奉事公實記 墓表 盧光履 撰 公諱弘勛字伯建李氏載寧之世也五世祖茅隱先生諱午麗亡歸隱于咸州茅谷終身不出有子曰介智亦不仕以詩禮成家三子皆種學績文曰孟賢仲賢幷副提學曰季賢薦司議居家養親不樂仕進司議生琮主簿生喜億有隱德是娶晉陽河氏壽碩女以嘉靖甲寅生公公生有異姿長慷慨有志節奮義壬辰亂官軍資監奉事忠武公李舜臣嘗南遊主公家咨議禦敵方策稱之以此地主人盖湥許之也從父弟南溪公蕃引風軒公蕡亦從郭忠翼公再祐倡義旅有功同堂之內蔚然並作時論多之公娶驪陽陳氏敎授克一女生三男長支厦宣敎郞次承厦主簿季擎厦宣敎郞仲季不育長房有六男榮國明國貞國經國揚國寧國經國出后承厦揚國出后擎厦曾玄內外男女不盡錄 公墓在雲谷新山酉坐陳氏墓大壯藏洞先兆下酉坐七世孫某等將竪石墓道徵文於光履弟以狀德之文佚於兵燹家乘所錄頗恨其零星光履曰無傷也公旣見知於忠武公一言足以重公昔吾夫子題季札之墓無也剩辭但曰嗚呼延陵季子之墓只此一句季子之名益重是何必多乎哉是何必多乎哉公後裔蕃衍又多淳謹雅飭惟懼其有忝于先歷世餘蔭尙有未艾幷可書也 (安陵忠義錄에서)
| 노광리(盧光履) 撰 공의 휘는 홍훈(弘勛), 자(字)는 백건(伯建), 이씨인데 재령세가이다. 5세조 모은선생 휘 오(午)가 려망하니 함주의 모곡으로 돌아와 자취를 감추고 종신토록 세상에 아니나갔다. 아들 개지(介智) 또한 벼슬하지 않으면서 시례(詩禮)로써 성가하다. 아들 셋이 종학적문(種學績文)했으니, 맹현(孟賢),중현(仲賢)은 함께 부제학이며 계현(季賢)은 천(薦)으로 사의(司議)인데 거가하면서 양친(養親)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의의 아들 종(琮)은 주부(主簿)이고 주부의 아들 희억(喜億)은 은덕이 있었으며 진양하씨 수석(壽碩)의 따님을 취(娶)하였는데 가정(嘉靖)갑인년(1554년)에 공을 출생하였으며, 공은 나면서부터 자태(姿態)가 남달랐으며 강개(慷慨)한 뜻과 유지절분(有志節奮)하여 임진난에는 군자감봉사(奉事)로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일찍 남유하였을 적에 공의 집을 주인삼았는데 어적(禦敵)의 방책을 논의드리니 이곳의 주인이라 칭하였으며 무릇 깊이 허지(許之)하였다. 종부제(從父弟) 남계공 번(蕃)과 인풍헌공 분(蕡)은 또한 곽충익공(郭忠翼公) 재우(再祐)를 추종하였으며,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으니 같은 당내에서 울연(蔚然)함을 함께 이루었다는 시론이 많았다. 공은 여양진씨 교수 극일(克一)의 따님을 취(娶)하였는데, 삼남의 장(長)은 지하(支廈)이니 선교랑이요, 차(次)는 승하(承廈)인데 주부요, 계(季)는 경하(擎廈)인데 선교랑이다. 중과 계는 후사가 없었으며, 장방(長房)의 6남에는 영국(榮國), 명국(明國), 정국(貞國), 경국(經國), 양국(揚國),녕국(寧國)이다. 경국은 승하에게 출후했고, 양국은 경하에게 출후했다. 증현(曾玄)과 내외 남녀는 모두 기록하지 아니한다. 공의 묘는 운곡 신산 유좌(酉坐)이고 진씨 묘는 대장동 선조하(先兆下) 유좌(酉坐)이다. 7세손 모(某)등이 묘도비(墓道碑)를 세우러 하여 광리(光履)에게 징문하려고 찾아와 상덕지문(狀德之文)을 제시하니 병난(兵亂)에 타다가 남은 것 뿐이므로 가승(家乘)의 기록에 의할 수밖에 없으니 자못 한됨은 그 영체(零替)함이다. 그러나 광리는 마음 아파하지 않았음은 충무공께서 공을 중히 여겼던 일언으로 족하며 지난날 오부자(吾夫子)도 계자(季子)의 묘에 넘치는 말씀이 없으셨다. 단왈(但曰) 오호(嗚呼)라. 연능(延陵)의 계자(季子)의 묘에는 다만 일구(一句)가 있을 따름인데도 계자의 이름은 중했으니 여기 꼭 많아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공의 후손은 번연(蕃衍)하고 또 순근(淳謹)하고 아절(雅節)함이 많으니 오직 선영(先靈)에 누됨이 있을까 두려워할 따름이다. 세대를 거치면서 아직도 여음(餘蔭)에 아름다움이 있음을 알리니 이를 아울러 기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