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의 시간 정치
1. 농경시대의 ‘시간’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인식되었다. 변화는 질적인 순환 속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통해 표현된다. 하지만 새로운 국제적인 표준 시간체제를 도입하게 되자 시간은 양적으로 계량되고 개별적인 시간이 아닌 ‘사회적 시간’으로서 활용되었다. 모두가 동일한 시간의 영향 속으로 편입되었고 시간의 통제를 받게 된 것이다. “근대적 시간은 타자와의 관계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위계화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통치성에 의해 조직화되어 생체권력으로 작동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개인에게 단계적으로 적용가능한 ‘권력의 새로운 기술’로 역할하게 되었다.”
2. 근대적 시간은 국가가 국민을 통치하는 강력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김학선은 『24시간 시대의 탄생』에서 80년대 시간정치를 분석한다. “이 책은 1980년대 들어서 24시간 시대가 열림으로써 하루 24시간이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자원으로 적극 개발되고 활용되면서 사회적 갈등관계가 조율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저자는 80년대에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신군부 정권은 ‘지금 여기’의 시간을 새 시대를 향한 준비의 시간으로 보고 먼 미래를 바람직한 사회가 이룩되는 시점으로 제시한 반면, 시민사회는 ‘지금 여기’를 바람직한 현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시간에 대한 상이한 관점은 88년 서울올림픽 개최 결정에서 파급되었다.
3. 86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 개최 확정은 80년대 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로 작용하였다. 1982년 전격적으로 결정된 ‘야간통행금지 해제’는 올림픽 개최에 따른 국민 질서의식을 새롭게 하고 국제화, 개방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논의 속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통금해제’가 충분한 검토나 준비가 없이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급격하게 이루어진 것은 통금해제가 국민의 권리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통금해제와 함께 정권은 ‘올림픽 시민 담론’이나 ‘자발적 발전 주체로서의 자율’을 강조하면서 국민들에 대한 새로운 통치전략을 시도했다. “신군부 정권은 야간통행 금지제도의 철폐와 일련의 자율화 조치(교복·두발 자유화, 해외여행 자율화, 민간주도 경제체제 등)을 통해 개방과 대화합 정책을 표방하고 ‘자율’을 새 통치규율로 삼아 국민을 신군부 정권이 제시하는 목표 완수를 개인의 발전이자 국가의 발전으로 인식하고 능동적으로 그 발전의 대열에 참여하는 ‘자발적 발전 주체’로 호명했다.”
4. '야간통행 금지‘ 해제는 24시간을 완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의도대로 여가시간의 활용이나 시간의 여유 대신에 오히려 시간 부족과 시간적 압박이 증가하였다. 해제 이후 심야활동이 증가하면서 노동시간과 학습시간이 증가하였고 유흥업소와 퇴폐업소들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국가의 3S 정책으로 허용된 업소들이 심야의 늘어난 시간을 활용하여 급격하게 팽창한 것이다. 여기에 성공주의와 성과주의 속에서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구별없이 모두 시간 활용에 몰입한 결과, 시간의 압박 강도는 오히려 높아져갔던 것이다. “1980년대 야간 통금 해제는 문제점을 완화할 만큼 사회적 장치를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올림픽 유치와 개회를 위해 필요하다는 명분하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청소년의 비행, 음주운전, 치안부제, 무질저, 퇴폐영업 등의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5. 신군부 정권은 많은 자율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국민들의 지지와 협력을 이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주의와 군사주의에 의해 추동되는 정책을 통해 국민들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것들이 ‘등화관제 훈련’, ‘극장에서 애국가 상영’, ‘국기 하강식’과 같은 행사였다. 하지만 이런 행사들은 국제화와 자율화 과정 속에서 점차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고 개방적인 국가 정책과도 맞지 않아 1980년대 말부터 사라지게 된다. 1980년대 아직도 잔존하였던 많은 외형적 통제들이 개방화의 명분 속에 중지된 것이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분명 ‘88 올림픽’ 개최가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6. 80년대 시간정치에서 ‘야간통행 금지’ 해제와 함께 강력한 영향을 끼친 것은 텔레비전, 특히 컬러 텔레비전의 확산이었다. 야간통행 금지 해제와 마찬가지로 ‘컬러방송’ 실시도 대통령의 결단으로 인해 1981년 1월 1일 ‘전격적으로’ 실시되었다. 동시에 KBS는 ‘국민생활시간조사’를 격년제로 실시하면서 국민들의 개별적 시간을 공적인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각 개인의 시간은 마치 하나의 공공재처럼, ‘국민생활시간’이라는 시간자원으로 개념화되었고 사적이고 질적인 시간 대신 공적이고 양적인 시간이 대외적으로 대한민국의 사회적·문화적 지표를 대표하게 되었다.”
7. 컬러방송과 함께 ‘프로야구’ 방영 및 ‘TV과외’, ‘아침방송’ 그리고 미디어 이벤트를 통한 텔레비전의 활용은 국민들의 시간적 감각을 변화시켰고 일상시간의 리듬과 구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가의 사회적 시간을 텔레비전을 활용하여 국민들의 일상시간과 동시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방송시간은 일상시간 밖에 존재하지만 시청이라는 행위를 통해 지금 내가 여기에서 경험하는 현상학적 시간으로 존재하게 되면서 우리의 일상시간을 구성하고 재생산한다. 또 텔레비전 방송은 프로그램 단독의 시간성이 아니라 편성을 통해 연속성과 규칙성을 가지는 데, 그 흐름은 일상의 리듬과 시간을 재조직한다.” 또한 텔레비전을 활용한 이벤트의 효과는 <이산가족 찾기>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엄청난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디어 이벤트는 민족과 국가를 실질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수용자들에게 직접적이고 살아있는 느낌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방송매체를 통해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여 국가와 사회가 지향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8. 자율을 내세우고, ‘올림픽 시민 담론’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대한 협력을 강조하면서 미디어를 활용하여 지지를 이끌어내려 했던 국가의 ‘시간정치’는 반드시 권력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국제적인 시선을 의식하여 시도된 ‘자율화’ 정책은 시민들의 정치적, 사회적 의식을 향상시키는데 영향을 주어 자발적인 민주화 의식을 강화시켰고 국가에 의한 부당한 행위에 대한 저항의식을 심화시켰다. ‘시간’과 관련된 영역에서는 ‘TV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편파/상업 방송 항의). ‘서머타임제 반대’(미국 방송에 의한 부당한 계약에 대한 항의), ‘고유 명절 과세(국가 정책과는 별도로 설과 추석 강행) ’,‘자발적인 기념일 행사(노동절, 학생의 날)’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9. 1980년대 ‘시간정치’의 정책과 담론 형성 그리고 시민들의 반응을 살펴보면서, 폭력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가 자신들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추진했고 시행했던 개방화의 일환으로 성공한 ‘올림픽 개최’가 그들 권력의 운명에는 일종의 자충수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국제적인 행사를 앞둔 상태에서 강압적이고 독단적인 정책 시행은 지속하기 어려웠고 ‘자율화’라는 명목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개방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으며, 국가에 대한 반발에도 폭력 사용에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80년대 권력에 의해 자행된 엄청난 폭력과 고문의 기억과 기록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탄압이 ‘임계점’을 넘을 수 없었던 이유는 ‘88올핌픽’이라는 세계적인 행사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추정이 가능한 것은 폐쇄적인 독재 국가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폭력 현장을 지금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광기와 공포의 시대’였지만, 군부의 정치적 한계 때문에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자율화’의 흐름이 결국 ‘민주화’의 성공을 가져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시점에서 평가할 때 80년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88올림픽’이었는지 모른다.(결론의 생각은 저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글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첫댓글 - 21C 사회적 변화는 TV 방송 및 다양한 미디어를 통하여 급속도로 전파되고, 이에 대한 충분한 숙고 없이 물결처럼 떠밀려 다닌다. 광고, 보도, 정치, 드라마, 음악..... 심지어 교양 프로그램 마저 이슈 열풍에 휩쓸리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유행, 시대 감각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선전을 하게 만든다. 유투버 열풍도....... 모두가 하나를 향하게 하는 정책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신호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