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스포츠는 몇몇 종목을 제외하고는 개화기 이후 서양에서 선교사들과 함께 들어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 축구는 마치 우리 고유의 전통적인 운동이나 국기처럼 여길 정도로 발전했다.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넣어 논바닥에서 축구를 하다가 오늘날엔 잔디구장에서 뛰게 되었고, 월드컵 본선 7회 연속 출전에 도민 프로축구단을 만들 정도가 되었으니 충분히 그렇게 여길 법도 하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야구가 또 이에 못지않게 전성시대를 누리는 것 같다. 야구도 일제시대에 들어오기는 마찬가지다. 지금이야 프로야구가 주축이 됐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고교야구가 전국을 뒤흔들었다.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대통령기…. 고교야구를 빛낸 깃발들이다. 지역분포도 가히 전국적이었다. 서울에서부터 어느 지역에 관계없이 기라성같은 야구 명문고교들이 즐비했었다. 오늘날 야구지도자들은 이 고교야구를 통해 배출된 인재들이 많다. TV도 지방에는 제대로 없던 시절이니 라디오가 절대적이었다. 고교야구가 개최될 양이면 전국방방곡곡에서 이○○ 아나운서의 감칠맛이 나는 중계방송이 일손을 놓게 만들었다. 6할대의 타율, 역전의 명수 이런 말들은 그 시절의 언어들이다. 고교야구는 예측불허의 상황이나 장면이 자주 연출되기도 했다. 반전을 거듭하는 짜릿한 승부, 위기 뒤의 기회, 빗맞은 타구가 안타가 되는 의외성, 눈물어린 젊음의 땀과 열정, 애교심이 넘치는 뜨거운 응원전…. 고교야구는 그래서 재미가 더했다. 얼마 전, 타계한 장효조씨와 최동원씨도 70년대 고교야구의 지존들이다. 그들은 대구와 부산이 낳은 불세출의 인물들이지만 이제는 한국야구의 영원한 전설적인 별이 됐다.
진주는 축구 명문도시로만 알고 있지만 실은 야구로서도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몇 개의 초등학교와 중등부 팀이 있었고, 야구가 좋아서 보수도 없이, 심지어 자기 돈을 축내가면서까지 어린 학생들을 지도하는 분들도 계셨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경남일보사가 주최하는 전국 규모의 중·고 야구대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는 제대로 된 야구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설운동장도 없던 시절이라 진주중학교 운동장에 백넷이 설치되어 있었고 거기서 대회를 개최했었다. 그래도 관중들은 운동장에 둘러서서 지역의 선수들을 응원하며 관전하는 재미에 빠져들었고 안타가 나오고, 홈런이라도 터질라치면 그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는데 그 부상으로는 타자에게 라면 한 상자가 주어졌다. 이런 것들은 오늘날 프로경기에서 맛볼 수 없는 아마추어의 즐거움이었다.
스포츠는 축제다. 카타르시스가 있고, 승리의 환희가 있다. 비록 경기에서 패배해도 당당한 자부심이 있고, 그 곳에 새로운 도전과 미래의 목표가 있다. 더구나 그것이 순수할 때 더욱 강렬한 짜릿함이 있고, 오래오래 감동으로 기억된다.
이제 진주에도 야구재건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60, 70년대보다는 여건이 펵 좋아졌다. 모처럼 시민들의 사랑과 관심으로 무르익어가는 진주야구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함께 즐기는 행복한 야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주제일여고 교감
첫댓글 짠합니다.......진주 야구 화이팅!!!!
제일여고 운동장 확인 해보시죠... 전무이사님
ㅎㅎ 제일여고 소프트볼팀(?)창단해야 하는건 아닌지..^^
헌데 제일 여고는 체육대회때마다
럭비를 한답니다
여학생들이 할퀴고 언니들이 욕하고 몸싸움 악으로 한다네요^^
ㅋㅋㅋㅋ 그래도 좋은 소식과...좋은 바람이네요..
야구가 좋아요 진주야구화이팅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