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함과 부요함
빌4:10-12
많은 사람들이 부자로 살고 싶어합니다. 한때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다들 싫어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듣고 또 들어도 기분 좋은 말 1위가 바로 ‘부자되세요’라는 말이랍니다. 우리나라 초등학생이 가장 되고 싶은 사람이 ‘돈 많은 부자’이고 미혼 여성의 최고 신랑감 역시 ‘능력있는 남자’입니다. 그 능력이란 곧 돈 버는 능력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듯 부자는 어딜가나 환영을 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부자되기를 소망하고 꿈꾸고 힘쓰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부자에 대한 성경의 입장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부자에 대해 뭐라고 했습니까? 딤전 6:9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또 이어 10절에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라고도 했습니다.
잠언서에 보면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23:4)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해석에 있어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만 예수님도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부자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큰 부자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이렇게 우리가 그렇게도 간절하게 원하는 부자가 되는 것을 말리는것입니까?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부요는 무엇입니까? 오늘은 바로 이 부요와 가난의 문제에 대해 살펴봄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부자라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며칠 전에 79세된 할아버지와 78세된 할머니가 이혼하였습니다. 이들의 이혼이 화제가 된 것은 나이 문제도 있지만 이들이 바로 우리나라 최고의 제약회사인 동아제약의 회장 부부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남편인 강신호 회장은 우리나라 재계의 얼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회장까지 맡고 있어 그 파장이 더욱 컸었습니다. 이혼의 사유는 부자지간의자 경영권 갈등등 여러 가지 복잡했지만 결론은 ‘돈’이었습니다.
약 53억원의 위자료를 주는 조건으로 한 평생을 함께 살아왔던 부부가 헤어지게 된 것입니다. 돈 앞에서는 세월도 사랑도 다 부질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돈이 많으면 그만큼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하고 행복하곤 거리가 멀어도 한 참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 심리학회장을 지내고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부 교수로 있는 셀리그먼 박사가 어제부터 오늘까지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리는 특별강연을 위해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그는 이 강연에서 “행복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을까 고민하지 말라”고 충고를 합니다. 돈과 행복은 무관하다고 말해 줍니다.
그는 강연에 앞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50년 전과 비교했을 때 현대인들의 환경은 훨씬 풍요로워 졌지만 행복지수는 그때보다 훨씬 더 나빠졌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역시 전쟁과 가난을 벗어나 이제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됐지만 우울증이나 자살 같은 것은 계속 늘고 있다고 들었다”며 “이는 우리의 ‘부(富)’에 대한 왜곡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그는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긍정적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행복해지기 위한 훈련 방법을 2가지를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매일 밤 잠들기 전 종이 위에 그날 가장 좋았던 일 3가지를 그 이유와 함께 적어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6개월 정도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이전보다 훨씬 행복해져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될 거라고 합니다. 둘째는 우리 자신만의 장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하면 훨씬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이 우리의 행복을 좌우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행복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 솔로몬의 경우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줍니다. 그 이유는 솔로몬은 성경의 인물 가운데 최고의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현실 세계에서도 그를 따라 올 부자가 없을 정도로 그는 큰 부자였습니다. 그의 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전도서 2장 이하에는 솔로몬이 이 세상에서 해 보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해보았노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즉 자기 눈이 원하는 모든 것과 자기 마음이 즐거워 하는 것을 남김없이 해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부자인지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사용하는 것들은 모두가 순금으로 만든 것들이며 한끼 식사로 고운 밀가루가 삼십 석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 석이요 살진 소가 열이요 초장의 소가 스물이요 양이 일백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였더라‘(왕상4:22) 고 했습니다.
또 열왕기 상 10장 14절을 보면 “솔로몬의 세입금의 중수가 육백 육십 륙 금 달란트요”라고 했습니다. 육백 육십 육 금 달란트를 요즘 시세로 치면 대략 사천 오백 억원에 해당되는 하는데 솔로몬은 매년 이렇게 엄청난 액수를 세금으로 거둬들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주변 여러나라들에게서 조공까지 받았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은 같은 것은 돌처럼 여겼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솔로몬보다 더한 부자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솔로몬의 최후가 어떻습니까? 만약 그가 부자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의 마지막도 좋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솔로몬의 삶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우상을 끌여들였고 여호와 신앙을 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 결국 나라는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실패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미 신명기에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해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신 17:16-17절을 보면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3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첫째는 말을 많이 사육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을 많이 사육한다는 것은 전쟁을 준비하고 힘을 기른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를 금하셨습니다. 군비확장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호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왕의 권력으로 여자들을 많이 소유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축재를 하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재물을 많이 소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솔로몬은 이 세 가지 모두를 어겼습니다. 그는 많은 말을 얻기 위해 애굽과 무역을 했으면 수많은 병거를 거느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려 1,000명의 처첩을 두었습니다. 여자에 둘러 싸여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엄청난 재산을 모았습니다. 큰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한탄합니다. 잘 못 살았다는 것입니다. 삶이 너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즐기고 싶은 대로 다 즐기고 하고 싶은대로 다 해보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공허뿐이라는 것입니다.
돈이 그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돈이 얼마나 인간을 황폐하기 만드는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전에도 한 번 예를 든 내용입니다. 작년에 인천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20년 지기 중고등학교 동창 둘이 동업으로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쇼핑몰을 차려 분유 화장품 애완동물 용품등을 판매하였는데 기대 이상으로 잘 되었습니다. 그러자 에어컨과 전자제품 쪽으로 사업을 확대하였습니다.
작년 봄에 '100년 만의 무더위'가 찾아온다는 예보와 함께 에어컨과 냉장고의 주문이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주문이 밀려드는지 도저히 물건을 조달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공모를 했습니다. 아예 고객들의 물품 주문 대금을 받고 그냥 외국으로 도망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에어컨과 냉장고를 주문한 고객에게는 다음 달 배송될 예정이라고 알리고 물품 대금을 미리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고객 2천 여명으로부터 41억원을 거둬들인 이들은 물품 배송일로 약속했던 날에 이르러 사이트를 전격 폐쇄하고 잠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동업자 중 한 사람이 친구 몰래 약 절반 가량인 23억원을 몰래 인출하여 다른데다 예치해 놓았습니다. 이 사실이 들통이 나자 서로간에 불신이 생겼습니다. 다툼도 잦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이럴 바에야 경찰에 자수해야겠다고 말하자 자수의 뜻이 없는 동업자는 친구를 살해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2명의 하수인을 각각 1억원과 2천만원을 주고 친구를 유인하여 술에 취하게 한 다음 살해하였습니다.
중학교 입학이후 17년간을 쌓아온 두 사람의 우정은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 여겼던 돈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화근이 되고 말았습니다.
잠23:4-5절을 쉬운 성경을 보면 ‘부자가 되려다 건강을 해친다. 분수에 맞게 사는 지혜를 배우라 아무리 재물에 눈독을 들여도 재물은 날개가 달린 독수리처럼 창공으로 훨훨 날아가 버릴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돈으로 행복을 사려는 사람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 가난하다고 부끄러워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함이 성경의 뜻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잠30:8-9에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 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부자가 되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가난하면 범죄하기 쉽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생계형 범죄가 많다고 합니다. 먹고 살기위해 저지르는 범죄입니다. 좀 도둑들과 강도들입니다. 경찰서 유치장이 넘쳐 날 정도로 증가 추세입니다. 가난하면 정직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빈 자루는 홀로 서지를 못합니다. 그렇다고 성경은 절대로 가난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잠10:15절에 보면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 고 했으며 또한 19:4에는 ‘친구가 끊어질 것’이라 했으며 급기야 7절에는 형제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않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고 했습니다. 사정해도 다 달아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난한 자에 대한 세상 인심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과도한 부자가 되는 것을 금하는 것처럼 가난하게 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113:7에는 우리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세우’신다고 했습니다. 가난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궁핍하게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실제로 세계 지도를 놓고 보면 예수를 믿는 기독교 국가는 모두가 잘 사는 나라들입니다. 반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라들은 대개가 못 사는 나라들입니다.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는 개인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자보다 더 귀한 가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는 삶을 말합니다. 신앙 때문에, 사명 때문에 부자가 되기 보다 가난을 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용규 선교사는 서울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중동 지역학 및 역사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인재였습니다. 그런 그가 안락한 미래의 보장과 인간의 기대를 전부 내려놓고 어느날 몽골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몽골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지금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쓴 책 <내려놓음>을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진리는 우리가 내려놓으면, 모두 빼앗긴다고 유혹하지만 하늘 진리는 우리가 내려놓을 때, 온전한 우리 것이 된다고 약속한다. 우리 인생에는 ‘분명한 내 것’처럼 보이지만, 남김없이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다. 힘겹게 쌓아올린 명예, 꼭 움켜쥔 재물, 미래의 불안과 생명의 위험까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내려놓을 때, 진정한 쉼과 참된 평안을 체험할 수 있다‘ 고 했습니다.
그는 서울대의 경력과 하버드 명예도, 찬란한 미래의 보장도, 가족 친지의 기대감도, 심지어 자신의 모든 소유까지도 "너는 그저 내려놓으라"는 하나님 말씀에 겸손히 내려놓음으로 육신적으로 가난하지만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경험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동행 여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도 이땅에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를 둘 곳이 없도다’(눅9:58)라고 하셨습니다. 집 한 채 없는 무주택자로 사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6:7)’라고 하면서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모든 것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 모든 것을 분토처럼 내려놓았습니다. 스스로 가난함을 택하였습니다. 평생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난하다고 고개를 숙이고 살 이유는 없습니다. 부끄러워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게으름으로 인한 가난은 경계를 해야 합니다. 죄의 형벌로 인한 가난은 배격해야 합니다. 성경은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유로 지금 우리가 가난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고 싶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남들이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면서 무언가 좀 근사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도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먹고 마시는 그릇 조차도 금으로 만들고 방패 또한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부자들의 깊은 욕구 중의 하나가 과시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과시욕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가난함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3. 그래서 궁극적으로 가난함도 부요함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고 다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가난을 싫어한다고 해서 가난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가 삼상 2:7에 나옵니다. ‘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자도 하나님께서 내시고 가난한 사람도 하나님이 내신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최고의 부자라고 한다면 최고로 가난한 자는 거지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부자의 집 대문에서 평생 얻어 먹고 살았습니다. 솔로몬을 부자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은 나사로를 가난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진 인생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가난하든 부요하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자로 사는 것도 가난하게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느냐?’ 가 중요합니다. 성도는 물질보다 생명에 더 많은 관심을 둬야 합니다. 영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구원영생의 가치를 아는 성도들은 현재 우리가 부자인든 가난하든 그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 있다할지라도 내게는 과분한 환경이다 이렇게 여기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부자를 동경하지 않고 가난을 경원하지 않습니다. 부자 되기를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더 원하고 가난을 두려워 하기 보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더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울처럼 가난함도 부요함도 다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물질보다 중요한 것이 생명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자로 만들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영생 구원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구원의 조건은 물질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자가 되기 위해 인생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이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새로운 버전입니다.
부자가 죽을 때 회개하여 간신히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천사와 함께 천국의 거리를 거닐고 있는데, 전의 자기 집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고도 아름다운 집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천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좋은 집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전에 네 집 대문에서 구걸하며 살던 나사로의 집이다.”
부자는 너무도 놀라 말을 잇지를 못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걷는 중에 이번에는 아주 좋지 않은 집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로 작고 초라한 집 앞에서 부자가 물었습니다. 이 집 주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 몰랐느냐? 바로 네가 살 집이란다.“
실망의 빛이 역력한 부자에게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천국에 있는 집들은 너희들이 세상에 있으면서 보낸 재료들을 가지고 지은 것이란다”
이 땅에서 부자로 살거나 가난하게 살거나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에 대해 교훈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땅보다 중요한 곳은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 가난하든 부자든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미 부요한 자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 어느 누구도 우리의 이 부요를 능가할 부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통장에 구원 영생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입금해 주셨습니다. 이 통장의 비밀번호는 우리 자신만 알고 있습니다. 얼른 이 놀라운 은혜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지닌 가장 부요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이 부요함과 넉넉함을 이 가을 아침에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