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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공동신조(The Formula Consensus Helvetica, 1675)에 관하여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1893)는 그가 저술한 Creeds of Christendom에서 “스위스 공동신조Helvetic Consensus Formula는 스위스 개혁교회가 마지막으로 고백한 신조로, 이로써 칼빈주의 신조의 시대를 마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를 가리켜서 상징적인 후산after-birth이라 불렀다.
이것은 칼뱅Jean Calvin, 1509-1564이 사망 한 지 111년 후인 1675년에 취리히의 존 헨리 하이데거John Henry Heidegger, 1633-1698교수의 요청으로, 바젤Wezel의 루카스 게르너Lucas Gernler목사와 제네바의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6교수의 협력 가운데서 작성된 것이다. 이 신조의 작성을 주도한 하이데거는 스위스의 신학자로서, 1633년에 스위스 취리히 주Canton 안에 있는 베레츠빌Bäretswil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그는 마부르그Marburg와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에서 공부했으며, 그 과정에서 하이델베르크의 교수가 된 요한 파브리우스J. L. Fabricius, 1632-1696와 친구를 맺어 교분을 쌓기도 했다.
나중에 그는 히브리어와 철학과의 특별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659년에는 교리dogmatics와 교회사 교수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스테인푸르트Steinfurt로 부름을 받아, 같은 해에 하이델베르크의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675년에 그의 주도로 작성한 스위스 공동신조는 스위스 개혁교회들의 연합을 의도하며 작성한 것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역효과를 보았다. 그로인해 스위스 공동신조는 취리히와 스위스를 넘어서까지 그 권위를 확장시키지는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신학의 역사에서 있어서 상당한 중요성과 관심을 모으는 문서다.
그것은 소뮈르Saumur 학파의 신학, 특히 모세 아미로Moses Amyraut의 보편주의-1598년 프랑스 개혁교회의 전국 대회에서 결정하여 설립된 소뮈르 아카데미는, 특히 신학에 있어서 카메론(John Cameron, 1579-1625)이 1618년에서 162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영향을 끼친 세 명의 학생 카펠(Louis Cappel, 1585-1658), 플라카이우스(Josué de la Place), 그리고 아미로(Moise Amyraut, 1596-1664),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아미로의 사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 바로 ‘아미로주의’(Amyraldism)이다. 그러한 아미로주의를 가리켜서 ‘보편주의’라고 하는 것은, 그가 정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로마가톨릭과의 논쟁을 순화시키고, 또한 루터파 교회들과 개혁파 교회들 사이의 연합을 위한 신학의 통일을 의도하고 쓴 『예정론』(Traité, de la Préestination, 1643)의 책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어서는 택자나 불택자의 구별이 없이 보편적으로 제시된 것이며, 다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적용에 있어서만 특정적, 혹은 제한적이라고 하는 다소 완화되어 보이는 예정론을 펼치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정통적 개혁주의 신학의 통일성을 약화시키고 이탈하도록 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는 평가를 받는다-에 대항하는 도르트 총회의 스콜라적 칼뱅주의를 방어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데니슨James T. Dennison, Jr에 따르면 이 신조는 1675년 3월에 스위스의 복음주의 회의에서 채택되었으며, 1679년 1월에는 제네바에서도 채택했었지만, 1706년에 이르러서는 계몽운동enlightenment의 대두로 인해 결국 이 신조를 부인하고 말았다.
◆ 스위스 공동신조(1675)의 본문은, 데니슨이 쓴 16-17세기의 개혁파 신앙고백들의 영어 번역판 4권에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스위스 공동신조에 대한 간략한 설명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미 17세기 후반에조차 칼뱅주의 신학에 엄밀하게 바탕을 두는 신조가 종교개혁의 진영에 넓게 뿌리를 뻗지는 못했다는 것과 더불어서 로마가톨릭 스콜라주의 신학과 명백히 구별되면서도, 그 안에서 기초적인 골격을 이루는 신학의 맥락을 보수하는 독특한 개혁신학의 신Neo 스콜라적 기풍이 퇴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그러한 배경 가운데서 스위스 공동신조는 로마 가톨릭의 스콜라주의와 구별되면서도 보수적이기도 한 종교개혁의 신학이 지니는 독특한 성격을 그 시대의 마지막까지도 고수하고자 했다고 하는 의미심장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종교개혁에 있어서 스위스는 결코 한적한 변방이 아니었다. 오히려 최초로 국가적인 공동의 신앙고백으로서의 신조를 작성했던 것이 바로 스위스였으니, 제1스위스 신앙고백Confessio Helvetica Prior(1536)이 바로 그러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1529년 초, 스위스의 바젤에서는 이미 미사와 수녀원 제도를 폐지하고 성상을 숭배하는 것을 철폐하는 등 활발한 종교 개혁의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1534년에 12개 조항으로 된 『바젤신앙고백』을 작성했던 것이다. 그 후로 취리히,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 세인트 고울, 뮐하우젠 등의 스위스의 도시들이 독일의 루터교회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로 통일된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한 회의를 계획하여, 1536년 1월에 바젤의 어거스틴파 수도원에서 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회의는 불링거, 미코니우스, 그리내우스, 레오 유다, 메간더 등에게 스위스 교회들이 전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따라서 이 제1 스위스 신앙고백은 상당히 루터교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스위스가 독일어 사용권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에 상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루터교회의 신학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제2스위스 신앙고백』이 작성되어 이를 대치하게 되었다- 물론 그보다 앞서 1534년에 제1바젤 신앙고백이 작성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12개의 간략한 조항으로 작성된 것이었고, 전체 국가적인 것으로서의 공동 신앙고백은 1536년에 작성한 제1스위스 신앙고백이 최초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젤은 1568년에 법령으로 교회정치에 관한 질서체계를 정립하기도 했었던 바, 이는 제네바와 더불어서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신앙과 교회정치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처럼 최초의 공동 신앙고백이라는 의미와 더불어서, 칼뱅주의적인 개신교 스콜라적 신학을 보수하는 마지막 공동신앙고백으로 작성되었다는 점, 또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회의 정식적인 요청에 의해 공동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했었던 마지막 사례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깊다.
특별히 아미로주의Amyraldianism와 스위스 공동신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미국 N. Ireland, Ballymena에 있는 CPRC 교단-언약 개신교 개혁교회(Covenant Protestant Reformed Churches)-의 목사인 앵거스 스튜어트Angus Stewart가 잘 정리한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스튜어트에 따르면 스위스 공동신조 제4조에서 6조까지는 아미랄두스[아미로]의 ‘보편적 선택설’Hypothetical Universal Election을 반대한다. 또한 제13조에서 16조까지는 아미랄두스의 ‘보편적 속죄설’Hypothetical Universal Atonement을, 그리고 제17조에서 20조까지는 복음으로 전도되지 않은 이교도들의 구원에 대한 아미로의 견해를 반대하고 있으며, 끝으로 제20조에서 22조까지는 사람의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능력에 대한 아미랄두스의 견해를 반대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처음 제1조에서 3조까지는, 구약성경의 보존에 관한 카펠Louis Cappel, 1585-1658-카메론에게서 영향을 받은 프랑스 소뮈르 학파의 유명한 3인 가운데 한 사람-의 도전, 특히 히브리어 모음의 독창성을 부정하는 것에 대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위스 공동신조는, 아미랄두스 의 보편주의와 같은 오류들을 공적으로 반증하는 칼빈주의 신조의 마지막 전형임을 그 자체의 본문 가운데서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 스위스 공동신조의 작성을 촉발한 배경이 되는 소뮈르 학파의 신학은 도르트 대회(1619)와의 대비 가운데서 검토되어야 하는데, 1620년 10월 1일에 프랑스 알레Alais에서 열린 프랑스 개혁교회 제23회 전국 대회는 도르트 대회의 신조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1559년의 프랑스 신앙고백과 더불어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채택했으며, 모든 목사들과 장로들에게 죽기까지 지키겠다는 엄숙한 서약a solemn oath으로서 결속시켰다. 그리고 1623년 9월에 프랑스 샤랑통Charenton에서 열린 제24회 전국대회는 이 채택을 재확인reaffirmed했다.
그러나 유명한 개혁주의 정치가 모르네이Du Plessis Mornay에 의해 설립된 소뮈르Saumur의 신학 아카데미에서는, 좀 더 자유로운 학풍이 생겨났는데, 비록 알미니안 주의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세 가지 점-성경의 언어적 영감, 특정한 예정, 아담의 죄의 전가-에서 당시의 엄격한 정통주의에서 이탈해버리고서도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보다도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세 교수-Josué de la Pace, Louis Cappel, Moyse Amyraut-들이 주도했다. 그리고 점차 소뮈르 대학은 이러한 지도자들 아래 큰 명성을 얻었으며, 스위스로부터 많은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소뮈르 신학의 발전은 1685년에 루이 14세에 의해 낭트 칙령이 잔혹하게 파기되고, 프랑스 개혁교회의 완전한 소멸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탄압이 가해짐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그들 신학의 아이디어는 조용하게 발전을 이루어 왔으며, 최근의 시대에 더욱 독자적인 부흥을 이뤘다. 특히 소뮈르 신학을 대표하는 세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인 모세 아미로에게서 파생된 아미로주의Amyraldianism에 대해 스튜어트는 “아미로주의는 프랑스 소뮈르Saumur의 개신교 신학교 교수였던 모세 아미로Moise Amyraut, 1596~1664 이후로 이름 지어져서 도입된 오류의 신학 체계로서, 그것이 저 멀리 프랑스의 오래된 오류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오늘날의 영국 제도와 다른 곳들에서도 적극적으로 홍보되어 있다.”고 언급한다.
계속해서 스튜어트의 설명에 따르면, 모세 아미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도록 가상적으로hypothetically 선택하시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완전하게 죽으시도록 보내셨다고 하는 가상적 보편주의hypothetical universalism의 한 형태를 선포하고 대중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아미로는 가상적인 보편적 선택universal election을 가르쳤으니,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믿게 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믿음으로 향하도록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타락한 사람은 믿지 않을 것임을 아시고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누구에게 믿음을 주실지 그의 택하심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미로는 가상적인 보편적 속죄universal atonement를 선언하여, 그리스도께서 앞으로 모든 사람이 믿게 되는 것을 조건으로 죽으셨다고 선포했다.
그렇지만 타락한 사람이 믿지 않을 것임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택하심을 위해 유효하도록 죽으시기를 작정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미로는 그의 복잡한 견해가 프랑스 태생의 장 칼뱅John Calvin의 견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선생은, 일명 ‘John’이라 불렸던 존 카메론John Cameron, 1579-1625이었다. 카메론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인간의 의지는 마음의 실제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는데, 사람이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입하신 지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대한 주관함에 있어서 마음의 판단에 주로 의존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를 육체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오직 도덕적으로만 움직이신다고 보았다. 이러한 모세 카메론의 주장과 교리가 루이스 카펠과 아미로 등에게 전수되었던 것이다.
아미로는 그가 가입한 프랑스 개혁파 교회의 목사a French Reformed minister로서 자신의 시각이, 장 칼뱅과 도로트의 신조들(1618-1619)의 신학,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에나 지금이나, 그에 대한 비평들이 지적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거짓이었다. 마틴 I. 클로버Martin I. Klauber는,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그의 신학체계를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를 향한 첫걸음이라고 보아 거부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개혁교회 내외의 정통주의자들은 그에 대한 치리를 요구했으나, 프랑스 대회에서는 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는데, 그의 학생들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프랑스 개혁교회가 알미니안주의로 점점 더 나아간 것이 문서로서 잘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스위스 개혁 교회는 모세 아미로의 견해와 소뮈르의 다른 여러 자유주의적인 교수들의 교리에 반대한 스위스 공동신조Formula Consensus Helvetica(1675)를 작성하여 스위스 개혁 교회의 목사들에게 서명하도록 요구했는데, 이 는 제네바에서의 칼뱅의 후계자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과 바젤에서의 오클람파디우스Johannes Oecolampadius, 1482-1531의 후계자인 가르너Luke Gernler, 1625-1675, 그리고 취리히의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의 후계자로 널리 인정되는 하이데거Johann Heinrich Heidegger, 1633-1698가 관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적으로는 제네바와 바젤, 그리고 취리히를 배경으로 하며, 또한 칼뱅과 오클람파디우스, 그리고 쯔빙글리의 영향을 내포하는 것이 바로 스위스 공동신조의 배경인 것이다.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모세 아미로의 새로운 견해를, 도르트 회의의 다섯 가지의 칼빈주의적 요점들Five Points of Calvinism과 매우 다른 다섯 가지 명제들propositions로 요약했는데 그 다섯 가지 명제들은,
(1)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해야만 하도록 한 동기는 자비심benevolence, 혹은 사람에게 전반적으로 베푸시는 사랑이었다.
(2) 이러한 동기에서 그는 그의 아들을 보내시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하셨다.
(3) 하나님께서는, ‘decretum universale hypotheticum’ 즉 ‘보편적인 가상적 작정’으로,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다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 하신다.
(4) 모든 사람들은 회개하고 믿을 수 있는 본성적 능력a natural ability을 지니고 있다.
(5) 그러나 이러한 본성적 능력이 도덕적인 무능a moral inability으로 인해 훼방을 받음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효과적인 은혜efficacious grace를 특정한 수의 인류에게 주시고, 그리하여 그들의 구원이 확실하도록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아미로가 성경과 장 칼뱅,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의 가르침을 시들게 하려고 시도한 계획들일 뿐이다. 1675년에 작성한 스위스 공동신조는, 바로 이러한 소뮈르 학파를 대표하는 가상적 보편주의 사조에 대한 반응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 신조는 그 의도에도 불구하고 곧장 역효과에 직면했었으며, 1706년에 이르러서는 계몽주의 운동의 대두로 인해 신조 자체를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종교개혁의 신학과 그 온전한 체계로서의 칼빈주의 신학체계는 17세기말 스위스 공동신조에까지 분명하게 계승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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