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복음서 안에서 누가복음의 위치 대담 : 김상훈 ● 총신대신대원 신약학 교수 그말씀 2003년 10월호
복음서 안에서 누가복음의 위치
누가복음이 교회에 의해 정당히 평가되며 이해되고 있는가? 누가에 의해 기록된 이 복음서가 그 의미와 목표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채 사용되고 있거나, 반대로 일각에서 이 복음서만을 지나치게 부각하거나 하는 경향이 있지 않는가 묻고 싶다.
만일 누가복음이 다른 복음서와 똑같은 기능과 신학적 목적만 있다고 이해한다면 그건 바른 이해는 아니다. 당시의 헬라인을 위한 복음서이며 사도행전의 저자이자 의사인 누가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는 정도의 피상적인 이해만을 가지고 다른 복음서의 본문에 대한 이해와 단순히 섞어 이해한다면 그것은 저자인 누가의 의도나 이 복음서를 교회에 주신 성령의 의도가 제대로 파악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복음서란 점에서는 누가복음도 다른 복음서과 동일한 가치와 목표를 소유한다. 반면 제3 복음서로서의 특별한 위치와 신학적 기능이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누가를 통해 제3 복음서를 이 땅에 주셨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단지 또 하나의 복음서를 주셨다는 생각에 머물 수 있다.
2세기의 인물 이레니우스(Irenaeus)는 사복음서를 세상의 네 구역 또는 건축물의 네 기둥으로 묘사했다. 세상에 네 방향이 존재하듯, 사복음서는 전체를 이루기 위해 모두 한결같이 필요하다는 점을 나타낸 것이다. 네 복음서가 한 방향을 가리킨다거나, 단순히 같은 기둥으로 간주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공통의 복음서이면서도 독특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레니우스와 동일 시대의 인물로 알려진 타티안(Tatian)이 네 복음서를 하나로 묶어 만든 디아테사론(Diatessaron)은 한때 동방교회에서 상당히 인정을 받는 듯했다. 그러나 개별 복음서의 가치를 약화시켰다는 점 때문에 후대 교회에 의해 폐기되고 말았다. 네 복음서를 하나로 만드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었다. 네 복음서는 각기 독자적이고 특별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한편으로 각각의 독특한 특징과 목적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복음서들이다.
그렇지만 누가복음은 네 복음서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 또한 주의해야 한다. 누가복음이 가진 장점과 귀한 특징이 많이 있지만 다른 복음서를 제치거나 그것만이 월등한 그런 성경이라 생각하는 것 또한 지나친 것이다. 제3 복음서는 신약의 세 번째 책으로서의 특별한 가치와 신학적 기능이 있다. 이 점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는 다른 셋과 함께 전체를 이룬다. 그 하나들은 각기 독특하면서 한편으로 함께하여 전체를 이룬다는 점을 이해하자. 하나님께서 그렇게 풍성하게 교회에 복음의 은혜를 허락하셨다.
먼저 공통점을 이해하자
누가복음은 상당 부분 마가복음과 마태복음과 유사하다. 마가복음 가운데 반 정도의 내용이 누가복음에서 찾아진다. 마태복음의 250절 가량이 누가복음과 그 내용에 있어 유사성이 상당하다. 그래서 이 셋을 ‘공관복음’이라 부른다. 이 세 복음서는 요한복음에 비해 구조와 형식, 내용에 있어 상당한 공통점을 가진다.
그렇지만 공관복음만 공통점을 갖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과 함께 네 권의 복음서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특히 그분의 말씀과 사역에 초점을 맞춰 사람들에게 그분을 믿어 천국의 생명에 이르도록 이끄는 하나님의 거룩한 책이다. 네 복음서 모두 그리스도 예수와 관련된 복음전도(선교), 양육(영적 성장)과 교육, 예식과 예배의 기능과 목적을 가진다. 그리스도는 이 복음서들을 통해 지금도 그의 사람들과 말씀하고 계신다. 그의 손을 얹으시고 축복해 주시며, 때로 깊은 말씀의 충격으로 선포하며 설득하며 확신을 주신다. 그의 한없는 사랑이 그렇게 표현되고 있다.
그 어느 복음서를 접하더라도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생명의 주님은 복음서를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무엇을 강조하며 말씀하신지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은 바로 이 귀한 복음서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 복음서를 열어 주님에 대해 설교할 때마다 말씀 가운데 살아 계셔서 다가오시는 생명의 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생생히 증거해야 한다. 이천 년의 시간의 간극은 그렇게 메꿔진다. 주님이 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뵐 수 있다.
먼저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서’라는 공통적 특징을 기반으로 해서 네 복음서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다음은 네 복음서를 모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네 복음서에서 공통적이고 반복되는 것은 예수의 생애에서의 사역과 말씀의 핵심적인 윤곽, 즉 사건(또는 메시지)의 골격이라 할 수 있다. 복음서 기자들이 동일하게 수록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그만큼 사건의 비중이 큰 것이거나, 신학적 의미가 특별한 것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각 복음서에서 별도로 수록해 주고 있는 것들이 무시될 수는 없다. 어떤 사건에 대한 기록 가운데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없는 것이 누가복음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 내용이 비중이 없는 것으로 소홀히 취급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부분들이 합쳐져서 전체의 종합된 내용을 알려 주는 것이다. 부분은 모여 전체를 구성한다.
예수님 당시 실제 일어난 사건들은 네 복음서를 합한 내용보다 더 많을 것이다. 또 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모두를 합해도 실제 주님께서 전하신 말씀 그 자체보다는 적을 것이 분명하다. 네 복음서의 합이 실제 사건과 말씀의 전체보다 많을 수 없다. 그렇지만 네 복음서를 다 합할 때, 하나의 복음서의 내용보다는 더 큰 사건과 말씀의 전체적 그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네 복음서를 사건별로, 말씀별로 합쳐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주님의 사역과 메시지를 분량에 있어 좀더 많이, 그리고 개별 복음서보다는 좀더 종합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필요하다면 이처럼 좀더 전체적인 그림을 가지면서 특정 복음서의 본문을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전체적인 사건(메시지)에 대해서는 특정 복음서의 내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네 복음서의 이해에 있어 중요한 단계는 전체를 종합하는 것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그 다음 단계라 할 수 있는 것은 개별 복음서의 특징, 즉 그 독특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독특한 점을 어떻게 이해할까
각 복음서간의 차이가 있다. 각각의 복음서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이 다르기도 하고, 그려 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도 각 복음서에 따라 특징적인 부분들이 있다. 복음서 기자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료들이나 그들이 회상하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들이 공통적인 것만이 아니라 독특한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들이 아니라, 앞서 강조했듯이 합쳐서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전체의 부분들이다. 그런데 이 부분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주로 수록했느냐 하는 것이 그 복음서의 신학적 특징으로 나타난다.
같은 예수의 말씀 가운데서도 어떤 부분의 말씀을 발췌하고 있는가에 따라 해당 복음서의 특징이 구별된다. 특정 복음서에 주로 선택된 말씀과 사건의 내용서술은 그 복음서의 신학적 방향을 결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된(다른 기록들보다 더 기록되거나, 때론 덜 기록되거나, 때론 다소 다르게 기록된) 내용은 그 복음서의 신학적 특성과 기술 목적을 보여 주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 서로 다른 부분들이 합쳐서 전체의 그림을 그려 준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서로 다른 부분들은 그 부분을 선택하여 발췌한(기록한) 저자의 의도를 반영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그렇게 배열하도록 성경 저자들을 이끈 성령 하나님의 의도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 부분(다른 복음서와 다른)을 누가복음에 수록하게 하셨는가? 이 물음은 그 독특한 부분에 대해 저자를 영감으로 이끄셨던 하나님의 수록 의도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설교자는 이런 점에서 누가복음의 독특한 점(부분)을 발견하고자 해야 하고, 발견했을 때 그 ‘저자적’(authorial) 의도를 묻고 찾아야 한다. 그런 해석적 노력이 하나님과 저자의 의도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져 힘 있고 생명력이 있는 설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르다는 점, 특히 어떻게 다른가에 초점을 두면 특정한 복음서의 신학적인 특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성령께서 그 복음서(누가복음)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세례 요한에 대한 각 복음서의 소개는 각기 조금씩 차이를 가진다. 누가는 역사가로서 세례 요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상세히 소개한다(3:1~2). 마태(3:1~6), 마가(1:2~6), 누가(3:3~6) 모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지만 누가는 특히 5~6절에서 그리스도 구원에 대한 범위가 보다 확대될 것을 강조하는 이사야의 말씀을 더 담는다(“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마가는 요한의 메시지의 대부분을 생략해서 소개하고 있는 반면, 보다 상세히 소개하는 마태(3:7~10)와 누가(3:7~14)는 죄와 회개의 주제에 초점을 맞춰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의 소개가 좀더 자세한데, 특히 요한이 일반인들에게는 구제를, 세리들에게는 정직한 세금 징수를, 군병들에게는 폭력을 사용하지 말고 자족하는 법을 배울 것을 권하는 내용이 독특하게 나온다(11~14절). 이런 부분은 모두 누가복음의 신학적 특성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내용이 된다. 누가는 이들 내용이 세례 요한의 기록 가운데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누가를 통해 이런 주제의 말씀을 강조하신다.
누가복음은 어떻게 독특한가
누가복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의 구주가 되신 것과 그분이 행하신 복음의 메시지와 행적은 사실상 그들 모두를 위한 것임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당시의 로마제국에 속해 있던 모든 이들의 구주로서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족보는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것과는 그 배열과 특징이 다르다. 아브라함에서 멈추지 않고 아담, 그 위로 하나님을 예수의 족보에 포함시켰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첫 인류 아담을 예수 족보의 앞에 둠으로써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복음을 주지시키고자 했다. 모든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사도들의 행적을 담은 사도행전에서 연속된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모든 인류,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이다. 이 일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연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성령의 사역으로 진행된다.
특히 누가복음은 약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들에 대해 보여 준 구주로서의 사랑과 연민에 대한 기록을 많이 담고 있다.
첫째, 병들고 가난한 자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다른 복음서에서처럼 예수님은 치유하시는 분이시다. 누가복음에서 그분이 보여 주신 연민이 강조된다. 나병 환자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 주는 기록 중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치신 사건(17:11~19)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병든 자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특히 많이 나타난다(4:18; 6:29~31; 7:22, 12:33; 14:12~14; 18:22). 이와 관련해서 부의 위험에 대한 누가복음 특유의 비유들이 등장한다(12:13~21의 미련한 부자, 16:1~13의 부정직한 청지기, 16:19~31의 부자와 나사로). 주님은 가난한 과부의 연보(21:1~4)를 귀하게 여기신다. 특히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이사야 61장 1~2절의 글을 펴고 읽으신 부분에서 그가 오신 목적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4:18) 전하러 오신 것임을 증거하신다.
둘째, 소외된 자에 대한 예수의 관심은 아이들과 여인들에 대해서도 특별하다. 로마시대의 아이들은 부모들이 쉽게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권익이 없었다. 그러한 때이므로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오는 아이들을 용납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8:16)고 말씀하시면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으셨다(8:49~56; 9:37~43, 46~48 등도 참조하라). 물론 이들 부분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누가복음에만 예수의 어린 시절(2:40~52)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던 시대에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여성에 대한 기록을 더 많이 담고 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에 대한 적지 않은 기록들(1:5~7, 24~25, 39~45; 1:25~26; 2:5~7, 19~20, 34~35)은 누가만 기록하고 있다. 성전의 안나(2:36~38), 나인성 과부(7:1~17), 예수 사역에 함께 섬겼던 여인들(8:2~3), 18년 동안 병중에 있던 여인(13:10~17),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울던 예루살렘의 여인들(23:27~31) 등은 누가복음에 나타난 대표적인 여인 관련 기록들이다.
셋째, 사회에서 버림 받고 천대 받는 이들에 대한 주님의 특별한 관심이 나타나 있다. 당시의 사회적 주류였던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 가까이 하지 않았던 이들을 주님은 기꺼이 받으셨다. 이와 관련된 세 가지 비유(15:3~7의 잃은 양, 15:8~10의 잃어버린 동전, 15:11~32의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소개와 19장의 세리 삭개오의 소개는 누가복음의 독특한 내용이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교(18:9~14), 바리새인 시몬의 비난 가운데 주님의 발에 기름 붓던 죄인 여인의 기록(7:36~50), 십자가 상에서 회개하던 강도의 구원 사건(23:39~43) 등은 누가가 어떤 관점을 갖고 예수의 행적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냈는지 보여 주는 내용들이다.
이와 함께 이방인들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인들을 특별히 사랑하셨고(9:51~56), 이들 사마리아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거절하셨다는 것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25~37)에서 찾을 수 있게 한다. 특히 이방인들의 믿음에 대한 강조(4:24~27; 7:1~10; 13:29; 23:47)는 결국 모든 민족, 모든 이에게 전파될, 만인을 위한 주 예수의 복음이라는 신학적 선포를 강조한다.
설교자는 이런 누가복음의 신학적 특징을 외면할 수 없다. 누가복음을 설교하면서 소외되고 연약한 이들에 대한 교회적 관심을 강조하지 않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마태, 마가, 요한보다 더 강하게 도전하는 이런 주제의 말씀은 주님의 뜻대로 교회 사역에 힘쓰는 사역자들이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다. 주님께서 마태와 마가, 그리고 요한만이 복음서를 쓰도록 허락하지 않으셨고 그 안에 누가를 포함시켰다는 점을 교회는 생각해야 한다.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부와 관련된 특별한 비유들
(1) 선한 사마리아인(10:29~42):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주님은 오히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즉 이웃이 누군지 찾기보다는 선한 이웃이 되라는 말씀을 주신다. 섬김의 사역을 중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사마리아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외면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엿보게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의 특징은 주님의 말씀대로 연약한 자의 선한 이웃이 되는 것이다. 약하고 상처 받은 자들에게 베풀어져야 할 실제적인 도움을 강조해야 할 부분이다.
(2) 미련한 부자(12:13~21): 탐심을 경계하기 위해 주어진 이 비유는 자신만을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 자를 어리석은 자로 규정한다. 자신을 위해 쌓는 재물과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것을 대조시켰다. 이어진 말씀(특히 12장 33절을 보라)을 통해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것으로 소개한다. 물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특히 가난한 자에 대해 어떤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보여 주는 말씀이므로 설교자는 이런 부분을 외면할 수 없다.
(3) 옳지 않은 청지기(16:1~13): 해석하기 난해한 부분은 청지기의 지혜로움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중심적인 내용은 역시 이 땅의 재물(자신의 것이 아닌, 본래 주인의 것인)을 사용하여 이 땅의 연약한 자를 도우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론 부분인 13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사랑했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듣고 비웃었다고 누가는 기록한다(16:14). 재물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말씀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재물로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것임을 말씀해 주는 비유라 할 수 있다.
(4) 부자와 나사로(16:19~31):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호사했던 부자와 늘 앓고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던 나사로에 대한 말씀이다. 부자의 잘못은 단지 그가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데 있지 않고 그의 문 앞에 있던 나사로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 반면에 부자는 죽어 장사되어 음부에 보내진다. 아브라함의 말에 따르면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던 부자와 나쁜 것을 받았던 나사로는 내세에서 입장이 바뀐다. 한 쪽은 위로를 받고 다른 쪽은 고통을 얻는다. 그러나 물론 부자는 다 음부에 간다거나 가난한 자는 모두 아브라함의 품에 받아들여진다고 볼 수는 없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을 함유한 나사로라는 이름에 힌트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사로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음이 전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약하고 어렵고 가난한 자들에게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섬기는 이들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앞의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와 주제상으로 연속된 말씀인 것이다.
물론 설교자들은 이와 같은 말씀들만이 교회에서 강조돼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가복음만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을 함께 주셨다. 말씀의 균형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함께 또한 누가복음을 교회에 주신 이유를 잊어서는 안 된다. 신약 정경의 순서로 마태, 마가 다음에 누가를 두심으로 주님은 우리 교회가 주님과 같이 균형 잡힌 사역을 감당해 나갈 것을 원하셨을 것이다. 그 다음 요한복음을 허락하심으로 교회는 다시 새롭게 주님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하셨을 것이다.
누가복음을 통해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모든 이를 구원하고자 하시며, 특히 연약한 자와 소외된 자를 사랑으로 이끄시며,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이 땅의 부귀에 마음을 두지 말고 다른 이들을 섬기는 자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주님을 따라 살도록 촉구하신다. 오늘도 우리는 이것을 누가복음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김상훈 ● 총신대신대원 신약학 교수 | 200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