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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모, 그리고 보육사
서은혜
저녁 일곱 시 이십 분. 다른 지역에서 업무상 교육일정이 잡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차를 타고 출장을 다녀왔다.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꼭대기층이었다. 초등학생 막내가 보이지 않았다. 작은방 문을 열어보니 녀석이 불도 켜지 않고 침대 위에 몸을 옹크리고 있다가 나를 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은 눈이 빨갰다. 부엌에서는 진주이모가 늦게 들어온 나를 위해 밥그릇에 비빔밥 재료를 얹고 있었다. 혹여 아이가 진주이모에게 꾸중을 들었다고 울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엉뚱한 말로 어르고 달래는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방문을 닫고 조심스럽게 나왔다.
그 사이 중학교 다니는 둘째는 식탁 앞에 혼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학교에서 축구 하느라 힘들었다며 오늘 있었던 일을 슬그머니 꺼내놓았다. 평소에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내아이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너는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경기 팀을 짤 때마다 은근히 인기가 있더라” 하면서 맞장구를 치자 아이도 덩달아 배시시 웃었다. 낮의 일이 다시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런 둘째가 대견해서 등을 두들기고 장난도 좀 치는 와중에 방안에서 혼자 울고 있을 막내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선생님, 막내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학원 다녀와서 내내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저렇게 울기만 하고 있어요. 학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에요. 선생님, 늦게까지 출장 다녀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식사부터 얼른 하세요. 막내가 일어나서 밥 먹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아야 저도 마음 놓고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 그렇다. 나는 이 아이들의 엄마가 아니다. 여기는 내 집도 아니다. 여기는 그룹홈이고 나는 여기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다. 보육사라고도 한다. 그룹홈은 원가족과 함께 살기 어려운 아이들이 가정과 유사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만든 사회복지시설이다. 건물을 크게 지어서 몇십 명씩 공동생활을 하는 아동양육시설과는 모양과 성격이 다르다. 가정과 유사한 형태를 만들기 위해 지역사회 안의 주택이나 빌라, 아파트 등에 간판도 없이 살림을 꾸리고 사회복지사 서너 명이 일곱 명 이내의 아이들과 함께 365일 24시간을 돌아가며 함께 잠자고 밥을 지어 먹으며 생활한다. 그룹홈에 따라 아이들이 사회복지사를 엄마라고 부르는 곳도 있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는 모양이지만, 여기서는 우리를 이모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는 그중의 한 명이다. 그날 그 시각, 월급에서 떼어낸 돈으로 빚을 갚으며 기거하는 또 다른 집에서는 남편과 내가 낳은 두 딸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윽! 딴 집 냄새!“
퇴근해서 집에 들어설 때마다 둘째딸은 나를 끌어안다 말고 이런 소리를 하고는 했다. 그것도 정색을 하고. 내가 그룹홈에서 일을 하고나서 이 년 정도가 될 때까지 아이는 매번 이렇게 반응을 했다. 이박삼일씩 다른 공간에서 먹고 자고 하다보면 그곳의 냄새가 온몸에 배는 모양이었다. “엄마가 돌아올 때마다 다른 집 냄새가 퍼지기는 해.” 대학생이 된 첫째딸이 이 정도로 덤덤하게 대꾸하는 것에 비해 중학생이던 둘째딸의 반응은 늘 사나웠다. 며칠씩 일하고 돌아온 엄마한테 이러기냐고 서운한 마음이 들기보다는, 정말로 바람피고 온 사람처럼 머쓱한 마음이 들고는 해서 나도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그룹홈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집에서 절대로 꺼내지 마세요. 나는 하나도 듣고 싶지가 않거든요.”
“난 정말 엄마가 그룹홈에서 일하는 거 싫어하지 않는다니까. 그래도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마! 아무래도 엄마는 에너지가 다 닳도록 열심히 할 것 같지만.”
존댓말을 썼다가 반말을 썼다가, 나를 끌어안았다가 떠밀었다가, 둘째가 오락가락하며 말했다.
“그룹홈에서 아이들이 엄마를 ‘이모’라고 부른다고? 다행이네.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아무도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게 해서는 안 돼. 엄마는 어디까지나 우리 엄마니까.”
사춘기 딸아이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꿀렁꿀렁 요동을 치며 나를 뒤흔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둘째 딸의 걱정과는 달리 그룹홈 아이들은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룹홈에 처음으로 ‘입소’를 하게 된 아이들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이모’라고 부르는 데에도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선생님, 아, 아, 이모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니야. 호칭은 네 마음이 괜찮아질 때까지 편하게 써도 좋아.”
저녁 식사 준비를 도우며 식탁에 숟가락을 놓던 여자 그룹홈의 고등학생 둘째가 눈을 흘기며 끼어들었다.
“뭐야. 집안에서 우리 이모한테 선생님, 선생님 하는 거 듣기 불편해. 당장 고쳐줬음 좋겠어.”
새로 들어온 열여섯 살 아이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며칠간 어떤 호칭도 사용하지 않았다.
남편과 두 딸 아이는 내가 그룹홈에서 수퍼스타급 인기를 구가할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자 아이들이 사는 그룹홈에서는 이 년 밖에 지내지를 못했고 남자 아이들이 사는 그룹홈으로 옮긴 것도 이제 겨우 일곱 달이 되었을 뿐이다. 그룹홈 경력이 길지 않은 처지라 이모들이 아이를 낳는다고 육아휴직을 할 때마다 잠깐씩 자리를 대신 하는 통에 법인 안에서 부득불 집을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 가정과 유사한 그룹홈 환경에서 일하는 이모들은 사표를 쓰지 않는 이상 아이들 곁을 옮기는 것을 끔찍하게 여긴다.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거나 동생을 때려놓고도 시치미를 뗄 때 꾸지람을 하다 보면 대번 알 수 있다. 아이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나는 여자 그룹홈에서 이 년쯤 지내고 나서야 아이가 내 말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느낌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말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아이와 나 사이에만 존재하는 어떤 공기였다. 아니, 그제야 단단한 끈 같은 것이 우리 둘 사이를 묶어준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일곱 달 본 나를 보고 아이들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를 거라 생각하는 일은 괴이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관계를 생각보다 쉽게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그룹홈에는 나 말고도 두 명의 사회복지사가 더 있다. 사랑을 더 받으려고 아득바득 기를 쓰는 아이들 못지않게 이 세 명의 어른들이 벌이는 보이지 않는 공방전도 장난이 아니다. 인정, 애정, 이런 게 사람을 참 치사하게 만든다. 그 치사함이라면 나도 빠지지 않는다. 갖은 친절과 애정 공세로 아이들의 마음을 싹 다 그러잡을 심산이었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그간 읽어온 책을 들먹이며 지적인 매력 공세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고등학교 다니는 첫째가 이러는 거다. “이모, 진짜 부담스러워요!” 내가 쓸 수 있는 최고 풀파워로 나섰는데도 매번 밀리는 상황을 보면서 진짜로 도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호락호락한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시간과 비례하는 마음의 크기를 앞지를 그 무엇도 아이들은 허락하지 않았다.
밤 아홉시 이십 분. 진주이모도 퇴근하고 없는 시간, 거실에 내려앉은 공기가 제법 고요하고 묵직해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간식 먹느라고 뒤늦게 내놓은 그릇들을 설거지하는 사이 싱크대에 놓아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대학생이 된 큰딸 전화였다. “어, 하연아. 무슨 일이야?” “응, 엄마한테 그냥 한번 전화해 봤어.” “에이~ 진짜로 할 말이 없는데 전화했어?” 그 사이 거실에서 고등학생인 첫째도 나에게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내일 아침에 깨워달라고? 몇 시에?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고?” 순간 수화기 너머 큰딸이 내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아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그 이상하고 무거운 정적에서 싸한 기운 같은 것이 전해졌다. 아뿔싸. 집에서는 피곤하다고,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고 싶다고, 먹는 건 다들 알아서 챙기라고 소리소리 지르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서운한 마음이 든 건가. 배신감 뭐 이런 건가. 몰라. 엄마 일하는데 얘는 왜 전화를 걸어 가지고. 사람 정신 빠지게.
밤 아홉시가 되면 모두 방에 들어가서 잠을 자기로 했지만, 두 시간 가까이 울음을 터뜨린 막내와 진이 빠지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거실에 너저분하게 굴러다니는 세간살이들을 대강 치우고, 부엌 한켠에 치워둔 음식물 쓰레기통을 밖에 내다놓고, 이 방 저 방 숨겨 두었던 게임기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면서 시시한 농담을 조금 나누는 사이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끼리 한 달에 한 번 가족회의를 열어서 밤 아홉 시에는 꼭 자도록 하자, 집안 청소도 조금씩 맡아서 돌려보자, 온갖 규칙을 다 세워보아도 어른이 중간에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규칙이고 뭐고 모든 것이 없는 것처럼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가습기에 물 채운 거 확인하고. 다들 방에 들어가서 이제 자는 거다. 옳지! 이모도 이제 진짜 자러 간다.”
방문을 닫고 하루종일 미뤄두었던 행정업무를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아니, 큰 딸한테 다시 전화를 해볼까 말까 고민을 하던 순간이었다. “이모! 텅텅텅” 막내가 나를 부르며 방문을 두드렸다. “막내야 무슨 일이야?” “이모, 저 이빨이 빠졌어요.” 문을 열자 막내가 검지와 엄지 사이에 빠진 이를 집어 들고 나에게 내밀었다. 이가 빠진 자리를 “이~”하고 내밀어 보이기까지 했다. 아래쪽 어금니였다. 그때 나는 그 빠진 이와 이가 빠진 자리를 보고 “우와”하고 탄성을 질러 줄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뚜렷이 자각하면서 현민이를 쳐다보았던 것 같다. 아이가 그러기를 기대하면서 온 거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날 하루종일 미뤄두었던 그 어떤 서류업무들보다 집중해야 할 순간이었다. “밑에 새 이가 나고 있구나. 아프지는 않아?” 깨끗한 거즈를 뭉쳐서 피가 채 마르지 않은 잇몸 위에 꼭꼭 얹어주었다. “이제 꽉 물어봐. 옳지.” 막내는 그제사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미소를 지으면서 방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비비안 마이어라는 사진작가와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라는 주인공에게 빠져 살았다. 가진 재능은 많지만 남들이 보기에 하찮아 보이는 직업 때문에 어딘가 모를 곳에서부터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이었다. 비비안 마이어는 평생을 독신으로 남의 집을 전전하며 보모, 가정부로 일하면서 수십 만 장의 사진을 찍어온 사진 작가였다.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는 노벨상을 수상하는 프로젝트에 기여를 하지만 어쩌다 생활고로 세차장에서 투잡을 하는 고등학교 화학교사가 되었다. 이후 실력과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집어삼킨 나머지 남은 삶을 모조리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능력은 화려했다.
그룹홈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가진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이모’라는 호칭에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아이가 “이모”하고 불렀을 때 “오이야”하고 대답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아이와 평생을 함께 할 수도 없으면서 ‘엄마’라고 불리는 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아이의 보호자이면서도 아이가 어디서나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도록 놔둘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이모’하고 부를 때의 그 포근하고 끈끈한 거리감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모’는 잘 모르는 여성을 친근하고 편하게 부를 때, 심지어 야동에서조차 나이 좀 있고 만만한 여성을 부를 때 온갖 다양한 뉘앙스를 담아 사용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그룹홈에서 일하고부터 블라우스에 스커트, 하이힐, 만년필 챙긴 핸드백을 착용하고 출근하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사시사철 땀이 나도 금방 마르고 어떤 자세를 취해도 쫙쫙 늘어나는 재질의 티셔츠와 고무줄 바지가 딱이었다. 가방은 늘 백팩을 멨다. 하루나 이틀 묵을 옷가지와 짐들을 들고 다니다보니 어깨끈 넓고 넉넉한 사이즈의 백팩을 메야만 만원 버스든 만원 지하철이든 마음 놓고 다닐 수가 있었다. 아이가 부르면 언제 어느 때고 뛰어나갈 수 있도록 운동화를 신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씩 거울을 볼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딘가로 추락하는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직장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이 오랜만에 만나 인사하면서 그랬다. 외모가 많이 바뀌었다고, 왜 그런 곳에서 고생을 하느냐고. 나쁜 뜻은 전혀 없는 말이었다. 오히려 애정을 가득 담은 말이었다. 그래서 얼마간은 아팠고 얼마간은 고마웠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누가 들으면 비웃을까봐 혹은 쭈글스러워 보일까봐 혼자만 하고 말던 생각들이다. 돌봄 노동의 하찮음 때문에 어떤 혼란과 콤플렉스 같은 것에 시달려왔던 것 같다. 나는 그룹홈에서 임금을 받고 아이를 돌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을 짓는다. 하지만 집에서 두 딸아이를 낳아서 직장을 그만두고 똑같은 일을 할 때는 사회로부터 아무 일도 안 하는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칠 년이 넘는 그 시간은 내 이력서에 적을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무보수 노동, 아무 대가 없이 치러지는 사랑의 행위라고 했다. 엄마가 무급에 대가 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라면, 임금을 받고 아이를 보는 보육사는 대가를 받는 노동자라서 사랑이 부족한 존재가 되는 걸까. 아니다. 보육사의 처우는 같은 사회복지계 안에서도 사회복지시설종사자 인건비가이드라인의 적용을 받은 적이 없다. 사랑의 행위는 늘 그렇게 뭘 받지 않거나 덜 받아야 증명이 되는 걸까. 그런데 나는 왜 거울을 보거나 누군가를 의식할 때마다 추락하는 느낌이 드는 걸까. 소리 없이 함정에 빠져서 혼자 허우적거리고는 했다.
정체성이 패션처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보육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거울을 볼 때마다 불안함에 시달리는 걸 보면 뭐 대단한 걸 성취할 수 있는 자리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아이들과의 관계에 놓였을 때의 내가 나는 가장 좋다. 나는 나 하나지만, 어떤 사람과 함께 관계를 맺고 서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 표정을 짓고 다른 말투를 쓰고는 하는데 나는 그룹홈에서 아이들과 있을 때 내 모습을 스스로도 꽤나 편안해 하고 좋아하는 편이다. 아이들 앞에서는 거짓 웃음을 짓지 않아도 된다. 꾸미지 않아도 아이들이 다 받아준다. 그럴 때마다 나는 표현하기 힘든 고마움 같은 것을 느끼고는 한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나를 꽤나 괜찮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줄 때마다 뭔가 이상한 감정이 생기는데, 날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것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기대가 그리 크지는 않은데, 거기에 부합하는 사람으로 계속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나를 키운다고 해도 크게 다른 말은 아닐 것 같다.
시계를 보지 않았으나 아주아주 깜깜한 밤. 막내는 괜찮을까. 잇몸에 꽂아준 거즈를 갈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괜히 걱정이 되었다. 모니터 앞에 앉아 행정업무를 시작하려다 다시 일어났다. “이게 뭐야. 아직도 안 잤어? 일단 거즈는 새로 갈자. 이번에는 조금 있다가 쓰레기통에 싹 뱉어내고 진짜로 자는 거야.” 녀석이 아직도 안 자고 놀다가 들킨 게 민망해서 자꾸만 싱글거렸다. “어유. 책상 위에 얹어둔 이 코딱지 같은 것들은 뭐야? 이러다가 집어 먹겠다. 이모가 치우고 갈게.” “이모, 안 돼요. 코딱지 같은 건 절대 버리면 안 돼요! 내가 아주아주 정성을 다해서 만든 거란 말이에요.” “알았다. 놔두고 갈게. 잘자.” 아마도 내가 오늘도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좋아하는 이유를 나 스스로에게 해명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일이 그렇게 하찮지 않음에 대해서 스스로를 설득해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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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는데 빼기를 신경쓸 겨를도 없이 쓴 글이라, 회원 분들께 많이 많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꽤 긴 시간 쓸 수 없었던 내용의 글을, 심지어 몇 달간 소재와 상관없이 완결된 된 글을 한 편도 쓰지 못하고 지냈던 제가, 드디어 행간을 통해서 한 편을 완성할 수가 있었어요. 이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모를 정도로... 넘나 감사하고 행복하고 좋습니다.
계간지 <epiic>측으로부터 2023년 1월에 실을, 보육사의 내러티브 논픽션 한 편( 200자 원고지 80매 이상)을 써달라고 부탁을 받았는데요. 그런데 글이 써지지 않아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일단 이신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A4 4장 분량은 한번 써보았습니다. (조금 넘기는 했습니다;;;)
오늘까지 완성한 분량에 이어 '아이들의 내밀한 정보' 기타 등등의 산을 넘은 그룹홈 안에서의 '환멸'과 보육사가 느끼는 '마음의 바닥'까지 추가로 엮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다음 합평 시간에는 200자 원고지 80매 정도의 완본을 한번 합평 받아보고 싶습니다!
---- 완본의 원고도 4장 분량의 원고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메인 주제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쓸 때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조금 초조하기도 합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스스로에게도 아직은 더 들어봐야 할 단계라는 생각도 들고요. 4장을 써도 이런데... 10장 정도의 분량을 하나의 주제로 짱짱하게 땡겨내는 것. 저에게는 그것이 남은 과제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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