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 되게 하신 최종락 교수님
남효덕
첫 만남과 실험실에서 취침
내가 교수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대학 3학년 때인 1968년 2월 OHIO 주립 대학에서 1년간 연구를 마치고 귀국하신 바로 그 때였다. 당시로서는 학부 학생 혼자서 교수님 연구실을 직접 찾아가 개인적인 부탁을 드린다는 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내게 처해진 제반 사정을 말씀드리면서 연구실에서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드리러 갔던 것이다. 당시 학부 학생이 교수 연구실에 상주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방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연구실 입실을 쾌히 승낙해 주셨다.
그런데 교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것은 일과시간 동안 연구실정리를 돕고 틈틈이 공부해도 좋다는 뜻일 텐데, 내 속셈은 연구실에서 침식까지 하겠다는 고약한 속셈이 깔려있었다. 대담하게도 연구실 옆의 실험대 서랍에 이불과 냄비를 몰래 갖다 놓고 새로운 살림을 차린 것이다.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늦게 돌아와 실험대 위에서 잠을 자고 3식 밥까지 거기서 해결한 것이다. 교수님이 출근하시기 전에 냄새가 나지 않도록 창문을 열어젖히고 깨끗이 청소를 했지만 연구실에서 침식까지 한다는 사실을 교수님이 눈치채지 못하실 리가 만무하다. 워낙 입이 무거우신 분이라 모른척했을 뿐임을 알고 교수님께 사과 말씀드렸으나 교수님은 문단속, 불단속을 잘하라고 당부만 하셨지 별다른 말씀이 없었다.
그 계기야 어찌 되었든 교수님과의 첫 만남이 인연이 되어 최교수님은 나의 대학원 지도교수가 되셨고, 그 후 교사 발령 혹은 교수로 임용되는 데도 보이지 않는 후원자가 되셨다. 그보다는 생의 갈림길에서 헤맬 때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신 길잡이 은사가 되셨다.
내가 가야할 길을 일러주신 교수님
교수님께서는 평소 말씀이 적으시기 때문에 친구들 가운데서는 너무 어렵게 여기는 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교수님을 자주 만나 뵌 적이 있는 사람이면 그 인자하시고 자상하신 성품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연구에 몰두하실 때에는 정말 냉철하고 엄격한 면모를 분명히 보이시는 반면, 집념의 시간을 마치고 제자들과 정담을 나누실 때나 사적인 자리에서는 세상사를 논하실 때 인자하시고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게 하셨다. 강의에 임하실 때 충실하시면서도 적절히 사용하시는 유머는 수업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해주며 제자들에게 친근감을 더해 주셨다.
교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중용의 도를 일러주시며 참된 삶의 길을 가르쳐 주시면서 자기를 감추시기를 몸소 실행하신 분이시다. 인생의 가치는 생의 길이에 있지 않고 생을 걸어가는 과정과 활용에 있음을 강조하셨고,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옳게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함을 일깨워 주셨으니, 우리 제자들은 옛 성현군자들의 면모를 배울 수 있었다. 하나뿐인 삶을 남을 위해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며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을 할 것이 아니라 해야할 일을 즐겨 행하라고 깨우쳐 주셨다. 어떤 직장에서 일을 하더라도 자기가 하는 일이 국가와 사회에 얼마만큼 공헌하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학부 3학년 초 연구실에 입실하여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기까지 4년과 경북대 강사로 출강했던 1년간을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와같이 교수님을 가까이 모시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내가 오늘날 부족하나마 대학 교단에 서게 되었고, 지금까지 조그마한 장학회 운용을 비롯하여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것도 교수님의 큰 가르침 덕분이라 생각된다. 교수님을 만나게 된 인연이야말로 내 인생의 분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교수님은 어려운 제자들을 예사로 넘기지 않으시니, 교수님 허락도 없이 실험실에 이부자리를 갖다 놓고 침식까지 했던 나의 경솔한 일까지 묵인해 주신 것도 대표적인 포용의 사례라 하겠다. 내가 진로 결정을 앞두고 고민하고 방황할 때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제시해 주셨던 교수님께서는 어려운 고비를 슬기롭게 극복한 여러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심으로써 ‘자네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말로 나를 위로 격려해 주셨다.
특히 부산교육청의 교사 발령을 유예시킨 상태에서 대학원을 마치자 재임용발령이 난 부산시교육청에서 교사를 할 것인가 아니면 대학원 공부를 계속할까를 고심할 그때였다. 지금 당장은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며 초조하게 서두르는 나에게 두 시간의 ‘일반물리’ 강좌를 맡기시면서 “굼벵이가 꾸물거리듯 더딜지라도 결코 쉬지 않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일러주셨다. 그랬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내 능력으로 보아 굼벵이 걸음으로밖에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러나 결코 제자리에 머물지 않겠다고 그때그때 노력한 흔적이 있었다면 바로 교수님의 이러한 교훈이 밑거름이 된 결과라고 확신하고 있다.
중학교를 다니지 못해 고입자격 검정고시를 거처 계성고등학교와 경북대 사범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밤에는 가정교사나 기타 잡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야간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대학원에 다녔고, 대학 강사를 하면서 전문대학교를 거처 영남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니 이 모든 과정을 내 개인적인 행운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신 선생님의 덕분이요 은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과학교육의 선구자
최종락 교수님께서는 학생들로부터 존경받는 스승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과학교육의 선구자이심을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이면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1921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신 교수님은 1943년 동경물리학교 고등사범과에 수학하시던 중 해방과 동시에 귀국하시어 1948년 8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시고 같은 해 10월 대구사범대 전임강사로 임용되셨다. 모든 학문분야가 그러했지만 과학교육계 역시 갑자기 교직자가 턱없이 부족하여 대학은 물론 초중등학교에서도 비정상 수업을 해야 했던 그때였다. 그리하여 교수님은 중등학교에서 강의를 하시면서 대학교 전과정을 수료하셨고, 사범대학에 부임하시고는 한글 교재 하나 없는 교육환경에서 물리학도를 지도하셨기에 교수님은 불모지를 개척하는 선구자의 역활을 다하셨다.
우리나라 물리학을 비롯한 기초과학이 차차 기반을 찾게 되자 교수님은 과학분야 연구가 계속 발전되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전공분야 연구 못지않게 과학교육 분야를 새로이 개척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원래 교수님의 주전공 분야는 물리학 중에 광학이지만, 과학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으신 이후에는 이 분야 연구에 주력하셨다. 60년대 미국에서 시작한 새로운 과학 사조를 도입하기 위하여 미국 OHIO 주립대학에서 1년간 유학하셨고 이 사조를 우리나라 현실에 알맞게 토착화시키는 데 앞장 서셨다.
그 실례로 경북대학교에서 과학교육과정연구소를 창설하시어 초대 소장을 역임하시면서부터 과학교육 관련 논문발표회를 수차 개최하셨고, 과학교육 관련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얻어내셨다. 그리고 매년 방학기간에 연수를 실시하여 과학교사의 양성과 재교육을 시행하는 기반과 전통을 세우셨다. 덕분에 과학교육 연구가 활기를 찾아 오늘날 과학기술 방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다하셨다고 생각하니, 우리나라 과학교육의 역사가 바로 교수님의 발자취라 할 수 있겠다.
교수님께서 체험하신 풍부한 경험을 전수받은 저희 문하생들은 교수님의 열정을 직접 지켜보면서 2세의 과학교육을 담당할 교사가 될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었다. 학생지도용 과학교재 개발을 위해 몸소 볼록렌즈에 햇빛을 모으시고, PSSC 물리 시간에 타이머를 직접 작동하시며 자유 낙하운동을 설명하시던 그 결의에서 우리 문하생들은 새로운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과학교육에 남기신 교수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배교수들과 제자들은 회갑기념논문집을 발간하였고, 정년퇴임기념 특강에서도 교수님께서 우리나라 과학교육과 인재양성에 얼마나 관심과 열의가 많으신가를 읽을 수 있었다.
직접 발표하신 과학교육 논문 영역도 참으로 광범위하셨다. 우리나라 과학교육 현황과 개선 방안, 교육과정 시안작성에 관한 연구, 과학교육 평가에 관한 연구, 과학적 사고력 신장을 위한 실험적 고찰, 국민의 과학운동과 과학교육 등 주옥같은 논문들은 우리나라 과학교육의 개선과 정책수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특별히 과학교사의 양성과 재교육에 온갖 정열을 기울이신 공로는 자타가 인정하고 있으니 우리나라 과학교육의 역사에서 바로 선생님의 발자취를 읽을 수 있겠다.
선생님께서는 당시 지방대학에서 맡기 어려웠던 한국물리학회 부회장을 역임하셨고, 사범대학 학장 등 학내 중요한 보직을 맡으면서 탁월한 행정 능력도 보여주셨다. 그러나 선생님을 가까이 모셨던 나로서는 학내외 남기신 어느 업적보다도 우리나라 과학교사들에게 새로운 안목을 심어주신 공적을 더 높이 평가하고 싶다.
격이 없는 사제간의 동행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시피 교수님과의 우연한 만남은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하였고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사제간의 동행’이라는 이름을 빌린다면 선생님과 나는 엄연한 ‘교수와 제자’와의 관계이다. 그런데 교수는 가르치고 통솔하는 반면 학생은 배우고 따라야 하는 엄격한 상하의 관계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최종락 교수님은 인생의 선배로서, 각각의 제자들이 어떤 진로를 택해 어디로 나아갈까를 이끌어 주시는 인도자로서, 그리고 생의 가치와 철학을 깨우쳐 주시는 선각자로서 직분을 다하셨다,
그런데 공적인 직분이나 관계를 떠나 사적인 친분으로 이어지는 사제간의 동행 모습은 각기 달리 나타난다. 내 경우 교수연구실에서 교수님과 점심 도시락을 같이 먹기도 하고 가끔씩 선생님 댁에 식사 초대를 받기도 하였으며, 사정상 집을 비워야 할 경우는 식구의 한사람처럼 집안 전체를 관리하는 일일 경비대가 되기도 하였다. ‘제자는 스승’을 닮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제자들은 은연중 스승의 인품을 닮아가고 있다는 교훈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선생님의 인품에 흠이 되지 않으려고 다짐하곤 한다. 농담이기도 하지만 학반 친구들은 내 음성이 교수님의 음성을 닮아가고 있고, 연구수업 시간에 강의를 하면 그 스타일까지 점점 흉내내고 있다고 놀리기도 한다.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으며 교수님의 그림자라도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내가 대학졸업 후 교사 월급을 받고부터는 외식도 같이 하고, 낚시를 좋아하신 교수님과 먼 바다까지 동행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내 업무가 점점 바빠진다는 핑계로 선생님과의 식사 기회가 줄어들자, “요사이는 식사 한번 하자라는 전화가 제일 반갑구나” 하고 농담하시며 나를 반겨주셨다.
교수님의 은혜를 잊지 못한 나는 웬만하면 명절인사를 빠뜨리지 않았으며,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전화라도 드리곤 했다. 말년에 암진단을 받고 누워계실 때 “며철 전 미국에서 좋은 약이 들어왔으니 곧 나을 것입니다” 라고 말씀드리며 쾌유를 빌은 적이 기억나지만, 이젠 하늘나라로 먼저 가신 선생님의 명복을 빌 뿐이다.
첫댓글 원고 청탁을 드릴 때 요즘은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셨는데도, 날짜 지켜 원고를 보내시느라 노력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를 깔고 있습니다. 오늘 원고를 다시 읽으면서, 적극적으로 스승을 찾아나가시는 모습을 눈에 그립니다. 제가 교수님을 알게 된 것은 적극적으로 제자를 찾아나가실 때였습니다. 대학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학생들이 입학하기 때문인지, 대학 밖의 학생들에게 월급을 쏟아넣으며 장학금을 마련하시던 이야기를 들었고 대안학교를 여실 때였습니다. 스승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찾으셨고, 그렇게 제자를 기르셨구나 싶습니다. 은사님의 말씀하시는 톤과 비슷해지고, 강의하는 스타일이 닮아가는 것은 사제간의 정이 어떤지를 실감하게 합니다. 굉장히 많은 스승과 제자의 사례를 지니신 교수님을 부러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