수성이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도표-5:1-13 교회 안에서 성도가 경계해야 할 자들
1. 남을 비판하는 자(마 7:3)
2. 외식하는 자(마 15:7-10; 23:15)
3. 분쟁을 일으키는 자(고전 1:10)
4. 죄를 방관하는 자(고전 5:2,9)
5. 불의로 미혹하는 자(고전 6:9)
6. 범죄하고 회개 않는 자(고전 5:9-11)
7. 거짓 진리를 전하는 자(고후 11:4)
8. 쓸데 없는 말을 전하는 자(딤전 5:13)
9. 복종치 않고 헛된 말하는 자(딛 1:10)
10. 이단에 속한 자(딛 3:10)
주요 주제-5:1-13 교회의 권징
본장 연구 자료 참조
보감-5:7 유월절 어린 양과 그리스도
출 12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5:2 교회의 건덕을 위해 성도 개개인이 피해야 할 것들
고전 14장 자료노트 참조
신학 용어 -5:5, 주의 날
눅 17장 자료노트 참조
5:1-8 고린도 교회의 성적 타락에 대한 권고
1:10-4:21까지에서 글로에의 집 사람에 의해 전해 들은 것을 토대로 한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권면 중의 하나로 분쟁 문제를 논의한 바울은 이제 본장과 제 6장에서는 고린도 교회의 윤리적인 문제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게 된다. 그중 본장은 고린도 교회 내의 음행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본문에서는 고린도 교회 내에서 발생한 부도덕한 근친 상간의 죄(1절)와 이에 대한 교회의 방관을 책망하고(2-5절), 교회가 영적으로 순결해야 할 것을 유월절 규례를 실례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6-8절).
당시 고린도시는 세계적인 항구 도시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아울러 도덕적 타락과 성적 문란이 만연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서론 특별자료를 참조하라. 때문에 고린도시는 '방탕아'란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 이러한 고린도시에 있는 고린도 교회는 자연히 죄악 속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교회 내에서 근친 상간이라는 패륜적 사건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1절).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죄악에 대해 고린도 교회가 수수 방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2절). 사실 교회 내에 범죄자가 있으면 마땅히 그 사람이 죄를 회개토록 하기 위해 권징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인데도(마 18:15-17) 고린도 교회는 이와 같은 책임을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 교회 의 무책임한 행동을 책망하고 자신은 이미 그 음행자를 판단했음을 주지시켜 그리스도의권위와 능력 아래서 그를 출교(出敎)시킴으로써 후에 회개를 통하여 그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것이다(4,5절; 요일 1:9).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교회가 영적으로 거룩해야 함을 누룩의 비유와 유월절 규례 (출 12:7-14)를 통해 권면하고 있다. 즉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이전의 죄악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누룩없는 떡을 먹었듯이(출 12:8) 참된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누룩, 즉 죄로부터 구속함을 얻은 성도들은 삶 속에서 묵은 누룩이 발견되지 않도록 거룩해져야 하는 것이다(7-8절). 그런데 죄는 그 특성이 누룩과 같아서 그 크기가 매우 작다고 해도 마치 누룩이 삽시간에 온 덩어리에 퍼져 부풀리듯이(6절) 교회 내에 죄가 발생하였을 때 그대로 방치해 두면 삽시간에 주위의 모든 성도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그들로 하여금 죄악에 물들게 한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 내에 죄가 있을 경우 속히 가려내어 권징함으로 죄를 척결해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되지만(마 7:12 고전 4:35)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어긋나고 주위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불의와 범죄에 대해서까지 관용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은 더더욱 안된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도덕적 기준을 유지할 책임이 성도들에게는 있는 것이다(살전 4:3-5).
한편 교회의 권징이 지니는 목적은 죄악과 불의로부터 다른 성도들을 보호함과 아울러 범죄자 자신을 회개시키기 위함이다. 즉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회개의 기회를 주지도 않고 징벌을 내리는 것을 올바른 권징이라고 할 수 없다. 마치 원수를 대하듯이 권징이 보복적 성격을 띠게 되면 오히려 그것은 교회에 분쟁을 초래하는 또다른 원인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교회의 권징은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라야 한다(고후 2:5-11). 교회의 권징에 대해서는 본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이와 같은 본문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교회의 권징은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서 교회의 질서와 성결의 유지를 위해서만 쓰여져야 한다. 따라서 회개를 유도하는 것이 아닌 징계의 차원으로 교회의 권징이 남용되어서는 안된다(마 18:15,16).
②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은 서로를 위해 권면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성도된 자가 잘못 길로 들어서는 지체에 대해 이기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방관해서는 안된다(살전 4:1-6).
③ 성도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자들이므로 묵은 누룩처럼 내 안에 살아 움직이는 죄의 모습을 깨끗이 제거하여, 누룩 없는 떡과 같이 거룩하고 영적으로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지녀야 할 것이다(빌 2:15).
5:1 심지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로스'는 '실제로' 또는 '확실히'라는 의미로서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과는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즉 우리말에서 '심지어'라는 말은 '도가 지나쳤다'는 뜻으로 주로 어떤 기대치 이상으로 나쁜 행동을 했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그러나 본 용어의 헬라어 원의(原意)는 그러한 뜻보다는 '확실히 음행의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을 들어 알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음행.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르네이아'는 일반적으로 '성적 음란'을 지칭하는 말로 영어의 '포르노'가 이 말에서 파생되었다. 보다 학적인 용어로는 '간음'이라는 뜻의 '모이케이아'가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학적 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도덕적 음행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들으니. -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 소식을 글로에의 집 사람에게서 들있다고 하였다. 고전 1:11 주석 참조. 아마도 바울은 이 음행에 대한 것도 그에게서 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Ellicott).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 이방인 중에도 음행의 범죄는 있었다. 오히려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은 음행의 범죄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이방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전에서 공공연하게 음행을 저지르는 등 음행의 정도가 심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이방인 중에 음행이 성행했다 하더라도 '이런 음행', 즉 아비의 아내를 범하는 음행은 이방인 중에도 거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음행은 인간의 마지막 도덕적 본성까지도 짓밟는 패륜적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불신 세계에서도 있을 수 없는 그와 같은 패륜적 행위를 자행한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여기서 '이방인'을 비유대인으로 보고, 이런 현상이 복음을 오해한 유대인 개종자가 자신은 율법에서 자유로우므로 이런 일을 행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비유대인에게도 없는 음행을 행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Lightfoot). 그러나 여기서 '이방인'은 신자와 대조되는 개념으로의 '불신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음행은 고린도의 성적 문란함이 고린도 교회 내에까지 침투하여 교회의 윤리관이 흐려짐으로써 발생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와 관련하여 고린도시의 성적 타락상에 대해서는 본서 서론, '신학적 집필 동기와 배경' 부분을 참조하라.
아비의 아내. - 헬라어로는 '귀나이카 투 파트로스'로 직역하면 '아버지의 여자'이다. 따라서이 말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사회는 일부다처를 허용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의 여자'는 친 어머니가 아닌 계모나 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신화'가 보여 주듯이 헬라 시대에는 자신의 어머니 마저 성적 대상으로 보는 극단적인 패륜적 음행의 사회적 풍토가 없지 않았으므로 '아버지의 여자'는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한 '아버지의 아내들' 모두를 지칭한다고 보아도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극악한 음행의 범죄가 헬라 문명 안에 있던 고린도 교회에서도 제거되지 못했던 것이다.
취하였다. - 이것이 한글 개역 성경에는 과거로 번역되고 있지만 원문에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 '취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즉 고린도의 어떤 교인들은 현재도 계속적으로 아버지의 아내를 범하는 음행의 범죄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5:2 너희가…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 차마 용서할수 없는 패륜적 음행을 저지르는 자가 그들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같은 당파에 속했다는 이유로 음행한 자를 두둔하고 비호했던 고린도 교인들의 죄악을 책망하는 말이다. 한편 여기서 '통한히 여기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펜데오'( )는 '죽은 자를 위하여 애곡한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상대의 범죄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상대의 죄에 대해 같이 죄의식을 느끼고 슬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바울이 고린도 교회 내의 음행에 대해 고린도 교회 전체에게 그 책임을 공동적으로 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교회는 성도 개개인의 집합체임과 동시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룬 연합체이다. 따라서 성도 각 개인의 문제는 곧 교회 전체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음행의 문제에 직면하여 그것이 바로 자신의 문제임을 직시하고 마치 자기 몸에 병이 들었을 때처럼 그것이 속히 치유되도록 안타까워하며 간구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의 죄악을 방관할 뿐만 아니라 그들도 같은 악한 마음을 가진 결과 고린도 교회는 전체적으로 악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으며, 때문에 바울의 불같은 책망을 듣기에 이른 것이다.
5:3 내가 실로. -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음행의 잘못에 대하여는 공분을 느끼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믿음안에서 얻은 자식으로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고전 4:14) 복합된 바울의 뜨겁고도 애틋한 심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구절이다.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 시공의 제한을 받는 육체는 그 제한 때문에 고린도의 교인들과 멀리 떨어져 있으나, 마음은 고린도의 형제들과 함께 한다는 말이다. 이는 바울의 고린도교인들에 대한 열정을 나타내 주는 말이며, 한편으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치 바울 자신이 그들 앞에 있는 것처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으라는 의미를 암시해주는 말이다.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 '이 일 행한 자'는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음행을 저지른 자를 가리키며(1절), '이미 판단하였다'는 것은 그 음행한 자를 '축출하기로 했다'(13절)는 말이다. 바울은 육체적으로는 멀리 있었지만 이미 음행한 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으며, 그것을 본서의 편지로 알리고 있는 것이다.
5: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 바울은 이제 '복음으로써 낳은 자신의 자식들'(고전 4:15), 즉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다시 모여 자신과 협력하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서 파렴치한 음행자들을 처벌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즉 주 하나님의 의로 새롭게 무장하고 고린도 교회를 일신시키도록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주 예수의 능력으로. -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며(마 28:18) 버릴 권세도 가지고 계시고 취할 권세도 가지고 계신다(요 10:18).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믿고, 자신의 이름으로 모인 자들에게 이러한 권세를 행할 능력을 허락하셨다(마 18:20; 막 16:17).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주 예수 이름으로 모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음행하는 자를 물리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예수의 능력으로 악한 자를 물리치는 것은 합법적이고도 정당한 행위이다.
5:5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 이 말은 3절의 '판단하였노라'와 13절의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는 내용과 동일한 맥락의 말이다. 따라서 본구절은 어떤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육적인 제재를 의미하는 것(Lightfoot, Hofmann)이 아니라 단순한 출교의 형벌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본절 뒷부분의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는 말과 연관시켜 볼 때 본 구절의 말은 잔인한 형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출교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Augustine, Calvin, Beza, Olshausen, Godet). 바울은 음행하는 자들을 교회 밖으로 내어 쫓음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을 음행의 범죄로부터 보호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음행하는 자들을 그렇게 교회 밖으로 내어쫓는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영향의 범위 밖으로 내어 쫓는 것으로 보고 '사단에게 내어 준다'고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딤전 1:20). 한편 바울은 이렇게 음행의 범죄에 대해 가장 무거운 형벌인 출교의 벌을 내리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음행이라는 죄가 무서운 죄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 이 구절은 매우 이해하기 난해한 구절이다. 왜냐하면 본절은 마치 육신을 죽여 영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되어 있어, 육은 멸망해도 영은 구원받을 수 있는 것 같이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영과 육은 분리되어 구원받지 않는다. 즉 인간은 영과 육이 하나로 되어 있는 전인적(全人的) 존재이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서도 영과 육의 함께 구원받거나 함께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롬 8:11,23; 고전 7:34). 더욱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육신을 죽여서 영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오직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으므로(롬 1:17; 3:28) 본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본문의 '육신은 멸하고'는 '육신을 죽게 한다’ 또는 '육신만을 영벌에 처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해 출교와 같은 잠시의 육체적 고통을 주게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죄인이 계속 죄를 짓는 것을 방치하여 심판 날에 영육이 함께 멸망당하게 하는 것보다, 어차피 한번은 썩어질 육체에 벌을 가함으로써 결국 영육이 함께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낫다는 의미이다(롬 6:6). 그러므로 본문은 '죄에 속한 육적인 것을 멸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로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다. 한편 이렇게 볼 때 음행한 자들을 벌하라는 바울의 냉혹한 명령은 결국 고린도 교인들과 음행한 자들을 모두 죄로부터 구원시키기 위한 바울의 깊은 사랑의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실로 바울의 아버지의 마음으로(고전 4:14,15)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했다는 것이 증명되는 장면이다. 바울은 자신의 징계의 목적도 교인들의 구원이었기에 파멸에 이르게 하는 범죄의 행 위를 준엄하게 꾸짖고 벌하려 했던 것이다.
5: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 헬라어에는 '자랑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가 두 개 있다.하나는 '카우케마'( )이고, 다른 하나는 '카우케시스'( )이다. 이 두 단어는 동일하게 '자랑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즉 '카우케마'는 '자랑하는 내용'을 의미하며, '카우케시스'는 '자랑하는 행위'를 뜻한다. 본문에서는 전자인 '카우케마'가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 본문에서 '자랑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카우케시스'를 사용하지 않고 '자랑하는 내용'을 의미하는 '카우케마'를 사용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자랑하는 행위 그 자체를 나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내용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글개역 성경이 '카우케마'를 '자랑하는 것'으로 번역한 것은 적절한 번역이다. 바울은 앞에서(고전 1:31) 자랑하는 행위 자체는 금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은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할 만한 여러 가지은사들을 가지고 있었다(고전 1:4-7; 12:8-11).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세상의 지혜를 자랑하며 분쟁을 일삼고(고전 3:3), 심지어 음행하는 자들과 합심하여 교만하였던 것이다(2절). 그래서 바울은 잘못된 고린도 교인들의 자랑을 옳지 못한 것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누룩'은 빵을 구울 때 빵이 잘 부풀도록 넣는 재료로 발효성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당시에는 어떤 것이 처음에는 하찮아 보이나 나중에는 전체에 퍼져 그 전체를 삼켜버릴 때 본문과 같은 비유를 종종 사용하였다(마 13:33; 눅 13:21; 갈 5:9). 본절도 그러한 상징적 비유로 사용되고 있다. 즉 바울은 음행하는 자 또는 음행하는 자들이 범하는 음행의 죄를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면 그것이 온 교회 안에 퍼져 교회가 죄악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사실을 누룩의 영향력에 빗대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죄는 그 영향력이 매우 강하여 아주 하찮은 것이라도 결국은 한 인간을 큰 죄인으로 만들거나 한 조직 또는 한 사회를 범죄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죄의 심각성을 익히 깨닫고 있던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에서도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고 경고하였다.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 누룩의 비유에서 누룩은 좋은 의미에서는 '복음'(마 13:33; 눅 13:21)으로 나쁜 의미에서는 '죄'(갈 5:9)로 상징되었다. 본 구절에서는 나쁜 의미에서의 죄로 상징되고 있다. 따라서 '누룩이 없는 자'는 '죄가 없는 자'란 뜻으로, 이는 전에는 죄의 노예가 되어 사망 가운데 있었으나(롬 7:1-24)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입었기 때문에(롬 3:25) 죄가 없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 구절 뒷부분의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가 이 내용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 바울은 앞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이미 '누룩 없는자', 즉 죄 사함을 입은 새 피조물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해 묵은 누룩을 버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본 구절의 '새 덩어리'는 단순히 '거듭난 자'를 넘어서는 무엇, 즉 '신령한 자'(고전 2:15)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묵은 누룩'은 '구습'(엡 4:22), 즉 '육신에 속한 행위'(고전 3:3)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문은 '너희는 이미 새 피조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새 피조물로서 장성한 신자, 곧 신령한 자가 되기 위하여 육신에 속한 일을 내어 버리라'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 고린도 교인들이 어떻게 해서 이미 죄 사함을 받아 새 피조물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서 왜 육에 속한 일을 버리고 신령한 자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죽음의 사자가 자기의 집을 넘어가도록 흠 없고 일 년 된 숫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구원을 받았는데(출 12:7-14),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흠 없는 유월절 양이 되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롬 3:25,26). 그로 인해 믿는 자들이 죄 사함을 받아 생명을 보존하고 새 피조물이 된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자손은 출애굽하는 날 밤에는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과 죄의 청산을 의미하는 무교병, 곧 누룩 없는 떡을 먹어야 했다. 출 12:8-11 주석 참조.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은 마땅히 그들 가운데 있는 죄를 청산하고 신령한 떡을 먹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 가운데 여전히 죄의 누룩을 간직하여 하나님 앞에 합당한 존재로 서지 못하였고 결국에는 바울의 책망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5:8 명절을 지키되…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 유월절 규례를 영적인 의미로 적용시킨 것이다(Calvin). 즉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 당시 장차 재앙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여 무교병을 먹으며 유월절을 지켰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옛 성품과 죄된 모습을 버리고 순수하고 진실한 모습으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자는 말이다. 물론 이스라엘 자손들의 유월절은 한 주간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유월절은 평생 동안이 될 것이다(Godet). 한편 여기서 '순전함'과 '진실함'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삶의 특징들로 '순전함'이 동기의 순수함을 나타낸다면(본장 자료노트 참조), '진실함'은 행동의 순수함을 나타낸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룩한 삶'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롬 12:1).
묵은 누룩도 말고…누룩 없는 떡으로. - 구약 시대의 유월절에는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을 먹었다(출 12:8). 그래서 유월절은 무교절이라고도 불리웠다. 하물며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 그러한 누룩은 더욱 있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성도는 누룩으로 상징되는 모든 죄악을 벗어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새로운 유월절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묵은 누룩'과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은 부도덕한 기질과 악한 행위 등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속하기 이전에지녔던 모든 죄의 습성을 가리킨다.
5:9-13 음행자에 대한 출교 명령
고린도 교회가 성적으로 부도덕한 자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책망하면서 교회의 성결을 들어 간접적으로 음행자의 처리 문제를 권고한 바울(1-8절)은 이제 본문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교회 내에서 음행자에 대해 성도들이 취해야 할 태도, 즉 음행자를 출교시킬 것에 대해 지시한다. 이러한 본문은 앞단락의 음행에 대한 교훈과 관련하여 이전에 보낸 서신에 대한 추신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바울은 일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교훈했는데(9절), 그것을 고린도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의 교제를 완전히 단절하라는 뜻으로 오해하여 사회생활에 적잖은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은 이와 같은 권면이 세상 사람들과 교제를 끊고 완전히 고립되어 살라는 것이 아니라, 육체만 교회에 속하여 있을뿐 삶은 세상의 음행자들과 다를 바 없어 그리스도와 교회의 거룩한 모습을 실추시키는 진실치 못한 자들과의 교제를 완전히 단절하라는 뜻이었음을 밝힌다(살후 3:6,14). 사실 성도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은 아니지만 엄연히 세상 가운데서 살고 있는 자들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결코 세상과 분리되는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런즉 성도들이 영적 순결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은둔과 도피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물론 본문의 내용이 교회와 세상의 분리를 반대하고 있다고 해서 교회와 세상의 동화(同化)를 찬성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비록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지만 한편으로 세상과 철저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성도들은 불의하고 죄약된 세상에 복음을 전함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마 5:13-16).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세상 사람들의 범죄 사실에 대해서는 성도나 교회가 상관치 말라고 말하고 있는데(12절), 이는 만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므로(시 8:6-8; 롬 11:36) 불신자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권한이기 때문이다(13절; 계 20:12, 13).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 내의 범죄자를 엄격히 징계하며 그가 돌이킬 수 있도록 유도하고 세상 속에서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적극적으로 교회의 거룩성과 성도의 순수성을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상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는 세상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을 보임으로써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한다(마 5:13-16). 왜냐하면 성도가 세상에 보내진 것은 세상에 동화되어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빛의 존재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자 함이기 때문이다(딤후 1:13,14; 벧전 2:12).
②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서게될 참으로 거룩한 존재들이다. 따라서 성도의 삶 또한 죄악에서 구별되어 영적으로 거룩해야 할 것이다(롬 12:2; 약 4:8; 벧전2:5).
5:9 내가 너희에게 쓴 것. -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그 편지에서 쓴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본장의 앞부분들(2,6,7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서 이외에 '전에 보낸 편지'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Meyer, Godet, Lightfoot, Calvin, Bengel, De Wette, Robertson). 그리고 그 편지는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현존하지 않는다. 단 본절을 통해 볼 때 그 편지의 내용은 음행에 대한 금지와 경고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그 편지가 사도 바울의 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없어진 것은 그 편지가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간의 개인적인 서신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따라서 영감을 받은 본서와 같은 서신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딤후 3:16 주석 참조.
사귀지 말라. - '사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나나믹뉘미'( )의 원뜻은 '섞다', '혼합하다'이다. 따라서 본문의 '사귀지 말라'는 말은 '(그 가운데) 섞이지 말라'는 뜻이며, 다른 말로하면 '음행하는 자들 가운데 있지 말라'는 뜻이다.
5:10 이 말은…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 이 말은 9절의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는 말이다.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권면한 이 말을 오해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그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지금 해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사귀지 말라'는 말은 '섞이지 말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9절 주석 참조)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것은 '음행하는 자들 속에 있지 말라'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이 말은 자칫 오해하면 '음행하는 자들이 있는 도시나 하늘 아래 있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은 바로 그러한 오해에 빠졌던 것 같다. 즉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권고를 '음행하는 자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떠나라'는 극단적인 말로 들었으며 그래서 크게 반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바울은 '도무지'라는 말을 덧붙여서 '아예 음행하는 자들과 이 세상에서 함께 있지도 말라'는 말은 아니었다고 해명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후반의 '만일 그리하면 세상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는 말과 비교해 볼 때 더욱 뜻이 명확해진다. 바울은 '악에서 떠나라'고 한 것이지 '악한 세상에서 떠나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음행하는자들. - '음행'은 자신의 육체에 범하는 가장 대표적인 죄이다(고전 6:18). 그러면서도 이 죄는 인간이 가장 범하기 쉽고 또 인류의 역사 속에서 쉬지 않고 행해져왔다. 더욱이 성 개방 사회가 되면서 현대인들은 음행을 아무 죄책감 없이 저지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사는 성도들은 더욱 경성하여 음행과 음행하는 자들을 경계하여야 한다.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 - 헬라 원문에는 하나의 관사로 연결되어 있어 같은 유형의 범죄자임을 나타내고 있다. 즉 이들은 물질적 · 경제적 죄를 범하는 자들을 지칭한다. 한편 '탐하는 것'은 '욕심'이며, '토색하는 것'은 '착취와 강탈'이다. 욕심은 죄의 시발이며, 타인을 괴롭히다가 결국은 자신도 죽게 한다(약 1:15).
우상 숭배하는 자들. -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 대한 죄로 모든 죄 중 가장 근본적이고 무거운 죄이다. 왜냐하면 앞에 논거된 음행, 탐심, 토색 따위의 죄는 피조물에 대한 죄이나 우상 숭배는 창조주에 대한 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상 숭배의 죄는 불신자들만 짓는 죄가 아니라 교회 안의 신자들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신자들은 기억해야 한다(히 6:4-6).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 말은 성도가 완전히 세상과 등지고 금욕적 생활을 할수 없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세상과의 타협을 허락하는 말은 아니다. 바울은 앞에서 분명하게 세상의 악한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권면했었다(9절). 따라서 바울은 세상과 타협하지도 말고 세상을 등지지도 말라는 역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실로 신자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 속에 있어야 하며, 세상의 죄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되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수 없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5: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 - '이제'라는 낱말이있어 본절이 단순 과거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9절의 '쓴것'은 '먼 과거'의 편지를 가리키지만 본문의 '쓴 것'은 지금 쓰고 있는 편지를 지칭한다.
어떤 형제라 일컫는자. - 외형상의 신자도 교회의 일원이므로 '형제'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외형상의 신자가 형제라고 불리운다고 해서 참 신자는 아니다. 따라서 그는 '참 형제'라기 보다는 '형제라고 불리우는 자'이며 사실상 믿지 않는 자이다. 바울은 이런 의미에서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라고 약간 비아냥거리는 투로 표현하고 있다.
음행…탐람…우상 숭배…토색. - 이러한 악덕은 이미 10절에서 언급된 것이니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 10절의 악행에 두 가지가 더 첨가되고있다. '후욕하는 자'(로이도로스)는 '타인에게 욕설이나 비방을 하여 모욕을 주는 행위를 하는 자'이다. 타인을 욕하고 비방하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으나 주님은 이 죄도 큰 죄의 하나로 여기시고 계신다. 즉 주님은 형제에게 욕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 라고 엄하게 경고하신 바 있다(마 5:22). 한편 '술에 취하는 것'도 죄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사람은 취하게 되면 음행과 욕심과 토색과 후욕의 죄를 짓기 쉬운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즉 술에 취하게 되면 인간은 자기 절제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자기 속에 있는 죄성을 그대로 드러낼 유혹에 노출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술을 마시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라고 할 수 없지만, 술을 마시고 취하여 방탕하는 것은 분명한 죄악이다(엡 5:18).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 이것은 단순히 성찬에 참여할 때 같이 먹지 말라는 것만이 아니라 일상의 식사도 같이 하지 말라는 말이다.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친분을 나타내는 것이다(행 11:3). 그런데 바울은 이미 9절에서 '사귀지 말라', 즉 '친분을 가지지 말라'고 했으므로 본문은 일체의 식사도 같이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Meyer, Alford, Godet, Findlay). 따라서 바울은 철저한 관계 단절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12 외인들을…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마는 교중 사람들이야…판단치 아니하랴. - '외인들'은 '교회 밖에있는 사람들' 곧 불신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판단'은 '개별적인 일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본문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 옳고 그른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교회 안의 사람들이 옳고 그른지는 따져봐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신자나 불신자나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4:5에서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 신령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해야 한다(롬 12:2; 고전 2:13).실로 권징은 교회의 신성한 의무요 권리이다. 만일 권징이 흐려진다면 그 교회에는 이미 권위가 상실되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교회의 권징에 대해서 본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한편 참고로 본래 '외인들'(투스 엑크소)은 유대인이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바울은 이것을 기독교의 용어로 전용시켜서 '신자가 아닌 불신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골 4:5; 살전 4:12; 딤전 3:7).
5: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을 권징하는 권한은 교회에 주어져 있으나, 세상을 권징하는 권한은 교회에게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세상의 부패에 대해 눈을 감으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님은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하셨다(마 5:13). 즉 소금이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듯이 성도들은 세상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판단하지 않는 것과 관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교회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되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전하고 성결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 세상에 선을 심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장 연구 자료, '교회의 권징'을 보다 참조하라.
이 악한 사람은…내어쫓으라. - 교회의 권징 중 가장 무거운 벌이다. 바울이 음행하고 토색하고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 대해 이처럼 가장 무거운 권징을 하는 것은 그 죄가 결국은 온 교회를 죄악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6절). 따라서 출교의 궁극적 목적은 교회를 죄로부터 단절시켜 순결을 유지하기 위함이며(신 17:7), 더 나아가서는 출교 당하는 자가 회개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5절 주석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