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근대화론과 목포의 눈물
목포는 전라도의 주요 항구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머물며 조선 수군의 진을 형성했던 곳이다. 목포가 항구로서 모습을 갖춘 것은 1897년의 일이고 이후 목포는 일제 강점기 조선 침탈의 주요 항구로 이용됐다. 따라서 목포는 한반도에서 나온 주요 산물인 삼백(목화, 소금, 쌀)의 주요 집산지이기도 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사용되는 주요 도로와 철도는 서울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2대 도시인 부산을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일본은 한반도 수탈을 목적으로 국도1호선을 목포와 서울을 연결하는 도로를 만들었다. 일제의 이런 수탈정책이 목포를 교통의 요충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일부 경제사학자들로부터 시작한 식민지근대화론은 현재까지도 사학계의 최대 논쟁거리로 회자되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기반은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건설된 철도와 도로 및 각종 공장들이 해방이후 그대로 한국경제로 편입됐고 이것들로 인해 대한민국이 비약적 발전을 이룰 수 있는 토대가 됐다는 점이다. 이런 논리대로 식민지 시대 조선의 근대화가 이룩됐다면 수탈의 상징인 1번국도의 건설과 함께 또 다른 수탈항이었던 군산을 중심으로 한 철도 건설은 해방이후 전라도의 비약적 발전이 동반돼야 한다. 여기에 두 번째로
건설된 2번국도가 목포와 부산을 연결한 도로라는 점에서 목포는 대한민국 최고의 교통의 요충지여야 하지만 목포의 교통은 그것으로 끝이다.
물론 해방이후 목포의 발전이 산업화시기 정치적 관계 속에서 야당의 상징적 인물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라는 이유로 산업화에서 배제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식민지시대 도로 교통의 중심으로 발전을 이룩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대한민국의 발전을 얘기할 때 목포의 더딘 발전은 무리가 있다.
1934년 OK레코드사 창립기념으로 향토가사 공모대회에서 목포 출신의 19세 청년에 의해서 만들어진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다. 문일석과 같은 나이로, 목포 출신 가수인 이난영에 의해 취입된 ‘목포의 눈물’은 일제강점기, 민족의 한을 담은 노래로 애창됐다. 그러나 노래가 유명해지면서 일제의 감시도 그만큼 빨라지게 됐다.
‘목포의 눈물’ 2절 첫 구절에 나와 있던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와 2절 마지막의 ‘임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설움’이 문제가 됐다.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의 ‘삼백년 원한’은 임진왜란 삼백년 동안의 일본에 대한 원한을 얘기한 것이고,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속이기 위해 노적봉 위에 쌓은 노적가리를 비유한 것으로 해석된 것이다. 여기에 마지막 구절 ‘임그려 우는 마음’에서의 ‘임’은 다름 아닌 임진왜란의 최대 영웅인 이순신 장군을 그린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었다.
일본은 이를 불온 가요로 규정하고 이 노래의 작사가인 문일석을 조사했다. 당시 문일석은 경찰조사에서 ‘삼백년 원한품은’은 ‘연못의 동백나무 세 그루에 불어오는 바람’으로 ‘삼백연 원안풍’이 잘못 인쇄된 것이라고 말해 ‘목포의 눈물’이 금지곡 될 위기를 모면했다.
일제시기를 넘긴 민족의 애창곡으로 ‘목포의 눈물’이 사랑받았지만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프로야구에서 광주를 연고로 한 해태타이거스의 응원가로 목포의 눈물을 전라도 사람들이 부르자 이 노래에 ‘임그려 우는 마음’의 ‘임’이 은연중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상징한다는 이유로 광주구장에서 부르는 ‘목포의 눈물’을 금지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수탈의 아픔 속에서 민중의 마음을 실어 불렸던 ‘목포의 눈물’은 70~80년대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서도 지역 정치인의 고난에 빗대 불리며 제목만큼이나 고난을 당해야 했던 곡이다.
https://youtu.be/nTEaztgefW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