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리님 : 상황적 지식, 겸손한 목격자의 언어가 영감과 희망을 주었다고 말씀하시면서 대화의 문을 열어 주셨다.
이신정 선생님의 해러웨이에 대한 질문들
도나해러웨이 여신이 되기보다 사이보그가 되겠다는 선언
순혈주의 순수는 없다. 우리 몸에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이물질을 몸에 이식하고 살아간다.(임플란트, 실리콘, 인공관절 등등)
무한한 타자와의 접속과 경계를 허물면서 접합하고 연대하는 것이 인간이 궁극적으로 할 일인가 하는 질문
이분법을 해체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소쉬르의 언어학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 그들이 발견해 낸 것은 언어가 빠롤과 랑그로 나위어져서 랑그에 의해 빠롤이 제한된다 즉 문법에 의해 발화하는 행위는 구조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는 것
이분법에 의해 나뉜 것(빛과 어둠, 남자와 여자)이 문제가 되는 것은 늘 어느 하나가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런 이항대립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계속 발명, 발견해야 한다는 것, 이성애, 동성애, 간성 등 이런 차이를 왜 존중하지 않나, 그 수많은 차이를 우월과 열등함으로 나눌 수 없다. 그런데 이 무한한 차이들과 취약한 것에 나를 열 뿐 아니라 인간 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 인간과 기계, 종이 다른 것까지 결합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하는 인간인가 핵심을 놓칠 수도 있다.
내가 무엇을 하는 인간인가가 먼저 선 다음에 연대해야 한다. 하나에 충실하는 것이 빠지면 얼마든지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다. 차이에 대해 판단을 해서는 안되는가?
해러웨이와 세 남자와의 동거가 자기가 제창한 이론의 모형이라면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다.
사랑은 노고다. 내가 훼손되는 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인간이 자기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다자간의 관계, 차이에 대한 관대함이 열어 제낀 새로운 지평은 인정하지만 너무 나가는건 아닌가? 차이에 대해서 판단을 해야만 하는 때도 있다.
민아님의 해러웨이를 위한 변호
상황적 지식이 지식 상대주의(아무 것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얘기하고 있다. 윤리적인 원칙없이 폴리가미를 한 사람만은 아니고 굉징히 헌신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지식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면밀하게 관찰한 사람이다.
겸손한 목격자를 키워드로 잡은 이유
자기의 한계와 내가 보기 전에 보여지는 존재라는 것을 먼저 의식했던 존재, 본다는 위치성을 의식하게 하는 것이 목격이다.
구영주님, 사이보그종을 창조한 해러웨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기존의 질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하고 규정했다는 것이 주체적인 행위였다라고 생각. 건강한 욕망으로 본다.
종미님, 사이보그종과 다자간의 사랑은 인정은 하지만 크게 와닿지 않았다. 상처에 대한 목격의 진실과 상황적 지식이 가장 와 닿았다.
겸손한 목격자에 대해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이신정 선생님께서 키워드로 뽑으시기도 했지만 나에게도 머릿속에 양각으로 새겨진 문구였기 때문이다. 해러웨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물고 넘어가려 했는데 중간에 갑가지 '독후감을 못 쓰신 분! 겸손한 목격자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보라'고 하셔서 깜짝 놀랐다. 굳이 숨어 있는데 왜 불러 내셨을까? 그 때의 횡설수설을 떠올리며 겸손한 목격자를 다시 생각한다. 나는 겸손한 목격자가 얼마나 엄중한 말인가를 깨닫는다. 나는교만한 맹인일까봐 두려웠다(겸손한 목격자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해서)
해러웨이가 이신정 선생님과 다른 모든 학우들을 경유해 암죽식 수업으로 나에게 이런 울림을 전해준 점이 이번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고 듣고 쓴 뒤에 얻은 소득이다.
첫댓글 분명 하실 말씀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잘 이야기해 주셨구요. 직접 발제를 했을 때와 다른 사람이 한 발제를 듣기만 할 때, 텍스트는 분명 다르게 다가온다고 생각해요. 맴돌면서 고여 있던 말이 밖으로 꺼내질 때, 그 발언의 의미는 사후작용처럼 배가되는 듯합니다. 내가 한 말에 대해 또 다시 곰곰이 생각하게 되니까요. 거칠지 않고 세심하게 써 주신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겸손한 목격자, 겸손한 청강자의 거칠지 않은 후기인데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얘기를 듣고 특히 감명, 감화 받았던 지점이 같은 것도 좋지만 조금씩 다르고 그 인용의 늬앙스도 조금씩 다른 걸 보는 게 또 후기의 재미군요.
담백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교만한 맹인'이라는 표현도 재밌네요. 우린 모두 일정 부분, 그렇게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 고맙습니다. ^^
경애님 후기를 읽을 수 있어서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같은 표현이라도 이렇게 선명하고 이해가 쏙쏙 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