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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자료들 스크랩 웃음치유의 시발자 노먼커슨스(책소개)
행복한나현 추천 0 조회 26 11.01.17 17: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책 - 웃음의 치유력

노먼 커즌즈 지음, 스마트비즈니스 / 2007년 4월 / 203쪽

 

이 책은 불치병을 선고받았던 저자가 '웃음'을 통해 건강을 되찾은 비법을 소개한 것으로 웃음이 얼마나 적절한 고통의 치유제이며 자연적인 치료제인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또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왜 웃음이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인지 강조하며 웃음을 잃지 말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웃음으로 난치병을 치유하다 - 나의 회복기

 

1964년 8월, 해외여행을 하고 비행기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왔더니 미열이 있었다. 그 나른한 권태감은 가벼운 몸살 기운으로 시작해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1주일이 지나자 목, 팔, 손, 손가락, 다리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적혈구침강속도(ESR)가 80을 넘었다. 감기같이 흔한 질병은 30에서 40 정도다. 그러나 적혈구침강속도가 60을 넘어서 70에 이르면 의사는 보통 이상의 건강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입원할 당시 나의 적혈구침강속도는 88에 이르렀고, 1주일도 지나지 않아 150으로 올랐다. 상당히 위독한 수치였다.

 

어느 날, 각기 다른 병동에 소속된 의사 네 명이 와서 네 번이나 상당량의 혈액 샘플을 뽑아 갔을 때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서로 조정하여 하나의 혈액 샘플을 나누어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 않은가? 너무 무책임한 행동이라 생각되었다. 설령 건강한 사람이라도 하루에 네 번이나 다량의 피를 뽑아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다음 날에도 같은 의사들이 검사실에서 사용할 혈액 샘플을 뽑으러 왔을 때, 나는 그들을 쫓아낸 뒤 입원실 문 앞에 게시문을 붙여놓았다. “사흘에 한 번만 혈액 채취를 허락할 것이며, 각 부서는 그 샘플을 나누어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그런 가운데 나는 병원이란 중환자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기에 이르렀다. 기본적인 위생관념도 없고, 포도상구균과 같은 병원체가 눈 깜빡할 사이에 병원 전체로 퍼져나갈 수 있을 만큼 환경도 열악했다. 사소한 증상인데도 엑스레이 사진을 마구 찍어대고, 신경안정제나 강력한 진통제 사용이 너무 무절제했다. 그러나 가장 중대한 결함은 영양 부족이다. 병원에서 가공식품을 남용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매 끼니마다 표백한 밀가루와 연화제를 넣어 만든 하얀 빵이 나오고, 채소는 너무 삶아서 영양가라고는 거의 없었다. 주치의는 병원의 존재방식에 대한 나의 비판적인 의견에 어떤 반론도 펴지 않았다. 나는 다행히도 환자의 입장에서 사태를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주치의를 만났던 것이다. 윌리엄 히치그 박사는 내가 병원검사실의 조수들이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제멋대로 피를 뽑으려는 행위를 거부한 것이 옳았다고 칭찬해주었다.

 

히치그 박사와 나는 20년 이상이나 친구로 지냈기에, 그는 내가 의학 분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박사는 나의 병에 대한 자문을 얻기 위해 초빙한 여러 전문의의 보고를 정리해 봤지만 정확한 병의 원인을 밝힐 수 없었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내가 중증 콜라젠 질환에 걸렸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했다. 콜라젠(collagen)이란 조직과 조직을 이어주는 섬유질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내 몸의 여러 조직은 서로 하나로 연결되지 않고 제각기 떨어져 있는 셈이다. 손발을 움직일 수 없기에 침대에서 돌아누울 수도 없다. 증상이 악화되었을 때는 입조차 벌릴 수 없었다.

 

나는 히치그 박사에게 완치 가능성이 있느냐고 물었다. 박사는 숨김없이, 완치 가능성은 오백 분의 일이라는 것이 전문의들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나는 모든 것을 의사에게 맡겼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좋든 싫든 간에 스스로 무슨 짓이든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히치그 박사에게 이 병의 원인이 될 만한 게 무엇일 것 같으냐고 물었다. 박사는 중금속 중독 때문에 일어났을 수도 있고, 연쇄상구균 감염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발병 직전의 일들을 순서대로 떠올려 보았다. 나는 1964년 7월에 문화교류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미국 대표단의 단장으로 소련에 다녀왔다. 호텔은 주택지역에 있었고, 내 방은 2층이었다. 매일 밤 디젤 트럭의 행렬이 24시간 작업을 계속하는 주택건설 공사현장을 오가고 있었다. 여름이라 방문을 활짝 열어둔 터였기 때문에 나는 매일 밤잠을 설쳤고 아침이면 구역질을 했다. 마지막 날에는 공항에서 대형 제트기가 바로 눈앞의 활주로 위에서 방향을 바꾸며 내 얼굴에다 배기가스를 내뿜었다. 혹시 호텔과 공항에서 디젤 엔진의 배기가스 성분인 ‘탄화수소’를 들이킨 것이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도 있다.

 

만일 이 가설이 맞는다면, 나는 부신(副腎)을 정상 상태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한스 젤리에가 쓴 『생활의 스트레스(The Stress of Life)』를 읽은 적이 있었다. 젤리에는 그 책에서 부신피로가 욕구불만이나 억압된 분노와 같은 정서적인 긴장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제시하면서, 불쾌하고 부정적인 정서가 인체의 화학작용에 음성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정서는 양성적인 화학반응을 일으켜야 마땅하지 않을까? 사랑이나 희망, 믿음이나 웃음, 신뢰나 삶의 의욕이 치료에 좋은 역할을 하지 않을까? 화학변화가 꼭 나쁜 쪽으로만 일어나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 자신의 정서를 어느 정도까지 조절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생리적으로 건강에 좋은 효과를 낼 수 있을지 모른다. 불안한 마음을 자신감으로 바꾸어 놓으면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또 하나의 문제는 심한 염증이다. 나는 이전에 의학 잡지에서 아스코르빅산(비타민 C)이 기관지염을 비롯한 어떤 류의 심장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병에 유효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비타민 C는 염증에도 효과가 있는 게 아닐까? 산소 공급의 부족이나 장해가 콜라젠 질환의 일부 원인이라면 비타민 C를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적 근거가 성립하지 않을까? 콜라젠 질환 환자에게는 비타민 C가 부족하다고 한다. 그것은 콜라젠 질환 때문에 일어난 조직파괴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대량의 비타민 C가 소비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지.

 

병원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몸속의 화학작용을 증진하는 방법의 한 요소로 긍정적인 정서의 완벽한 개진을 목표로 한 계획을 시작했다. 우선 웃기는 영화를 보기로 했다. 엉뚱한 사람을 속이고 당황하게 만드는 ‘몰래 카메라’의 프로듀서 알렌 펀트가 자신의 대표작에서 선별한 필름과 영사기를 보내줬다. 옛날 마르크스 형제의 필름까지 찾아냈다. 그리고 창에 블라인드를 내리고 영사기를 돌렸다. 때로는 간호사가 여기저기서 모아 온 유머 책을 읽었다.

 

효과가 좋았다. 고맙게도 10분 동안 배를 잡고 웃으면, 적어도 2시간은 아픔을 느끼지 않고 잠들 수 있었다. 웃음의 진통 효과가 없어질 만하면 다시 영사기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면 잠시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유쾌한 이야기를 듣기 직전과 듣고 몇 시간 지난 후의 적혈구침강속도를 측정해 보았다. 그 결과, 적어도 5포인트가 낮아졌다. 나는 ‘웃음이 보약’이라는 옛말에 생리학적인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뛰어오를 듯 기뻤다.

 

그렇다면 비타민 C는 나의 회복 전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을까? 비타민 C의 다량 투여는 신장에 해를 줄 수도 있다는 주의를 받았으나 내 신장은 당분간 문제가 없으므로 일단 젖혀두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비타민 C를 링거주사로 서너 시간에 걸쳐 천천히 하루에 25밀리그램까지 투여해 보기로 했다. 우리의 이 어처구니없는 시도가 과연 정도를 벗어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10밀리그램의 비타민 C를 주사하기 전에 적혈구침강속도를 측정했고, 주사 후 4시간 뒤에 다시 측정해 보았다. 그 결과 무려 9포인트나 낮아졌다.

 

하늘을 날아오를 듯한 기쁨에 젖어보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웃음도 좋았다. 그 두 가지 힘이 조직결합을 침범했던 독을 서서히 몰아내고 있었다. 열이 내려가고 맥박도 이전처럼 불안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비타민 C의 투여량을 늘렸다. 그러면서 매일 웃는 데 온 힘을 기울였고 약이나 수면제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러자 통증 없이 자연스럽게 잠을 자는 숙면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이대로 가면 100퍼센트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몸의 운동기능은 해를 거듭할수록 좋아졌다.

 

인간의 열망에 대한 응답 - 플라시보 효과

 

플라시보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동사 ‘나는 기뻐할 것이다’라는 일인칭 단수형이다. 그 고전적 의미는, ‘명확한 진단을 거쳐 그 증상에 필요하지는 않지만 환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가짜 약(보통 진짜 약으로 보이게 만든 당의정)’이다. 의학계에서 플라시보는 오랜 세월 악평의 대상이었다. 많은 의사가 플라시보를 ‘위약제’라 여겼고, 환자의 고통이나 불쾌감이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인지 그 진정한 원인을 찾아낼 여유가 없는 의사들이 귀찮아서 적당히 처리하는 임시방편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천대받던 플라시보가 오늘날 의학자의 진지한 눈길을 받고 있다. 아더 샤피로, 헨리 비처, 스튜와트 월프, 루이스 라사냐와 같은 의학박사들은, 플라시보가 단순히 강력한 약제 요법을 위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의 요법으로서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충분한 증거를 발견했다. 어떤 플라시보 연구가들은 플라시보가 대뇌피질의 작용을 활성화하고 그것이 개괄적으로는 내분비계를, 특히 부신을 흥분시킨다고 주장한다. 플라시보가 정신과 육체에 작용하는 정확한 경로가 어떤 것이든 진짜 약제와 마찬가지로 가끔 그 이상으로 효과를 발휘한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실제로 약이란 것은 고슴도치의 바늘이 아무데나 마구 찌르는 것과 비슷한 작용을 한다. 음식물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떤 약이라도 체내에서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분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부작용이 없는 약이란 존재할 수 없다. 항생물질, 코티손(부신피질호르몬제), 신경안정제, 항고혈압제, 소염제, 근육이완제와 같이 묘약이라 불리는 약일수록 그 부작용도 크다.

 

약에 대한 의사의 딜레마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약을 자동차와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약에 대해서도 매년 모델이 바뀌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며 그 약이 강력하면 할수록 더 좋은 약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들었거나 신문이나 잡지에서 읽은 새로운 항생제 등의 묘약이 처방전에 적혀 있지 않으면 그 의사를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환자가 너무 많다.

 

미국에서 가장 유능한 의학 리포터 중 한 사람인 버턴 루세는 《뉴요커(New Yorker)》에 쓴 기사에서, 플라시보가 보여주는 힘의 원천은 “자기기만에서 비롯하는 인간정신의 무한한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시보 연구가들은 이 해석에 찬성하지 않는다. 플라시체적인 실재로 번역해내기 때문에 큰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플라시보 연구가들은 플라시보가 인체를 속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의욕을 주며 또한 그들은 플라시보가 몸속에서 어떤 특정한 생화학 변화를 일으키는 데 방아쇠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자료로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환자가 플라시보라는 사실을 알아버리면 플라시보가 생리적 효과를 일으키지 못한다는 사실이야말로 환자의 희망을 구체적이며 본질적인 생화학적 변화로 바꾸어내는 인체의 능력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플라시보 효과에 관한 과학적 실험 자료는 얼마나 될까? 근래 25년 동안 발표된 의학문헌 중에 그 건수는 대단히 많다. 그것을 잠시 소개하기로 하자.

 

* 한 파킨슨씨병 환자에게 약이라고 하면서 플라시보를 주었더니 경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 플라시보 효과가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똑같은 약을 우유 속에 넣어 보았지만 경련은 재발하고 말았다.

 

* 가벼운 우울증 환자를 대상으로 대규모 연구 조사를 하면서 지금까지 복잡한 흥분제를 투여하던 환자들에게 그 약을 중지시키고 플라시보를 주었더니 이전 약과 똑같은 징후를 보였다. 그 조사와 관련된 다른 조사에서 아직 약을 투여하지 않은 133명의 우울증 환자에게 플라시보를 투여한 결과 4분의 1에게서 아주 양호한 반응이 나오는 바람에 진짜 약으로 하는 실험에서 제외시켰다.

 

* 88명의 관절염 환자에게 아스피린이나 코티손 대신 플라시보를 투여했더니, 보통의 관절염 약이 듣는 환자와 거의 비슷한 수치를 보였다. 플라시보 알약을 먹여도 증상이 가벼워지지 않은 환자 일부에게 플라시보 주사를 놓았더니 그중 64퍼센트가 증상이 호전되었다. 88명 환자 전체를 보면, 플라시보 효과는 단순히 통증의 경감뿐 아니라 식욕이나 수면 증진, 배설의 촉진은 물론 부종의 감소까지 보였다.

 

* A. 레슬리는 모르핀 중독 환자들에게 플라시보(생리식염수)를 주사했는데, 그 주사를 중지하기까지 금단증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

 

* 루마니아의 부카레슈티에 있는 국립노인의학연구소 의사들은 내분비계를 활성화하고 아울러 건강을 증진하며 수명을 연장시키는 신약 테스트를 하기 위해 피실험자에게 알리지 않고 이중적인 실험을 했다. 나이는 60세이고 대체로 같은 지방의 농촌에서 살아가는 150명을 50명씩 세 그룹으로 나누어, 그룹 1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고, 그룹 2에는 플라시보를 주고, 그룹 3에는 신약을 주었다. 그리고 매년 세 그룹의 사망률과 발병률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룹 1의 통계수치는 같은 연령층의 농촌 사람과 비슷했다. 플라시보를 투여한 그룹 2는 그룹 1보다 건강상태가 훨씬 좋았고 사망률도 낮았다. 신약으로 치료를 받은 그룹 3은 그룹 2가 그룹 1보다 나은 정도만큼 그룹 2보다 좋은 결과를 보였다.

 

불가피하게 플라시보의 사용에는 내재적 모순이 있다. ‘환자와 의사의 바람직한 신뢰관계’가 플라시보 과정에는 불가결한 것인데, 그 파트너 한 쪽이 중요한 정보를 다른 한 쪽에게 숨기고 있다면 그 관계는 어떻게 될까. 만일 의사가 진상을 알리면 플라시보의 토대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반대로, 진상을 알리지 않으면 신뢰관계가 위협받게 될 것이다. 이런 딜레마에서 ‘어떤 경우에 의사는 환자에 대해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하지 않아도 될까’라는 의사 윤리에 관한 문제가 일어난다. 말기 증상 환자의 경우에 의사가 환자에게 육체적인 고통에다 절망감까지 얹어주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아니 무책임한 행동이라 생각하여 진상을 감추는 길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플라시보에 관한 모든 것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으로 보아도 그 연구는 의학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긴급과제로 계속되어야 할 가치는 충분하다. 자연이 준 생명력을 탐구하는 것은 그냥 일시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이야말로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것이다.

 

슈바이처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환자도 내면에 자신의 의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환자들은 그 진실을 모르고 우리를 찾아오는 거지요. 우리가 그 사람들 속에 살고 있는 의사를 잘 움직이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플라시보는 모든 개인 속에 살고 있는 의사를 가리키는 다른 말이 아닐까?

 

웃음과 장수 - 슈바이처와 카잘스의 교훈

 

내가 애당초 웃음과 장수에 대해 또는 그 양자의 결합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파블로 카잘스와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만난 이후이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 다 80대 노인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세상 사람을 위하는 일을 하며 그 속에 푹 빠져 있었다. 숭고한 목적과 삶의 의욕이 인간존재의 주요한 원재료라는 사실을 배웠으며 그 원재료야말로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파블로 카잘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내가 처음으로 카잘스를 만난 것은 카잘스가 아흔 번째 생일을 맞이할 즈음이었다. 나는 그의 일과에 큰 흥미를 느꼈다. 대체로 오전 8시경에 젊고 아름다운 마르타 부인이 그의 아침 준비를 해준다. 카잘스는 여러 가지 질환을 앓고 있어서 혼자 힘으로 옷을 입기도 힘들어 했다. 카잘스는 마르타 부인의 팔에 기대 거실로 들어섰다. 허리는 심하게 굽었으며 손가락도 굽어 있었다. 카잘스는 아침 식탁은 보지도 않고 피아노 쪽으로 걸어갔다. 그게 매일 아침의 의식이라고 한다. 그는 아주 불편한 자세로 피아노 앞의 의자에 걸터앉더니 부어오른 손가락을 힘들여 피아노 건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때 상상하지도 못할 기적이 일어났다. 카잘스의 굽은 손가락이 조금씩 펴지더니 마치 식물의 싹이 햇빛 쪽으로 뻗어나가듯 손가락이 건반 쪽으로 나아갔다. 그의 등은 갑자기 판자처럼 꼿꼿하게 서고, 숨결도 조용해졌다.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에 떨어졌다. 그러자 깊은 정감이 배여 있고 멋들어지게 컨트롤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첫 소절이 울려나기 시작했다. 그 곧게 펴진 손가락이 힘차면서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날렵하게 건반 위를 치달렸다. 뻣뻣하고 쪼그라든 방금 전의 모습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연주가 끝나자 그는 혼자서 일어섰다. 거실로 들어설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꼿꼿한 자세였고 키도 훨씬 커졌다. 발을 절지도 않고 아침이 마련된 식탁으로 걸어가더니 힘차게 음식을 들고 활기차게 이야기했다.

 

벌써 아흔에 가깝고 이런저런 노인 장애로 고통받는 사람이 자신에게 소중한 일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적어도 잠깐 동안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 버리는 것이다. 그가 어떤 소염진통제를 복용한들 그것이 그의 정신과 육체와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내는 물질만큼 강력하고 안전한지는 의문이다. 그 과정은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 만일 카잘스가 정서적 격동에 휩싸인다면, 그 영향으로 위로 흘러들어가는 염산이 증가하고 부신이 활발하게 움직일 것이며 코티코스테로이드의 생산, 혈압 상승, 심장 고동의 가속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카잘스는 그와는 다른 무엇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은 그의 긍정적인 열정이었으며, 어떤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그 자신의 의지였다. 카잘스는 가녀린 몸에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정신력에서는 거인이었다. 그의 태도는 밝고 친절하며 친구나 방문객을 정성껏 대접했고, 유유자적한 태도와 마음의 소유자였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자각과 유머감각이 조화를 이룰 때, 그것이 모든 병을 물리치는 가장 좋은 약이라는 신념이었다. 그는 예전에 “우리 몸이 역병신을 대접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린다”고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다. 슈바이처 박사가 가진 삶의 본질은 긍정과 목적의식이다. 그는 아흔이 넘은 후에도 진료와 회진을 하고, 힘이 필요한 목공 일을 하고, 무거운 약상자를 나르고, 매일 수많은 편지를 처리하고, 틈을 봐서 집필 중인 원고를 다듬고, 피아노를 쳤다. “나는 죽을 생각이 없다네. 일을 하는 동안에는 말이야. 일을 하고 있으면 절대 죽을 필요가 없지. 그래서 나는 더 오래 살 걸세.” 슈바이처 박사는 직원들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오래 살았다. 향년 95세까지.

 

친구 파블로 카잘스와 마찬가지로 알베르트 슈바이처 역시 하루라도 바흐를 연주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가 가장 사랑한 곡은 ‘토카타와 푸가 D단조’였다. 이 곡은 오르간을 위해 씌어진 것이다. 그러나 람바레네에는 오르간이 없었다. 고물 피아노 두 대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직원식당의 피아노가 더 고물이었다. 습기 가득한 열대 기후 때문에 원형을 찾아보기도 힘들 만큼 상해 있었다. 해머의 펠트가 닳아서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오랫동안 조율도 하지 않았고, 설령 조율을 한다 해도 소리는 금방 뒤틀려버릴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슈바이처는 매일 저녁 시간이면 거기에 앉아 찬미가를 연주했다. 그의 손이 닿으면 그 피아노에서는 고물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은 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가 피아노 앞에서 일어섰을 때 그의 등은 곧추 서 있었다. 그에게는 음악이 보약이었다.

 

그러나 음악만이 아니었다. 그는 늘 풍성한 유머의 정신을 품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유머는 너무도 예술적이라, 혹시 그 자신의 유머를 악기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슈바이처가 일하는 병원의 생활은 젊은 의사나 간호사들에게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슈바이처 박사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그들의 정신에 영양분을 보급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직원이 모여 회식을 할 때 슈바이처는 늘 식탁에서 재미있는 이야기 두세 가지를 펼쳐 놓았다. 식탁에서 터져 나오는 그 웃음은 그날의 코스 요리 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메뉴였다.

 

어느 날 선착장 옆에 둥지를 틀고 있던 암탉 에드나가 낳은 알에서 병아리 여섯 마리가 부화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슈바이처 박사는 얼굴을 찌푸리고 이렇게 말했다.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믿을 수가 없어. 그 여자가 임신하고 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지.”

 

유머가 인간의 정신과 육체 내부에서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지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이 작용한다는 증거가 있으므로 몇 세기 동안 의사들만이 아니라 철학자나 학자들까지 거기에 대해 사색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기쁨의 생리학적 특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고, 로버트 버턴은 “유머는 혈액순환을 돕고 몸을 힘차게 하며 어떤 일에도 적응할 수 있게 한다”고 자신이 관찰한 결과를 정리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Critique of Pure Reason)』에서 큰 소리로 웃는 것은 “가장 중요한 육체의 대사를 촉진하여 몸을 건강하게 하고, 장과 횡경막을 움직이는 정감, 즉 우리가 느끼는 만족의 내용물이라 할 수 있는 건강한 느낌을 낳고, 우리는 그것으로 정신을 통하여 육체에 이르며, 정신을 육체의 의사로 활용할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어쨌든 나는 중병에 걸리기 이전부터 긍정, 삶의 의욕, 희망, 애정 등이 생화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질병의 치료와 심신 건강에 크게 기여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적극적 정서는 활력을 증진시키는 약이다. 요즘은 과학적 연구의 결과로 인간의 뇌에 엔도르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분자구조나 효과 면에서 모르핀과 흡사하다. 그것은 이른바 인체에 갖춰진 마취약이며 이완제로, 인간이 통증을 견뎌낼 수 있게 도와준다. 질병을 극복하겠다는 결의를 가진 사람들 쪽이 불안과 신경과민에 휩싸여 있는 사람들보다 격통을 견디는 힘이 강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의 의학자는 인체의 경락에 침을 찌르면 엔도르핀이 활성화하므로 마취하지 않고 수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인간의 마음은 질병과의 싸움에 아주 큰 역할을 할 수 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통증의 억제에도 적극적으로 작용한다. 플라시보라는 현상만 보아도 인간의 마음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육체를 향하여 일정한 반응을 나타내도록 지시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반응 중에는 단순히 심리적 반응만이 아니라 육체의 화학작용도 들어 있다.

 

고통은 적이 아니다 - 인체의 자연적인 메커니즘

 

아마도 미국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고통을 두려워하는 국민일 것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 인쇄물이나 라디오, 텔레비전 등에서 아주 작은 고통의 징후라도, 그것이 마치 재앙의 근원이라도 되는 듯이 즉각적으로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는 세뇌를 당해왔다. 우리는 통증에 대해 너무도 무지하다. 모르기 때문에 통증에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 통증의 90퍼센트 정도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는 것이고, 통증이 반드시 건강불량을 나타내는 증거가 아니며, 통증을 제거하는 최선의 길은 그 원인이 되는 악조건을 제거하는 것인데, 통증에 대한 모든 진실 가운데서 이것만큼 무시당하는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원인 제거는 생각하지 않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아스피린, 신경안정제, 수면제, 진통제 등을 입 안에 털어 넣는다. 잘 알려진 진통제의 대부분은 원인이 되는 조건을 개선하지 않고 통증을 숨기는데, 일반인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른다. 그런 약은 어떤 고장이 일어났다는 신호를 뇌에 전달하는 인체의 기능을 둔감하게 만든다. 근본 원인이야 뭐든 무조건 통증을 억제하다 보면 인체는 그것 때문에 나중에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물론 중병을 미리 경고하는 징후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어리석다. 의사의 입에서 나올지도 모를 심각한 말이 두려워 통증을 계속 방치하다가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마는 사람도 있다. 증상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은 우울증에 대한 올바른 대처 방법이 아니다. 유일한 대책은 인체의 기능에 관련된 교육을 철저히 하고, 좀더 많은 사람이 엉터리 약의 남용과 진짜 징후를 무책임하게 무시하는 것 사이에 있는 현명한 길을 찾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체의 작용 가운데서 자기치유력만큼 훌륭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힘을 살려내려면 그냥 조금만 그것을 존중하면 된다. 미국 방송국이 진통제 광고에 대한 반응 보도와 똑같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 해도, 적어도 매일 2~3분의 시간을 할애하여 통증 문제에 대한 상식적인 코멘트를 흘려보낼 수는 있지 않을까?

 

통증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의학연구의 자취를 살피다 보면 ‘폴 브랜드’라는 이름을 만나게 될 것이다. 브랜드 박사는 의학자로서 반평생을 한센병 환자의 치료에 바쳤다. 그는 영국의 성형외과의인데, 불구가 되거나 마비된 손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데 세계 최고의 의술을 가진 사람이었다. 폴은 몇 천 명이나 되는 한센병 환자의 손과 팔을 움직일 수 있게 했고, 아내 마가렛도 몇 천 명의 한센병 환자를 실명에서 구해냈다. 폴 브랜드는 발가락,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거나 코가 쪼그라드는 현상이 한센병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중요한 발견은 한센병이 통증을 못 느끼게 만드는 질병이라는 사실이었다. 한센병균은 신경의 말단을 죽인다. 그러면 섬세한 감각이 떨어지거나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뼈나 살에 심한 상처를 입어도 모르고 지나는 것이다. 박사는 압력의 가감을 계산하는 방법을 한센병 환자들에게 가르쳐주고, 그들의 손을 지킬 수 있는 특수한 장갑을 고안했다. 또한 매일 검사하는 규칙을 만들고, 과거처럼 상처가 악화하여 궤양화하거나 신체의 형태를 잃는 일이 없도록 했다. 그러자 새로운 상처의 발생 건수는 기적처럼 줄어들었고, 자연히 한센병 환자들은 다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 문제는 실명이었다. 브랜드 박사는 한센병을 철저하게 연구해본 결과, 실명은 한센병의 직접적인 산물이 아니라 부산물이라는 확신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비타민 A의 현저한 부족이 백내장의 큰 원인이고, 그것 때문에 실명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백내장은 수술로 제거하면 된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의 실명은 백내장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백내장을 앓지 않으면서도 눈의 궤양으로 실명의 위기에 처한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인간의 눈이란 하루에 몇 천 번 닫았다 열었다를 반복하여 눈물샘에서 눈물이 나오게 하여 눈의 표면을 세척하는 셈이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의 경우에는 말초신경의 위축으로 눈의 표면에 감각이 없어서 이런 세정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폴 브랜드 박사 연구팀은 턱 근육을 눈꺼풀에 연결시키는 방법을 고안했다. 입을 벌릴 때마다 개조된 안면근육이 눈꺼풀을 당겨 눈을 감게 하여 안구를 세정하게 하였다. 인체의 자연적인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교묘한 외과수술로 눈에서 먼지를 제거하는 방법 덕분에 많은 환자들이 실명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브랜드 박사와 그의 스테프들은 한센병 환자에게 그 같은 수술을 몇 천 번이나 했고, 단순한 수술의 영역을 넘어서 전체적인 치료에 가장 중요한 단계라 할 수 있는 곳까지 파고들었다. 그것은 심리적 재활이었다. 한센병 환자이면서 20년 동안 거지생활을 해왔던 사람이 자존심을 가진 유용한 사회의 일원이 되기에 적합할 만큼 육체적이며 정신적 준비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는 한 브랜드 박사는 완치로 보지 않았다. 신체장애를 가진 환자에게도 최대한 자립능력을 가질 수 있게 교육했다. 그 결과, 환자는 인체가 갖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과 순응력을 존중하게 되었고, 설령 운동능력이 10퍼센트밖에 남아 있지 않다 해도 그것을 사용하여 멋지게 일을 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

 

폴 브랜드 박사의 세 가지 업적(한센병을 둘러싼 음침한 저주와 미신 부정, 재생외과수술 시도, 인격적·심리적 재활 진행)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비교하고 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세 가지보다 더 흥미롭고 우리를 사색으로 이끄는 뭔가가 있다. 브랜드 박사는 만일 통증이라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되찾아 줄 수만 있다면 설령 하늘과 땅을 뒤집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박사는 왜 그처럼 통증을 중시했을까? 통증은 경보조직이며 보호장치이다. 개개인은 그 덕택에 자신의 신체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다. 통증의 신호가 온다고 해서 바로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경보 역할을 할 수 있다. 사람은 거기에 응하여 방위수단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증명된 질병은 고작 26가지 - 3,000명의 의사들로부터 배운 것

 

이 책의 첫 장을 《뉴잉글랜드의학지》에 발표하자 10여 개국의 의사들로부터 약 3,000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많은 의사들이 난치병 치료를 위한 새롭고 파격적인 방법에 대해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얼마나 기쁘고 놀랐는지 모른다. 편지 중에는 내가 건강을 회복하는 데 동원했던 방법(삶의 의욕을 강화하고, 웃고, 비타민 C를 투여한 것)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많아 나는 크게 고무되었다. 내 글을 읽고 편지를 보내준 의사들은 환자가 의사의 독점적 영역인 진료에 관여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올바른 요법을 탐구하는 아마추어를 자신의 파트너로 여기고 협력해야 한다는 의견에 찬성해 주었다. 또한 약물의 부작용이 점점 심각해져 가는 이때, 신중하고 유능한 의사일수록 환자가 신기한 약에 의존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견해도 공통된 의견이었다.

 

뉴욕에 사는 한 변호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네 살 난 딸이 레녹스 힐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만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바이러스성 뇌염에 걸렸고 그 병에는 항생물질이 효과를 보았다는 기록이 전무하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대량의 비타민 C를 섭취한 후에 콜라젠 질환에서 벗어났다는 글을 읽고, 같은 요법으로 딸을 고칠 수 없겠느냐고 물어온 것이다. 나는 주치의에게 비타민 C를 사용하는 게 어떨지 의논해 보라고 권했다. 변호사는 내가 보낸 의학지의 복사물을 들고 딸의 주치의와 의논해 봤지만 차갑게 거부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변호사는 머리를 썼다. 며칠 후 그는 전문의에게 물었다. 이번에 아이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면 아이스크림을 먹여도 되겠느냐고. 전문의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주었다. 변호사는 아스코르빅산 나트륨 450그램을 구입했다. 그는 10그램의 분말을 아이스크림에 섞어 병원에 들고 가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딸에게 주었다. 그는 매일 그렇게 했고, 딸은 하루가 다르게 호전되어 2주일 뒤에는 산소마스크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비타민 C가 가진 매력의 또 하나는 올바르게 투여하면 설령 좋은 효과를 보지 못한다 해도 해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아마추어가 의사 몰래 치료에 관련된 어떤 행위를 한다는 건 옳지 않다. 그러나 그 의사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 의사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다른 길은 애당초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의사의 의무는 과연 환자를 돌보는 일에 한정되는가. 환자 가족의 합당한 정서적 요구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 전문가와 여자아이의 관계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한정된 것이지만, 아버지는 그 아이의 평생을 책임져야 한다.

 

현대의학은 중증환자는 반드시 입원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 병원의 중환자실에 설치된 고도의 의료장비들은 그 자체로 폐해가 될 수 있다. 물론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는 위급할 때 진단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받는다. 다만 정밀한 기계적 감시보다 인체에 더 필요한 안락함은 없다. 그래서 환자는 불안에 사로잡혀 평정심을 잃고 만다. 그것이야말로 질병의 가장 위험한 악화 요인 중 하나이다. 중환자실은 응급치료를 위해 여태 없었던 우수한 전자공학적 설비를 갖추고 있지만, 환자는 그 엄청난 설비를 보자마자 절박한 위기감에 사로잡히고 병세는 오히려 악화되고 만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따스한 접촉이 없다는 것을 실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생생한 예다.

 

한 의사는 자신의 환자로 스물두 살 된 캐롤이라는 아가씨가 있는데 콜라젠 질환 때문에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캐롤은 애틀랜타에서 가족과 같이 살고 있었는데 절망감 때문에 온 가족이 붕괴 직전에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주치의는 환자가 절망감을 벗어던지고 긍정적인 감정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글을 캐롤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그 글을 읽었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나는 환자가 내보이는 삶에 대한 의욕이 회복의 계기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고, 내가 하는 모든 시도를 지켜보고 격려해준 훌륭한 주치의를 만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웃음은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캐롤은 어떻게 하면 웃을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웃음도 노력으로 얻어야 하는 것이므로 가족들이 교대로 도서관에 가서 사람을 웃기는 책을 찾아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9시 30분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와 가족들이 그날 뽑은 걸작 한 편을 들려달라고 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프로젝트가 실행에 들어갔다.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캐롤의 목소리가 첫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웃음을 터뜨렸다. “저,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럼 읽어볼게요. 어떤 목사님이 골프를 쳤습니다. 그런데 작은 연못 너머로 공을 날려 보내고 싶은데 이게 잘 안 되는 겁니다. 공 5개를 연못 속에 빠뜨리고 여섯 번째 공을 티에 올리려다 말고 목사님은 캐디에게 말했습니다. ‘어이, 이제야 공이 제대로 안 날아가는 이유를 알았어. 샷을 하기 전에 기도를 드려야 했는데 말씀이야. 그게 잘못된 거야.’ 목사님은 기도를 하고 공을 쳤습니다. 공은 18미터 정도 날아가더니 물 속에 퐁당. ‘목사님,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하고 캐디가 말했습니다. ‘아, 어서 말해봐.’ 그러자 캐디는 주저 없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다음에 기도할 때는 머리를 앞으로 더 숙이세요.’ 어때요, 재미있나요?” 나는 너무 기뻤다. 캐롤을 포함해서 가족이 모두 즐겁게 이번 기획에 참가했다는 것이 캐롤이나 가족 모두에게 큰 의미였다. 캐롤은 이전보다 분명히 건강해졌고 앞으로 희망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중환자는 절망한다. 그것 자체로 하나의 난치병인 절망을. 다시는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불안. 환자의 고질적인 불평불만으로 보이고 싶지도 않고, 가족에게 더 이상은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점점 환자를 고립 속으로 몰아넣는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뭔가를 자기들 멋대로 결정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도 있다. 그러면서도 아는 게 두렵다. 주사바늘과 주사약을 들고 쳐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도 있다. 하얗게 칠한 복도와 검사실의 정체 모를 조그만 기계, 깜빡이는 빨간 등, 온통 낯선 것에 둘러싸여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솟구쳐 오르는 사람의 따스한 접촉에 대한 그리움, 따스한 미소와 내미는 손, 그것이 현대의학이 제공하는 어떤 것보다도 고맙고 그립다. 그래서 병원이 가장 신경을 써야 할 문제는 환자에게 바로 여기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며, 환자에게 그 자신을 고쳐주려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우연히도 나는 1964년의 발병에서 10주년을 맞이하는 날, 뉴욕 거리에서 나의 증상이 악화할 것이라고 절망적인 진단을 내렸던 전문의와 마주쳤다. 그 의사는 분명히 나를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힘껏 상대의 손을 잡았다. 상대는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놓아달라고 말했다. 상대는 나에게 어떻게 회복했느냐고 열심히 물었다. 그것은 오로지 어떤 전문가들의 지식이 한 인간을 향해 사형선고를 내릴 만큼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버린 순간부터 시작되었다고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남에게 말을 할 때는 좀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듣는 상대가 그 말을 믿어 버릴지도 모르고, 그것이 종말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인간의 자기치유력 - 웃음과 긍정은 유효기간이 없는 최고의 약

 

《뉴잉글랜드의학지》에 글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전체론적 보건(Holistic Health) 운동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운동의 지도자들이 모임에 참가하여 나의 체험을 직접 말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 운동의 취지에는 찬성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의학계와 대중 사이의 벌어진 틈을 이어줄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의학계는 사회 전체와의 관계에서 비밀스런 집단이란 인상을 풍겼고 권위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의사 쪽에서 가능한 한 환자에게 정보를 주고, 환자를 올바르게 이끌면서도 거만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려 애쓰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전체론적 보건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은 의사들이 ‘정신과 육체는 하나의 유기체이며 어느 한쪽을 치유할 때도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자신의 사상과 실천의 바탕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알면 크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확신했다.

 

사람들은 항생물질이 나타났을 때, 다른 약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미생물을 퇴치하는 마법의 약이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박테리아가 내성을 가지게 되자 더 강력한 항생물질이 아니고서는 죽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인간의 몸이 항생물질의 유해한 작용에 노출되는 위험성이 나타났다. 이 연쇄반응은 경제를 좀먹기도 하고 몸을 파괴하기도 한다. 그래서 의사는 위험과 효용을 신중하게 저울에 달아보게 되었다. 이러한 약의 위험성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인식은 급격히 높아졌다. 약에 대한 반발이 전체론적 보건 의술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큰 요인이 되었다.

 

사람들이 건강에 관련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미국의 교육수준이 급속히 향상되었음을 말해준다. 지금 수백만 명의 미국인이 의학의 발전에 습관적으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 사람들은 더 이상 의사의 선고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의사가 자신들의 환자를 존중하며 대화를 나눌 자세가 되어 있느냐 없느냐로 그 자질을 평가한다. 이러한 관념이 교양 있는 대중의 관심을 지탱해주는 기둥이 되고 그들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슬로건 역할을 한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관념의 기초에는 늘 의료 교과서에서 큰 제목으로 나오는 건강의 전통적인 기본조건이 깔려 있다. 그것은 적절한 영양, 적당한 운동, 충분한 수면, 좋은 공기, 생활의 절제 등이다.

 

균형 잡힌 영양은 좋은 약과 같은 효과를 낸다. 약이 인체 내부의 기능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음식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약이란 언제나 원하는 대로의 효과를 내는 것이므로 아무 음식이나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좋은 음식물이 질병과의 싸움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어쨌든 의사에게 진단자료를 만들기 위한 검사를 할 때 환자 자신의 영양섭취 상태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일반인들이 의사를 향해 자신이 비타민 결핍이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리면서 웃음거리가 되리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면, 더 많은 환자가 비타민 문제를 의사에게 의논할 것이다. 특히 사람들이 가공식품에 의존하게 되면서 비타민 결핍은 가볍게 볼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가 되고 말았다.

 

홀리즘(holism)이란 말은 ‘치유’를 뜻한다. 육체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이 말은 그대로 적용된다. 이 운동이 달성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무엇이 있다면, 대중과 의사를 연결하여 양쪽이 서로 경의를 표하면서 협력하게 하는 것이다. 그 협력의 목적은 인체에 갖춰진 건강유지와 질병 극복의 능력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가까운 미래에는 건강문제와 전체론적 보건의 사고방식에 아마추어의 관심이 잘 반영되어, 의학계 쪽에서도 아마추어의 참가에 경의를 표하게 되는 바람직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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