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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언더우드의 선교정책
훗날 장로회신학교 뿌리된 사랑방 성경공부
언더우드는 남달리 뛰어난 선교적 안목과 열정을 가졌던 선교사였다. 그러나 그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선교현장에서 쌓은 경험이 없었고, 선교이론에 밝은 이론가도 아니었다. 과연 한국 선교는 어떤 방법과 정책으로 해야 할 것인가. 그는 효율적인 한국 복음화의 방안을 모색하다가 1890년 6월 네비우스(John Nevius)를 초빙했다.
네비우스(John Livingstone Nevius, 1829-1893)는 중국 산둥성 지푸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노련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였다. 그는 오랜 헌신과 많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선교에 양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는 이런 체험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선교 방법’이란 논문과 책자를 간행,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2주간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그 나름의 선교방법을 제시하였다. 한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그의 주장에 호응하고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를 흔히들 ‘네비우스 방법’이라고 부른다.
당시 언더우드가 정리한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각 사람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그곳에 남아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하며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진다. 둘째, 교회의 운영과 방법, 기구를 각 교회가 관리하고 경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발전시킨다. 셋째, 교회가 자체적으로 인력과 재력을 제공할 수 있는 한 훌륭한 자격이 있는 사람을 뽑아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맡긴다. 넷째, 자신들의 예배당을 스스로 건축하도록 독려하고, 그 지방의 건축양식에 따르게 하며 각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예배당을 짓게 한다.
이 내용을 압축하면 자전(self-propagation) 자립(self- support) 그리고 자치(self-government)가 된다. 즉 한국인이 스스로 전도하고 재정도 스스로 담당하고 교회 운영도 스스로 하게 하는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이 선교 방법을 채택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네비우스의 강연 이전부터 이미 자력 선교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이 정책이 뿌리내리게 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솔내의 교인들이 한국 최초의 예배당인 솔내교회를 지을 때 그를 찾아와 예배당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언더우드는 이 선교정책에 따라 “당신들이 스스로 직접 예배당을 건축하십시오”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예배당을 건립하지 못하였다. 나중에 신도들이 수적으로 불어나고 그들의 믿음이 성장한 후에야 건립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의 새문안교회도 철저하게 교인들의 헌금, 노력, 봉사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이런 선례들을 좇아 이 정책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보충자료> | 삼자 원리(三自原理, three self-principles) |
자치(自治): self-governing 자립(自立): self-supporting 자전(自傳): self-extending, or 자파(self-propagating) 삼자원리는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현지 목회자들을 양성하며, 교회의 행정책임을 위임하고, 교육기관들을 운영함으로,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교지 교회들이 독립적으로 성숙하고, 선교하는 교회쪽에 크게 의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한편 이 삼자원리는 영국 국교회의 헨리 벤(H. Ven)과 미국 회중교회에 속한 루프스 앤더슨(R. Anderson)에 의해 19세기 중반에 제창된 것이다. | |
사도 바울은 그가 회심자 들을 입교시켜 교회를 세운 후에 자신들의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였는가에 대해서 모범을 보이며 가르쳤다. 교회를 세울 때에 우선 제일 먼저 신실한 자로 장로를 임명하고, 그 후로는 그들이 세례, 성찬, 교육, 훈련, 치리, 재정 등의 모든 일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교회를 부탁하는 메시지 내용 속에서 알 수 있다. 바울은 결코 회심자 들이 그들의 교회를 자립할 때까지 방치하지 않았다. 바울은 제일 먼저 교회를 오직 성령님께 맡겼다(행 20:28). |
성경공부 열풍이 신학교로 발전
자력전도 외에도 네비우스가 강조한 것은 성경공부였다. 처음에 이 정책이 펼쳐질 1890년 무렵에는 전국의 장로교와 감리교 신자들을 다 합해도 100여명 정도밖에 이르지 못했다. 언더우드는 1890년 가을 자기 집 사랑방에서 성경공부반을 개설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7명이었으나 1892년 16명으로 늘어났다. 갑오개혁이 시작되는 1894년 전후 시기부터는 전도의 문이 열려 개종자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교회당이 생기는 곳마다 한글공부와 성경공부가 강조됐다. 특히 선교사들이 때맞추어 선교지회(station)를 개설한 북한 지역에서 호응도가 높았다.
기독교의 복음을 먼저 깨달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줄 알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서 선생의 역할을 하였다. 그들을 지도자로 선정하고 훈련에 참여하게 하여 공동체의 감독과 관리자의 역량을 배양시키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중에서 탁월한 사람들을 해당 지방에 있는 여러 공동체의 지도자로 세웠다.
그들은 각 지방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선교사들은 이런 단위를 총괄하는 대규모 성경공부 모임을 형성했다. 지도자들을 위한 특별한 훈련과정도 개설하였다. 이것은 동기, 하기, 혹은 1∼6개월 과정의 사경회였다. 이 과정이 발전해 더 엄격하게 장기적으로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신학반이란 특수 교육과정이 생겨났고, 마침내 1900년에 이르러 평양에서 장로회신학교가 시작됐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에 따라 자력에 의해 세워진 교회당 모습은 서양 교회당들과는 사뭇 달랐다. 규모도 작았지만 대부분 전통적인 초가집, 기와집 양식으로 지어졌다. 아름다운 건축학적인 유물은 별로 남기지 않았지만 눈물과 봉사와 헌신에 의한 교회당의 자력 건립은 한국 기독교의 발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게 하였다.
3자원리는 한국 교인들이 규칙적으로 헌금하게 하고 전도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성경을 열심히 배우는 열정을 발현시켜 한국교회를 급격하게 성장시켰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신학교에서 교역자를 양성할 때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교육 수준을 서구의 기준대로 하지 않고 평신도보다 약간 높게 하도록 결정했는데 이는 초기 문맹률과 교육열이 낮았을 때에는 통했으나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의 지적 저하를 초래하였다는 후대의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됐다.
(12) 언더우드의 ‘그리스도신문’ 발행과 문서 활동
한국 첫 근대 출판사 조선聖敎서회 세워
1897년 첫 발행된 '그리스도신문'은 당시 기독교인뿐 아니라 일반 대중을 위한 정보를 게재해 민중계몽과 한국문화 창달에 기여했다.
언더우드는 한국의 출판문화에서도 선구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문서사역을 매우 중시해 한글의 사용과 연구, 사전과 성경·찬송·전도문서 간행에 힘썼다. 인쇄 매체는 선교의 주요 요체였다. 전도지와 소책자, 잡지 신문은 복음전파를 위한 전령의 노릇을 감당했다.
언더우드는 1888년, 조선성교서회(Korea Religious Tract Society)의 설립을 제안하고 준비했다. 이 일은 그가 사전 출판을 위해 일본에 체류하는 일로 지연되다가 1890년 6월 25일에 성사됐다. 서회가 창립된 후 가장 먼저 발행된 첫 작품은 웨일스 출신 중국 선교사였던 그리피스(Griffith J)가 지은 간단한 교리서인 '성교촬리(聖敎撮理)'였다.
순 한글 내려쓰기로 편집된 이 교리서는 기독교 교리 소개와 함께 기독교인은 그가 속한 나라에 대해 충성하고 전통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내용이 담겼다. 조선성교서회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출판사로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이다.
한국 기독교 신문의 효시
인쇄매체 중에서도 신문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던 언더우드는 1897년 4월 1일부터 ‘그리스도신문(The Christian News)’을 발간했다. 이 신문은 2개월 앞서 아펜젤러가 간행한 ‘죠션그리스도인회보(Korean Christian Advocate)’와 함께 한국 기독교 신문의 효시가 된다.
주간신문으로 매주 목요일 8면씩 순 한글로 간행됐고, 국배판 크기로 4호 활자를 사용했다. 면마다 3단 종서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광고도 실었고 캠페인도 벌여 근대 매스컴의 역할을 선보였다. 신문의 발행과 편집을 담당한 사람은 언더우드였지만 사무 일은 빈튼(Vinton)이 맡았다. 언더우드 형의 선교기금으로 간행됐다. 국내 인사와 동료 선교사들이 집필진을 이뤄 그들의 글이 언더우드의 번역으로 실렸다.
창간호는 신문 발행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이 신문이 백성을 도우려 함이요 착하고 참된 것만 하려 함이니 일이 참되고 바른 것만 기록함이오. 아무 때라도 어그러지는 일을 알면 바로 말함이오. 옳은 일은 참 능함이니 이 신문은 더욱 옳은 것을 좇으며 밝게 하자 함이니…”라고 천명했다.
창간 논설에서도 “죠션 나라와 백성을 위하려는 것이라”고 목적을 분명하게 세웠다. 기독교 신앙 전파가 간행의 목적이었지만 당시 교인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인만이 아니고 한국의 지식인과 일반 민중에게 교육 정치 경제 지식을 제공해 그들을 계몽하고 생업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예를 들면 ‘감자 농사짓는 법’ ‘소 강하게 키우는 법’ ‘위생법’ 등 삶에 구체적인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담았다. 따라서 신문은 기독교인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까지 독자의 대상이 되었다. 창간 연도 신문 내용을 분석해 보면 교회 통신 74회, 공업 진흥 100회, 농업 개량 99회, 일반 교양과 세계소식 105회를 이뤘다. 1899년에만 177만6000쪽을 인쇄했다고 선교본부에 보고했다. 당시 이 신문은 전국 13도 370여명의 수령들이 구독했다. 궁궐에서도 2부를 받아보았을 정도였다. 신문대금 수금은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
이 신문은 1905년 7월 1일부터 교회연합 차원에서 감리교의 ‘죠션그리스도인회보’와 통합해 ‘그리스도신문’이란 이름으로 1907년 9월 27일까지 발행됐다. 게일 선교사가 주간을 맡았고 1907년 언더우드가 건강치유차 스위스로 떠날 때까지 사장으로 일했다. 신문은 1907년 11월 13일 ‘예수교신보(The Church Herald)’로 개명돼 발행됐다. 이후 1910∼1914년 장로교단에 의해 ‘예수교회보(The Christian News)’가 발행되었을 때도 언더우드는 이 일에 적극 협력했다.
신문 잡지 발간은 한국 문화 존중의 방식
언더우드는 잡지 간행에도 앞장섰다. 1905∼1906년에는 헐버트가 주간하던 ‘코리아리뷰(The Korea Review)’의 편집을 맡기도 했다. ‘The Korea Mission Field’라는 선교사들의 영문 월간지도 언더우드의 주간으로 시작됐다. 그의 부인은 문서사역에 재능과 열심을 보여 1906년부터 1914년까지 이 잡지의 편집 주간으로 활동했다.
언더우드는 신문사를 통해 영어나 한문 책자들을 번역해 간행했다. 한문 서적으로 ‘대주지명’ ‘상제진리’ ‘권중회개’ ‘중생지도’ ‘복음대지’ ‘예수교문답’ 등 여러 종류의 전도문서들을 간행했다. 그 외에도 많은 전도문서들을 간행해 ‘언더우드 출판물’이란 제하에서 이 문서들을 광고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출판문화 노력은 한국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 그 바탕은 한국 사랑이었다. 그는 1901년 안식년을 기해 한국을 떠나면서 4월 25일자 ‘그리스도신문’에서 “대한도 내 본국이라”고 기술했다. 출판문화에 관여한 그의 글들은 오늘날 한국학 연구에서 훌륭한 자료들이 되고 있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자료들이 증거하거니와 언더우드가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무시하지 않고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갖고 연구, 인쇄 매체들을 통해 한글로 기독교를 소개하고 그 위에서 한국 기독교회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13) 언더우드와 ‘하나님’ 이름
여호와를 ‘샹뎨’로 번역… 훗날 ‘하나님’으로
기독교의 한국 전래와 수용 과정에서 대두된 큰 문제는 '여호와(YHWH)' 라는 기독교의 최고 신 명칭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용어였기에 이를 둘러싸고 선교사들 사이에서 이견이 많았고 논란도 오랫동안 극심했다. 성경 번역과 찬송가 편찬, 전도문서 간행 사역에서는 물론이고 전도와 예배 현장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속히 결정해야 할 급선무였다.
중국의 한문 성경에서는 '상제(上帝)'로 번역되어 있었다. 중국에서도 이런 번역 문제로 많은 논란이 빚어졌다. 중국인들은 많은 신을 섬겨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천주교인들이 '천주'라고 호칭하고 있었고, 만주에서 로스 목사가 주도해 간행한 한국어 성경에서는 '하느님'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전지전능한 최고의 신을 '하늘님' '하느님'으로 불러오고 있었다.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에서는 일본의 호칭에 따라 '신(神)'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모든 신보다 뛰어나고 유일신관을 내포하는 개념
언더우드는 마가복음을 새로 번역하면서 ‘샹뎨’로 표기했다. 일본인이 부르는 ‘신’은 일반적으로 귀신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부르는 ‘하늘님’에서 파생된 ‘하나님’도 사용하지 않고, ‘샹뎨’나 ‘상주’ ‘참신’이라고 부르기를 주장하였다.
1893년에 자신이 간행한 ‘찬양가’에서 그는 ‘아버지’ ‘참신’ ‘여호와’를 사용하였다.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하나님’과 ‘신’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논쟁은 불이 붙었다. 당시에 마펫이나 스크랜턴은 ‘하나님’과 ‘텬쥬’를 선호해 번갈아 사용했다. 아펜젤러와 베어드는 ‘하나님’을 사용하였다.
기독교의 신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언더우드가 찾았던 것은 모든 신들보다 뛰어나고 온갖 잡신을 포괄할 수 있고 유일신관을 내포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그는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적 근거로 이사야와 시편 구절을 들었다.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나이다”(사 37:16) “만국의 모든 신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시 96:5). 두 성구가 적용되는 용어여야 했다.
언더우드는 처음에는 ‘여호와’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과 ‘참신’이란 용어를 선호하였다. 귀신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상쥬’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천주와 같은 뜻을 가졌으면서도 천주교를 따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용어에 대해서는 성공회에서도 같은 견해를 지녔다.
언더우드는 얼마 후 중국과 한국의 전통종교에 대해 연구를 한 후에 한국인을 위한 하나님 개념을 다시 정립하고 자기의 주장을 바꾸었다. 그는 한국인들이 고구려시대 ‘하나님’이라 불리는 ‘위대하고 유일한’ 신만을 섬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하나님’은 하늘님에서 파생하였지만 당시에 사용되었던 의미와는 다르다고 파악하였다.
마침내 크고 ‘고귀한 하나님(The Honorable Heavens)’이란 본래의 의미대로 사용되기를 바라면서 종래의 태도를 바꾸었다. 이때가 1903년이었다. 그는 자신이 강력하게 주장해 오던 명칭들을 버리고 상대방의 요구를 기꺼이 수용했다.
그리하여 신약전서 공인본을 1906년 간행하면서 신의 명칭으로 인한 논란이 일단락됐다. 언더우드는 후에 프린스턴신학교와 뉴욕대학교에서 동아시아의 고대종교에 대해 강연하고 이 강연 내용을 ‘동아시아의 종교(The Religion of Eastern Asia)’란 책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하나님으로 번역한 것은 완벽하게 의미 살린 것
‘하나님’을 ‘하늘의 주’에서 ‘유일하신 큰분’으로 바뀌어 이해하게 된 것은 주시경의 영향을 받은 게일 선교사의 공이 컸다. 주시경은 “하나님의 ‘하나님’는 ‘일(一)’을 뜻하고 ‘님’은 ‘주’ ‘주인’ ‘임금’을 뜻한다. 즉 한 크신 창조주가 하나님이다”라고 알려주었다. ‘하나님’은 후에 맞춤법 통일안에 따라 ‘하나님’으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현배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많은 반대를 받았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하나란 숫자에 님을 붙인 것은 유일신의 의미만 나타낼 뿐 전통적인 한국인의 하느님 개념이 없고 문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개신교에서는 ‘하나님’, 일부 개신교인들과 공동번역 성경, 천주교 측에서는 ‘하느님’을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인이 히브리어의 신 명칭인 ‘YHWH’를 ‘하나님’으로 번역한 것은 단순한 수사에 ‘님’자가 붙은 것만이 아닌 거의 완벽한 것으로 인정받아 사용되고 있다. 외래 종교가 들여온 신 개념이라기보다 한민족이 대대로 심중에 믿어온 하나님을 새로 찾은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말이란 지속적으로 사용하면 의미가 붙여져서 그대로 통용되게 되는 것 같다.
(14) 언더우드와 왕실과의 관계
을미사변·아관파천 등 고비마다 고종 보필
언더우드에게는 천민부터 왕실까지 모든 계층이 선교 대상이었다. 고아원을 세웠던 그는 왕실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선교사들이 왕실과 가까워진 동기는 1895년 콜레라를 퇴치하기 위해 그들이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데에 있었다. 왕실은 처음에 선교사들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선교사들이 죽어가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보고 남을 돕는 이들로 여기게 되었다. 고종은 공개적으로 언더우드를 형제라 부를 정도가 되었다.
고종 황제. 국민일보DB
언더우드는 고종의 통역으로도 활동했다. 고종은 기독교 발전이나 국가 복지, 지방 수령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다.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아스(Lillias H Underwood·1851∼1921)가 명성황후의 시의(侍醫)였던 것도 왕실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된 요인이었다. 명성황후는 릴리아스에게 외국의 풍습과 크리스마스에 대해 물어보고 선물을 보냈으며, 기독교에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겨울에는 선교사들이 궁궐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그런 가운데 언더우드는 거의 모든 권력자들과도 알게 되었다.
왕실을 복음 전파의 기회로
언더우드 부부가 이처럼 왕실과 친분 관계를 맺은 기본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리는 데에 있었지만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895년을 전후해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전쟁, 갑오개혁 등이 전개되면서 국내외적인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선교사들도 정치 상황에 관여하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국에 많은 배상금을 요구했다. 그들은 한국에서 명성황후가 배일친러 정책에 관여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1895년 10월 8일 저녁 일본인 폭도들은 명성황후를 야만적으로 시해했다. 고종은 궁궐에서도 공포와 불안을 느꼈다. 그러자 고종으로부터 많은 친절과 호의를 받아온 언더우드와 다른 선교사들이 온갖 방법으로 왕을 도우려 했다.
고종은 음식도 언더우드의 집과 러시아 공사관에서 준비해간 것만 먹을 정도로 그들만 믿었다. 음식 검역은 에비슨 선교사가 맡았다. 언더우드는 미국 공사의 통역을 맡고 한밤중에 궁궐을 숙위(宿衛)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왕의 주변을 지켰다.
그러는 동안 윤웅렬 장군을 중심으로 일부 인사들이 고종을 대궐 밖으로 이어(移御)하려다 실패한 소위 ‘춘생문사건’이 발생했다. 얼마 후에는 임금이 러시아 공관에 일시 머무른 ‘아관파천’도 발생했다.
그런 과정에서 언더우드는 가장 신뢰를 얻었다. 그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유도해 전도의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그는 1896년 9월 2일과 이듬해 8월 23일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들과 함께 고종 탄신을 축하하는 만수절 행사 개최를 주선했다. 1000명 이상이 모일 수 있는 장소에 만국기를 달고 무대와 제반 시설을 갖추고 정부 관리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초청했다.
그가 창간한 ‘그리스도신문’에도 교회가 임금을 섬기기를 극진히 충성하라는 구절을 창간사에 실었다. 순서지도 만들어 미리 배포했다. 여기 실린 찬양가는 ‘높으신 상주님, 자비론 상주님 긍휼이 보소서. 이 나라 이 땅을 지켜 주옵시고, 오 주여 이 나라를 보우하소서. 우리 대군주폐하 만세 만만세로다. 복되신 오늘날 은혜를 나리사 만수무강케 하여 주옵소서…’라는 가사로 되어 있었다.
1894년에 그가 간행한 ‘찬양가’에도 고종 탄생을 축하하는 곡들이 있었고, 애국충군적인 찬양가도 포함돼 있었다. 축하 모임은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찬송과 기도로 시작돼 설교와 축가, 주기도문으로 끝났다. 예배는 기독교가 애국과 충성을 권하는 종교인 것과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섬김으로써만 나라가 번영한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권능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면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 기회가 되었다.
왕실과 우호 지속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아스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엄비의 주치의로서 계속 친분을 가졌다. 이때는 김란사가 통역을 하였다. 김란사는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웨슬리안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여학사가 되었다. 그녀는 이화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여성의 지위 향상과 교육을 위해 함께 노력했다.
언더우드는 1897년 봄 의화군(義和君) 강(堈)의 유학을 추진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 의화군은 한때 언더우드의 집으로 피신한 적도 있었다. 이때부터 일제는 언더우드를 미행했다. 고종은 의화군이 미국에 가서 사관학교 교육을 받게 되기를 바랐다.
언더우드는 왕자가 미국에 가서 대학에 갈 준비를 몇 년 하고 대학을 마치면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1년 정도 다닐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미국 해외선교부에 요청했다. 일제는 왕자의 미국 유학을 막으려 했다. 나중엔 언더우드가 왕자를 미국까지 모시지 못했고 가톨릭 신자가 수행하게 됐다. 언더우드는 그 후로도 왕실과 우호적으로 지냈다. 물론 기독교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였다.
(15) 언더우드와 연합사업
하나의 교회 꿈꿨던 교회 연합운동 선구자
언더우드는 초교파주의자였고 연합운동의 선구자였다.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고 에큐메니컬 신학의 터전을 닦았다. 그는 한국에 교파 구별이 없는 하나의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다. 1885년 4월 5일 그와 나란히 제물포항에 도착한 아펜젤러 선교사도 교파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울 정동에 각각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를 세웠으나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했다.
교파 구별 없는 하나의 교회 설립을 꿈꾸다
1888년 1월 1일 그들이 세운 정동감리교회와 정동장로교회(새문안)는 첫 번째 연합기도회를 가졌다. 선교활동을 비교적 자유롭게 시작할 무렵인 1893년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과도한 경쟁을 피하기 위해 협정을 맺었다. 1893년에는 장로교공의회(The Presbyterian Council)라는 연합기구를 조직했다. 미국의 남·북 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등 4개의 외국 장로교선교회가 하나의 장로교를 형성해 하나의 신학교를 세웠다. 남·북 감리교선교회도 나중에 하나의 신학교와 하나의 교단을 이룩했다.
1905년 9월 15일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선교사 150명이 모여 주한복음주의선교부통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조직하였다. 의장에는 언더우드가 추대되었다.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등 모든 교회가 교파 구별 없이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하나의 한국교회 설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들은 이미 1890년부터 조선성교서회(The Korean Tract Society·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세워 교회 서적의 출판을 같이했다. 서회는 언더우드의 집에서 탄생했고 그 자신이 초대, 5대 회장을 역임했다. 그 활동은 그의 아들과 손자에 이르렀다. 초기에는 그가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성경 번역도 타 교파 사람들과 같이 했다.
언더우드 주도 아래 공의회는 학교와 병원도 공동으로 경영하기로 했다.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가 그 대표적인 예다. 주일학교 공과도 같이 사용하기로 했다. 찬송가, 신문도 같이 발행하기로 하였다. 그 전까지 언더우드는 자신의 편찬 노력과 형의 재정 지원으로 찬양가를 독자적으로 발행해 10여년 동안 사용해왔다.
‘그리스도신문’도 일부 동료들의 협조를 얻어 독자적으로 발행했다. 그러다가 공의회 조직을 기해 자신이 주관하던 찬양가와 신문을 중단시켰다. 연합을 위해서였다. 미국의 개신교회는 교파마다 다른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다. 언더우드는 하나의 찬송가가 교회의 일치를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자기애에서 벗어나는 결단으로 한국에서 이런 연합의 결실이 맺어지게 했다.
공의회가 조직되면서 선교사들을 위한 영문 월간지 ‘The Korea Mission Field’도 함께 발행하게 했다. 이 잡지는 주한 선교사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할 때까지 해외에 한국 선교와 교회 소식을 알리는 유일한 월간 언론매체였고, 지금은 한국교회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가 되었다. 교파를 초월한 한국청년운동(YMCA)도 언더우드가 출범시켰다.
선교지 분할, 부흥운동에도 연합
언더우드는 장·감 교파 선교회들이 과도한 경쟁을 피하기 위해 활동 구역을 나눈 선교지 예양을 추진하는 일에 큰 역할을 했다. 이 문제는 근 5년의 세월을 설왕설래하며 흘려보내다 그의 결단으로 확정되고 실행되었다. 그 결과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경상북도는 미국 북장로교가, 함경남북도와 만주는 캐나다 장로교가, 전라남북도는 미국 남장로교가, 경상남도는 호주장로교가, 경기도와 충청도와 강원도 지역은 미국 남북감리교 선교회가 주축이 되어 선교하게 되었다. 서울과 평양 같은 큰 도시는 양 교파가 다 같이 활동했다. 그러나 애초에 바랐던 하나의 교회를 설립하는 일은 이 교계 예양으로 인한 지역분할 고착과 본국 교회와의 관계, 기타 여러 사정 등으로 이룩하지 못했다.
또 하나의 연합운동은 부흥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그는 1909∼1910년 한국 선교 25년을 기리면서 ‘백만명구령운동’이란 부흥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의장을 맡아 주도했다. 당시 이 운동은 목표 숫자에 미달하면서 실패작이었다고 흔히들 규정하고 있지만 1960년대 등장했던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로 시작된 전도운동이나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엑스플로74에서도 애초 목표로 세웠던 숫자가 달성된 적은 없었다.
백만명구령운동 때에는 많은 신도들이 하루를 온전히 전도를 비롯한 사역에 헌납하는 날연보(day offering) 로 헌신 봉사했고, 70만권의 성경이 전국에 배포되었다. 이때는 성경이 전부 번역되지 않은 시절이어서 신약과 쪽복음 위주로 보급되었다. 언더우드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사 55:11)란 말씀을 확신하면서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그런 믿음으로 한 손은 중국에, 한 손은 일본으로 뻗어 한·중·일 3국에 기독교권을 형성해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이런 비전을 통해 교회가 힘을 모으는 데 앞장서고 열정적으로 전도하도록 했다.
(16) 언더우드와 YMCA
젊은 상류층 전도 위해 기독교청년회 설립
언더우드는 선교의 문을 젊은이들과 상류층으로 확대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선교 초기 교회에는 부녀자와 노인이 많았다. 양반 중인 평민 천민이라는 4계급이 뚜렷하던 당시 사회에서 고아나 갖바치, 백정, 기생 같은 천민들이 먼저 개신교와 접촉한 것이다. 하층민들이 교회에 먼저 나오게 된 것은 양반들이 가톨릭을 접했다가 핍박을 받으면서다.
당시 양반 등 상류층은 개신교보다 100여년 앞서 가톨릭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 관심을 갖고 몰려들었다. 하지만 제사 거부를 비롯한 여러 이유들로 장기간 박해를 받았고 1866년부터 수년간 8000여명이 순교하자 같은 서양 종교인 개신교에 대해 문을 닫고 있었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뿌린 기독교 복음의 씨앗은 1894년 청일전쟁을 전후로 서서히 자라났다. 선교사들은 전란 때에도 피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했고 양반들은 이를 지켜봤다. 그러나 하층이 모여 있는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았다. 반상(班常)의 차별이 심해 한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고, 언어에 존대체가 있어 대화를 나누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양반들이 처음 교회에 나올 때는 천민들과 한자리에 앉아야 했기 때문에 변장을 했고 때로는 자기 집 하인을 보고 당황해했다. 언더우드는 이 모든 광경을 목도했다.
지식층 청년을 위해 YMCA 설립
언더우드는 젊은 상류층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을 큰 과제로 여겼다. 그는 ‘청년’이란 말이 없던 시대에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시절을 보내는 청년들을 교회로 이끌 방안을 구상했다. 당시 기독 청년은 주로 하류층으로 150∼200명 정도가 있었다. 서울에는 5만여명의 청년들이 살고 있었는데 조선 청년들은 혈기 왕성한 에너지를 발산할 곳이 없었다. 공원과 도서관은 물론 오락이나 스포츠 활동을 할 수도 없었다. 사랑방에 모여 노름이나 하고 주막이나 드나드는 정도였다.
언더우드는 상류층이나 지식인이 모일 수 있는 기독교청년회(YMCA)를 설립하는 것이 한 방책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아펜젤러와 공동 명의로 뉴욕에 있는 YMCA 국제위원회에 한국에도 YMCA를 설립해 주기를 요청했다. 150여명 청년들의 진정서도 같이 보냈다. 그러자 YMCA 국제위원회가 돕겠다고 회답했다.
회원은 정회원, 준회원, 명예회원으로 했고 이사회는 선교사들과 정회원으로 구성하게 하였다. 실무 간사로는 영국과 미국에 다녀온 한국인을 두기로 하였다. 회관은 아펜젤러의 집을 사용하기로 했다. 200여명이 회원으로 가입하겠다고 청원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종은 정치 단체를 만드는 것으로 오해하고 설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중국 톈진에서 YMCA를 창설했던 라이언(D W Lyon) 선교사가 이 무렵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중국 산둥과 베이징의 서양선교사 189명을 죽인 의화단사건(1900년)으로 중국인들이 선교사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살해하던 시기에 한국으로 피신해 있었다. 라이언은 언더우드를 만나 그간의 상황을 전해 들었고 이를 뉴욕에 보고했다.
뉴욕의 YMCA에서는 훗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존 모트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모트는 실무를 담당할 수 있는 인물로 질레트(Philip L Gillett, 吉禮泰)를 선정하여 파송했다. 그는 지식층 젊은이를 다룰 수 있는 인재였다.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였고 다재다능한 데다 다양한 문화에 대해 열려 있었던 사람이었다. 질레트는 미국 콜로라도대학을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1년 반을 공부한 후 예일대 YMCA에서 전도목사로 봉직한 경력도 있었다.
연희전문 설립의 발판이 되다
한국에 온 질레트는 언더우드 등의 환영을 받고 먼저 한국어 공부에 몰입했다. 주일을 제외하고 주중 8시부터 4시 반까지 1년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이와 함께 어느 계층의 젊은이들을 전도하고 참여시킬 것인지 고민했다. 그는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로부터 현장의 사정을 청취했고 상류층의 젊은이들과 접촉하기로 했다.
그 무렵 조선에는 독립협회 사건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돼 기독교서적을 접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지식인들이 있었다. 이상재 이원긍 홍재기 김정식 유성준 신흥우 이승만 윤치호 전덕기 등이었다. 질레트는 이들을 YMCA로 끌어들여 민족운동의 맥이 이어질 수 있게 하였다. 미국의 백화점왕 워너메이커의 기부로 모금에도 성공해 1908년 종로2가에 회관을 건축했다. 질레트는 청년들과 더불어 등산도 하고 성경반도 조직했으며, 야구 등 스포츠도 한국에 도입했다.
언더우드는 YMCA를 통해 젊은이와 상류층을 교회로 끌어들여 선교의 문을 확장했다. 그는 YMCA 회관의 건축 부지를 마련하는 데에도 기여했고 이사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활동은 마침내 그의 필생의 꿈인 조선기독대학(연희전문)에서 젊은 지식인을 직접 길러내는 데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그 대학의 강의가 YMCA 회관에서 시작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7) 교육 선교
“교육이 곧 선교”… 최초 학생은 고아 2명
언더우드가 한국에서 행한 주된 활동은 교육선교였다. 그는 교육 자체가 선교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교육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원자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학생으로 삼았다. 하지만 다수의 동료 선교사들은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것만을 선교라고 보고 교육은 간접적인 활동이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경영하는 학교에는 기독 신자만 입학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실행했다.
교육이 선교다
언더우드는 애초에 교사 자격으로 입국했고 실제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며 활동을 시작했다. 입국 2개월 후부터는 그의 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공개적으로 전도하러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조용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소임을 다했다. 1886년 5월부터는 정부의 허가를 받고 정식학교를 세워 가르쳤다. 최초의 학생들은 천민인 고아 2명이었다.
이 학교는 언더우드학당 예수교학당 구세학당 민노아학당 경신학당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렇게 이름이 여러 번 바뀐 것은 우여곡절이 심했음을 알려준다. 이 학교는 1890년대 말에 동료 선교사들의 몰이해와 반대로 3년간 폐쇄되기도 했다. 그 기간에는 새문안교회에서 영신학당을 세워 교육선교 활동을 지속했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경신학교의 6대 교장이 되어 직접 학교 경영에 나서기도 했다.
조선 정부는 1888년 언더우드에게 육영공원을 맡아 운영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기독교 교육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사양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대학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후술하려고 한다). 1895년 봄에는 왕비의 명으로 양반 자제를 위한 학교 설립을 요청받았다. 그는 양반층을 전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고 수락했다. 궁궐 부근의 학교 부지와 3만 달러의 건축비가 마련됐으며, 연 2만∼3만 달러의 운영비도 책정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일본인의 만행으로 왕비가 처참하게 시해되면서 이 계획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언더우드는 초등교육에 우선적으로 힘썼다. 크리스천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전도에 가장 효율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쏟은 교육에 대한 열정은 20세기 접어들면서 호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2년에는 장로교선교회에 속한 63개 학교에 845명의 남학생과 148명의 여학생이 있었으나 1909년에는 589개 학교에 1만916명의 남학생과 2511명의 여학생으로 늘어났다.
에비슨과 함께 세브란스 세우다
교육에 관한 그의 관심은 초중등교육에서 고등교육으로 이어졌다. 먼저 1893년부터 동료 선교사인 에비슨(O R Avison)의 노력에 힘입어 제중원이 선교부가 경영하는 병원이 되면서 그 기능이 정상화되었다. 에비슨은 토론토대 의과대 교수였고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였다. 그는 안정된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의 한국 선교 요청에 부응해 내한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상부상조하며 나란히 한국 교육계와 의료계의 선구자가 되었다. 에비슨은 1900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서 선교지에 여러 개의 작은 병원을 두는 것보다 하나의 큰 병원을 운영하는 것이 효율적이란 내용의 연설을 했다.
이에 호응한 스탠더드석유회사의 세브란스(L H Severance)가 거액을 기부, 1904년 병원을 신축하고 나아가 세브란스 의학교도 세우게 되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이때 동료 선교사들은 거액의 기부금은 직접적 복음 선교 활동에 써야 한다며 대형병원 설립에 반대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힘써 에비슨을 지원했다. 언더우드는 그의 집도 아예 병원 근처로 옮겼다.
언더우드는 신학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1890년대 이미 서울에서 신학반을 개설해 한국인 지도자들을 가르쳐왔다. 1901년부터는 평양에서 마펫 선교사 등이 주도해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했는데 언더우드는 교수로 참여했다. 열악한 교통 상황 속에서도 평양까지 가서 하루 7∼8시간씩 집중적으로 강의했다. 이 신학교는 1년에 3개월씩 농번기를 피해 개강해 5년 만에 졸업하는 학제로 운영됐다. 그리하여 1907년 7명의 제1회 장로회신학교 졸업생이 배출됐다. 길선주 한석진 양전백 서경조 이기풍 방기창 송린서는 그해 9월, 한국인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됐다.
한편 성경학교의 설립을 주창하던 언더우드는 1912년 피어슨성경학원이 설립되자 학교부지 마련과 건축을 위해 선교본부와 협의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언더우드는 그곳에서도 가르쳤고 한때 교장으로 일했다. 이 학교는 감리교와 연합으로 운영됐다.
언더우드는 1904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고 회장이 되었다. 협회는 한국 교육 발전을 위해 교과서를 편찬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나아가 당시 시류 속에서 갑자기 늘어난 교회 경영의 학교들을 통솔하고 서로 연결하여 효율적인 성과를 거두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각종 술어를 만들고 용어도 통일했다. 이런 일이 크게 미비했기 때문에 여러 위원회를 조직해 해결하도록 했다. 이런 목적으로 그는 자신의 집을 사무실로 활용했는데 마치 한국 정부의 교육부와 같았다. 언더우드는 이외에도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가 창설되자 그곳 회원으로도 활약했다.
(18) 한국 최초의 총회장
선교 활동 27년만에 장로교 초대 총회장에
언더우드는 1912년 9월 1일 창립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초대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선교사로 와서 한국 최초의 장로회 목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지 27년 만의 일이었다. 원래 장로교회의 행정치리 기구에는 당회(Session), 노회(Presbytery), 대회(Synod), 총회(General Assembly)가 있는데 한국에서는 대회 제도를 두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에서 한국교회 최초 당회장이 되었고, 노회가 처음 조직되었을 때 제1대 회장이 된 사람은 마펫이었다. 언더우드는 이때 안식년으로 미국 체류 중이었다. 그는 귀임 후에 1909년 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후 창립총회에서 제1대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처음 선교사들이 내한했을 때는 기독교를 전할 수 없었고 조직된 교회도 없었다. 1889년 일시적으로 장로교 선교사들의 공의회가 구성된 바 있었으나 1893년에야 미국 남북장로회 선교사들의 장로교공의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캐나다장로교와 호주장로교 선교사, 한국인 대표들이 참석하는 ‘조선장로회공의회’가 구성된 것은 1901년의 일이었다. 당시엔 선교사들이 모든 것을 주관하였다.
언더우드가 총회장이 됐던 이유
1900년을 전후해 한국교회는 급성장했다. 한국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끌어들인 동인(動因)에 관해 언더우드 부부는 먼저 ‘청일전쟁, 콜레라 창궐, 황후 피살, 그 후의 소요, 독립협회운동, 러일전쟁, 일본에 의한 나라 강탈과 식민지화 등 모든 국가적 재앙, 정치적 격동’을 꼽았다. 당시 조선에는 500여년의 사직이 망하는 것을 보고 교회 문을 두드린 사람이 많아 민족적 비운의 시기에 교회는 급성장했던 것이다. 그 다음 성장 요인은 자발적인 기독교 복음 전도와 교육이었다.
한국 교인들은 1907년 평양신학교에서 7명의 졸업생이 처음 배출되었을 때 주체적인 치리 기구를 만들었다. 그해 9월 졸업생을 목사로 장립했고 장로교회 치리법에 따라 처음으로 노회를 조직하였다. 이 노회는 전국에 단 하나밖에 없었고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노회였기 때문에 흔히 독노회(獨老會)라고 부른다. 이 독노회는 한국인 목사 7명, 장로 40명, 선교사 38명으로 구성되었다. 1911년 대구에서 모인 독노회는 장로교 최고 의결기관인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했고, 5개 조직교회당 목사 1인과 장로 1인의 총대를 내어 구성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12년 총회가 구성되었다. 이때 한국 장로교회는 노회 7개, 조직교회 134개, 미조직교회 1920개, 예배당 건물 1438채, 한국인 목사 69명, 외국인 목사 77명, 장로 225명, 세례교인 5만3008명, 총신자 수 12만7228명의 교세를 이루고 있었다.
첫 총회는 평양의 경창리에 있던 여자성경학원에서 장로 221명, 목사 96명(선교사 44명 포함)이 회집한 가운데 직전 독노회장이었던 레이놀즈(W L Reynolds) 선교사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언더우드의 총회장 피선은 첫 선교사의 공적을 예우한 것이었다.
1885년 한국 선교를 시작하여 각 분야 사업의 초석을 놓아 한국교회가 경이적 성장을 할 수 있게 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고, 새로 구성된 총회에서도 그 초석을 잘 놓아달라는 염원의 표시였다. 언더우드는 청년 시절 이 땅에 와서 자신이 뿌린 씨가 다른 선교지들과는 견줄 데 없이 급속히 자라나는 것을 본 당사자이면서 목격자였기 때문에 크게 감격해했다.
해외 선교사 파송 결의
언더우드가 총회장으로서 회의를 진행하면서 사용했던 의사봉을 ‘고퇴’라고 불렀다. 일곱 개의 각기 다른 빛이 나는 나무는 당시 7노회를 상징했고 세 띠를 달아 삼위를 상징했다. 고퇴는 십자가 위의 반석 같은 교회를 상징해 견고한 나무로 제작했다. 이 고퇴는 독노회를 처음 조직할 때부터 사용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의사봉을 망치라고 부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게일이 두드릴 ‘고(鼓)’ 자와 나무망치 ‘퇴(槌)’ 자를 합하여 고퇴라고 정했다.
창립총회에서는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산둥성 내양현에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을 선교사로 파송키로 한 것이다. 동아시아를 향한 기독교 선교는 중국과 일본에서 먼저 이루어졌지만 선교사 파송은 한국에서 먼저 행해졌다. 한국교회는 이 일을 통해 교회는 선교하는 공동체이며, 교인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증인이어야 함을 증언했다.
다른 한편으로 언더우드 선교사가 자립하고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하도록 선교의 씨를 뿌린 수고의 열매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는 이미 처음 노회가 조직되었을 때부터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한 이래 일본, 시베리아, 만주에 선교사를 파송해오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으로부터 받은 유교문화에 대한 보답으로 기독교를 전한다는 마음으로 중국 선교에 임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 정세는 달랐다. 중국은 스스로 대국이라고 자만하고 있었고 이미 유수한 기독교 단체들의 선교사들이 오래전부터 활동해오고 있었다. 그런 중국 땅에 역사가 일천하고 재정적으로도 어려웠던 한국교회가 선교를 수행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의 마음은 어쩌면 1세기 로마시대에 망국의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로마에 전도하러 갔던 심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나라가 쇠망해가는 상황에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었고, 온 신도들이 마음을 합하여 나라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기구를 탄생시켰다. 또 밖으로 해외 선교를 담당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장차 교회가 나아갈 진로를 닦았다. 여기에 첫 총회 조직의 큰 의미가 있다.
(19) 대학설립
4년제 종합대학 체제 연희전문학교 세워
언더우드 교육선교의 정점은 대학 설립이었다. 그는 당시의 조선사회가 개화하지 못한 것은 필요한 지식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신분제도가 철폐돼 누구나 학문과 지식을 넓히면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또 이런 사회 변화에 앞서 사람의 마음을 개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양 지식의 확산을 위해 처음부터 서구식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초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무상 교육에 무상 급식은 물론 목욕까지 시켜줘도 싸늘하게 반응했다. 게다가 교육선교를 경시한 동료 선교사들에 의해 언더우드가 세운 예수교학교가 폐쇄되기까지 했다.
서울에 대학 설립을 반대했던 선교사들
그러나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1905)을 겪고 나면서 서구식 교육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달라졌다. 기독교 인구는 급증했고 교회와 학교, 학생도 늘었다. 배재학당과 숭실학당에서는 대학부가 운영됐다. 언더우드는 초중등 교육기관을 설립한 후 불굴의 의지로 에비슨(O R Avison)을 도와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의 설립을 관철시켰다.
언더우드는 대학 설립을 오랫동안 계획하고 추진해 왔다. 1889년에 이미 대학 설립 문제로 조선 정부와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명성황후와도 1895년 논의를 거쳐 실현을 앞두고 있었으나 시해사건으로 허사가 되었다. 그가 꿈꾼 대학상은 초교파적 종합대학을 서울에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뉴욕대학을 모델로 해 일본의 도쿄대학보다 더 좋은 대학을 세우려고 했다.
본격적으로 대학 설립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06년이었다. 그는 서울과 평양에 두 개의 대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선교본부 곧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와 서울 주재 선교사들은 언더우드의 대학 설립 안에 동조했다.
반면 평양의 마펫을 비롯한 대부분의 주한 장로교 선교사들은 서울에 대학이 설립되는 것을 반대했다. 장로교선교회와 감리교선교회가 이미 합의해 평양 숭실학당에서 대학부를 운영하고 있었고 평양에 기독교인들이 더 많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숭실은 1905년 대한제국의 대학 인가를 받았으나 1910년 일본과의 강제 병탄으로 새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이후 1925년에야 숭실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주한 선교사들은 대학을 둘 장소를 서울로 할 것이냐 평양으로 할 것이냐를 두고도 근 10여년을 끈질기게 싸웠다. ‘대학 문제(College Question)’라는 용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그들은 극렬하게 대립했다. 언더우드는 한국인의 서울 선호사상을 간파했다. 서울에 꼭 대학을 설립해야 할 이유로 서울이 한국의 수도이자 정치 경제 문화 외교 지리의 중심이고, 각 선교부의 한국선교회가 모두 서울에 있으며, 교육시설이나 철도를 비롯한 교통 등 모든 게 서울에 집중해 있다는 점을 내세웠다.
그러나 전체 선교사의 3분의 2는 평양을 선호했다. 총독부의 사립학교 규칙 개정으로 학교 채플에서 종교의식을 갖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총독부가 한국에서의 기독교 전파를 두려워해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채플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내부의 반대와 외부의 억압으로 대학 설립은 자꾸만 지연되었다.
언더우드는 동료 선교사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본국의 해외선교부 지도자들과 주한 남북감리교 선교회원들과 보조를 같이 해 동료들을 설득했다. 그런 어려움 때문에 그의 친정 격인 북장로회의 재정 지원을 받지 못했고, 휴양차 간 안식년 기간에 미국 전역을 두루 다니며 모금활동을 펴기도 했다. 모금 캠페인은 성공적이어서 5만2000달러가 축적됐다. 그의 형이 거액을 기부해 대학 부지 기금도 마련했다.
연희전문학교로 인가 받다
언더우드는 마침내 1915년 경신학교 대학부란 이름으로 개교해 YMCA 건물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학교는 일제 당국과의 마지막 교섭 단계에서 1917년 4월 7일에야 대학령이 없다는 이유로 대학이 아닌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문과 상과 농과 신과 수학과 물리학과 응용화학과를 두었고 ‘조선크리스천칼리지(Chosen Christian College)’란 영어 명칭을 붙였다. 학교의 조직이나 구성 과목 수업 연한도 4년제 종합대학 체제를 취했다.
그 후 1923년 경성제국대학 설치를 위해 총독부가 대학 설치령을 제정하자 연전 측은 연희전문, 세브란스의전, 감리교신학교, 피어슨성경학교를 묶어 종합대학 설립을 신청했다. 해외에서도 해외선교부 등이 이 일을 위해 모금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조선에서는 경성제대 하나로 충분하다는 이유로 연전의 대학 설립 청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언더우드가 바라던 종합대학은 해방 후인 1946년에야 연희대학교(Chosen Christian University)의 설립으로 성취됐다. 1957년에는 세브란스의대와 통합해 연세대학교로 재창립, 그의 꿈이 성취됐다.
연희전문학교의 창립 정신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학문과 기술을 연마해 국가와 민족을 지도하며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 데에 있었다. 만일 기독교 신앙인들만 양성하려 했다면 신학교만 세워야 했을 것이다. 언더우드가 종합대학을 고집한 것은 민족을 구원할 인물을 길러내기 위함이었다.
(20) 언더우드 정신 계승
그가 이 땅에 심은 비전, 세계 복음화 열매로
언더우드는 필생의 선교사업인 대학 설립의 꿈을 이뤄냈다. 그 과정에서 동료 선교사들 다수가 반대했고, 이런 까닭에 그의 친지들은 그에게 선교회를 탈퇴하고 독자적으로 추진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그는 교단 선교회를 떠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교단 선교회까지 참여케 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회의 하나 됨을 구현했다.
57세의 나이로 별세
이러한 에큐메니컬 정신은 연세 신학의 전통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그는 건강을 잃었다. 일본 조선총독부의 교육 시책도 건강 악화를 부추겼다. 그 시책이란 총독부가 일본어 구사를 교육 현장의 수장이 되기 위한 필수요건으로 정한 것이었다. 그에 따라 언더우드는 일본어를 습득하기 위해 도쿄의 일본어학교에서 매일 9시간씩 정규수업을 받은 것 외에도 아침과 저녁에 개인교습까지 받으면서 강행군을 했다.
그 무렵 한국으로 보낸 편지에서도 그는 위장이 나빠 음식의 소화도 힘든데 일본어까지 소화하려니 더 힘들다고 하는 재치 있는 글을 남겼다. 건강이 악화되자 일단 한국으로 돌아와 급선무를 처리한 다음 미국으로 치료를 받기 위해 떠났다. 미국에서는 누이의 집에 머물다가 뉴저지의 애틀랜틱시티로 옮겨 요양했다.
그는 병상에 누웠어도 기력을 다할 때까지 새 대학의 발전을 위해 사람을 만났고 비서를 통해 업무를 처리했다. 그는 삶의 마지막 해인 1915년 4월 1일부터 1916년 4월까지 1년여 동안 2300통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편지를 썼다. 이때 그는 조선기독대학장 외에 전국주일학교대회장, 피어슨성경학원장, 성경개역위원장, 조선예수교서회 실행위원장, 새문안교회 목사 등 여러 직책을 맡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결국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30분 애틀랜틱시티에서 5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한국 선교 31년 만이었다. 그의 유해는 그를 파송했던 뉴욕 브루클린의 라파엣교회 묘지에 묻혔다. 고종은 그의 공을 기려 태극훈장을 내렸다.
한국 정부는 다시금 1963년 광복절 18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상을 내렸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27년 새문안교회당 안에 기념비를 세웠다. 연세대학교는 교정에 그의 동상을 3번이나 다시 세웠다. 1928년 처음 세운 것은 일제 강점기 말에 공출당했다. 두 번째는 1948년 10월에 세웠다가 인민군에 파괴당했다. 세 번째로 1955년 4월에 세운 것이 현존하고 있다. 그는 죽어서도 그의 동상을 통해 한국 민족의 수난을 함께 겪었다.
‘한국은 나의 조국’
그의 비문에는 ‘Messenger of God’(하나님의 사자), ‘Follower of Christ’(그리스도의 추종자), ‘Friend of Korea’(한국의 친구)가 새겨있다. 문구는 그의 삶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명령을 좇아 이 땅에 왔다. 한국 근대화와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해 한국의 친구가 되었다.
비문 말미에는 정인보 선생이 쓴 “뉘 박사의 일생을 57세라 하더뇨? 박사 의연히 여기 계시도다”라는 글귀가 있다. 이 비문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의 정신과 비전, 뜻이 계승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더우드 사후에도 그의 형은 오늘날 연세대의 본관인 언더우드관을 짓도록 건축비 전액을 희사했고, 그의 후손들은 지금까지 4대에 걸쳐 연세대와 한국 땅에서 봉사하며 그의 뜻을 계승해오고 있다.
언더우드는 임종 하루 전에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의 바람은 뒤늦게나마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이장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는 청년기 이후의 생애를 한국에서 보냈고 ‘한국도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라고 고백했다. 언더우드의 정신과 비전 희생 봉사는 계승되어야 할 한국교회의 유산이요 전통이며 사명이다.
그는 교세가 미약했던 1904년 한국선교 20주년 기념 선교대회 연설에서 ‘기독교한국(A Christian Korea)’의 꿈을 피력했다. 그의 소망대로 한국교회는 선교대국이 됐다. 그는 당시 장차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넘어 선교를 주도하리라고 보았다. 놀라운 선견지명이었다.
필생의 과업인 대학 설립의 꿈도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으로 실현되었다가 해방 후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대가 통합하면서 연세대로 발전했다. 교명 연세(延世)는 세계로 뻗어간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연세대는 인천 송도캠퍼스에 외국인을 위한 영어 전용 신학대학원을 세워 한국신학의 세계화를 꿈꾸고 있다. 1885년 인천을 통해 들어왔던 복음의 씨앗이 이제 인천을 통해 세계 복음화의 열매로 나가게 된 것이다.
“주 강생 천 팔백 팔십 오년 사월에 박사 이십오세의 장년으로 걸음을 이 땅에 옮겨 삼십삼년 동안 선교의 공적이 널리 사방에 퍼지고 큰 학교로는 연희전문이 이루히니 그럴 사 박사 늙으시도다. 신학문학의 높은 학위는 박사 이를 빌어 무거움이 아니라 얼굴로조차 얼른 살피기 어려우나 이렇듯이 연세보다 지나 쇠함을 볼 때 누구든지 조선 민중의 믿음과 슬기를 돕는 그의 평생을 생각할지로다. 베푼바 날로 늘어감을 따라 우리의 사모-갈수록 깊으매 적은 힘을 모아 부은 구리로서나 방불함을 찾으려함이라 뉘 박사의 일생을 오십칠세라 하더냐 박사 의연히 여기 계시도다.”(정인보)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연구교수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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