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7년 10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비행기를 타고 갔지만) 아주 무거웠다. 산호제 서부 장로교회에서 나를 간곡하게 붙잡는 성도들을 뿌리치고 떠난 것이 마음 아팠고 대구 삼덕교회의 권사님들이 보냈던 뼈 앞은 편지를 생각하며 어떻게 저들을 다시 보아야 하는 가 하는 마음이 귀국 길을 아주 무겁게 했다. 나는 한국에 가서 바로 대구에 내려가지 않고 한국 대전의 한 기도원에 올라가서 1 주간 금식하며 마음을 정리하였다. 그 때 드린 기도는 내게 아픈 말을 한 권사님들을 위한 용서와 축복기도였고 저들이 그런 말을 하게 한 내 잘못에 대한 회개의 기도,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삼덕 목회에 대한 주님의 선하신 인도였다. 한국 도착 후 10일 간을 기도원에서 보내고 대구로 내려갔다. 지금도 아주 뚜렷하게 기억되는 귀국과 귀임의 소감 몇 가지는 이런 것들이다. 김포비행장이 아주 초라하게 보였다. 서울 거리에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이상했고 겁이 났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 만나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다 무서워 보였고 한국사람 모두는 다 성난 사람 얼굴 같아 보였다. 대구 삼덕교회 사택에 들어갔는데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5년 이상 살았던 집인데도 그 집이 아주 어두워 보였다. 2 년 정도의 미국생활에 내 눈과 마음이 변한 것 같아 두려웠고 이런 인간의 간사함이 내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내가 싫었다.
어쨌든 삼덕 목회는 다시 시작되었다. 교회도 교인도 변하지 않았는데 목회는 떠나기 전처럼 순조롭지 않았다. 내가 미국으로 유학 가기 전의 목회가 신혼기간이였다면 돌아온 다음의 목회는 여기저기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목회였고 늘 내 자신에게 평안이 없는 목회였다. 이러면서 삼덕교회에 새로 등장한 과제가 교회당 이전 문제였다. 교회당 이전문제는 내가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현재 교회당 시설로는 그 당시 교인들을 더 감당할 수 없는 문제였고 그래서 그 때도 당회에서 여러 번 이전 문제가 거론되었었지만 이제는 이전을 모든 교인들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래서 당회에서 교회당 이전 문제와 봉산동에 위치한 현 교회당 판매를 위한 위원이 조직되어 새 교회당 부지 물색이 시작되었다. 몇몇 부지가 후보지로 나왔다. 동대구 쪽 2군사령부 부근에 있는 1600여 평의 땅이 제일 후보지였고, 대구 서쪽으로 성소로 나가는 곳에 3800여 평의 야산이 후보지로 나왔다. 이 야산은 자동차가 들어 갈 수 있는 곳에서 1 키로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에는 대구지방에 아주 흔한 경사진 석청 밭이었다. 이 석청 밭은 흙을 파면 흙이 아니고 얇은 층의 돌 판, 이 돌 판은 손으로도 부서지는 돌 판이지만 이 석청이 겹겹이 쌓여 있어 이런 밭은 나무도 잘 못 자라고 농사도 할 수 없는 그런 땅이다. 이 땅은 당시 삼덕교회당을 팔면 판매가의 절반도 안주고 살 수 있는 땅이었다. 나는 이 땅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장로님들이 여러 번 이 땅을 가 보았다. 몇몇 집사님들도 다녀왔다. 나는 여기에다 삼덕교회를 옮겨 삼덕 쎈타를 이루고 싶었다. 교회당과 교육관과 복지시설, 양노 시설, 교인 아파트를 짓고 싶었다. 당회에서 여러 번 의논을 하였다. 그러나 이 장노님과 김 장노님만 찬성하는 쪽이었고 그 외 13 장로님들이 다 반대였다. 그 곳으로 이전하면 그 교회는 삼덕교회가 아니고 성소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반대를 했다. 그곳으로 이전하여 교회 뻐스를 구입하여 주일 낯 예배는 물론 새벽기도 시간에 그리고 삼일 예배와 저녁예배 시간에 운행할 것이라고 저들을 설득하였지만 당회에서도 제직회에서도 절대 다수로 부결이 되었다. 이러는 중 경북의대 건너편 삼덕동에 자리 잡았던 대구 교도소가 화원으로 이전을 하며 그 교도소 터를 필지로 나누어 팔게 되었다. 이 자리는 봉산동 소재 삼덕교회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였고 결국 나와 삼덕교회 교인들은 3800 여 평의 값싸고 좋은 성소 땅을 버리고 이곳에 800평을 사서 새 교회당 부지로 삼는 아주 큰 어리석음과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 당시 삼덕교회가 살려고 했던 성소의 석청 밭은 현재 삼덕교회가 위치한 땅보다 더 비싼 지역이 되었고 그 곳은 대구의 변두리가 아닌 대구 중심 같은 곳으로 개발되었다. 그 땅을 그 때 샀더라면 삼덕교회는 땅 부자 돈 부자가 될 수 있었던 땅이다. 그 당시에는 그 땅 값이 아주 형편없이 쌌던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그 땅이 금싸라기 땅이 된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때 그 곳으로 교회를 이전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고 결국 장로교 목사의 리더십은 당회가 밭여주지 않는 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지금 삼덕동 800평 땅에 지은 삼덕교회는 그 후로 주변 얼마의 땅을 더 샀지만 매주일 주차문제로 가히 전쟁을 하고 있다. 리더들의 짧은 안목과 잘못된 결정이 이렇게 후세에 큰 잘못이 되어지는 것을 삼덕교회 이전문제가 너무나 잘 보여준다. 귀국 후 내 삼덕 목회는 고단한 중 교회 이전 문제를 중심으로 이어져 갔다.
유학하고 귀국한 후 삼덕교회의 목회는 어려운 중에도 교회의 대 과제인 교회당 건축 사역으로 이어져 갔다. 대구교도소 자리에 구입한 800평의 땅에 건축할 설계도가 공모되어 결정 되었고, 봉산동 교회당의 판매도 결정이 되었다. 건축헌금도 했고, 그래서 삼덕교회당의 건축이 시작되었다.(성소의 3800 평 땅을 포기하고 삼덕동의 800 평 땅에 교회당을 신축하게 된 것은 아주 엄청난 잘못이었다). 이렇게 교회당 신축문제로 분주한 중 삼덕교인 중 누구 하나 <김 목사님 이제 이 이 교회를 떠나주십시오> 라고 말하지 않았고 교회는 그런 대로 잘 되어갔다. 그러나 내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였고 이것저것 눈치가 보였다. 이런 정도의 고난을 목회의 고난으로 생각하는 것은 부끄러운 사치였고, 어불성설이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삼덕교회에서 떠나 있었다. 미국의 산호제 서부교회에서는 당회와 제직회와 공동의회와 미국장로교 산호제 노회를 통해 나를 정식 담임목사로 초청하였고 산호제 노회에서 보낸 내 이민 페티션이 주한 미대사관에 전달되었다. 산호제 서부교회의 소식이 여러 경로로 들려졌다. 산호제 서부교회에서 내 청빙을 위해 이렇게 힘을 쓰는 성도들이 있었고, 저들이 미워서 내가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는 사람들도 또 늘어났다. 나를 적극적으로 청하는 성도들은 내가 얼른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교회가 큰일 난다고 말들을 했고, 내가 돌아오지 말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내가 미국에 돌아오면 서부교회는 두 쪽이 나게 되었으니 미국으로 돌아오지 말고 삼덕에서 마음잡고 목회 잘하라고들 말들을 했다. 사실 내가 그 때 마음을 잘 정리하고 열심히 목회를 하였으면 나의 삼덕교회 목회는 그런 대로 순탄하게 열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당회원 중 어느 한 분도 내가 삼덕교회를 떠나기를 원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질그릇 같아서 한 번 금이 난 후는 이 질그릇을 철사로 아무리 꽁꽁 비끄러매도 질그릇이 흔들릴 때마다 그 갈라진 금이 점점 더 벌어지는 것 같이 나와 삼덕교회의 권사님들 사이는 마음으로 점점 갈라지고 있었고, 그래서 내 마음은 이민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새 교회당의 골조공사가 끝이 날 무렵 나는 주한미대사관에서 이민인터뷰 통지를 받았다. 준비에 필요한 서류를 가추어 인터뷰를 하러 갔는데 가서 보니까 인터뷰가 아니고 이민서약을 하는 것이었다. 나와 아내, 그리고 아들과 딸 모두 이민이 허락되었고, 나는 삼덕교회의 당회에 사표를 냈다.
1978년 3월 새 교회당의 골조공사가 끝이나 그 철근 골격들이 굳어지기를 기다릴 때 나는 삼덕교회의 8년 목회(이 중에 1년 9개월을 미국 유학으로 보냈다)를 끝내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퇴직금으로 받은 돈은 삼덕교회 새 교회당 건축헌금으로 작정했던 헌금으로 거의 다 지출하였고 내가 미국에 가져온 돈은 5천 달라가 조금 넘는 것이었다. 1978년 3월 2일 나와 가족은 대한항공을 타고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한국의 3월은 꽤 쌀쌀한 날씨였다. 나와 식구들이 속내의를 입고 출국하였는데 하와이 공항에서 이민수속을 하게 되었고 하와이 날씨는 한국의 한 여름 날씨였다. 냉방이 된 공항이었지만 그래도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이민 수속을 마쳤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 3년이 못되어 산호제 서부장로교회로 돌아왔다. 교세는 장년 150여명, 아이들 100여명이 모이고 있었고 이런 교세라면 결코 작은 교회가 아니었다. 내 교회당이 있고 교인이 이만큼 모이고 내가 개척하고 내가 목회했던 교회가 서부 장로교회다. 이제부터 목회는 잘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했다. 나의 귀국문제와 그리고 내가 삼덕으로 돌아 간 다음 다시 나의 초청문제로 갈라지고 상처 난 성도들의 마음은 이미 더 이상 합쳐질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골이 패여 있었다.
첫댓글 아주 감사합니다.
그래도 은혜로 목회를 마쳣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저 보다 이민 3일 늦게 오셨네요. 저는 1978년 2월 28일에 미국 도착했습니다.
재미있고 은혜스러운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