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불경스런 단어를 입에 혹은 손에 올려서 미안하지만 그 표현은 ‘똥이나 오줌을 담거나 담아 나르는 통’이라고 떡하니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정정당당한 우리말이니, 날 너무 욕하지 마시길.
내 고향 무안에서는 예전에 밭농사에 인분 즉 ‘합수’가 거름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농촌지역에서 자체 생산한 걸로는 모자라니 도시지역인 목포에서 합수를 사왔다. 그걸 운반하는 배가 있었고, 그 배가 닿을만한 바닷가 가까운 언덕배기에 큼직한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 그걸 저장해 놓고 사용했었다. 그런데 그 옆을 지나가는 어떤 사람이 자칫 발을 잘못 디뎌 그 합수 구덩이에 빠지는 일도 드물게 있었다. 왜냐면 그게 걸쭉해서 그 위에 마른 잎들이 떨어져 쌓이게 되면 식별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는 집집마다 헛간 옆 한구석에 변소간이 있었고 거기에 손바닥 크기로 잘라놓은 신문지 조각들이 대나무를 쪼개 만든 작은 가고(かご, 바구니의 일본어)에 뒤처리용으로 담겨 있었는데, 국민학교 다니던 어느 날 나는 우리 집 헛간에서 이웃집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일당 중에 나보다 서너 살 어린 이웃집 아이 창녕이가 있었는데, 내가 그 애에게 변소에 가서 신문지 조각 몇 개를 가져오라고 시켰더니, 그 애가 그걸 가지러 변소에 갔다가 그만 실족하여 빠지고 말았다. 난리가 난 것이다. 어른들이 달려와서 끄집어냈지만 창녕이는 이루 말할 수도 바라볼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그때가 초겨울이었는데도 창녕이 엄마는 창녕이를 냇가로 데려가서 발가벗겨 씻겼다. 심부름을 시켰던 나는 엄청 미안했다. 지금도 속죄하고 있다.
‘정치’라는 단어에 대한 국어사전의 정의는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이라고 되어있다. 거기에 덧붙여서 정치가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영어사전에는 ‘국가의 통치와 관련된 활동, 특히 개인이나 정당들의 권력을 얻기 위한 논쟁이나 다툼’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우리말 사전의 정의 중 정치가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는 표현에 대해 나는 다분히 회의적이다. 반면에 그게 ‘권력’을 얻기 위한 활동이라는 데는 너무도 동의한다. 그리고 ‘권력’은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이다.
정치인은 일반적으로 선거에 의해서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게 되며, 그 권력을 바탕으로 국가의 정치적, 행정적 주요 의사결정 사항에 대해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인이란 ‘공직 후보자 또는 선출직 공무원’을 가리킨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 정치인이라고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대통령이고, 그 다음이 국회의원이며 이어서 시장이나 도지사, 군수나, 구청장 등 각급 지방자치단체의 수장들이다. 그밖에도 각종 단체나 기관에서 그 우두머리를 선거로 뽑는다면 그런 활동도 다분히 정치적인 성격을 띤다. 대학총장이나 조합장, 교육감, 노조위원장 등이 그 예이다.
선거는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정치를 작동하게 하는 기본 동력이다. 그리고 그 선거는 입후보자와 유권자가 벌이는 까막잡기와 같은 게임이다. 선거를 통해서 어떤 사람을 해당 집단의 대표로 뽑는다는 것은 유권자들, 즉 투표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정치적 권리를 뽑히게 될 대표자에게 양도한다는 걸 뜻한다. 즉 어떤 입후보자가 일단 당선되게 되면 그 사람이 유권자를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거머쥐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권자는 자신이 뽑은 사람에게 기꺼이 복종당하고 지배당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실적으로 선거와 투표는 다분히 기만적인 행위이다. 투표를 행하기 전 짧은 기간 동안 유권자가 권력을 가진 입장이고 갑이며, 입후보자는 그걸 양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입장이며 을이다. 그러나 유권자가 자신이 가진 바로 그 한 표를 어떤 입후보자에게 던져줘 버리는 순간 입장이 180도 바뀐다. 방금 전까지 권리나 권력을 가졌던 사람 즉 유권자가 이제 무권자로 전락한다. 반면에 당선자는 그 무권자를 복종하게 하고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로 등극한다. 그런 드라마틱한 반전이 또 어디 있으랴.
그런데 그 ‘거시기통’과 ‘정치’가 대체 무슨 관련이 있어서 나는 이렇게 사설(私說)을 풀고 있는 걸까? 나는 지금까지 몇 차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대학총장 선거에서 한시적인 유권자였었다. 나는 1978년 제9대 대통령 선거 때부터 투표권이 있었으나 그때 대통령 선거는 간접 선거로 일반 국민은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을 뽑았고, 그들이 박정희 후보를 99.85% 찬성으로 대통령으로 뽑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는 선거에서 나는 연령상 투표권이 있었지만 뭐가 뭔지 몰라서 기권했다. 제12대 대통령 선거도 비슷했다. 대통령 선거인단을 뽑는 선거가 있었고 선거인단의 투표결과 전두환 후보가 선거인단 90.11%의 표를 얻어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국민 직선제로 바뀐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를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그를 찍었다. 그때 나는 쌍촌동에서 살았었고 조선대학교 종합운동장에서 열린 김대중 후보 연설회에 갔었는데, 그 넓은 운동장을 꽉 메운 수만 명의 사람들이 노란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는 걸 보고 덩달아 가슴이 뭉클하고 뜨거워졌다. 그러나 김대중 후보는 노태우 후보에게 져서 떨어졌고 나는 몹시 실망했고 분했다. 노태우보다 김영삼이 더 미웠다.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1992년에 있었는데 나는 그때 미국에서 유학 중이어서 투표하지 못했지만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그러나 그는 김영삼 후보에게 져서 또 떨어졌다. 김영삼 씨는 나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1997년에 개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나에게는 오직 김대중뿐이었다. 나는 그에 대해 거의 광신적인 믿음과 지지를 보냈고 마침내 그가 이회창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펄펄 뛸 만큼 좋았다.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나는 김대중의 후예로 여겨지는 노무현을 지지했고 그가 당선되었지만, 그전처럼 그렇게 감격하진 않았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라도 사람이고 민주당 후보인 정동영을 찍었으나 그가 이명박에게 큰 표 차로 졌다. 나는 이명박이 꼴배기 싫었지만 서울 사람들이 그를 높게 쳐주니, 그리고 서울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하니 그냥 받아들이고 살았다. 이명박 정권 동안 내내 나는 떨떠름한 느낌으로 지냈다.
그 후로도 나는 몇 번 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또 몇 번의 대학총장 선거에서 유권자의 신분이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거시기통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요즘 TV정치 토론을 시청하지 않으며, 지금까지 유튜브 등 SNS에서의 정치물들을 들여다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민주 공화국에서 정치와 선거 없이 우리는 국민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으니, 앞으로도 선거철이 오면 나는 나의 한시적인 유권자 권리와 정치권력을 휘두를 것이다. 하지만 될수록 그와 관련된 생각이나 말을 삼가고 듬쑥하게 지내다가 알량한 내 권한인 한 표—무게로 치면 아마도 단 몇 그램 정도—를 조용히 행사하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다음 선거와 투표까지, 내가 다시 유권자가 되어 잠깐 동안 떠받들어지게 될 때까지 고분고분 지배당하고 복종당할 것이다. 정치가 그 거시기통이라면, 그 통 속의 내용물은 나를 포함한 국민들이 생산한 물질이다. 입후보자나 유권자나 다 같은 부류이다.
첫댓글 제발 기꺼이 지배당하고 복종당할 수 있는 정치인이 나타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