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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기획 정의 • 생명 • 공동체
기독과농민운동과 정의, 생명, 공동체
김 영 원 (장로, 전 기독교농민회장)
10 년만에 같은 주제의 글을 다시 써야 되는요청을 받았다 그러니까
1989년 5월 기독교농민회가 출범한 지 10년만에 그 10년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조직 제 2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10년의 회고와 향후
방향설정을 위한 정책협의회가 열렸다. 그 때 나에게 주어진 과제가 ‘기
독교 농민운동의 이념과 그 선교적 과제’였다. 그 정책협의회에서 설정
된 과제가 ‘정의 • 생명 · 공동체’였다. (이후 기독교농민회를 ‘기농’으로)
그러나 그 후 기농과 가농이 축이 되어 전국농민운동연맹을 탄생시키면
서 기농은 발전적 해체를 하고 몇몇 지도력만 남아서 농민선교의 영역
을 교회 속에 뿌리내려 이상 설정한 과제를 수행코자 했으나 역 량의 부
족과 여전한 교회의 폐쇄적인 입장이 기농을 수용하지 않게 되고 기농
은 표류하기 시작하였다. 문자 그대로 유명무실하게 오늘에 이르면서 세
월과 재정의 낭비만 가져왔다. 솔직히 말해서 기농은 80년대 운동으로서
그 시대의 사명 수행으로 끝이 난 셈이다.
그러나 그 과제인 ‘정의 · 생명 · 공동체’는 오늘에도 변함없이 아니, 더
욱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 다행히도 농촌목회자협의회(이하 농목)가
뭇 있는 젊은 목회자들에 의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농민선교의 주체
는 물론 크리스찬 농민이지만 농목이 이 농민선교의 주역으로 그 역할
을 담당해야 할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역할은 한국교회의 갱신과도
기독교농민운동과 정의·생명·공동체 ·김영원 19
깊은 관계가 있으며 이 시대의 모순인 하나님의 생명 창조사역의 단절
위기에서 마지막 보루로써 그 역할이 기대된다.
기독교농민운동은 생활신앙 고백
신앙은 삶이다. 삶은 운동이다 . 운동은 생명 있는 존째의 본능적인 동작이다.
역사란 언제나 힘을 가진 자의 횡포(모순)가 극한 상황에 이를 때 이
것을 시정하기 위한 피해자의 자기 생존을 위한 몸부립, 즉 운동으로 발
전되어 왔다. 어느 시대나 모순이 그 시대의 운동을 유발시켰다. 모순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운동이다. 어느 독재자가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독
재를 중지한 일이 있었던가? 어느 독점자가 스스로 개과천선(改過遭善)
하여 -독점을 중단하고 나누는 일이 있었던가? 억압당하고 수탈 당한 민
중들의 저항하는 힘이 커졌을 때 그 모순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다
예로서 4 .1 9가 바로 그런 것이다. 농민운동도 농업과 농민을 에워싼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자위의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다.
근대 역사 속에 명멸한 농민운동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그 운동의 방
향과 과제가 그 시대의 상황과 요청에 따라 설정되었고 역사적인 소명
에 부응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동학농민전쟁은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춤했課求)에 시달린 가난한
농민들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또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斥洋斥倭(척양척왜)로 자신들의 삶을 지켰던 것이다.
• 1920 년대는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에 대한 농민들의 생존권 수호
와 민족운동으로써 항일농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
• 1930년대는 농민조합이 마지막 농민운동의 조직으로 동장하는데 이
때 농민운동은 격앙된 항일 농민운동의 성격을 띈다. 영흥에 적색농민조
합이 나타난 것도 이 때 일이다. 이 운동이 8.15 이후 한국전쟁 (6.25) 으
로 단절되고 자생적인 농민운동은 약 16 년간의 공백을 이룬다. 그러던
중에 한국전쟁 이후 H뼈년에 한국농민운동의 재건으로서 한국가톨릭농
민회가 출범하여 한국농민운동의 맥을 잇는다. 이 가농 운동이 80년대까
지 실질적으로 한국농민운동을 주도하면서 82 년도에 와서 기독교농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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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탄생하여 수레의 양 바퀴를 이룬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두 운동체
가 모두 교회의 배경과 지원, 그리고 신자들로 축을 이룬 ‘ 점이다. 그러
던 중에 농민협회가 조직되었고, 00년에 가서는 이 세 운동단체가 연합
한 한국농민운동의 모체로써 전국농민운동연합(이후 ‘전농협’으로)으로
출범하고 가농과 기농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특화된 농민선교(농민운동)
의 기능을 담당하면서 전농과는 유기적 협력관계를 이룬다.
그간에 전개된 농민운동의 과제는 10년 주기로 구분된다. 속담에 “10
년이연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10년 주기의 변화는 운동과제
의 변화를 가져왔다 .
• 10Có -197H 초기) - 농촌 크리스찬의 모범적 생활과 협동적 생활을
실현하는 운동 전개
• 1970년대 - 구조적 · 정책적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투쟁을 축으로
한 조직 운동의 확산
• 1980년대 - 민족 · 민주변혁 운동으로써의 농민운동 전개
• 1900년대 - 생명공동체 운동으로써의 농민운동
산업사회가 초래한 환경의 파괴와 생명생존의 위기의식이 확산되면서
이 생명공동체 운동은 생명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생명의 농산물을 매개
로 생활자치운동을 통해 서로 더불어 사는 세상 즉, 공생의 사회를 건설
하는 운동으로써 자연과 조화되는 유기순환의 농업과 그 세계관의 실현
을 통해 농업 · 농민문제의 위기 즉, 생존의 위기를 근원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운동이다.
이상과 같이 농민운동의 방향이 그 시대적인 특정과 요청에 따라 설
정되고 그 시대적인 모순의 극복을 위한 역사적인 소명에 충실히 복무
하고자 한 흔적이 역력하다.
기독교농민운동의 과제인 정의, 생명, 공동체운동은 오늘날에도 여전
히 유효하다. 정의가 실종된 정치는 정치허무주의와 부정부패를 초래함
으로써 불신풍조를 만연시켰고 생명의 존엄성이 실종된 경제 우선 주의
는 생존환경을 파괴하고 생명경시 풍조를 조장하였으며 공동체 의식을
파괴한 빈부의 격차는 이기주의적 삶을 심화시킴으로써 사회적 모순은
더욱 깊어만 가고 있다.
기독교농민운동과 정의·생명·공동체·김영원 21
우리는 이 시점에서 3.1운동 이후에 전개되었던 역사적인 교훈을 오늘
에 되새겨야 할 필요를 절감한다.
3.1운동 이후 중산계급의 민족운동은 종식, 굴절되었으나 이 운동이
새롭게 노동자, 농민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교회는 영과 육, 현세와 내세,
성(聖)과 속( @-)을 구분하여 신비주의에 빠져들어 민중의 삶을 외면했을
때 민중의 자주적인 운동은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어 갔던 것이다.
일제가 한국교회를 박해할 때 피 흘린 순교자가 있었으나 그 피는 기
독교의 교리 수호때문에 흘린 피이다. 민족과 민중을 위해 피흘린 기독
교 지도자는 없었다. 일제가 조선 농민의 토지를 빼앗고 고율( 高率)의
소작료로 또 강제공출로 수탈해 가고 ‘농촌진홍운동’이라는 관제 새마을
운동(우가끼 총독)을 벌려 조선민족의 혼과 정신을 빼버리고 문화적으로
일본화하는 정책으로 조선농민은 자기의 삶의 터전을 잃고 만주와 일본
등지로 유랑민 신세가 되고 남은 사람은 하나의 생산 도구로, 노예로 내
몰리는 비인간화된 참상을 세속 일이라고 외연한 당시의 조선 교회 지
도자들이 말할 복음주의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렇게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은 그 동안 80여 년이 흘렀다. 그런데 외세로부터 주어지는 농민
문제의 양상은 그 수탈의 구조와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상으로 달
라진 것은 없다. 그리고 농민선교에 대한 이해도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다만 아직도 제도교회의 인정은 받지 못하연서도 새로운 도전에 대웅하
는 소수의 성직자들이 있어 여기서 희망의 작은 불씨를 본다.
사회 현실에서 발견되는 모순 앞에서 그 모순의 극복은 곧 교회의 선
교적 사명이며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 모순의 극복을 위해서는 교회는
어느 편에 설 수밖에 없는 결단을 촉구 받게 된다. 이 촉구 앞에서 이것
도 저 것 도 아닌 태도는 분명한 방관이며 모순의 현실을 이대로 지속하
자는 말이 된다. 이것은 이미 교회속에 깊이 뿌리내린 기득권 수호라는
병이다. (변화산상에서 제자들의 말 그대로 “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와 같다.)
지금 우리의 농업은 국제분업화와 세계시장경제에 편입되어 경쟁논리
에 휘말리면서 설자리가 없어 졌다. 우리는 지금 Il\1F체제의 통제하에서
경제위기시대를 살고 있다. 아직은 먹을 것이 있다. 그러나 진짜 경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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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는 식량의 핍절의 때가 왔을 때이다. 언제일지는 정확히 모르나 그 때
가 정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어쨌든 한국사회의 희망은 농촌에서부터 구체화되지 않으면 길이 없
다. 더구나 오늘 한국의 상황에서 아무리 경기부양책 을 써도 농업에 국
가의 존망이 걸려 있다. 그래서 교회는 현장 농민에게 희망을 주는 구심
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농촌사회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실체가
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교회가 농촌현실에서 농민의 삶 속에 깊 이 파
고들어 농민을 위해 희생하며 농촌사회 속에 하나님의 의를 구현하고
사랑과 믿음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다. 농
촌과 모든 농민의 사회적 관계와 자연과의 관계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화로운 관계로 발전시키고 농촌 전체를 구원하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독교농민운동의 이념적 토대로 다음 세가지를 농민선교의
과제로 제시하고자 한다.
1) 농촌사회 속에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정의운동
2) 파괴되어 가는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생명운동
3) 믿음과 삶이 이어지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운동
정의운동
예수 당시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은 대체로 그 날 그 날의 끼니를 걱
정해야 하는 가난한 민중들이었다. 이들 절대 빈곤 계층들에게는 최대
관심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몸에 무엇을 걸칠까 하는 의식주
문제 해결에 있었다. 이들이 그토록 예수를 따르게 된 것은 빈들에서 오
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은 경험에 미루어 자신들의 당연한 민생문
제해결을 예수께 기대한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러한 군중들의 기대에
대해 예수가 제시한 대안은 동문서답 격인 것이었다. “너희는 먼저 하나
님의 나라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
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끼마태 6장 33절)라고 민생문제해결을
위해 먼저 추구해야 할 순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셨다
이 예수님이 제시한 대안은 만고의 진리로서 오늘의 상황에서 더욱
절실한 요청 이다. GNP 1 만달러 돌파, 중진국 진입, OECD가입 등 곧 선
기독교농민운동과 정의 ‘ 생명 · 공동체 · 김영원 23
진국 대열에 끼게 된다던 나라경제가 어느 날 갑자기 IMF 신탁통치 아
래 들어가게 되면서 국가경제가 부도직전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정경이
유착되어 저지른 부정과 각종 비리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무수한 기업
이 도산되고 실업자는 날로 증가하여 200만을 돌파하였고 끼니를 해결
못하는 무료 급식자는 31 만 명이나 되고 지하도나 대합실에서 밤을 지
새는 노숙자는 늘어만 가는데 이 꼴로 만든 책임을 규명하는 경제청문
회도 열지 못하게 하는 세력들이 아직도 버티고 있다. 국가부도라는 위
기 앞에 나라를 구하려는 서민들의 애국충정은 제 2의 국채보상운동으
로 아기들의 돌반지까지 모으는 금모으기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정작 큰
금괴를 소유한 자들의 금괴는 꼭꼭 숨겨놓고 내놓지 않았다고 하며 숨
겨진 외화와 지하 금융이 양성화되면 이 경제난국을 극복하고도 남는다
는데 이 국난이 가진 자에게는 호기가 되고 노동자와 농민 등 서민에게
는 생존을 위협하는 난국이 되었다. 이런 결과를 가져온 책임은 정치,
경제, 사회의 정의가 메말라 버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인 “너희는 먼
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리하
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라는 이 예수의 정의운동이 오
늘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아닌가 !
오늘의 상황을 경제위기라고 하는데 진짜 경제위기는 먹을 식량의 핍
절 즉, 식량의 위기가 왔을 때가 참 경제위기의 때가 될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것은 농업이 담당한 역할이다. 그런데 이 기아
(創戰)의 세기는 이미 지구촌에 엄습하고 있다. 이런 상황 앞에서 예수
는 뭐라고 말씀하고 계실까? “유전자 조작 식물을 개발해라. 바이오 테
크놀로지로 발전시켜라, 농업을 규모화 해라, 시설화, 기계화 해라" 이렇
게 말씀하실까? 아니다. 먼저 정의를 세우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구체
적인 정의의 내용이 무엇인가?
Q) 정의로운 토지제도
역대 정권은 땅의 정의를 심지 않았다. 토지는 농업생산수단으로써 농
민문제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토지의 공개념은 모세를 통해서
명령하신 하나님의 법도이다 (레위기 25장 참조).
1949년 농지개혁 당시 농민에게 분배된 농지가 32만2천 정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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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계속된 비농민 농지소유 허용으로 소작제도가 부활되면서 소작농
지는 계속 늘어났다. 85년도에 와서는 소작지가 당시의 2배가 넘는 65만
정보(당시 전 농지 214만 정보)로 30.5%가 소작농지가 되었고 전 농가
의 64.7%가 소작농가가 되었다. 그 해 한해 동안 농민이 지주에게 지불
한 소작료만 해도 5,100억원이나 되었다.
1997년에 와서는 전체 농지가 192만4천 정보로써 85년에 비해 21 만 4
천 정보가 줄었으며 최근 5년 어간에는 매년 약 8만 정보의 농지가 타
용도로 전용되거나 휴경지가 되어 사라져 가고 있다. 비농민 농지소유가
허용되면서 소작농지는 정확한 통계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토지생산성은 토지 피폐화의 가속화로 생산력이 현저하게 감소되고
있다. 그 동안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땅값의 상승을 부추겨 투기의 대상
이 되어 사회악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땅의 정의를 심지 못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와 같이 토지가 생산수단이 아니라 재화증식수단 즉, 투기
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도시자본의 토지투기로 불로소득하는 불한당들의
이기심 충족으로 사회악을 조장시켰다. 지금 경제우선정책으로 경자유전
의 제도도 실종되고 그린벨트마저 풀어가는 결과가 어떤 재난을 가져올
는지 그 누구도 책임질 사람도 없는 그 때가 걱정된다.
@ 정의로운 가격제도
일한 만큼의 정당한 뱃가를 보상으로 받는 것 그 자체가 곧 사회정의
이다. 역사이래 농민은 생산비(적당한 노동의 뱃가)를 보장받지 못한 모
순된 가격 정책으로 항상 수탈의 대상이 되어왔다.
·봉건제 하에서는 신분까지 예속된 농노적인 노동으로 생산한 농산물
을 봉건지주에게 가혹하게 수탈 당하고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겨
우 명맥을 이어왔다. 게다가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면서 그 인
고를 묵묵히 견디며 민족을 먹여 살렸다.
• 일제하에서는 이른바 토지조사(1910-1918)등 식민지 농업경제의 수
탈로 농가의 절반이상이나 되는 52만7천의 농가가 자기 땅을 빼앗기고
하루아침에 소작인이 되어 고율의 소작료를 지불해야 했고 빼앗긴 농지
의 면적은 2천 1 백 70만 정보로 전체농지의 절반이나 되었다. 또 말기에는
강제 공출로 공제식량 일부를 제하고 전량을 빼앗겼다(2차대전 당시).
기독교농민운동과 정의·생명 · 공동체·김영원 25
소작인의 고통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도처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났다.
1937년은 이 소작쟁의가 절정을 이룬 해인데 전국에서 무려 31 ,977건이
나 발생했다.
필자가 16세 소년시절, ffikg시나 되는 공출 가마니를 지고 7km나 되는
수납 창고까지 지고 가며 그 고통을 참기 어려워 울면서 지고 갔던 일
은 일평생 잊을 수 없는 한으로 남아있다. 출하명령의 기일에 수납장에
출하 못하면 더 가혹한 벌이나 불이익을 당했기 때문이다.
• 종전 즉, 8.15 이후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미국 잉여농산물을 과다하
게 받아들여 국내농업은 설자리가 없어졌고 천대받는 것이 농산물이 되
고 보니 따라서 농민은 더 천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
• 5.16 박정희 군사정권이 등장하면서 조국근대화의 기치를 내걸고 중
농정책을 포기하고 공업 입국정책을 표방하여 산업예비군을 농촌에서
빼내가야 했기에 저곡가 정책을 써서 농사를 지어서는 살기 어렵게 만
들어 이농행렬을 유도한 것이다.
이것을 호도하기 위해 일으킨 운동이 ‘새마을 운동’이다. 이 운동은 일
제가 한국을 통치할 때 우가끼 총독이 통치수단으로 일으킨 ‘농촌진흥운
동’과 너무도 흡사하다.
군사정권의 저농산물 가격정책으로 생계가 어려워진 농민은 농업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해마다 fi) -ffi만명이 도시로 도시로 병적인 이농
행렬이 이어지면서 농촌은 공동화되기 시작한다.
농업인구동향 통계가 이를 설명해 준다. 1~됐년도 농림업 인구가
55.9%이던 것이 1997년에는 1 1.6%로 감소된다.
• 세계화 시대를 맞아(V,π'0) 농업수탈은 농업의 분업화와 경쟁력 강
화를 내세워 시장경제 원리에 편입시켜 경쟁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우리 농업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싼 농산물의 개방, 의무수입 량 이
행으로 우리의 식량자급권마저 상실 당한 상황에서 농산물 가격파동의
악순환은 농가 부채증가로 이어진다.
@ 농가 부채문제의 해결
19æ년 6월 말 현재 농가부채는 총 28조 8천억원으로써 호당 평균
1 ,없5만원 꼴이다. 그런데 이 부채는 대부분이 기업농(규모농)이 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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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 동안 정부는 수차에 걸쳐 농업구조 개선정책을 집행하면서 규모
화, 시설화 시킨 기업농육성에 재원을 투입했다.
미국 농업을 선진 모델로 하여 국제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시설
화, 경제작물, 기업축산에 투입한 것이다 .
지난 김영삼 정권이 농업구조 개선에 42조원을 투입(실제로 농업부문
에 투자된 것은 14 조원)했다는 것이 참담한 실패작이 되어 지원 받은 기
업농들은 부채상환 능력이 없는 농가가 대부분이다.
금년 말부터 상환 연도가 돌아오는데 그 부채 해결책으로 예산 당국
이 결정한 대책을 보면 1998년 10월부터 1999년 12월말까지 만기가 돌
아오는 정책자금을 갚을 수 있도록 농민은 농협을 통해 2 년 만기 금리
6.5% 융자를 받아 갚도록 돼있다 . 이와 같이 사업을 권장한 정책당국이
자기들의 집행한 정책의 결과, 그 실패의 짐을 농협과 농민에게 떠넘긴
다. 오늘 패권적인 세계무역기구(W1D) 체제 속에 있는 우리 농업의
현실은 농사지어서 6.5% 금리의 빚을 절대로 갚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빚을 쓰는데도 어려운 문제가 있다. 설령 농협 이 융자를 해
준다고 할지라도 융자를 받을 농민이 거기 상응하는 채무 담보물이나
보증인을 확보할 수 없는 것이 농촌현실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과욕을
부린 기업농의 적정규모를 초과한 규모의 확대와 방만한 경영으로 인한
도산 농가도 상당수가 있다.
이와 같이 미국형 기업농은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 불가능한 농업형
태이다. 경지면적과 기후가 크게 다른데도 국제 경쟁력 강화를 말하는
것은 다국적 기업의 농산물 시장 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한 허울 좋은 논
리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이 미국농업을 선진모델로 한 우리의 기업농은 도산의 위기를
맞고 있다 예를 들어 한 구조물이 넘어질 때는 다림줄이 기울어질 때에
일어난다. 다림줄은 정의의 상징이다.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은 기술적
인 문제보다도 경제정의의 부재가 낳은 필연적인 산물이다.
예언자 아모스에게 보여주신 야훼 하나님의 다림줄의 경고는 오늘 우
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 야훼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광경은 이런 것이었다. 누군가 돌담 옆에
기독교농민운동과 정의·생명·공동체 · 김영원 27
다 다림줄을 대어 보고 있었다. 그 때 야훼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아
모스야, 무엇이 보이느냐?’ 내가 다림줄이 보인다고 대답하자 야훼께
서 말씀하셨다. ‘나 이제 다립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한 가운데 드리
웠다 더 이상 이 스라엘을 용서 할 수 없다. 이 사악의 산당은 쑥밭이
되고 이스라엘의 성소들은 폐허가 되리라. 나는 칼을 들어 여로보암
의 나라를 치리라"
야훼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농사꾼인 아모스에게 이런 다림줄의 광경
을 보여 주시면서 그 나라의 운명을 미리 말씀하셨을까?
내게 전광처럼 오는 느낌은 오늘의 국가적 위기는 나라를 지탱하는
다림줄(정의)이 기울어진 데서부터 온 것이다. 줄줄이 터져 나오는 부정
과 비리가 공직사회의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만연된 관행적 풍조가
되었으니 고양이들에게 생선가게를 맡겨놓은 그 가게꼴이 된 것이다.
이제라도 서둘러 농업에 다림줄을 드리우라. 즉 농촌사회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라 교회는 이 정 의운동의 전위대가 되라. 이 것 이 기독교농
민운동의 첫째 과제이다.
생명운동(생명농업운동)
오늘 이 시대의 특정은 생명경시풍조의 만연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
까? 돈이 주인이 되고 인간은 그 수단이 되어 인간의 본성이 황폐화되
고 따라서 생명이 상품화되는 생명경시풍조가 만연된 세상이 된 것이다.
예수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숭을 잃으면 무슨 소용
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고 한 생명의 가치를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가장 설득력있게 설명한 사람은 신학자도, 목사도 아닌 빨
치산이다. 남부군의 저자 이태(李泰)는 “이 세상에 생명을 걸만한 가치
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살기 위해서 생명을 건다. 지휘관은 어떤 목
적을 위해 병사를 사지 에 투입시킨다. 병사는 그 사지를 벗어나기 위해
서 즉, 살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싸운다"라고 말했다. 참으로 진솔한 고
백이다. 이런 죽음의 찰나에서 나는 사상을 위해 죽는다. 나는 그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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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위해 죽는다 라는 소리는 결코 그의 본의가 아닌 거짓임을 느끼게
된다.
고베(神戶)대학의 야스다 시게루(保田흉) 교수는 생명에 관련된 네 가
지 위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핵 또는 군사과학이 이상 비
대화한 사실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언제 이러한 인간의 산물에 의해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상태에 와 있으며 또 둘
째는 환경파괴도 대단히 심각한 상황까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셋째는 인간소외의 문제인데 인간소외라는 것은 인간 사회를 내적으로
파괴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우리의 의식과 마음의 문제임) . 그리고 넷째
는 식량의 문제이다. 식량의 문제는 양과 질의 양연의 위기가 있다. 양
이란 말할 것도 없이 전체의 생산량을 말한다. 또 질이란 것은 여기서는
특히 안전성과 동시에 영양의 문제가 무시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
우리들은 지금 이와 같은 생명의 위기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마치 사상누각과 같은 화려함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지금 진행되고
있는 환경문제, 식 량문제라는 것을 농업 속에서 생각해야 할 필요를 강
하게 느끼게 된다.
나는 이러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유기농업(생명농업)이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나는 이러한 환경보전 문제의 해결과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의 시장구조의 방향을 전환하는 등의 전면
적 궤도수정이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시장구조는 유통
이라는 점에서는 대단히 효율적이며 거기는 인간의 지혜도 활용되고 있
다. 그러나 유통이 효율적이라고 해서 이것이 우리들의 생활이 반드시
진정한 풍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환경 또는 생명이라는 문제는 현
재의 효율적인 시장 속에서는 좀처럼 해결될 수 없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콕명야(觀命也)란 말이 지닌 돗은 곡식 낱알 그 자체가 생명체이며 모
든 생명을 기르는 원천이란 뜻이다. 이 곡식은 농업만이 생산할 수 있
다. 또 농업은 농업환경(토양, 물, 공기 , 미생물, 원생동물, 나무, 잡초 등)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농업이 생산하는 농산물은 환경의 산
물로써 하나의 물건이 아니고 생명의 재생산이다. 그래서 인간과 농산물
과 환경은 분리될 수 없는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농업은 더 이상
기독교농민운동과 정의 생명 · 곰돔체·김영원 29
설명이 필요없는 생명의 농업 그 자체이다.
그래서 생명사상의 근본은 농업이다. 이 생명의 날알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모든 생명체가 유기적으로 연대하고 있는 신비를 농업(유기농)에
서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생명의 질서(창조질서)이다.
그래서 생명이란 생존이라는 삶(生)의 개념으로 이해되며 인간적인 삶
의 유지 에 없어서는 안될 식량을 획득하는 인간의 일상적인 활동올 농
업이라고 볼 때 모든 생명사상의 본류는 농업이 될 수 밖에 없다.
슈마하가 말한 농업의 기본원리는 생명인데 생명있는 물질을 다루는
것이 농업의 기본원리라는 것이다. 또한 농업자체가 그러한 생명체로 존
재하고 있다. 슈마하가 말한 농산물이란 생명의 과정 즉, 생명 성장의
결과이며 생산을 위한 수단은 살아있는 토양이다. 이 토양은 생명의 소
우주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의 질서를 뒤바꿔놓는 것은 물량적인 풍요를 추구하고 보다
더 편리하게 살자는 편의주의 그리고 보다 즐겁게 살자는 쾌락을 추구
하는 산업사회의 가치관이 농업이 인간의 삶의 절대적인 가치임에도 불
구하고 시장경제 구조에서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이와 같이
농업정책이 패권적인 국제질서에 따라 반생명적이고 환경을 파괴함으로
성립되는 공업에 농업을 종속시키고 또 농업 자체를 공업적 농업(화학
농업 )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농업의 위기 즉 생명존재의 위기와 모순은
극치를 이루게 되었다. 경제의 가치와 생명의 가치를 동일선상에서 자본
의 논리라는 잣대로 비교하는 어리석고 무모한 발상에서 생명의 가치가
경제의 가치에 밀려나게 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생명이 상품화 되어버
리고 생명경시의 풍조가 만연된 것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창조사역인 농업이 3D업종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고도 방관한 교회! 산업문명의 가치를 함께 추구한 공
조자가 된 교회! 교회가 이렇게 침묵하며 밀월하고 있는 동안 과학이라
는 신흥종교는 유전자조작으로 재배되는 작물을 만들어 내었고 생명공
학은 생명복제의 작업을 통해 신의 영역을 침범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일
련의 변화가 어떤 결과(재앙)를 불러올지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검
증되지 않은 미지의 사건들이다.
일전 인천 부듯가에선 환경단체 회원들이 미국서 들여오는 유전자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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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으로 재배된 콩의 입항 저지를 위한 시위를 벌였다. 이런 일이 있기
전에 교회는 유전자조작에 대한 신학적 입장이 천명되었어야 했 으며 행
동도 보였어야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과학이라는 신흥종교는 정책과
기업과 과학이 삼위일체가 되어 대기업의 막강한 힘으로 신의 생명창조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인간이 어디까지 생명의 근원에 개입할 수 있는
가? 라는 윤리적인 문제와 생태계 즉 환경에 미칠 창조질서의 혼돈과
파괴, 인간에게 미칠 질병과 돌연변이 , 농작물에 미칠 영향 등 위험성을
내포한 검증되지 않은 미지의 기술 이런 상황 앞에서 하나님의 생명창
조질서의 보전은 농업의 복권이 중요한 과제이다. 그래서 오늘의 기독교
농민운동의 두 번째 과제는 생명운동이다.
공동체 운동
조물주의 창조질서는 모든 피조물이 서로 더불어 공생하는 것이다 공
-생 못하면 파멸이다. 이것은 창조의 신비이다. 생태계는 서로 먹이사슬
로 얽혀 공생한다. 사람도 생태계의 일원으로서만 존재가 가능하다. 모
든 생명체는 공동체이다. 공동체의 적은 서로를 갈라놓는 독재와 독점이
다. 독재와 독점이 있는 곳에 공동체문화는 피어날 수 없고, 생명문화는
질식되고 만다. 그래서 공동체 문화는 민주화의 토양에서 피어난다.
빈들에서 외친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듣고 충격을 받은 군중들이 고
민하며 방문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 세례자 요
한의 대답의 요지는 독점과 독재를 중지하고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누
어 먹고 부리는 자가 되지 말고,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 (누가
3장 9-14절) 여기에 더불어 사는 공생이 었다.
교회는 공동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공동
체의 과제들이 없다. 다만 종교가 지닌 상징적인 이념을 공유하는 것으
로 공동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쓰고 있는 것 같다.
공동체를 지향하는 기독교농민운동의 공동체의 개념과 몇가지 과제를
제시해 본다.
@ 대가족제도의 부활
기독교농민운동과 정의 생명 · 공동체·김영원 31
대가족제도는 공동체의 원형이다. 핵가족제도 속에서 자녀 하나를 낳
아서 잘 기른다는 것은 그 ‘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한 솥에
밥을 먹는다는 것, 이것이 생명과 삶의 냐눔이다. 이렇게 혈연공동체는
온 식구가 서로의 관계속에서 더불어 사는 삶의 이치를 터득한다. 산업
사회가 대가족제도를 와해시켜 버린데서 공동체의 개념은 사라지고 개
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사회가 된 것이다.
@ 기초공동체 건설
교회를 단위로 하는 기독교농민회는 그 마을 전체를 변화시키는 근간
이 되는 조직으로서 소속회원 하나 하나가 먼저 변화되어 창조적이고
자주적인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신앙이 삶으로 승화되는 실천을 통해서
농촌과 교회, 그리고 사회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전위대가 된
다. 각종 교육 프로그램과 실천과제를 통해 기초공동체를 공고히 다진
다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그 지역의 여타 공동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
지면서 사회현상과 부단히 갈등과 조화를 이루면서 통일되어 간다.
@ 지역공동체 건설(촌락공동체)
근대화는 촌락공동체를 분해해 버렸다. 핵가족 또는 할아버지, 할머니
를 포함한 가족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이웃이라는(이웃사촌) 촌락공동체 ,
이것은 보수의 대명사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오히려 지향해야 할 공동체
의 형태이다. 지역공동제의 의미는 이웃과 함께 산다는 것으로 이해된
다. 공동체는 이웃의 필요, 사정, 아픔, 어려움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이
것을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오랫동안 우리 농촌은 마을이
하나의 생산공동체, 생활과 소비의 공동체, 외부에 대한 방어의 공동체
로서 나름의 의식과 생활양식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공동체 문화가 존재
해 왔다. 우리 농촌, 농민들 속에 있는 공동체 의식은 두레나 품앗이와
같은 생산에 있어 서로의 필요에 부응하는 생산공동체와 농로, 수리시
설, 마을소유의 임야, 마을소유의 전답 등 공유의 재산의 공동관리, 길흉
사간의 상부상조 등 함께 연대해서 더불어 살아왔다. 이것이 촌락공동체
의 원점이다. 여기서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모든 제도와 문화와 도덕의
기본이 된 것이다. 이 공동체의 기본에는 쌀농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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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근대화의 급속한 변화의 물결 즉 외형환경의 변화와 식민지적
농업, 그리고 도시소비문화에 의한 가치관의 변화는 촌락공동체 를 분해
해 버렸다. 촌락공동체의 붕괴는 민족공동체를 와해시킨다. 민족의 뿌리
와 전통이 이 촌락공동체를 통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촌락공동체의 건설로 이웃을 새롭게 발견하고 예식장 문화에 빼앗긴
마을의 잔치를 부활시키고 서로 도우며 일하는 즐거움을 회복해야 한다.
@ 생활공동체 건설(농도곰동체)
도시와 농촌은 대립관계에 있다. 그 대립관계가 점점 심화되어 간다.
농산물 값이 쌀수록 좋다는 도시인의 생각과 농산물 값은 생산비가 보
장되어야 된다는 농민의 생각의 차이에서 심화되는 악순환이다. 따지고
보면 도시와 농촌 즉, 소비자와 생산자는 공생해야 할 소중한 이웃이다.
그런데 공생해야 할 이웃이 없어진 것이 오늘의 비극이다. 농산물을 시
장경제에 편입시켜 하나의 상품으로만 취급하는 한 이 대립의 관계는
개선될 수 없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기독교윤리의
최고의 가치인데 그 계명은 우리 삶 속에서 이미 설자리가 없어 졌고 하
나의 주문처럼 되고 말았다. 신앙양심과 기업양심, 신앙양심과 농심도
별개의 것이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마비된 도덕성의 회복의 길은 오직
생활공동체의 건설이다.
생활공동체의 구체적인 과제의 하나로서 농 · 도간의 농산물의 직거래
이지만 이는 단순히 농산물 유통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을 매개물로
한 공생의 관계를 만들어 서로의 생명과 건강, 그리고 생활을 책임지는
것이다. (생명공동체로) 이것을 생활신앙이란 말로 표현해 본다. 현재의
우리의 사고와 생활관행이 신앙과는 무관한 것이 되어 소비자는 생산자
의 어려움은 나와 무관한 것이 되어 있고, 생산자는 소비자의 건강과 생
명을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대로는 모두가 파국으로
간다. 인간이 자연과 공생하는 기초위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인간
다운 기품을 가질 때 비로소 농 · 도 간의 공동체적 삶이 가능해진다. 이
공동체가 이 땅에 임하게 해 달라고 날마다 기도하는 주님의 기도의 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닐까?
정의운동, 생명운동, 공동체운동은 오늘의 모순을 극복하고 위기에서
기독교농민운동과 정으1 . 생명 · 공동체· 김 영원 33
구원되는 길이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계속된 독재, 독점, 패권적인 국제
질서 , 무한경쟁으로 모두가 병이 들었다. 사람도, 자연도, 사회도 모두
병이 들었다. 사람의 건강과 사회의 건강은 꼭 같다. 사람도 자연과 조
화를 이룰 때 건강하고 한 사회의 건강도 정의, 평등, 균등으로 조화로
운 상태를 이룰 때 건강하고 평화로와 진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모든
부문에서 균형과 조화가 깨어져서 인간도, 자연도, 사회도 병이 들어 만
신창이가 되었다 오직 경쟁에서 이긴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무한경쟁,
피폐적인 도시소비문화는 인간의 정신과 삶을 황폐화시켰으며 풍요와
편리와 쾌락을 가치로 추구하는 산업사회는 생존환경의 파괴와 인간의
정신과 육체 모두를 병들게 만들었다. 권력이 소수에 집중되고 경제력이
소수에게 독점되어 정치권력과 경제력의 유착이 드디어 IMF 경제신탁
통치를 불러들였다. 21 세기에 전개될 기아의 시대를 예견하면서 이와 같
은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하나님의 생명
창조사역인 농업의 복권을 위해 기독교농민운동은 정의를 세우는 운동,
생명을 살리는 운동, 그리고 더불어 사는 생명공동체를 건설하는 운동을
하나님이 명하신 이 시대 기독인의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운동은 생명있는 자의 생명이 생명답게 살게하는 본능적이며 자연적
인 자기표현이다. 그런데 그동안 독재정권과 그 추종자에 의해 사전(事
典) 에도 없는 말 ‘운동권’으로 불순시하고 매도하고 탄압했다. 이유는 비
판과 모순의 시정을 위한 저항을 했기 때문이다. 반면 찬성만 하고 지지
만 하는 관제운동은 애국행위로, 투철한 국가관으로 칭송, 지원했다. 다
시는 이런 비극과 치용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 책임이 오늘을
사는 기독인의 몫으로 주어졌다.<끝>
김영원 장로는 경북 의성 효선교회의 교인으로 기독교농민회 회 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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