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전주 지역의 역사 답②
전주는 마한의 영토였으며, 백제가 차지한 후 완산이라고 불렸습니다.
통일 신라는 이곳에 9주의 하나인 완산주를 설치하였으며, 통일 신라 말에는 견훤이 이곳에서 후백제를 건국하였습니다.
고려는 통일 후 전주로 바궜으며, 성종 때 12목의 하나인 전주목을 두었어요. 무신 집권기에는 전주에서는 관노들이 가혹한 부역 동원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고향으로 중시되어 유수부로 승격시켰으며, 경기전을 세우고 태조의 어진을 보관하였습니다. 정조 때 윤지충은 유교식 제사 의식을 거부하고 천주교 의식에 따라 모친상을 치렀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전라 감영에서 처형당하였습니다(진산 사건, 1791).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박해이자 최초의 순교자였어요. 1914년에 이 자리에 전동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는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후 전주 화약을 체결하고 전주에서 물러났습니다. 풍남문은 전주성의 남문 이름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각 지역의 역사적 사실을 묻는 문제들을 제시합니다.
유사 기출문제
27회 중급 47번 문제
47. 천주교 박해 유적지 답④
지도에 제시된 유적지 중 한 곳만 알아도 답을 찾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특히, 절두산 성지는 많이 들어본 곳이라 가장 큰 힌트가 되는 곳이네요. '성지'라는 곳이 종교와 관련된 개념이고, 동학도 종교지만 답지가 두 개나 제시되어 있어 답에서 제외되게 만든 답지 구성이 아쉽네요.
문제를 조금 어렵게 한다면 흥선 대원군 시기의 천주교 박해 등 근접한 지식으로 답지를 구성하면 될텐데 너무 쉬운 느낌이 있습니다.
천주교는 17세기에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우리나라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으로 소개되었으며, 18세기 후반 들어서는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에 의해 신앙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부는 천주교 교세가 점차 확산되는 데다가 평등 사상을 강조하고 조상에 대한 유교적 제사 의식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이유에서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조 때에는 윤지충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천주교 의식에 따라 모친상을 치른 것이 계기가 되어 윤지충과 권상연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진산 사건, 1791). 순조 때에는 이승훈을 비롯한 300여 명의 천주교인들을 처형하는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습니다(신유박해, 1801). 전주 치명자산 성지는 신유박해 때 천주교인 유항검 가족이 처형당한 곳입니다. 한편, 황사영은 신유박해의 전말을 알리고 프랑스에 무력 동원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베이징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는데(황사영 백서 사건), 제천 배론 성지는 이와 관련된 천주교 성지입니다.
고종 즉위 후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당시 천주교를 금지하라는 여론이 높아지자 국내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신자 8천여 명을 처형하는 대대적인 박해를 하였습니다(병인박해, 1866). 이때 순교 정소로는 서울 절두산 성지, 충남 해미 읍성 서문 순교지가 대표적입니다.
①, ③ 최제우는 경주에서 동학을 창시하였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동학을 포교하다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죄(혹세무민)를 쓰고 처형당하였습니다(1864). 후일 동학 교도들은 충남 공주, 전북 삼례, 서울, 충북 보은 등에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려는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습니다(1892~1893).
② 소격서는 도교 행사인 초제를 관장하던 기관으로, 삼청동 근처에 있었습니다.
중종 때 등용된 조광조 등에 의해 폐지되기도 하였어요.
⑤ 정감록은 이씨 조선이 망하고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여 새로운 세계를 연다는 예언서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6회 중급 6번 문제
6. 평양과 관련한 역사 답①
특정 지역, 특정 도시를 제시하고 그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 또는 문화유산에 대한 문제를 파악하는 문제는 한국사능력시험에서 빠지지 않고 출제되는 중요한 유형입니다.
이 문제는 20회 27번 문제와 유사하게 출제되었네요.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의 수도', '고려 시대 서경', '조선 시대 유상의 근거지'였던 곳은 평양입니다.
장수왕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427)하고 본격적으로 남하 정책을 폈어요.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은 이곳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하자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군을 지원하고 나·당 전쟁을 벌여 이곳에 있던 안동 도호부를 요동 지방으로 몰아냈습니다.
고려 때는 건국 초부터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중시되어 서경으로 삼고, 개경과 유사한 중앙 부서의 분소를 설치하는 제도인 분사 제도를 실시하였어요. 고려 중기에 묘청은 이곳으로 천도하자며 서경 천도 운동을 일으켰으며, 무신 집권기에는 최광수가 이곳에서 고구려 부흥을 내세우며 봉기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들어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명군이 연합해 평양성을 탈환하여 전세를 역전시켰으며, 조선 후기에는 사상인 유상이 이곳을 근거지로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19세기 후반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리다가 불태워지기도 했습니다(제너럴셔먼호 사건, 1866).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신미양요(1871)가 일어났었어요.
1900년대 들어서는 신민회에서 활동하던 안창호가 이곳에 대성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조만식 등이 중심이 되어 물산 장려 운동을 시작하였던 곳이죠.
① 청해진은 전남 완도에 설치되었습니다.
9세기에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신라·당·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무역을 장악하였어요.
② 신민회에서 활동하던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③ 유엔에서의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 결정으로 남북이 분단될 위기에 처하자 김구와 김규식은 통일 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해 평양에서 북한 지도자들과 남북한 정치 지도자 회담(남북 협상)을 열었습니다(1948. 4.)
④ 묘청은 고려도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할 것과 서경으로 천도하고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귀족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니 실패하였습니다(묘청의 난, 1135).
⑤ 일제 강점기에 조만식 등은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여 국산품 애용 등을 주장하며 물산 장려 운동을
전개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26회 중급 43번 문제
43. 독도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 답⑤
'우리나라 가장 동쪽에 있는 섬'이라는 설명과 섬 사진을 통해 독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울릉도와 독도는 삼국 시대 이래 우리의 영토입니다.
"삼국사기"에는 6세기 초(512)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현재의 울릉도와 독도 일대에 있던 우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에 복속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에도 우산국 사람들이 고려에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또한, 울릉도가 우릉(도) 또는 무릉(도)으로, 독도가 우산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강원도 울진현 소속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울릉도를 무릉, 독도를 우산으로 표기하였어요. 숙종 때에는 안용복이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본 어민을 몰아내고 일본에 건너가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오기도 했죠. 이후 일본은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에 가지 못하도록 도해 금지령을 내렸어요(1696).
대한제국 시기에는 칙령 제41호(1900. 10. 25)를 통해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키고 울등도 도감을 울도군 군수로 격상시키는 관제 개혁을 단행하면서, 독도도 관할하게 함으로써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이를 기념하여 2000년에 10월 25일, 이 날을 독도의 날로 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 전쟁 중인 1905년 2월, 독도를 ‘다케시마’라 이름짓고, 이른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라는 것을 통해 일방적으로 일본에 편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 대한 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본의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적 사실로나 국제법상으로 대한 제국을 계승한 우리의 영토입니다.
① 몽골의 1차 침입(1231) 후 고려 정부는 몽골과의 장기 항전을 위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1232),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이곳에서 약 40여 년 동안 대몽 항쟁을 전개하였습니다.
② 네덜란드 상인인 하멜 일행은 일본으로 가다 표류하여 제주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들은 한양으로 이송되어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신식 무기 등을 만드는 일에 동원되다가 훗날 탈출하였어요.
③ 랴오둥 반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청·일 전쟁 승리 후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청으로부터 랴오둥 반도, 타이완, 펑후 열도를 할양받았어요.
그러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압박으로 랴오둥 반도를 청에 반납하였습니다(삼국 간섭, 1895).
④ 갑신정변 직후 조선이 러시아와 가까워지려는 경향을 보이자 조선에서의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거문도 사건, 1885~1887).
⑤ 대한제국은 칙령 제41호(1900. 10. 25)를 통해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키고 울등도 도감을 울도군 군수로
격상하는 관제 개혁을 단행하면서, 독도도 관할토록 하여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5회 중급 3번 문제
3. 울산 지역의 역사 답⑤
문제에 제시된 반구대 암각화는 공부를 하지 않은 분이라도 댐 건설로 인한 수몰 등으로 훼손 문제가 자주 제기되어 뉴스에도 자주 나왔으니 평소 눈여겨 본 분들이면 어렵지 않게 알았을 수 있겠네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국제 무역항으로 이름 날린 곳으로는 울산과 벽란도를 들 수 있어요. 상품의 최대 수요처인 수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항구가 번성할테니 이는 당연한 것이죠.
따라서 세 가지 힌트인 '반구대 암각화', '통일 신라의 국제 무역항(경주와 가장 가까운 항구)', '효심의 농민 봉기' 지역과 공통적으로 관계된 지역은 울산입니다.
울산에 사는 분들은 그냥 점수 먹고 가는 문제입니다.
울산 울주 대곡리 반구대 바위그림은 경북 고령 장기리 바위그림과 함께 우리나라 선사 시대 암각화 중 가장 유명하죠.
반구대 바위그림에는 사슴, 호랑이, 멧돼지, 너구리 등의 육지 동물과 고래, 거북, 물개 등의 해양 동물 그리고 다양한 인물상과 사냥 도구, 사냥 장면이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바위그림은 사냥과 고기잡이의 성공, 풍성한 수확을 염원하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통일 신라 들어서는 대외 무역의 발달과 함께 무역항으로 울산항이 청해진, 영암, 당항성(남양만)과 함께 번성하였어요. 특히 수도인 금성(경주)과 가까운 울산항은 이슬람 상인까지 왕래하던 국제 무역항으로 가장 번성하였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무신 정권기에는 무신들의 농장 확대와 가혹한 수탈로 농민들의 봉기가 자주 일어났는데, 경주 주변 지역인 운문(청도)과 초전(울산)에서도 지방관의 탐학에 호소하며 김사미와 효심이 봉기하였어요(1193).
조선 시대에는 삼포 개항 당시 삼포(부산포, 제포(웅천), 염포(울산))의 하나로 개항되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울산성 전투가 유명하죠.
그리고 오늘날에는 자동차·조선·화학 등 우리나라 최대의 공업단지이지 국제적인 공업단지로 유명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4회 중급 42번 문제
42.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 된 남한산성 답②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유산에 대한 내용이 자주 출제됩니다.
최근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결정되어 출제 확률이 높아 안내해드렸는데 바로 출제되었네요.
'병자호란 당시의 주요 무대였고, 산성 안에 이궁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남한산성임을 알 수 있어요.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산성으로, 산성 안에는 행궁이 갖춰져 있었으며, 산성의 수비는 1626년에 설치한 수어청이 담당하였어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이곳에 들어가 항전하였던 장소로 가장 잘 알려진 곳입니다..
정묘호란 당시 화의를 맺고 돌아간 후금은 더욱 강성해져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조선에서는 주화론과 주전론으로 나뉘어 논쟁 끝에 주전론이 우세하여 청의 요구를 거절하자 청 태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 왔습니다(병자호란, 1636).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을 꾀하였지만, 남한산성에는 병력과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어요. 결국 인조는 45일간의 항전을 멈추고 삼전도로 나아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습니다.
(가)북한산성은 백제가 도읍할 때 쌓았던 산성이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효종, 숙종 때 북벌 정책을 추진하면서 성을 크게 개축하였습니다. 성 안에는 행궁이 갖춰져 있었으며, 1624년에 총융청을 두어 방어를 담당케 하였어요.
(다)상당산성은 츙북 청주에 있는 산성으로, 일찍이 백제가 쌓은 토성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속종, 영조, 순조 때 개축, 보수가 이루어졌어요.
(라)삼년산성은 충북 보은에 있는 삼국 시대의 산성으로,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고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라는 소지마립간 때 이 성을 완성하여 백제 공격의 최전방 기지로 활용하였어요.
(마)금정산성은 조선 시대의 산성으로, 낙동강 입구와 동래 등이 내려다 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4회 중급 46번 문제
46. 독도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 답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나라 가장 동쪽에 있는 섬'하면 반사적으로 독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독도에 대해 어느정도 한번쯤은 자세하게 공부해 보자구요.
울릉도와 독도는 삼국 시대 이래 우리의 영토로 계속 유지되었어요.
"삼국사기"에는 6세기 초(512)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현재의 울릉도와 독도 일대에 있던 우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에 복속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에도 우산국 사람들이 고려에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울릉도와 독도를 울진현 소속으로 구분하여 독도를 우리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어요.
조선 시대 들어서는 도적 방지, 왜구 침입 등에 대비하여 공도(空島; 섬을 비워두는 것)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이에 따라 울릉도와 독도도 섬을 비워두자, 울릉도와 독도 연안에 일본 어민들이 불법 침입하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숙종 때는 안용복이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본 어민을 몰아내고 일본에 건너가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오기도 했죠. 하지만, 그 이후로도 일본 어민들의 불법 침범은 계속되었습니다. 정부는 일본에 항의하는 한편, 육지 주민을 울릉도에 이주시키고 관리를 파견하였습니다(1884).
대한제국 시기에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1900. 10. 25)를 통해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키고 울등도 도감을 울도군 군수로 격상시키는 관제 개혁을 단행하면서, 독도도 관할하게 함으로써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2000년에 10월 25일, 이 날을 독도의 날로 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 전쟁 중인 1905년 2월, 독도를 ‘다케시마’라 이름짓고, 이른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라는 것을 통해 일방적으로 일본에 편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 대한 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본의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적 사실로나 국제법상으로 대한 제국을 계승한 우리의 영토입니다.
ㄱ - 거문도에 개한 설명입니다.
갑신정변 직후 조선은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조선에서의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거문도 사건, 1885~1887)하였어요.
ㄴ - 삼별초는 근거지를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옮겨 다니며 대몽 항쟁을 전개하였습니다.
ㄷ -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조'에 “우산(于山), 무릉(武陵) 두 섬은 정동 쪽 바다에 있는데,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라고 실려 있습니다.
ㄹ - 일본은 러·일 전쟁 중인 1905년 독도를 ‘다케시마’라 이름짓고,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라는 것을 통해 일방적으로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였으나, 이는 엄연히 불법적인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24회 중급 48번 문제
48. 인천 지역의 역사 답①
제시된 내용 중 '미추홀'이라는 것은 잘 모르더라도, '개항장(인천, 부산, 원산)으로 근대 문물의 수용의 관문, 6·25 전쟁 당시 대규모 상륙 작전(인천 상륙 작전)이 펼쳐진 곳'을 통해 인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천은 과거 백제 건국 관련하여 비류(백제를 건국한 온조의 형)가 이곳 미추홀에 나라를 건국하려다 실패한 곳이죠.
인천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이 많이 일어난 것은 근·현대에 들어서입니다.
인천은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하였던 3개 항구(인천, 부산, 원산) 중에 하나로, 1883년 개항하였습니다.
개항 이후에는 1888년까지 각국의 거류지가 마련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거류지였답니다.
그리고 1882년에는 인천에 일본 영사관 가청사가 설치되어 최초의 영사가 임명되기도 하였죠.
개항장으로 서울과 가까워 근대적 시설들이 일찍부터 마련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었습니다.
6·25 전쟁 당시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국국이 연합군과 함께 인천으로 대규모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23회 중급 45번 문제
45. 제주도 지역에서의 역사적 사실 답②
문제에 제시된 지도 모습, 그리고 제시된 여러 역사적 사실을 통해 제주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1점 배점을 한 비교적 쉬운 문제입니다.
삼성혈은 제주도 시조라고 일컫어지는 삼성 즉 고씨, 양씨, 부씨가 솟아났다고 하는 세 구멍이 있는 유적지입니다.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되면 한번씩 둘러보는 여행 코스죠.
항파두리 토성은 대몽 항쟁에 앞장 섰던 삼별초가 최후까지 항전하였던 역사 유적지입니다. 고려 정부가 원(몽골)과 강화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였지만(1270),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고 대몽 항쟁을 지속하였습니다. 강화도에서 항쟁하다 배중손의 지휘 아래 진도(용장성)로 옮겨 저항하였고, 그의 사후에는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이동해 항파두리성을 근거지로 최후까지 항쟁하였으나, 결국 진압되었던 유적지입니다(1273).
하멜 기념비는 효종 4년(1653)에 제주도 산방산 용머리 해안에 상륙하였던 하멜 일행을 기념하여 세워진 기념비입니다. 당시 하멜 일행은 타이완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다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이곳에 상륙한 후 서울로 압송되어 13년 동안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여 일본을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저술하였습니다.
① 원은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후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두어 일본 원정을 준비하고 목마장을 설치하였어요.
탐라총관부는 1301년에 고려에 반환하였어요.
② 통일 신라 때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곳은 완도입니다.
③ 추사 김정희는 여러 차례 유배 생활을 하였는데, 헌종 때인 1840~1848년에는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어요.
④ 김만덕(1739~1812)은 제주도 기생 출신으로, 객주를 운영하면서 많은 부를 쌓았던 인물입니다.
특히, 제주도에 기근이 들자 전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쌀을 구입해 도민을 구휼하여 당대에 전국에 알려졌습니다.
⑤ 삼별초는 강화도-진도-제주도로 옮겨다니며 대몽 항쟁에 앞정섰습니다.
특히 김통정은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도로 옮겨와 애월에 항파두리성을 쌓고 끝까지 항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2회 중급 13번 문제
14. 대몽 항쟁과 관련한 지역 답③
지도에 표시된 지역은 모두 몽골군과의 항쟁지라고 지도에 나타나 있네요.
각 지역에서 전개하였던 대몽 항쟁 내용 또는 피해 모습을 각각 살펴보자구요.
(가) 강화도
몽골의 1차 침입(1231) 이후 무신 정권은 몽골과의 장기 항전을 위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1232),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이곳에서 약 40여 년 동안 대몽 항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최씨 정권이 무너진 이후 고려 정부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였으나(1270), 삼별초는 환도를 거부하고 대몽 항쟁을 지속하였어요.
(나) 용인
몽골군의 2차 침입(1232)에 당시 처인성에서는 승장 김윤후가 이끄는 승병과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하는 정과를 올렸어요. 이를 계기로 몽골군은 철수하였습니다.
고려 정부는 공을 세운 이들에게 상을 내리는 한편, 처인 부곡을 일반 군현인 처인현으로 승격시켜 줍니다.
(다) 충주
1차 침입(1231) 때 지광수의 지도 아래 노비와 잡류들이 몽골군에 항쟁하고 이를 물리쳤습니다.
5차 침입(1253) 때에는 김윤후가 지휘하는 민병과 관노들이 몽골군을 물리치기도 했지요.
6차 침입(1254~1259) 때에도 충주 다인철소민들이 대몽 항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라) 대구
대구 부인사에는 고려 현종 때 거란 침입을 불력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 조판한 초조대장경 6천여 권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몽골의 2차 침입(1232) 때 불에 타 소실되었어요.
(마) 경주
몽골의 3차 침입(1235~1239) 때 황룡사와 황룡사 9층 목탑이 몽골군에 의해 불 타 버렸어요.
① 황룡사 9층 목탑은 경주에 있었다는 거 모르는 분 있나요?
몽골의 3차 침입 때 불에 타 소실되었어요.
② 제주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삼별초는 몽골과의 강화와 개경 환도를 거부하고, 강화도-진도-제주도로 옮겨다니며 끝까지 항쟁했으나,
제주도에서 끝내 좌절되고 말았어요.
③ 충주에서는 노비, 소민들이 대몽 항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어요.
④ 김윤후가 살리타를 사살한 곳은 용인(처인성)입니다.
⑤ 고려는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고 대몽 항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22회 중급 48번 문제
48. 대구의 역사 답④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는 주요 지역의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고 이 지역을 찾게 하거나,
각 지역의 역사적 사실을 묻는 유형이 빠지지 않고 출제됩니다.
1. 신숭겸 장군 유적
신숭겸 장군은 공산 전투(927)와 관련 있습니다.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는 일이 발생하죠. 이에 태조 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대구 공산에서 견훤과 싸웠으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대패하고 목숨마저 위급한 상황에 처합니다. 이때 신숭겸은 태조로 변장하여 김락과 함께 싸우다 전사하죠. 태조는 가까스로 단신으로 탈출하여 후에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전사한 자리에 절을 세워 명복을 빌어줬어요.
2. 부인사
대구 팔공산에 있는 절입니다.
부인사는 초조대장경을 보관하였던 곳이죠. 초조 대장경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만들었던 고려 최초의 대장경이었으나, 몽골의 2차 침입(1232) 당시 몽골에 의해 소실되었습니다.
3. 약령시
대구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시장이죠.
약령시는 예로부터 약재의 주요 산지라고 알려진 청주, 대전, 공주, 대구, 전주, 원주 등에서 채취해 이를 출하하는 시기에 맞추어서 해마다 봄 ·가을 두 차례 열렸어요.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것이 대구 약령시로, 1658년(효종 9)에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 뒤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4. 광문사
대구에 있던 회사로, 이 회사의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의 주도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1회 중급 29번 문제
29. 안동의 문화 유산 답③
우리나라의 탑은 대부분 석탑인데, 경북 안동에 유난히도 전탑(벽돌탑)이 많습니다. 남한의 전체 전탑 5개 중 안동에 3개가 있고, 그 중 안동 신세동 법흥사지 7층 전탑(국보 16호, 8세기 건립)이 유명합니다.
또한 고려 시대의 대형 석불인 안동 이천동 석불(마애여래 입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추정되는 봉정사 극락전(국보 15호, 1363년 수리 기록), 2009년에 경주 양동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하회 마을과 하회탈, 병산탈, 위대한 성리학자 퇴계 이황이 성리학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을 개축한 도산서원과 유성룡을 배향한 병산서원 등도 유명합니다.
① 세종의 능 영릉은 경기 여주에 있으며,
② 다산 초당은 정약용의 유배지인 전남 강진에 있어요.
④ 조선 태조 이성계(전주 이씨)의 어진(초상화)을 모신 경기전은 전북 전주에 있으며,
⑤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은 전남 완도에 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21회 중급 38번 문제
38. 일제 강점기 대표적 쌀 유출항 답③
일제 강점기 한반도의 쌀을 일본으로 유출해 가는 데 이용한 대표적 항구하면 군산 또는 목포를 들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금강 입구에 있는 군산은 우리나라의 최대 곡창인 호남평야뿐만 아니라 충청도 평야까지 근접해 있어 일제의 쌀 수탈 전초 기지로 가장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군산은 개항 이전부터 조운의 중심지로 강경과 연결된 항구의 역할을 하였으며, 1899년에 개항한 후 당시 우리나라 최대의 쌀 수출항이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도 일제의 미곡 수탈 전진 기지가 되어 호남평야의 곡물을 수탈, 수출하는 데 주로 이용되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는 해운이 당시 가장 활발하였어요. 이 때문에 군산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군산의 인구 중 일본인의 비율이 절반 정도나 되었으며, 군산의 시가지는 대부분 일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군산에는 일본 건축 양식의 집 등 일제 강점기의 건물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20회 중급 27번 문제
27. 평양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 답①
'서경', '장수왕이 천도한 곳', '대동강이 흐르는 도시' 등을 통해 (가) 지역이 평양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평양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파악해 보면 되겠네요.
평양은 옛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였던 역사가 깊은 도시입니다.
장수왕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427)하고 본격적으로 남하 정책을 폈어요.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은 이곳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하자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군을 지원하고 나·당 전쟁을 벌여 이곳에 있던 안동 도호부를 요동 지방으로 몰아냈습니다.
고려 때는 건국 초부터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중시되어 서경으로 삼고, 개경과 유사한 중앙 부서의 분소를 설치하는 제도인 분사 제도를 실시하였어요. 고려 중기에 묘청은 이곳으로 천도하자며 서경 천도 운동을 일으켰으며, 무신 집권기에는 최광수가 이곳에서 고구려 부흥을 내세우며 봉기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들어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명군이 연합해 평양성을 탈환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기도 하였으며, 19세기 후반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리다가 불태워지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신미양요(1871)가 일어나기도 했죠.
1900년대 들어서는 신민회에서 활동하던 안창호가 이곳에 대성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였어요.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는 조만식 등이 중심이 되어 물산 장려 운동을 시작하였던 곳이죠.
① 무신 집권 초기에 망이·망소이가 난(1176)을 일으킨 곳은 공주 명학소였습니다.
②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난동을 부려 평양 군민들에 의해
불태워졌습니다(제너럴셔먼호 사건, 1866).
③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 학교를 설립(1908)하였습니다.
④ 1920년부터 조만식 등이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여 국산품 애용 운동인 물산 장려 운동을 전개하였어요.
⑤ 고려 태조는 일찍부터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중요시 여겼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9회 중급 26번 문제
26. 강화도와 관련된 문화유산 답①
강화도는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한강 하구에 있는 섬이었기에 개항 전후로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그리고 외란을 일어났을 때는 도읍(개경, 한양)과 가까우면서도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중요한 피난처 역할을 하였던 곳이죠.
첫번째 자료인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은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고인돌로 유명하죠.
강화도에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 형태인 고인돌 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고인돌 유적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인정 받아 강화도를 비롯한 고창, 화순 고인돌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어요.
두번째 자료인 외규장각은 외부에 있는 규장각, 그러니까 쉽게 말해 규장각 별도 건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조선 시대에 국난시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하여 1631년(인조 9년) 고려 옛 궁터에 행궁을 건립하였는데, 외규장각은 1782년에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이곳에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립 도서관이었던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 역할을 하였습니다. 설치 이후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를 비롯해 총 1000여 권의 서적을 보관해왔어요. 그러다가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하면서 일부 서적을 약탈해가면서 건물에 불을 질러 나머지 서적들도 불에 타버렸습니다.
세번째 자료인 초지진은 강화 해안을 지키기 위해 설치된 진(鎭) 중의 하나입니다. 신미양요(1871) 당시 미국, 운요호 사건(1875) 때에는 일본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전적지입니다.
이 밖에도 강화도와 관련된 몇 가지를 사려보죠.
마니산 참성단은 마니산 정상에 있는 유적지로, 이곳에서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몽골 침입 당시 고려 정부는 강화도로 피난, 이곳에서 항전하였는데 이곳에 고려 행궁터가 남아 있죠.
조선 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 중의 하나인 마니산 적상산사고가 있었어요.
호란 당시에는 왕족들이 이곳으로 피난하기도 했죠.
18세기 초 정제두가 강화도로 옮겨 살면서 양명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써 강화 학파라 불리는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흥선 대원군 시기에 일어난 병인양요(갑곶진, 문수산성, 정족산성)와 신미양요의 격전지(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였어요.
1875년에는 운요호가 이곳에 접근해 서로간에 발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8회 중급 23번 문제
23. 공주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 답②
백제는 장수왕의 남하 정책에 밀려 한성(위례성)을 빼앗기고(475) 웅진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성왕에 의해 사비(부여)로 도읍을 천도(538)하기 전까지 도읍이었습니다.
공주 공산성은 이 시기의 도성이었으므로 (가)에 들어갈 역사 장면은 우선적으로 이 시기의 것이어야 겠죠.
웅진에 도읍한 시기 왕은 문주왕(475~477), 동성왕(479~501), 무령왕(501~523), 그리고 사비(부여) 천도 전까지의 성왕(523~554)입니다.
따라서 (가)에 들어갈 역사 장면은 이들 왕이 재위할 당시에 있었던 장면이어야 합니다.
이때의 주요 역사 사실로는 동성왕 때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어 동맹을 강화하였고, 무령왕 때 지방의에 22담로 설치해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 통제를 강화하였고 중국 남조 국가인 양(梁)과 친교하여(512)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고구려를 공격하여 승리한 사실이 있습니다.
공주와 관련된 주요 역사적 사건도 살펴볼까요?
우선 통일 신라 때는 웅천주 도독이었던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고, 고려 때에는 망이, 망소이가 난을 일으켰으며, 조선 시대에는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우금치 전투가 치러진 곳입니다.
①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성남의 남한산성으로 피난해 항전하다가 결국 항복하였습니다.
② 무령왕(501~523)하면 무령왕릉이 가장 먼저 떠오르죠?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벽돌무덤으로 조성되었다는 것도 기억나죠?
무령왕은 지방에 22담로를 두었으며, 중국 남조인 양(梁)과 외교 관계를 맺고(512) 사신을 파견하였어요.
③ 양헌수는 강화도에 프랑스군이 침입(병인양요)했을 때 이를 물리쳤죠.
④ 동학 농민군을 이끌던 전봉준은 전주 점령 후 청, 일 양국 군대가 국내에 들어오자 두 나라 군대가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정부와 전주 화약을 체결하였습니다.
⑤ 사도 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은 정조가 건설한 화성에서 치러졌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8회 중급 27번 문제
27. 개경 지역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 답④
'송악산', '선죽교'가 나타나 있으니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경이네요.
그럼 이 지역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면 되겠죠?
이 문제는 답지 위주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① 만적은 무신 정권기에 개경에서 신분 해방 운동을 일으키려던 인물입니다.
최충헌의 사노인 만적은 개성 북산(송악산)에서 노비들을 모아 놓고 "장군과 재상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라며 난을 일으키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어요(1198).
② 온건 개혁파인 정몽주는 이방원에 의해 개성의 선죽교에서 살해 당했습니다.
고려 말 신진 사대부 사이에는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온건 개혁파와 급진 개혁파로 나뉘어집니다. 이색, 정몽주
등 대다수의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조의 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였고,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창왕을 몰아 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을 잡아 역성 혁명을 반대하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를
제거한 후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1392).
③ 예종은 개경에 있는 국자감에 관학 7재를 설치하여 위축된 관학을 부흥시키고자 하였습니다.
④ 삼별초가 배중손의 지휘 하에 개경 환도를 반대하며 대몽 항쟁을 전개한 곳은 강화도, 진도입니다.
진도가 함락된 후에는 배중곤의 뒤를 이어 김통정이 다시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쟁하였습니다.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7회 중급 8번 문제
8. 청해진의 위치 답②
특지어 지역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나 유적, 유물을 파악하는 문제는 매회 빠지지 않고 출제됩니다.
문제에 제시된 기행문에 나타난 '장보고가 설치한 군진'은 청해진을 의미합니다.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곳은 오늘날 전남 완도입니다.
8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무역 활동이 활발해지는 상황이었어요. 장보고는 신라 하대의 중앙의 지방 통제력 상실을 이용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828) 해적을 소탕하여 남해와 황해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장보고는 당시 신라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산둥성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짓고 이 곳을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아울러 신라인의 친목과 단결, 안녕을 꾀하는 정신적 위안처로 만들었어요. 그는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와 명성을 얻게 되었고, 서남 해안 일대의 커다란 해상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가)는 강화도, (나)는 완도, (다)는 제주도, (라)는 거제도, (마)는 울릉도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6회 중급 30번 문제
30. 강화도의 문화유산과 관련된 역사 답③
①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은 탁자식(북방식) 고인돌로, 규모가 큰 고인돌입니다.
강화도는 많은 고인돌이 남아 있는 곳으로, 그 가치를 인정 받아 2000년에 전라도 고창, 화순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에 등재되었습니다.
② 고려 궁지는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맞서 항전하기 위해 1232년 수도를 강화로 옮긴 후 개경으로 환도하기 전까지
궁궐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③ 18세기 초 정제두는 강화도에서 양명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써 강화 학파라 불리는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소론 계열이었으며, 북학파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을 들 수 있습니다.
④ 정족산성은 병인양요(1866) 당시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입니다.
⑤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냈던 곳이라 전해지는 곳으로, 고려와 조선 초에도 이곳에서
초제를 올렸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6회 중급 35번 문제
35. 원산과 관련된 역사 답①
원산은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하게 된 3개 항구(인천, 부산, 원산) 중에 하나죠.
개항 이후 이곳 주민들이 합심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식 사립 학교인 원산학사를 세웠습니다(1883). 원산 학사에서는 산수, 과학, 기계, 농업, 양잠, 채광, 일어, 법률, 세계 역사, 지리를 필수 과목으로 교육하였어요. 또, 문예반은 한문, 무예반은 병서와 무예를 전공 과목으로 채택하여 가르쳤습니다. 이는 원산 학사가 전통 학문을 바탕으로 신식 학문을 접목하여 교육을 실시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1905~1914년에는 일제에 의해 경원선이 설치되었어요.
일제 강점기에는 가장 대표적인 노동 쟁의인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9)이 일어났습니다. 이 파업은 영국인이 운영하던 원산의 한 석유 회사에서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1929년에 일어나 약 4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었어요. 파업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곳곳의 사회 단체, 청년 과 노동 단체 등에서 성금을 보내 지지하였으며, 일본 노동자들도 동조 파업을 벌였고, 중국, 프랑스, 소련의 노동자들까지 격려 전문을 보내 왔을 정도로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전개되었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28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사사랑방/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출문제/한국사기출문제해설/한국사능력검정시험난이도/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권으로끝내는한국사능력검정시험
첫댓글 좋네용
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유의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댓글 단 분은 등업 안됩니다.
청해진, 강화도, 전주 등 한국사에 단골로 등장하는 지역들을 이렇게 정리해서 보니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_^
원산학사에대해 이해하게되었습니다^^
문제에 지역명을 그래도 알려줘서 쉽게 풀수 있었습니다~ 몇몇 지역은 역사적사건을 외워두어야 대비할 수있을것같습니다.
지역 매번 헤매다가..
제대로 정리하네요
요번 기필코 합격할것같아요 ^^
지역에 관한 문제는 단골인것 같으면서도 막상 문제를 풀면 헷갈리는 문제인것 같습니다
문제애 지역명이 나와있을땐 어느정도 문제풀이가가능한데 지역명이 없을때의 풀이는 조금 힘듭니다 이에대한 대비가 필요해보입니다
개념은 어느정도 정리했는데 지도로 나오니까 헷갈리는 부분이 많네요
지도를 보고 어느 지역인지 유추하는 연습을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당
지역 문제는 일부 헷갈리는 지문 탓에 상당히 헷갈리는 문제 였는데 중요한 사건 몇개의 지역 명을 알면 어찌보면 쉽게 풀리는 듯도 합니다.
너무어렵다 역사를 쉽게 공부할수 는 없을까요
지역이 가장 많이 헷갈려요.. 지역끼리 묶어서 외워야 할 것 같아요.
너무 대단요 ^*
회원님들 살고계신 동네 이름도 유심히 보시길 권합니다.
가령 용인시엔 처인구가 있고,
전주시엔 완산구가 있습니다.
처인구는 고려 항몽기 때
김윤후 장군이 몽골 장수 살리타이를 죽인
처인성에서 유래한 구역명이고,
완산구는 견훤이 후백제의 도읍으로 삼았던
완산주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거든요^^
제가 취약한 부분이네요ㅠㅠ 여러시대가 섞여 공통점을 찾는 문제가 어려웠는데 유사기출문제를통해 보완할수있을것같아요!
많이 헤깔립니다. 지역과 역사적 사실을 연결하는 것이...
한 지역에 관하여 시대별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정리해야겠네요! 해설 감사합니다
아 지역과 역사적 사실을 연결하는 문제가 제일 어렵습니다 ㅜㅜ 너무 헷갈리네요
지역명과 사건을 연결해서 기억하는게 쉽지않았는데 덕분에 도움이 많이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와 문제 어렵네요 ㅜㅜ
해설보니 더 공부하고싶습니다
19회 중급 26번 문제는 지리적인 부분까지 신경써야하는 문제네요. 깊이 있는 설명이 도움되었습니다.
자료 감사합니당
자세한 해설이 있어서 이해가 되네요!
지역별로 역사적 사건을 모아서 보니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지역을 토대로 자료를 정리해서 보아야겠네요..
지역공부를 해도 막상 문제를 풀면 헷갈려요 많이 보고 외워야 할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