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원천은 결코 외부의 무언가에 있지 않다. 행복의 원천은 자신임을 인정해야 에너지 장이 비로소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한다. |
그러면
우울과 낙담에서 벗어나
두려움을 직시하게 되고,
자신에게 더 나은 무언가를 열망하며,
어떤 대상의 상실이 아닌
희생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이때 사람들은
보통 무수한 합리화 방식과 변명으로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분노의 바탕에는
행복의 원천을 외부에 두는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한층 깊은 차원에서 보면
자신의 원칙을 버렸다가
결국은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데 분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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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를
되살펴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우울증의 치료법과 실체를
이 세가지 차원 모두에서 다룰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에는
자신을 경험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다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몸은 자신의 몸성이나 오감을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다.
마음속에서 경험돼야 한다.
그런데 마음에도 스스로를 경험할 능력은 없다.
기억과 생각, 느낌, 미래에 대한 꿈, 백일몽 모두 더욱 크고 확산적인 장
즉 의식이라 부르는 에너지 장에 기록되고 여기서 경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의식도 자각이라는 더욱 큰 장에서 경험되어야 한다.
자각은 의식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게 해준다.
이처럼 의식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음은
몸의 오감은 물론이고 감정과 느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이모든 과정은 의식자체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힘이 가장 강한 최고 단계에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의식 장의 변화가 몸의 변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우울증을 이야기할때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는
바로 두뇌와 두뇌 호르몬, 신경전달물질들 그리고 몸의 생리다.
우울증의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다시 의식지도를 참조해보자.
의식지도는 0에서부터 시작해 아주 고차원적인 기쁨의 단계를 넘어
흔히 말하는 깨달음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단계를 보여준다.
지도를 보면 의식단계들 안에서
에너지 장들의 방향이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다.
이 화살표는 우리가 무언가를 삶의 긍정적인 자산으로 경험하고 있는지 아니면
부정적이고 해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나타낸다.
지도의 가운데 부분에는 200의 에너지 장을 지닌 용기의 단계, 진실의 단계가 있다.
200미만의 에너지 장들은 부정적인 반면 200이상의 장들은 위를 향한다.
생명을 지지해 주는 에너지 장들이라는 의미다.
지도의 아랫부분에 있는
죄책감과 무감각, 슬픔의 장들을 시작으로 인간의 경험을 다시 살펴보자.
이 장들은 자기혐오와 자기질책,가맘없음, 낙담같은 감정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리고 모두 후회와 상실감, 우울등을 동반한다.
이 우울한 에너지 장들에서 세상을 죄와 고통이 가득한 슬프고 가망없는 곳으로 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러하므로
자연히 신도 우리를 무시하는 냉담하고 무정한 존재,
우리와 분리되어 있는 존재라고 여긴다.
죄책감과 스스로 무가치하고 죄 많은 존재라는 느낌탓에
신도 인간처럼 부정적인 특징을 지닌 존재로 상상하는 것이다.
낮은 에너지 장들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작용을 살펴보면
맨 아래 수치심의 단계에서는 위축작용이 일어난다.
바로 위 죄책감의 단계에서는
의기소침 작용이 일어나 생명에너지와 삶의 의욕이 없어진다.
또 무감정 상태에 있을때 의식속에서 에너지의 상실작용이 일어난다.
내면의 생명에너지를 잃어버려서 우주로부터 더이상 에너지를 끌어당기지 못한다.
이런 무전력 상태는
파괴적인 자기혐오와 죽음 직전과 같은 낮은 의식상태들을 불러온다.
소극적인 자살은 흔히 이런 상태에서 일어난다.
이제 적극적인 자살과 소극적인 자살을 살펴보겠다.
이런 자살은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어떻게 다뤄야 할까?
이런 자살들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전인류적 병인 이 우울증의 전체 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의식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까?
용기 아래의 에너지 장들은 모두 부정적인 방향을 향한다.
그리고 이 부정적인 감정들은 단독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부정적인 감정은 일반적으로 다른 감정까지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울속에는 자기비난과 자기혐오, 무가치한 존재라는 느낌도 들어있다.
이런 느낌들은 가망없음이나 절망의 단계와 연관이 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생기고
죄책감과 분노의 감정도 흔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흔히들 우울을 내면을 향한 분노라고 말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심리치료에서는
우울증에 동반되는 분노 에너지를 불어넣어 위로 끌어 올린 다음
분노의 근원을 찾아보라고 권한다.
그러면 분노와 우울이 마음과
마음에서 일어난 똑같은 오류에서 비롯됐음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노와 두려움, 슬픔, 무감정 혹은 죄책감을 들여다보았을때
어떤 같은 오류를 발견할까?
그 오류는 바로 자기 외부의 무언가에 생존을 의지하는 것이다.
모든 부정적 에너지 장은
행복의 원천을 외부에 두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태도는 우리를 상처를 잘 받는 나약한 존재로 만들고
구제불능의 희생자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희생자가 된다는 것은 원인이 외부에 있다고 인식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행복의 원천이 외부의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우울증에 걸려들 취약성이 존재한다.
인간의 의식에는 외부의 무언가에 행복을 의존하려는 나약함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나는음 학위를 얻으면 성공해서 행복하게 살거야.
나는 그 외국어를 배우면 그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 그 모피코트를 사면, 새차를 사면, 대학원 학위를 따면, 그녀와 관계를 맺으면, 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고모가 술을 끊으면, 회사가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면,
그러면 성공할거야라고 말한다.
언제나 저기 바깥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이렇게 행복의 원천을 외부에서 찾으면 우울과 불안, 두려움에 빠지기 쉽다. 무언가를 상실했을때도 영향을 쉽게 받는다.
행복의 원천이 자신임을 인정해야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넘어선 독자적인 경험자가 자신임을 인정해야만
우울한 사건들에 영향받지 않는다.
의식지도를 볼때마다 다른 시각으로 다른 문제를 집중해서 본다.
이렇게 한층 폭넓은 시각으로 다른 맥락에서 접근하면
인간의 본질을 달리 이해하게 된다.
의식의 단계들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방향을 향하는데
중간에 있는 용기의 단계에서 결정적으로 그 방향이 갈린다.
이 용기의 단계로 올라가려면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진실은 바로 "나의 행복은 외부의 어떤 것에도 좌우되지 않는다.
나 자신의 내적인 결정과 진실성, 의도, 나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삶의 사건들과 관계맺는 방식을 통해 나 스스로가 내 행복의 원천이 된다"라는 것이다.
지도의 맨 아래부분에서는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는 생각이 최고조에 이른다.
이런 상태에서는 행복의 원천을 전적으로 외부에 둔다.
이처럼 행복의 원천을 상실한 탓에 자기비하와 자기혐오에 빠진다.
외부의 것이야말로 사랑할 만한 것이라고 보기때문에
자기안에는 사랑할만한 것이 전혀없다고 여긴다.
가망없음과 절망의 무감정 단계에서는 에너지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 이른다.
보통 무반응 상태로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기도 한다.
어떤식의 소통에도 묵묵부답이거나 말을 아예 못한다.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못자고 세상에서 제구실도 못한다.
이런 심각한 우울증은 뇌의 생화학적 작용에도 원인이 있다.
그런 이유로 삶을 슬픈 것으로 미래는 가망없는 것으로
자신은 공허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본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연히 신도 자신에게는 신경도 안쓰고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전혀 없고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임상 경험을 놓고 볼때
절망과 무력감으로 가득한 세가지 낮은 상태
즉 일반적으로 의기소침하고 우울하다고 말하는 상태는
그 위에 있는 두려움의 에너지 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결과다.
의미의 상실이 우울을 불러와 저변의 두려움을 직면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행복의 원천이라고 여기는 외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다.
대학학위가 아니라 이 학위에 부여하는 의미가,
관계가 아니라 이 관계의 의미가 문제인 것이다.
회사 사장이라는 직위나 명함, 경제적인 성공, 번듯한 집이 아니라
이것들에 부여하는 중요성과 가치가 문제다.
어떤 대상에 투사하는 것이나 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이 대상에 부여하는 의미가 달라진다.
이 대상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그냥 이것일 뿐이다.
의미는 우리가 밖으로 투사시킨 정신적 구조물일 뿐이다.
이런 투사를 통해 우리는 어떤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가치는 외부의 무언가에 투사된
우리자신의 정신적, 감정적 가치에서 생겨난다는 말이다.
이런 투사로 자신이 행복의 원천과 분리되어 있다고 본다.
역 내가 있고 저기 나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내외부의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것과 재결합하면 저것을 가지면, 저것을 통제하면 내면의 결핍감과 분리감이 치유되리라는 착각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면 무의식적으로 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런 우울한 상태에서 바라보는 신은 행복의 원천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존재다.
이런 우울에서 벗어나려면 저변의 두려움을 직시해야 한다.
이 두려움은 무엇일까?
앞에서 어느 여인의 실화를 이야기했다.
이 여인은 아들이 전사했다는 전보를 받고 안락의자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면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몇주 후 오류가 있었으며 아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전보가 다시 도착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아무리 얘기해줘도 그녀는 여전히 몸을 앞뒤로 흔들며 창문만 바라보았다. 가족들이 여인의 몸을 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엄마, 엄마, 제말 안들려요? 조이가 죽은게 아니래요. 건강하게 살아있다고 해요"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멍하니 앉아 의자를 앞뒤로 흔들기만 했다.
무언가 심각한 일이 벌어진게 분명했다. 그녀는 아들과의 관계가 행복의 주요한 원천인 에너지 장에 사로잡혀 있었다. 홀어머니였던 탓에 아들과의 관계를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심각한 일이 벌어져 그녀의 에너지 장이 두뇌의 화학작용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이 경우 두뇌의 화학작용이 변한 것은 결과다. 삶의 의미를 상실한 탓에 에너지 장이 두뇌의 화학작용 차원에서 스스로를 표현한 것이다.
모든 일은 몸과 마음,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 이 여인은 영혼의 차원에서는 삶의 의미를 상실하면서 신과 분리되어 버리고 말았다. 마음의 차원에서는 아들과의 중요한 관계를 잃어버렸고, 몸의 차원에서는 두뇌의 화학작용에 변화가 생겼다. 신경전달물질들이 소실되거나 변화한 것이다. 두뇌도 우울한 상태에 빠지면서 두뇌의 특정 영역에서 필수 신경전달물질들이 침체되었다. 이런 신체적 차원의 증상들은 항우울제 복용으로 개선할 수 있다.
우울증을 치료할때는 모든 차원을 동시에 다루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먼저 대화를 통해 말을 시키다 보면 환자는 자신이 무엇에 의미와 중요성을 두었는지 발견한다. 또 삶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외부적인 것들을 어떻게 내적인 공허를 메워왔는지도 살펴보기 시작한다. 외적인 것으로 내면의 공허를 채우는 이런 과정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심리적으로 이런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살펴보는 동시에 신체적인 차원에서도 이것을 다뤄야 한다. 390-391
오늘날 이용할 수 있는 항우울제는 아주 효과적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우울증은 항우울제를 통해 약리학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안전하다. 그러나 아이들과 사춘기 청소년들은 면밀한 임상관리를 병행해야 한다. 약리학적으로 항우울제는 의식지도에서 맨아래부분에 있는 환자들을 한결 높은 차원으로 이동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 우울증 환자도 심리치료나 영적 상담에 반응해 자신들을 취약하게 만든 우울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우울증의 양상이 무감각에서 격정으로 변할때는 신경정신과 약이 자살 위험성을 부추기지는 않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우울 저변의 두려움을 직시하면 우울증은 완화된다. 이때의 두려움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는데, 다른 무엇으로도 이것을 대체할 수 없을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희망이 없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삶에 활력과 의미를 불어넣어줄 의미가 있고 소중한 환경을 재창조하리라는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물론 착각이다. 하지만 우울증에 걸렸을때는 이런 가망없음을 토대로 삶과 자신을 인식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치료할때 우리는 환자가 무엇을 상실했는지 살펴본다. 예를 들어 일자리를 잃었는지, 활력이나 젊음 혹은 기회를 잃었는지 확인한다. 중년이 되면 쉽게 우울해진다. 삶이 휙 지나가버린 탓에 기회를 놓쳤다고 느낀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람은 젊어 보이는 외모를 상실했을때 자기 가치에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도 변화를 겪는다. 세상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의 토대로 외모를 두었을 경우 외모의 상실은 자만심 같은 피상적인 문제에 머물지 않고 엄청난 위험으로 다가온다. 외모는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외모는 스스로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전부였다. 자신을 소중하고 가치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아름다운 외모였던 것이다.
기저의 두려움을 발견하면 환자에게 이 두려움을 기꺼이 직시하게 한다. 두려움은 미래와 관련된 것이므로 우울해하는 대신 두려움을 다루어야 한다.
이거야 말로 제 삶의 의미를 만들어주는 건데 이것없이 어떻게 살죠?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생존의 근거를 외부의 어떤 것에 두는데 중독되어 있다.
중독되어 있는 사람에게서 생존과 행복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 약을 빼앗으려 하면 공포감을 드러낸다.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순전한 공포다. 이 약이 없으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내면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자가 두려움을 직시하게 하고 임상실험 결과 두려움을 다뤄 주는 것으로 밝혀진 기법들을 실행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392-393
그런 다음 자발적인 의지를 통해 두려움과 함께하고 두려움에 딱지를 붙이는 일을 그만다고 생각을 멈추게 한다. 그 대신 자신이 두려워한다는 것을 주시하면서 일어나는 것들을 정확히 경험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두려움을 주시하고 내면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일의 근본적인 진실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두려움에 기꺼이 순응하고 두려움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감각들이 온몬을 관통해 흐른다.
이때 환자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진다.
"몸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있지요?
입이 바싹 마릅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아요. 위가 뒤집어지는 것 같고요. 서있기도 힘들만큼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느낌들을 하나하나 놓아버리게 한다. 좋아요 다리에 힘이 없다고 했죠. 이 느낌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으세요. 이 느낌을 그냥 경험하고 이 느낌과 함께 하세요. 저항을 멈추세요. 두려움이라 명명하지도 말고요. 그냥 느껴지는 대로 느껴보는 것입니다.
뭐가 느껴지나요?
다리가 쑤시는 느낌이 납니다. 그러면 다시 이렇게 묻는다. 다리가 쑤시는 느낌을 다룰 수 있겠어요? 당신은 두통도, 중요한 수술도, 가족의 죽음도 잘 겪어 냈어요. 다리가 쑤시는 느낌도 분명히 잘 다룰 것입니다.
환자가 그럴수 있다고 하면 이렇게 말해준다. "다리의 쑤심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으세요.
위가 뒤집어지는 것 같은 느낌은 어떤가요?
그것에 대한 저항도 내려놓을 수 있겠어요?
일어나는 일을 그냥 경험하고 저항을 내려놓으세요. 좋아요. 이제 더 위로 올라가보죠.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은 어떤 가요?
마음속으로 이 느낌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을 수 있겠어요?
두근거리고 싶으면 그냥 두근거리게 두세요.
입술이 마른 것은 어떤가요?
그러다 보면 환자는 이렇게 말한다. 네 그건 다룰 수 있어요. 그른 느낌은 다룰 수 있어요. 하지만 두려운 생각들은 어쩔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두려운 생각들을 다룰 수는 없다. 그리고 두려운 생각들을 일으키는 일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두려운 생각들은 스스로 무수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숱한 두려운 생각들을 다스리고 나면 다른 두려운 생각들이 완전히 새롭게 또 일어난다.
"비행기 시간에 늦을지도 몰라. 비행기를 못탈지도 몰라. 난 비행기 타기가 두려워, 비행기에 무슨 사고가 날지 몰라" 마음은 이처럼 두려움들을 줄줄이 창조해낸다.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은 바싹 마른 입술과 쑤시는 다리다. 그러면 저변의 두려움을 직시할 수 있는 자발적인 의지가 생겨난다. 이때 가장 먼저 받게 되는 이득은 우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오 저는 우울하게 아니에요. 미래가 두려웠던 것이에요. 제가 원하고 열만하고 욕망했던 것들을 얻지 못하면 행복을 발견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했어요. 살아남고 행복해지려면 그것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지요." 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394-395
이런 확신으로 다량의 알코올이나 마약을 복용해온 사람들은 사실 지구상의 다른 사람들처럼 생존을 위해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버리고 모든 두려움을 직시하고 나면 생애 처음으로 삶이 기쁘고 완전하며 충분하고 즐거운 것임을 깨닫는다. 알다시피 두려움을 착각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아이의 손을 잡고 인도해주듯 두려움을 직시하도록 환자를 용감하게 이끌어 주어야 한다.
어린시절 이웃에 사는 몇상 위 아이가 내게 귀신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머니는 귀신이나 유령같은 것은 없다고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너무 그럴싸하게 들리고 그 아이가 정말로 귀신을 잘 아는 것처럼 굴어서 난 귀신이 두려웠다. 그러자 어머니가 내 손을 잡더니 손전등을 들고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데려가 정말로 귀신이 있는지 샅샅이 훓어보게 했다. 물론 지하실에 귀신같은 것은 정말 없었다. 벽장이나 커튼 뒤, 다락을 포함해 집안 어디에도 귀신은 없었다.
두려움을 직시할때는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게 좋다. 겁을 먹은 건 우리 무의식 속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의 아이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실제 삶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불쑥 등장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아 그게 없으면 나는 살아남지 못할거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울은 흔히 내부를 향한 분노와 같다. 이 분노의 원인은 무엇일까? 중독자처럼 외부의 무언가에 자신의 생존을 의지하는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그에게서 술병이나 약을 빼앗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리려 하면 그는 분노를 터뜨린다. 분노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제 확실히 알것 같지 않은가? 분노의 원인은 사실 행복의 원천이 외부의 어딘가에 있다고 보고 사람이나 사물, 장소같은 외부 대상에 행복을 의지하는 잘못된 생각에 있다. 이처럼 행복의 원천을 외부대상에 두면 이런 생각이 근본적으로 거짓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에너지 장이 형성된다.
행복의 원천은 결코 외부의 무언가에 있지 않다. 행복의 원천이 자신임을 인정해야 에너지 장이 비로소 긍정적인 방향을 향한다. 그러면 우울과 낙담에서 벗어나 두려움을 직시하게 되고, 자신에게 더 나은 무언가를 열망하며, 어떤 대상의 상실이 아닌 희생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이때 사람들은 보통 무수한 합리화와 변명으로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려 한다. "그들이 이것을 약속했어. 계약서에 싸인을 했다고 그래놓고 전혀 쓸모없는 수표를 보낸거야." 사람들은 분노의 근원을 언제나 외부로 돌리고 변명과 세세한 설명, 사건들로 자신의 분노를 합리화한다.
이런 분노도 자신의 취약성에 대한 분노로 전환하면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면 된다. 이제 진짜 원인에 분노해야 할때다. 진짜 원인은 자라는 동안 이런식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교육받은데 있어. 올바른 사고방식이라고 배운 것들이 진짜 원인이지. 우리가 정말 분노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들이다. 396-397
요컨대 우리가 배운 것은 우리를 잠재적인 희생자로 만들어 버리는 사고방식이다. 외부의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행복의 원천이라고 배운 것이다. 성공이 행복의 원천이라는 착각이야말로 이런 사고방식이 투사된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정말로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 줄까?
백만장자들이 사는 대서양 연안의 동네근처에 살았던 적이 있다.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가끔 자살을 하거나 마약을 과다복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인간의 취약성에는 전혀 면역력이 없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유명인사가된다고 면역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분노해야 할 것은 자신을 저버리게 만들고 그 방법들을 가르쳐 준 것이다 .제대로 분노하고 나면 이런 사실을 기꺼이 직시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용기의 단계로 올라가 진실을 말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은 우리 의식안의 무언가가 우리를 취약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스스로 책임을 지기 시작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을 바라보는 나의 방식이 이런 우울과 좌절, 분노를 낳았어 낙담과 실망도 마찬가지야." 그러나 이것을 용감하게 직시하고 진실을 기꺼이 말하면 이제 문제 전체를 바라보는 방식이 변한다. "음, 괜찮아.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교육받아도 나 역시 이런 세상에서 자라났어도 상관없어 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배웠을거야. 하지만 난 이제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거야."
그러면 자발성의 단계로 올라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 , 이 점을 직시할거야. 내 의도는 분명해. 적어도 이 문제를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볼 거야. 호의적인 세상에서는 신도 희망을 주는 긍정적인 존재일 것야. 다시 말해 이 특정한 상황에서 내게 이득이 주어질 것야. 뿐만 아니라 평생 지속될 이득도 얻게 될거야. 이 문제를 풀면 내 안에서 언제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될테니 말이야."
이렇게 문제를 기꺼이 직시하고 발견한 사실들을 받아들이면 내면에서 어떤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데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된다. 또 무언가 주의를 기울일 점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우울증이 일어났다는 것도 믿게 된다. 우울증은 마치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다. '무언가 고장났어. 내 마음의 의식, 나의 영적인 영역에 무언가 잘못된게 있어. 통증이 전하려는 말도 이것이다. 제발 날좀 봐줘. 뭔가 잘못됐어.
우울증을 약물로 치료하면 일시적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자신의 본질에 대한 사고방식, 세상이나 우주와 관계맺는 방식 혹은 기대를 바꾸지 않으면 취약성은 똑같은 상태로 남는다.
물론 항우울제 복용만으로도 우울증에서 회복되는 사람들은 많다. 반면에 유전적으로 두뇌의 화학작용에 뿌리깊은 문제가 있어서 우울증이 쉽게 악화되는 사람들도 있고, 환경을 완전히 바꾸지 않을 경우 병이 재발하는 이들도 있다. 의식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릴 취약성은 그대로 남는다. 그러므로 심리적인 요인때문에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 되풀이해서 우울증으로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398-399
몸과 마음, 영혼을 통합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통해 심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우울증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 수용은 자신에 대한 비난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판단의 시나리오에 걸려들지 않고 내면에 깔려있는 프로그램을 직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프로그램에는 잘못이 아무것도 없다. 단지 효과가 없을 뿐이다.
우리는 부모에 의해 이 세상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교육받고 정립되었다. 부모 역시 그런식으로 생각하도록 교육받았다. 그들은 단지 우리에게 그 방식을 불려주었을 뿐이다. 오래전 성서시대부터 이어져 온일이다. 기록을 보면 성서시대에도 아주 심각한 우울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울증은 우리가 물려받은 집단의식속에서 일어난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집단의식속에는 행복과 행복의 원천이 외부에 있다는 프로그램이 똑같이 들어있다.
진실을 말하고 직시하겠다는 자발성을 갖고 310의 단계로 올라가면 이 에너지 장의 힘을 확인하고 수용의 단계에 들어선다. 여기서 에너지 장은 부정적인 성격이 아닌 긍정적인 성격을 지닌다. 용기 이상의 단계에서는 행복의 원천을 외부의 것에 투사하는 일을 멈추기 때문이다. 덕분에 자신의 힘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용기의 단계는 진실을 말하고 상황을 직시하고 이겨내며 다룰 수 있는 자발적인 의지가 있다.
수용의 단계로 올라가면 자신감이 생기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행복의 원천이 자신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감정과 정신, 영혼의 성숙을 통해 자신의 삶에서 행복의 원천이 바로 자신임을 깨달은 것이다. 남태평양 어딘가의 낮선 섬에 데려다 놓고 1년 후에 다시 가보면 이런 사람은 아마 코코넛 농장을 운영하거나 대나무로 플롯을 만들거나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거나 원주민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원주민 배우자를 만나 나무로 집을 짓고 스스로 주변에 자기만의 세계를 재창조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자기 행복의 원천이 자신임을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분노의 바탕에는 행복의 원천을 외부에 두는 태도가 자리잡고 있다. 한층깊은 차원에서 보면 자신의 원칙을 버렸다가 결국은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 데 분노하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작동을 허용했다가 결국은 이것이 효과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이 효과가 없음을 기꺼이 인정하고 직시하고 변화하면 이렇게 말하게 된다. '좋아 그러면 정말 순식간에 효과적인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우울에서 벗어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일어난 일의 진상을 기꺼이 주시할 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어난 일의 진상을 받아들이고 행복의 원천이 자신임을 깨닫고, 이 원천을더 이상 외부에 맡기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이 힘을 다시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감이 불현듯 되살아난다. 400-401
그러면 저기 바깥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진실을 깨달으면서 이제는 결핍감이나 취약성을 드러내는 대신 훨씬 전체적이고 완전한 방식으로 자신을 경험한다. 자신이 행복의 원천이며 행복을 창조할 힘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식한다. 바로 이런 점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고기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독일 수 있다고 말한다. 똑같은 일도 누군가에게는 행복을 주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우울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돈버는 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본적 있다. 이들의 가치체계안에는 돈이 없다. 가난을 가치있게 여기기 때문에 복권에 당첨되는 것이 이들에게는 오히려 골칫거리다. 이처럼 복권당첨도 어떤 사람에게는 기쁜 일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죄책감만 안겨준다. 왜 그럴까? 삶의 의미를 다른 곳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미를 창조해내는 것은 무엇 혹은 누구일까?
누가 혹은 무엇이 외부의 것에 힘과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일까?
의미의 창조자는 바로 우리다. 무언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를 선택하는 것은 바로 우리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의식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태도를 주시해애 한다. 또 자신도 모르게 프로그래밍한 가치들을 직시하고 이렇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정말로 이 가치들에 공감하는가?
이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가?
이렇게 취약한 태도를 기꺼이 받아들일 마음이 정말로 있는가?"
그러고 나면 자기내면의 설정방식을 직시해서 내면의 프로그램을 다시 구성하고 삶의 환경을 재정립할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인식이 일어난다. 그 선택권과 힘이 오로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내적인 기쁨을 경험한다. 이처럼 의미를 설정하고 이 의미들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바로 우리자신이다. 따라서 실망과 슬픔, 고통, 분노에서 벗어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일어난 일을 무심하게 들여다보고, 내면의 자기를 다시 경험할 수 있다.
발병기간이 아주 짧아도 우울증속에는 실제로 기쁨의 가능성도 들어있다. 우울증은 삶속에서 떠올라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날 봐! 보라고!' 바로 이 오류 때문에 그 숱한 시간동안 고통과 아픔을 그낀거야. 이 오류가 앞으로도 끝없이 아픔과 고통을 가져달 줄 거라고" 자신이 취약한 존재가 아님을 인식하면 내적인 기쁨과 고요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 반면에 임싱학적으로 현재 우울증을 앓고 있지 않아도 자신이 취약한 존재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면 신적인 평화라는 놀라운 상태는 경험하지 못한다. 자신이 어떤 것과도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고 신과 함께 함을 인식하는 그 놀라운 상태에는 이를 수 없다.
그러면 영혼이라 불리는 것을 이 미묘한 앎의 상태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이런 경험은 삶의 커다란 비극 속에 주어지기도 하고 사소한 실망들로 경험할 수도 있다. 모든 일들 속에는 언제나 진실의 씨앗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의식 이면의 진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영혼은 언제나 현존하므로 고차원적인 기쁨의 순간이든 우울한 순간이든 언제나 발견할 수 있다. 선불교에서도 천국과 지옥이 십분의 일인치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한다. 402-403
앞에서 나의 개인적인 경험들도 이야기하고 나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도 입증했다. 내게도 물론 지옥구덩이에서 발버둥치는 것처럼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극도의 우울로 고통받던 시기가 있었다. 이 완전한 절망의 상태에서는 시간이 멈춰 말 그대로 억겁의 시간 동안 우울증이 계속될 것 같았다.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있을때는 시간에 대한 경험이 달라진다. 매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억겁의 시간속에 희망은 전혀 없다. 실제로 여기들어온 이들은 누구나 희망을 전부 버린다라는 표지판만 있을 뿐이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가장 깊은 지옥속에 있는 것만 같다.
단테 신곡의 지옥
# 상옥 : 1~5옥
# 하옥 : 6~9옥
제 1층 : 림보(변옥) - 세례받지 않은 선한자가 가는 곳, 형벌은 없으니 신은 볼 수 없음.
제 2층 : 색욕 지옥 - 색욕에 빠져 강간을 저지른 자들이 가는 곳. 시도때도 없이 폭풍에 휩쓸려야 함
제 3층 : 폭식 지옥 - 폭음, 폭식에 빠진자가 가는 곳. 더러운 비를 맞고 흙탕물에 누워 신음하는 곳
제 4층 : 탐욕 지옥 - 탐욕스러운 자가 가는 곳, 자신이 모았던 커다란 돈주머니를 굴리는 형벌
제 5층 : 분노 지옥 -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죄를 저지른 자들이 가는 곳.
제 6층 : 이단 지옥 - 이단자들이 가는 곳, 죄인들은 뜨거운 관속에서 신음
제 7층 : 폭력 지옥 - 폭력을 휘둘러 자신, 타인, 신과 자연을 해친 자로 나누어 고통받음
제 8층 : 사기 지옥 - 사기로 주변사람을 파멸로 몰아 놓은 자가 벌을 받는 곳
제 9층 : 반역 지옥 - 국가, 가족, 친구, 스승, 은인 등을 배신한 자들이 가는 곳으로 차가운 얼음 형벌.
루시퍼가 사는 곳
그러나 이 끝없는 고통과 괴로움에서 사랑과 신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되고 버려진 것 같은 느낌에서 벗어나면 갑자기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신이 있다면 신에게 도움을 구해보는 거야. 이 깊고도 진실한 내려놓음의 순간에 고통의 구덩이에서 영원한 사랑의 무한한 현존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진실에 대한 무언의 깨달음을 체험한다. 자아/에고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 마음은 말없이 큰나 속으로 사라진다. 다른 글에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이런 경험은 중요한 변화의 전조다.
자신을 치유한다는 것은 자발적인 의지로 자신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 자신의 취약성을 직시하고 이것을 인간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약함과 어리석음, 실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을 사랑하고, 아무리 잘못됐어도 이 인간적인 모습안에 태고의 본질적인 순수가 들어있음을 깨닫는 것이야 말로 자기 사랑의 능력이다.
이 세계의 현상적 모습들과 표현들속에서 분명한 사실은 오로지 하나, 모든 것은 변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경험속에서 모든 것은 변한다. 인간의 경험이란 결국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변화하고, 어떤 것도 한결같지 않은 상황에서 행복의 원천을 외부의 변화하는 것들에 둔다면 우울증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덧없는 것들, 소멸해 가는 것들, 오고가는 것들, 즉 변화하는 것들에 안전의 토대를 둔다면 우리의 취약성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저지르는 이 분명한 오류는 인간 전체의 조건속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오류는 인간전체의 조건속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오류는 누구나 똑같이 갖고 있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똑같은 것, 즉 의식자체의 본질적인 순수, 내적인 자기가 지닌 본질적인 순수함은 경험의 고통속에서 재발견할 수 있다.
이것을 확인하는 길은 두가지다. 첫째는 스스로 연민의 상태에 이르러 타인들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의식단계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면 이 순진무구함을 확인하고 인식하게 된다. 둘째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 이 순진무구함일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본질적인 순진무구함은 천부적으로 사람을 잘 믿는 아이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른들의 진실성을 믿는 아이들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들은 내용이 맞는지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아이들은 부모는 물론이고 교사같은 부모의 확장체나 다른 가족 구성원, 또래친구, 놀이친구, 텔레비전, 광고를 좋아한다. 또 상업광고도 마치 부모처럼 믿을만한 것으로 본다. 쉽게 믿고 마음이 열려있으며 사랑은 있지만 피해망상증은 없기 때문이다. 404-405
이처럼 순진무구하고 잘 믿는 마음은 쉽게 프로그래밍된다. 이런 순진무구함때문에 듣는대로 믿어버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족처럼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아이의 순수함은 프로그램들이 들어오는대로 프로그래밍된다. 본질적인 순진무구함때문이다. 이 순진무구함때문에 '누구나 알레르기가 있어. 심장병은 우리 집안내력이야, 우리집안 사람들은 누구나 체중문제를 안고 있지'같은 말을 그대로 믿어버린다.
이처럼 온갖 부정적인 프로그램들을 받아들이는 건 아이의 순진무구함때문이다. 아이의 마음이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같다면 이 하드웨어는 설치되는 프로그램들을 어떤 것이든 작동시킨다. 하지만 컴퓨터 자체이기도 한 하드웨어의 본질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어떤 소프트웨어 즉프로그램을 작동시키든 하드웨어의 본질적인 순진무구함과 순수함, 진실성은 질대로 훼손되지 않는다.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프로그램들이 전부 잘못돼도 하드웨어는 그대로 남는다.
어른들의 내면에도 이 아이같은 의식이 그대로 남아있다. 어떤 프로그램이 깔려있든 그 순진무구함과 순수한 동기,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은 그대로 존재한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이런 본질적인 것들이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남아있다. 바로 지금 이글을 읽고 있는 존재도 바로 이것이다. 이 아이처럼 맑고 순진무구한 의식이 바로 지금 이글을 읽고 있다. 그 사람이나 인격이 아니라 단순하고 순수한 의식이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나는 한마디도 안믿어"라고 말한다면 이런 생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 역시 순진무구함으로 인해 아이가 받아들인 또 다른 믿음체계에서 생겨난 것이다. 아버지가 "누구도 믿으면 안돼"라고 말했거나 어떤 실망스러운 경험이 '듣는대로 다 믿어버리면 안된다"라는 프로그램을 아이의 내면에 깔아 놓았을 것이다.
이처럼 '그의 말은 어떤 것도 안믿을 거야'라는 생각은 아이같은 순진무구함으로 인해 이런 프로그램을 받아들인 결과다. '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함부로 믿지 말아야 해. 듣는 대로 다 믿지는 말고 의심할 줄 알아야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파멸의 길로 빠질 수 있어'와 같은 생각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런 프로그램들을 받아들인 순진무구한 본성은 그대로 남아있다. 이런 본성은 희망과 믿음을 잃지 않고 언제나 진실에 귀기울이고 진실을 알아차리려 애쓴다. 생명을 북돋아주고 보살펴주며 고통을 덜어주는 것에 귀기울이려 한다. 냉소주의자는 단지 잘 믿지 않도록 프로그래밍된 사람에 불과하다. 406-407
자신을 치유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지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 본질적인 순진무구함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자기내면에 어떤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는지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면 이제 개인적인 심리연구나 내면의 성찰, 모든 영적인 작업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 순진무구함을 다시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받아들인 것이 무엇이든 누구에게나 있는 아름다움때문임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사랑과 잘 믿는 마음때문이다. 자신의 진실성을 세상에 투사해서 세상은 믿을 수 있는 곳이며 무엇이든 보거나 듣는대로 믿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거짓말도 때로는 아주 유용한 것이므로 누군가에게 "이미 송금했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로 생각한다. 진실을 살짝 왜곡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거짓말을 창조적인 사업윤리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을 받아들인 것도 결국은 우리의 순진무구함때문이 아닐까? 살아남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프로그램을 받아들인 탓에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그 대가를 치른다. 200미만의 단계로 내려가면 언제나 그 대가로 세계속에서 자신의 힘을 상실한다.
분노도 모두 이것때문이다. 나의 힘을 잃어버렸어. 내 행복의 원천을 다시는 되찾지 못할거야. 그건 내 외부에 있으니까. 내가 저기 바깥으로 투사시켜버리고 말았으니까. 이런 생각이 분노를 불러오는 것이다. 이 분노를 치유하려면 이것의 실제를 기꺼이 들여다보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이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행복의 원천이 외부에, 언제나 미래에 있다는 인생관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나의 순진무구함때문이야.
우리는 행복의 원천과 우리 자신이 공간은 물론이고 시간면에서도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일이나 그 다음날 혹은 다음 주나 다음해, 즉 드디어 대학을 졸업하거나 중년이 되거나 큰 집이나 캐딜락을 사면 삶에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행복이 미래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행복의 원천과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행복의 원천이 우리 자신이며 언제든 행복을 창조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어야 완전하다는느낌이 드는데 말이다.
완전하다는 느낌은 삶의 경험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이지만 어느 순간 경험이 멈춰도 완전하다는 느낌은 그대로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글쓰기를 갑자기 멈춰도 이 경험은 이미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힘닿는 데까지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 최선을 다했다는 기쁨이 함께 한다. 경험과 기쁨이 함께 하는 것이다. 완전하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내일에 대한 생각은 없다. 주어진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케이크를 빛나게 해주는 장식물과 같다.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 완전하다는 느낌이 함께 있어야 한다. 완전함은 행위의 옆이나 바깥에 있거나 행위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지금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완전함이다. 이처럼 완전함은 바로 지금의 경험과 함께 한다. 완전함은 경험과 분리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08-409
이렇게 경험과 함께 하면 모든 경험에서 사랑을 인식한다. 이것이야말로 경험과 함께 하는 방식이다. 실망스러운 모습가지 삶의 모든 표현들을 사랑하는 것, 부침속에서 실수를 거듭해도 다시 실수를 통해 배우는 끊임없는 깨우침의 과정자체가 바로 경험과 함께하는 방식이다. 실수 자체가 곧 경험과 함께하는 방식인 것이다.
자연과 신, 우리의 심리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관련있음을 우울증을 통해 알 수 있다. 뭐가 잘못됐는지 봐. 고쳐야 할 게 뭔지 보라고. 제발 연민을 갖고 나를 이해해줘. 나를 바로잡아줘. 모든 걸 치유해달라고 라고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이 소리친다. 이런 절규가 바로 우울증이다.
여기서 문제는 바로 내면의 분리감이다. 저기 바깥의 무언가나 미래와 결합되지 않으면 완전하거나 충분한 존재가 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바로 문제다. 에고는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큰 나는 매순간 완전하다. 완전에서 완전으로 움직인다. 진정한 행복은 언제나 바로 지금, 이 순간속에 있다.에고는 언제나 미래의 만족과 완전함을 즉 욕망이 충족될 때를 기대하지만 말이다.
우울증의 남녀 차이
임상학적으로 자살이나 우울증을 불러오는 촉발사건은 성별에 따라 다르다. 남성은 신의 현존이나 신과의 연결을 흔히 힘의 형태로 경험한다. 편재와 전지, 전능이 신의 전형적인 세가지 특성이기 때문에 남성들은 흔히 무의식적인 힘과의 결합에서 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들은 힘을 추구하고 힘의 원천과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우울증에 빠진다. 이때 힘은 물론 저기 바깥에상에 있는 것이며, 힘을 나타내는 신분의 상징물이나 사업체, 직함의 상실이 우울증을 불러일으키는 촉발사건으로 작용한다. 그러면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분리감과 취약성은 그대로 남는다.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돈과 지위, 권력을 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다.
반면에 여성들은 흔히 무의식적으로 관계속에서 신과의 연결을 경험한다. 흔들의자에 앉아 절망적인 눈으로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며 몸을 앞뒤로 흔들던 여인을 기억하는가? 그녀는 아들과의 관게를 통해 사랑을 경험했다. 그런데 이제 이 관계가 끊어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여인에게는 관계의 단절이 우울증의 촉발요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형태와 표현이 다를 뿐 근본문제는 여전히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울증은 자살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잘들여다보면 자살하는 사람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몸의 죽음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러나 몸은 딜레마를 만들어 낼수도 없고 이 딜레마를 경험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몸을 없애면 고통의 근원도 사라지리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딜레마를 창조하거나 경험하는 것은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의식속에서 일어나므로 해결책도 의식속에 있다. 의식의 본질을 살펴보고 나서 문제를 유발하고 경험하는 곳이 의식임을 이해하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곳도 의식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다. 410-411
우리는 자신을 몸과 동일시해서 몸이 곧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에너지를 상실하는 것은 기가 꺾여 있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에너지가 줄어든다. 대부분의 죽음은 사실 미묘하게 수동적인 자살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살아있음에 대한 느낌과 삶에 대한 기대감, 열의를 상실해버린 결과다.
통계상으로 자동차 사고나 전용차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등으로 기록되지만 수동적 자살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무슨 이유에선지 미리 조심할 만큼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으며, 생명을 돌보고 보존할 만큼 충분히 소중하게 다루지 않은 것이다. 수동적 자살은 자신의 신체적 질병을 무시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당뇨병에 걸렸으면서도 규정식을 제대로 지키지 않거나 인슐리 주사를 맞지 않아서 인슐린 반응과 약물과다복용, 당뇨병성 혼수에 빠지기를 여러차례 반복하다가 결국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그 예다.
중독증의 경우 수동적 자살은 흔히 약물과다복용의 형태로 나타난다. 20년 동안 여러가지 약물을 복용하던 사람이 어떻게 약물의 양을 잘못 계산해서 과다복용으로 죽을 수 있겠는가? 이들은 무수히 약을 복용해 왔기 때문에 정신약리학 분야의 전문가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과다복용으로 죽은 것이다. 흔히 사고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수동적 자살이 대부분이다.
자동차 사고의 경우 운전자 부주의가 원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살고자 하는 욕망이 부족했던 것이다. 또 건강을 위한 조언을 지키지 않거나 자신의 건강과 자산을 보살피지 않은 것 역시 에너지가 상실돼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에너지가 상실되면 덫에 걸려서 살아있다는 느낌도 잃어버린다. 위축되어 의기소침해지고 무의식적으로 벗어날 길을 찾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당뇨병성 혼수상태에 빠져 죽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고 관상동맥성 심근경색을 예방하기 위해 생활방식을 애써 바꾸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임을 인식하면 의식자체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이미 설명한 방법의 실천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증상들을 끝까지 느껴보고 최악의 시나리오 기법으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며 자문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이런 질문이 불러일으키는 느낌들을 인식하고 이것에 대한 생각들을 끊임없이 지워버리면서 저항을 내려놓아 직접적으로 이 느낌들을 다루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계속하다보면 증상들이 줄어드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우울증에서 벗어나 두려움을 기꺼이 직시하고 두려움이 어떻게 깔리게 되었으며 이런 두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두려움이 깔리게된 과정에 분노가 일어나면 이 분노의 에너지를 이용해서 자신을 위해 더 나은 무언가를 갈망한다. 이제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과정을 직시할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412-413
이런 과정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삶 전체의 맥락을 새로 짜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려면 삶의 모든 면들을 살펴보고 자문해보아야 한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이것이 커다란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이것이 내 삶에서 떠나도 삶의 목적을 여전히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삶을 무엇에 헌신해야 할까?
나의 직업은 삶에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해주고 있나?
어떻게 하면 이것을 더욱 폭넓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것이 내 삶에서 사라져도 인간으로서의 내 가치가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바라보아야 그럴 수 있을까?
이렇든 삶의 목적과 동기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에 삶을 기꺼이 헌신하고 있는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은 무엇인가?
타인을 위한 봉사?
자신의 삶을 돌볼 능력을 모두 상실한 상태에서 타인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온갖 상처와 상실에도 개의치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된일인지 그들에게 삶은 여전이 의미가 있어 보인다.그들이 우리보다 더 강하거나 도덕적으로 더 엄격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삶에서 더욱 큰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찮은 의미들을 내려놓고 더욱 큰 의미를 찾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울하다는 것은 우리가 자신보다 훨씬 사소한 어떤 것, 더욱 작은 의미를 받아들였다는 증거다.
이 어떤 것이 삶에서 갖는 진정한 의미를 다시 살펴 보아야 한다.
이것이 없어도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간단한 질문을 던지다보면 교정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어느 부분에서 취약한가? 꼭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들, 생존의 토대로 삼고 있는 것들이 바로 우리가 지닌 취약성의 단면들이다.
방법은 먼저 이 취약한 영역들이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삶에서 이것을 잃어버리는 상황을 그려본다. 그러고 나서 이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감정들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고 내면의 의식이나 무의식, 내면의 신, 초의식, 직관과 접촉한다. 그리고 내면의 탐구를 위해 질문을 던진다. 이런 작업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깨달음을 위한 수행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류지혜의 습득과 영적 성장을 위한 수행
죽도록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인류의 과학적 지식, 영적지식들의 체험적 습득
삶의 주된 목적은 무엇인가? 깨달음의 과정, 수행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 가운데 내가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적 성장
이런 질문들에 하나하나 답하다보면 본래의 자기 모습이 자라나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외부의 사건들에 더이상 쉽게 상처받지 않는다. 언제나 두가지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의식으로 보면 사건은 '저기 바깥'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있으며, 이 느낌은 우리의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이 사건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 요컨대 나와 사건은 별개다. 내게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사건과의 관계에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을, 사건을 마음속으로 그리는 방식을 선택할 힘이 있다. 그 사건이 정말로 나의 삶을 지배하게 둘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414-415
돈에 정말로 나의 삶을 지배할 만큼 많은 힘을 부여할 것인가?
그래서 돈이 없으면 살아갈 의욕도 잃어버리게 되고 말 것인가?
소유물과 직함, 학위 혹은 자동차에도 그런 힘을 부여하고 싶은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보다 더욱 크게 가치를 두는 것들을 전부 떠올려 보면 그들이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사춘기 청소년들은 특히 높은 자살율이 죽음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춘기 아이들에게 우리가 가르치는 가치와 관련해 이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부질없는 것들에 삶의 토대를 두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삶의 의미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재평가 해보고 이것들이 어떤 상실에도 우리를 지켜줄 만큼 충분히 가치있는 것인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에 대한 재평가도 이런 내적인 이해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목적과 의도를 설절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에 질문을 던지고 이 가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재평가해보고 있다면 진정으로 영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혼이란 무엇일까?
생명자체의 에너지란 무엇일까?
이 에너지의 형태를 부여하는 결정은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다. 어디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지는 자신이 결정한다는 뜻이다.
의식이라는 에너지 장안에서 우리는 엄청난 자유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에너지 장이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가치부여의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이해하기만 해도, 자신의 힘을 회복할 수 있다. 자신이 희생자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스스로 원천이 되면서 세상에 내맡겼던 자신의 힘을 다시 받아들인다. 이로 인해 자기존재의 가치를 경험하고 어떤 증명도 해보일 필요가 없으며 세상이 그 무엇도 해줄 필요가 없음을 깨달으면서 내적으로 고요한 상태에 이른다.
그러면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트로피를 집으로 가져올 필요도 없어진다. 우리 내면에서 이미 그 가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주어진 것을 그저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감사의 마음이 있으면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건 세계가 들어준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우리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쉽게 상처받지 않는 자리로 옮겨 간다. 더이상 실망이나 분노에 쉽사리 빠져들지 않고 자살에 대한 생각으로 자신을 공격하지도 않는다. 자실에 대한 충동은 몸을 죽게 하면 고통의 근원도 사라지리라는 절망적이고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고통의 근원임을 인정해야만 고통을 넘어설 수 있다. 그리고 고통을 넘어서야만 이 장의 목적인 내면의 치유도 이루어진다. 416-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