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비어salvia
송선주
집 입구에 줄지어 선 빨간 샐비어, 하얀색 삼 층 양옥. 서로를 돋보이게 한다. 일본 가와사키에 사는 외사촌 인주오빠의 집이다. 인주오빠는 두고 온 어머니와 형제들이 생각 날 때면 고향집 사립문에 사이에 활짝 피어있던 샐비어를 바라보며 위로를 삼았단다. 꽃이 만개 할 때면 빨간 나팔모양의 꽃을 따서 뒷부분에 입술을 대고 쪽 빨면 달콤한 꿀이 나왔다. 형제들이 너도나도 여린 꽃을 따 흩어진 꽃잎은 골목을 발갛게 물들였다. 수십 년이 흘렀어도 새록새록 한 어린 시절, 어찌 잊을까.
아버지를 모시고 언니하고 일본을 방문했다. 가와시키는 70여 년 전 아버지가 사셨던 제2의 고향이다. 가시기전에는 어디에 무엇이 있고 하며 훤하게 그리고 계셨다. 인주오빠가 안내한 아버지의 살던 곳에 갔다. 그곳은 세월만큼이나 모든 것이 변하여 우두커니 서서 그때를 떠올리며 가늠할 뿐이었다. 그나마 옛 절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 기억하고 계신 아버지의 일본어 실력에 놀랐다.
인주오빠는 외삼촌의 둘째 아들이다. 외삼촌은 인주오빠와 이모와 내 엄마를 데리고 일제 강점기에 바다 건너 가와사키로 갔다. 그곳에서 엄마는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고 언니가 태어났다. 언니가 두 살 되던 해 조국이 해방되면서 아버지는 가솔을 이끌고 귀국했지만 외삼촌 식구는 그곳에 머물렀다.
내가 초등학교 때 인주 오빠가 우리 집에 왔다. 까만 승용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오빠는 훤칠한 키에 시원한 이목구비의 호남 형이었다. 커다란 슈트케이스에서 엄마와 우리에게 줄 선물을 산타할아버지처럼 풀어 놓았던 게 생각난다. 엄마가 애지중지하며 꺼내보시던 인주 오빠의 결혼 사진첩 속에 인형 같은 올케언니가 있다. 그녀는 재일동포 2세다. 처음 시집와서 한글을 익히기 위해 부엌 캐비닛, 냉장고, 방, 발걸음 닿는 곳마다 이름을 한글로 써 부쳐두고 외운 다해서 엄마가 대견해하셨다. 오빠 역시 다시 만날 고국의 어머니와 형제들과의 소통을 위해 한국말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단다. “아내는 시골 교토 출신이라 내가 눈을 두 번 깜빡일 동안 한 번 깜빡였어.”라고 해서 순수했던 그 시절을 얘기하며 웃었다. 올케가 시골 출신이라 그만큼 여유가 있고 정적이라는 말이다.
오빠부부는 아들 내외와 손자들과 같이 살고 있었다. 며느리는 일본 여인이다. 오빠가 우리아버지랑 언니를 앉히고 자녀들에게 절을 하게 해 마음이 뭉클했다. 섬나라여서인지 식사는 매끼마다 생선이 빠지지 않고 올라왔다. 살짝 말려 찐 생선은 쫄깃하고 담백했다. 집 옆의 천정이 높은 큰 정비공장은 오빠의 삶의 터전이란다.
오빠는 1남 2녀의 자녀를 키웠다. 아이들이 어릴 때 일본인들의 차별은 대단하여 이지매 당하는 자녀들 때문에 가족이 극단적인 생각도 했다고 한다. 언니는 한인이 차별당하는 것에 항의와 계몽을 위해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신주쿠에 재일동포 문화회관을 세우고 일인 시위 연극을 하고 있다. 팜플랫 속 언니가 소복을 입고 추는 춤사위는 애절하다. 김대중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여사가 해외동포 중 조국을 위해 일하는 유력한 여성 5명을 선정하여 청와대로 초청해 찍은 사진 속에 언니도 있었다. 신주쿠 역은 한인 유학생 이수현이 열차를 기다리던 중 철로에 떨어진 술 취한 사람을 구하려다 달려오는 열차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의로운 희생을 한 곳이 기도하다.
외삼촌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거하셨던 1층 방에 아버지랑 언니랑 함께 나란히 누웠다. 호탕하던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는듯했다. 우린 천정의 거의 반을 차지한 하얀 포스트 지에 붓글씨로 쓰인 글이 의아했다. “언니는 각처에 초청이 되면 이 방에서 연설문을 직접 이렇게 써서 외운단다.” 오빠의 설명을 들으니 대단한 열정을 가진 언니를 직접 만나지 못하고 와 아쉬웠다. 그녀는 마침 한국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초청이 있어 그곳에 갔단다. 책자 속에 살아 있는 듯한 그녀의 동작을 바라보면 한국인의 혼이 느껴진다.
“오빠! 오빠 처음 봤을 때 영화배우같이 멋있었어요.” 내가 옛날을 떠올리며 얘기했다. 오빠는 조금 어색한 발음으로 “홍주. 내 손좀 봐.” 그가 내민 손은 굳은살이 박여 힘든 세파를 헤치고 열심히 살아온 장한 아버지의 손이다. 가깝고도 먼 타국 땅에서 디아스포라로 감내해야했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엄마의 언니인 이모님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많이 다쳐 한동안 하꼬네 온천에서 요양을 하셨다. 우리가 그곳을 찾았을 때 하얀 물안개가 고요한 숲을 감싸고 있었다. 이파리에 맺힌 물방울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나오는 가는 빛줄기 사이로 영롱였다. 우리가 탄 케블카 아래로 퐁퐁 솟아오르는 온천수들이 여기저기 구름 띠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있었다. 어린시절 아제가 마법처럼 보여준 입술로 담배연기를 동글동글 만들어 띄우던 것처럼. 이곳은 요양지로는 천외의 요소다.
엄마가 이모에게 하나님을 전해 주려 애쓰던 모습이 생각난다. 친정 피붙이를 그리워하며 가슴앓이 하시던 우리 엄마. 내가 머나먼 미국 땅으로 훌쩍 떠나온 뒤 보내온 엄마의 서신을 꺼내 본다. 미농지에 담담히 써 내려간 글 행간 속에 깊은 육친의 정이 사무친다. 몸은 멀리 떨어져있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연결해 주심을 감사하던 우리엄마. 그 옛날 “너희는 형제들 가까이에 살면서 정을 나누며 살아라.”라고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목에 가시가 되어 아리다. 나 또한 어머니의 삶을 이어 받았나보다.
샐비어의 꽃말은 정열이다. 외숙모가 사랑하던 꽃 샐비어. 그녀는 가난을 벗어나고자 떠난 남편과 아들을 생각하며 그리움과 열정을 속으로 삭혔나보다. 그녀의 다소곳하던 모습이 붉은 꽃 속에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