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야구를 짝사랑하며 살아왔다고 말하는 어우홍 원로.(사진=헤럴드스포츠 조석연 PD) |
지난 11월 10일, 한국시리즈 5차전. 경기 시작 전 시구가 있었다. 이날 시구자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끈 어우홍 전 감독. 한국야구위원회(KBO)는 현역 시절 실업팀에서 선수 생활을 거쳐 학생 야구 지도자로 활동하던 어우홍 원로를 한국시리즈 시구자로 선정했고, 시포자는 당시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 주역이었던 김재박
KBO 경기운영위원이 나섰다. 32년 전,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던 스승과 제자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2014 한국시리즈’가 적힌 옷을 입고 그라운드에 오른 모습은 경기장을 찾은 야구 팬들 뿐만 아니라 삼성, 넥센의 감독, 선수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꽤 컸다.
1931년 부산 출신의 어우홍 감독은 1949년 동래중에서 야구를 시작했고, 야수에서 투수로 보직 변경 후에는 중등학교 야구쟁패전(현 황금사자기)에서 최우수 선수로 뽑히는 등 빼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성균관대를 졸업 후 실업팀 한국전력에서는 1루수로도 활약했다. 1960년 은퇴 후에는 부산상고, 경남고, 동아대 감독을 거치며 후진 양성에 이바지했다.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 ‘한대화의 역전 3점 홈런’ 등 다양한 화제를 낳았던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아시아 국가로는 첫 우승을 일궈냈고, 그로 인해 체육훈장 기린장(1982), 세계야구연맹 올해의 감독상(1983)을 잇달아 수상했다.
프로야구 출범 후에는 MBC 청룡(1984~85)과 롯데 자이언츠(1987~89)에서 감독을 역임했고 대한야구협회이사(1980), 초대 일구회장(1991), KBO 총재특별보좌역(1991~96), KBO 10구단 평가위원회 위원(2012) 등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현재 어우홍 원로는 최동원상 선정위원회 위원장(2014~)을 맡아 제 1회 수상자로 KIA 양현종을 선정한 바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불멸의 스타’ 2편은 어우홍 야구 원로이다. 어우홍 원로는 우리나라 나이로 84세의 고령이지만 3시간이 넘는 인터뷰 동안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자신의 야구 역사를 짚어가는 질문들에 대해선 정확한 기억력으로 당시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어우홍 원로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 야구사를 되짚어봤다. 그리고 그가 키운 제자들 중에는 한국 야구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이 수두룩했다. 첫 질문은 한국시리즈 시구와 관련한 내용이었다.
*기사에서는 편의상 ‘어우홍 감독’이라고 표기한다.
#1. 어우홍이 본 ‘선동열 VS 최동원’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김재박 전 감독과 함께 시구를 했습니다. 오랜만에 마운드에 올라본 소감이 어떠했나요?
“11월 8일 KBO 양해영 사무총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었어. 갑자기 시구 얘기를 꺼내더라고. 한국시리즈에서 시구 좀 맡아 달라면서. 양 총장에게 ‘내 공이 (포수한테까지) 가겠느냐’며 걱정했더니 그래도 해 달라는 부탁에 잠실야구장을 향했지. 포수석에 삼성 라이온즈 포수가 앉을 줄 알았는데 김재박이 맡는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 KBO 관계자에게 ‘이거 누구 작품(아이디어)이냐’고 물었더니 허구연 작품이라 하더라고. 그런 아이디어를 제공한 허구연에게 고마운 마음이 생겼을 정도야.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개구리 번트로 팀을 살린 김재박과 당시 감독이었던 내가 시구와 시포를 장면은 나에게도 의미있는 일이었거든. 시구를 위해 마운드에 오른 후에는 관중석을 향해 진심어린 인사를 드렸어. 프로야구를 이만큼 성장 시켜준 야구 팬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지. 본부석뿐만 아니라 1루, 외야, 3루 쪽을 두루 돌며 인사했는데 팬들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인사를 했는지 잘 몰랐을 거야.”
시구 다음날인 11일에는 부산에서 아주 뜻 깊은 행사가 열렸어요. 제1회 최동원상의 주인공으로 KIA 타이거즈 양현종 선수가 선정됐고, 최동원상 선정위원장을 감독님이 맡으셨죠. 최동원상을 제정하면서 선정 기준도 밝혔는데 기준이 30경기 이상 출장, 180이닝 이상 투구, 15승 이상, 150탈삼진 이상, 15퀄리티 스타트 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양현종 선수는 171 1/3이닝 투구, 29경기 출장이었습니다. 선정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었어요.
“최동원상 선정위원에는 나 뿐만 아니라 김성근, 김인식, 천일평, 허구연, 양상문, 선동열이 함께 심사를 했어. 선정을 앞두고 위원들에게 표를 나눠준 다음 부문별로 1,2,3위 이름을 적게 했지. 1위는 5점, 2위는 3점, 3위는 1점을 줬는데, 거기서 최다 득표자가 양현종이었던 거야. 양현종은 올시즌 16승을 올렸고, 165개의 삼진을 잡았어. 물론 평균자책점은 떨어지지만 합계 점수가 가장 높았고 6가지의 선정기준에서 3개 부문 1위를 차지했고, 무엇보다 팀 성적이 8위였는데 하위팀에서 16승을 이룬 것을 대단한 성적으로 본 거지. 6개 기준에 모두 부합되진 못했지만, 그 안에서 최고의 점수를 받은 선수를 뽑은 것으로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한국 야구사에선 오랫동안 선동열과 최동원 중 누가 최고의 투수인가 하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감독님은 대표팀에서 두 선수를 가까이서 지켜보셨습니다. 어떤 평가를 할 수 있을까요?
“사실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나도 하기 어려워. 각자의 장단점이 뚜렷하기 때문에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는 게 어려운 거지. 최동원은 선동열보다 컨트롤이 좋았다. 선동열은 최동원보다 볼 스피드가 뛰어났고. 가볍게 던져도 150km 이상 나왔으니까. 그런데 선동열은 고려대 시절 걸출한 선배들 틈에 가려 혹사를 당하지 않은 반면, 최동원은 연세대 시절 무지하게 혹사를 당했었지. 그로 인해 프로에서 보인 두 사람의 성적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거야. 선동열은 프로 생활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마무리로 전환했고, 최동원은 은퇴할 때까지 선발투수로 활약했는데 두 사람이 프로 마운드에서 세 차례 맞붙어 1승1무1패를 거둔 건 유명한 일화잖아. 프로 감독 입장에서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난 마무리 투수로 뛰었던 선동열을 택했을 거야. 다른 이유는 없어. 내 야구는 지키는 야구야. 그런 점에서 볼이 빠르고, 볼 끝이 살아 움직이는 마무리 선동열이 필요한 거지. 하지만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대표팀에서 만난 최동원은 컨디션이 떨어지긴 했어도 내가 손댈 게 없는 완성된 투수였고, 선동열은 내 가르침을 순순히 받아들인 선수였어.”
![]() 한국 야구의 레전드 '최동원 VS 선동열'. 어우홍 원로는 대표팀에서 만난 두 선수에 대해 남다른 기억을 갖고 있었다.(사진=KBO) |
5형제 중 3형제가 야구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야구선수로 인생의 방향을 잡은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둘째 형이 경향신문사 편집국장을 하셨고, 셋째 형은 중부세무서 서장까지 역임하셨어. 내가 넷째였고, 다섯째 막내는 경기고 감독을 맡았었지. 둘째, 셋째 형은 선수 생활을 하다 대학 졸업 후 사회인이 된 케이스이고, 막내만 야구 감독까지 하며 야구인의 길을 걷었는데 술을 좋아한 나머지 길거리에서 객사를 했어. 다섯 형제 중 모두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나 혼자 남았지. 그래서 상당히 외로워. 형님들이 계실 때는 내 울타리가 돼주시고,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막내까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나니 헛헛함이 물밑 듯 했거든. 부모님은 물론 형님들, 동생을 모두 내 손으로 보내드려야 했어.”
#2. 잊지 못할 은사, 동래중 한경열 감독
동래중학교 야구부 시절, 당시 한경열 감독을 만난 부분이 야구인생을 좌지우지 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1950년대의 학제는 6, 6, 4제로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6학년, 대학교 4학년 제도였다. 즉 어우홍 원로의 동래중학교 시절은 고등학교 시기도 포함된다.)
“맞아. 한경열 감독님은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은인이야. 감독님은 일본에서 야구를 하다 오신 분이었어. 조선견직이란 회사에 근무하면서 동래중학교 감독을 겸하셨지. 지금은 안 그렇겠지만 당시엔 야구부 선배의 구타가 대단했어. 죽지 않을 만큼 맞았으니까. 2,3학년 까진 참고 했는데 4학년서부턴 참을 이유가 없었어. 매 맞으면서까지 야구하기는 싫었거든. 무조건 팀을 도망쳐 나와 수업에 들어갔지. 의사를 목표로 삼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5학년 때쯤 되니까 한경열 감독님이 집 앞에서 날 기다리고 계시더라고. 그 감독님을 만나지 않으려고 몇날 며칠을 피해 다니다가 결국엔 야구부로 잡혀간 거야. 그때 감독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 ‘난 이 야구부 감독 안 해도 된다. 월급 없이 오로지 부산 지역의 야구 발전을 위해 후배들을 키워보겠다는 일념 하에 회사를 다니며 야구 감독을 겸하고 있는데, 넌 단 한 번도 이 감독의 입장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없다고 대답하니까) 집에 가서 한 번쯤 내 입장을 생각해봐라. 그리고 (야구를 진짜 그만 둘 지에 대해) 답을 달라’고 말씀하시는 거야. 집에서 곰곰이 생각한 끝에 야구부를 찾아가 다시 해보겠다고 했고, 그 이후로 어우홍의 야구 인생이 새롭게 시작된 거지.
당시 학교 야구 지도자들은 월급을 받지 못했어. 한경열 감독님 뿐만 아니라 내가 고등학교, 대학에서 야구를 가르칠 때도 월급은 없었어.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 야구부에서 선수들을 가르치는 게 흔한 모습이었던 거야. 한 감독님은 야구선수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 당시만 해도 시험을 봐야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야구선수가 대학가려면 공부를 해야 했거든. 그렇다보니 동래중학교 선수 출신 중에는 연세대 의대 나와 세브란스병원에서 전문의가 되거나 서울공대 섬유학과를 졸업해 한일합섬 공장장으로 근무하거나 법조계에 뛰어든 선수 출신도 있었지. 나로선 동래중에서 감독님을 만난 게 야구의 기술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에서 배움을 가졌던 시간이었어.”
한경열 감독을 떠올릴 때 가장 기억나는 장면이 어떤 부분인가요.
“감독님이 하루는 내게 돈을 쥐어주며 나가서 정종 한 병 사오라고 하시는 거야. 그러면서 ‘우홍아, 이 돈은 학교에서 받은 돈이 아니다. 내 월급(조선견직)에서 나온 돈이니까 오해하지 마라’라고 하시더라고. 즉, 자신은 학교에서 돈을 받고 선수를 가르치거나, 학교에서 나오는 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셨지. 이 점은 나중에 내가 지도자 생활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어. 나도 한 감독님처럼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있을 때 낮엔 회사원, 밤엔 야구부 감독으로 일했기 때문에 돈에 대한 아쉬움이 없었고 학교에서 지원금이 나와도 1원 한 푼 개인적으로 쓰질 않았거든. 당시만 해도 선수들 명목으로 나오는 숙박비를 들고 흥청망청 쓰는 선배들이 많았어. 내가 아주 경멸했던 선배들이었지.”
야구하면서 전국 무대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이 1949년인 걸로 압니다. 당시 동래중 투수로 제 3회 전국지구대표 중등학교 야구쟁패전(현 황금사자기)에 출전해 당대 최고 투수였던 장태영(경남중)과 김양중(광주서중, 현 광주일고)을 꺾으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었죠?
“1949년은 6.25사변이 일어나기 전 해였지. 당시만 해도 투수로는 장태영, 김양중 씨나 박현식 씨 등이 이름을 날리던 시절이었어. 난 원래 1루수를 맡다가 감독님의 지시에 갑자기 투수로 나선 상황이라 그들에 비하면 실력이 보잘 것 없었지만, 직구보다 변화구에 강점을 갖고 있는 바람에 타자들이 내가 던진 변화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지. 제 3회 황금사자기대회에선 1차전 광주서중을, 2차전은 동산중을 잇달아 물리치며 결승까지 진출했고, 경남중 장태영 씨와 결승에서 맞붙게 된 거야. 8회까진 3-1로 앞서고 있었는데 9회에 6점을 내주면서 7-3으로 역전패를 당했어. 아주 쉬운 외야 플라이성 타구를 좌익수와 중견수가 서로 잡으려다 부딪치는 바람에 공을 놓친 게 역전패의 빌미가 된 거지. 그때는 불펜 투수 개념이 없던 터라 선발로 나가면 경기 끝날 때까지 150~160개의 공을 던져야만 했어. 어깨는 아프고, 게임은 아쉽게 졌고, 우승은 경남중에게 넘겨줬고…. 폐회식 때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최우수선수상을 시상하는 순서에서 장태영이 아닌 내 이름이 불리는 거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단상을 쳐다보니 모든 선수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더라고. 아마도 예선전부터 에이스로서의 역할을 다했던 내가 우승팀 선수를 꺾고 최우수선수에 뽑힌 이유가 아니었나 싶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배의 쓰라림으로 인해 그 수상이 기쁘지 않더라고. 그 당시에는.”
#3. 부산상고에서 만난 김응용
이후 성균관대와 조선전업, 한전 등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시다 은퇴하셨는데요,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국 야구사에 족적을 남길 만한 인물들과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으셨습니다.
“1960년 부산상고 야구부장이 집에 까지 찾아와선 학교 야구부를 맡아 달라며 부탁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조건을 내걸었지. 야구부를 맡는 대신 보수는 일절 없는 걸로 하자고. 당시 난 한국전력 부산지점에서 일을 했었고, 월급을 받았기 때문에 돈에 대한 아쉬움이 없었어. 한경열 감독님처럼 부산 야구의 발전을 위해 희생과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 부산상고 감독직을 수락한 거야. 그때 김응용을 부산상고에서 만났다. 김응용은 이북 출신인 아버지와 함께 월남했고, 어머니는 같이 오지 못한 상태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야구에 열정을 쏟지 못하고 있었어. 한 번은 개성중학교 서무과장이신 김응용 아버지가 나를 찾아와선 ‘응용이가 정신 차릴 수 있게끔 잡아 달라’고 부탁하시더라고. 아버지의 간절함을 못 본 척 하기가 어려워 김응용을 불러선 호되게 야단을 쳤지. 당시 김응용은 발에 맞는 운동화가 없어 흰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동네 불량배들이 모이는 ‘조방’에 들락거리는 걸 즐겨했어. 그래서 다시 조방에 출입하다 발각되는 즉시 야구를 못하게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지. 그 다음부터 김응용은 조방 출입을 끊더라고.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어. 훈련 중 김응용이 보이지 않는 거야. 야구부원이 16명 정도 밖에 안 되니까 선수가 없어진 걸 금세 눈치 챌 수 있었거든. 그것도 거구의 김응용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였지. 한참을 지나니까 김응용이 화장실에서 나오더라고.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었더니 변소 갔다 왔다고 말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야, 인마, 학교 수업 시간에 변소가려면 선생님에게 허락을 받아? 안 받아?’라고 묻자, 응용이가 ‘받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대. 그래서 ‘우리는 지금 야구 공부를 하고 있었어. 그런데 나한테 말 한 마디 안 하고 변소에 갔다 왔다고?’라며 엉덩이를 세게 때렸지. 선수들이 다 보고 있는 상황이라 응용이는 무지 창피했을 거야. 그 다음부터 응용이에게 매를 들 일이 없었어. 모든 일에 솔선수범했으니까.”
그러다 부산상고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셨는데요,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난 야구부 감독이었지만, 그 또한 수업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어. 운동선수도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공부도 해야 하며 담배와 술을 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지. 하루는 야구부 선수 중 한 명이 훈련 도중에 갑자기 사라진 거야. 나중에 돌아온 아이를 잡고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더니 훈육주임이 불러서 갔다 왔다고 하더라고. 당장 교무실로 뛰어 들어가서 훈육주임과 한판 붙었지. ‘당신이 만약 국어를 가르치는데, 훈육주임이 사전에 허락도 받지 않고, 학생을 데리고 갔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겠느냐. 난 야구 감독 이전에 야구 선생이다. 그런데 어떻게 내게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선수를 데리고 갈 수 있느냐’며 난리를 친 거야. 다음날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호출을 당했어. 교장 선생 말씀으로는 교사도 국가공무원인데, 야구 감독이 교무실에서 교사를 상대로 모욕과 폭언을 할 수 있느냐며 훈육 주임에게 사과하라는 거야. 야구 감독은 감독이고, 훈육 주임은 국가공무원이니까 야구 감독이 국가공무원을 상대로 사과하라는 교장 선생의 말에 분통이 터졌지. 그래서 곧장 사표 쓰고 나와 버렸어.”
![]() 경남고 사령탑에 부임한 어우홍 원로. 라이벌 부산상고를 맡아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한다.(사진 제공=어우홍) |
그리고 경남고 감독으로 부임을 하신 건가요?
“내가 부산상고에서 나올 때는 주위에 알리지 않았어. 그래서 아무도 몰랐지. 그런데 두 달 후에 경남고에서 연락이 오더라고. 경남고는 부산상고의 라이벌이었거든. 처음에는 고사하다가 거듭된 부탁에 마지 못해 경남고 사령탑을 맡았는데 그 해 야구부 창단 28년 만에 조선일보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어. 그리고 내가 경남고 감독을 맡은 이후론 부산상고랑 붙어 단 한 번도 지지 않았지. 당시엔 소소한 일들로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부산상고와 경남고에서 야구 감독을 했던 시절이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었던 것 같아.”
경남고 감독 시절에는 한 언론사 기자의 투서로 인해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던데, 어떤 내용인가요?
“1970년대 중반에 벌어진 일이지. 경남고가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당시 부산지역의 한 언론사에 재직 중인 체육 기자가 한전 본사 감사실에 투서를 한 거야. ‘한전 소속 직원이 왜 고교 감독직을 병행하고 있느냐’ 하는 내용이었어. 당시에는 학원 체육 지도자가 모자라 그런 형식으로 두 가지 직업을 갖고 있는 게 관행이었고, 야구 감독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닌 진심으로 야구 발전을 위한 봉사 차원이나 마찬가지였거든. 학교에서 교통비 정도의 지원금을 주지만, 내 주머니에 한 푼도 들어간 적이 없었어. 모두 학생들을 위해 사용했는데 그 체육 기자는 내게 감정이 있었는지, 알면서도 투서를 한 거야. 바로 인사계장의 호출이 있더라고. 그런데 그는 내 상황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야. 투서가 접수됐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라도 조사를 해야 한다며 미안해 했으니까. 학부형들로부터 밥 한 끼 얻어 먹은 적이 없었고, 담배, 인삼, 쌀 가져온 것, 다 돌려보냈던 사람인데 이중직이라고 투서를 받은 상황이 어이가 없었어. 결국 한전 본사와 부산지점이 발칵 뒤집어졌지. 결국에는 해당 언론사의 간부와 체육 기자의 사과를 받아냈고, 그 뒤로 경남고 감독직에서 물러났어.”
#4. 경남고 허구연의 남다른 애국심
경남고에선 허구연 해설위원을 비롯해 김용희 차동열 천창호 등을 데리고 제20회 전국고교야구대회, 제 28회 청용기대회 등을 제패했습니다. 당시 제자로 만난 허구연 해설위원에 대한 일화가 있을까요?
“부산 지역의 4개 고등학교에서 야구 잘하는 선수들만 추려 부산대표팀을 구성, 일본으로 시합을 떠난 적이 있었어. 대회 기간 중 시합 없는 날 중 하루를 정해 선수들과 관광을 나서기로 했는데 당일 출발하려는 버스 앞에 모인 선수들의 분위기가 왠지 어수선한 거야. 그때 일본에 거주 중인 한국인 가이드가 나를 찾아와선 이런 얘기를 했어. ‘감독님, 한국 야구선수 중에서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희망적입니다’라고. 이유를 물었더니 그날 관광 일정 중에 이토 히로부미 사당을 참배하는 코스가 있었는데 2학년 선발로 뽑힌 허구연이 그 사당에는 죽어도 안 가겠다고 나섰고, 다른 선수들까지 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는 거야. 그 가이드는 허구연의 남다른 애국심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결국 그날 관광 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 사당 방문은 빠지게 된 거지. 그 대회에서 우승까지 거두고 귀국했는데 허구연은 그 후 그 가이드로부터 학교 졸업할 때까지 미즈노 글러브를 지원받았어. 허구연이 야구 선수로 성공할 수 있도록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거지.”
![]() 82년 세계선수권대회의 히트상품, 선수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 장면.(사진=KBO) |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는 지도자 생활하면서 가장 잊지 못할 한 장면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김재박 감독의 절묘한 스퀴즈 번트와 한대화 감독의 역전 3점 홈런에 힘입어 사상 처음으로 세계선수권대회를 제패했으니까요. 김재박 감독의 개구리 번트도 그때 나온 얘기였죠.
“대표팀 이전에는 한국전력 실업팀을 맡고 있었어. 거기서 좋은 성적을 내니까 대한야구협회에서 세계선수권대회를 맡으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이전 대표팀 감독이 김응용이었어. 제자가 했던 감독직을 내가 맡는다는 게 부담스러워 정중히 거절하니까 거듭 부탁해왔고, 결국 거절하다 마지못해 대표팀을 맡게 된 거지. 82년 세계선수권대회는 프로야구 원년 해라 선수 선발하는 데 어려움이 아주 많았어. 그래서 프로에 가야 할 선수 중 5명을 유보시켰는데 그들이 김재박, 최동원, 유두열, 임호균, 장효조야. 이들 5명은 대표팀 때문에 1983년에 프로에 들어간 거야. 그렇게 5명과 나머지 선수들은 대학생과 군 복무 중인 야구 선수들 중에서 선발했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조합이 투수로는 김시진, 박동수, 박노준, 선동열, 오영일, 임호균, 최동원이었고, 포수는 김진우, 심재원, 한문연이, 내야수는 김상훈, 김재박, 박영태, 이석규, 이선웅, 한대화, 외야수로는 김정수, 박종훈, 유두열, 이해창, 장효조, 조성옥이 포함된 것이고.
당시 세계선수권대회는 서울에서 치렀고, 우리가 홈팀이다 보니 경기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어. 그런데 믿었던 최동원의 몸 상태가 좋지 않는 바람에 선동열이 대표팀 에이스를 맡으면서 스케줄 조정이 필요했어. 강팀과의 경기에 선동열을 투입시키려면 경기 간격을 벌려 놔야 했던 거지. 그로 인해 2차전 미국전에선 선동열이 완투승을 거뒀고, 4차전 대만전에서도 호투를 했으며 마지막 결승전이었던 일본전에서도 마운드에 올라 감격의 우승을 거둘 수 있었다. 물론 타선에서도 드라마와 같은 극적 승부를 펼쳤어. 0-2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2-2 동점이 됐고 8회말 2-2 동점, 2사 1,2루, 쓰리 볼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한 대화가 영황나 나올 법한 장면을 만들었지. 당겨친 공이 왼쪽 담장을 향해 곧게 뻗어나가면서 3점 홈런을 터트린 거야.
선동열이 9회초에도 등판했는데 무척 떨렸을 거야. 잠실야구장을 가득 메운 야구팬들의 함성으로 인해 선수들과의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으니까. 결국 선동열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9회초를 범타로 끝냈고, 마침내 2실점 완투승을 올리며 숙적 일본을 물리쳤어. 우린 우승을 차지했고 선동열은 3승으로 MVP와 다승왕을, 방어율 0의 임호균은 방어율 왕에 등극했지. 1938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생긴 이래 아시아권 국가로는 한국이 첫 우승을 차지한 거였어. 당시 일본 교과서의 왜곡 문제로 반일 감정이 팽배해 있던 상황이라 경기장을 찾은 팬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그 게임은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선수들은 국민 영웅으로 부상하며 우승의 기쁨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어.”
#4. 82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최동원이 에이스를 맡지 못한 이유
최동원 선수의 몸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데, 중요한 경기에 선발로 나서지 못했던 건가요?
“연세대 시절 팀에서 너무 혹사를 당한 나머지 스피드도 떨어지고 제구가 되지 않았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 맞붙었던 팀이 최약체로 꼽혔던 이탈리아였는데 그 경기에 김시진-최동원을 올렸다가 1-2로 패했지. 파나마전에서 최동원이 선발로, 임호균이 마무리를 맡으면서 4-2승을 거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던 거야. 누구보다 최동원의 역할이 필요했지만 내가 최동원에게 배려해줄 수 있는 것은 무조건 휴식이었어. 어깨를 쉬게 해줘야 살아날 것 같았으니까.”
(선동열 감독은 이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82년 세계선수권대회와 관련, 다음과 같은 설명을 곁들였다. ‘최동원 등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결승전 선발로 낙점되면서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0-2로 지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역전을 한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서든 점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굉장히 긴장했다. 9회에 마운드에 올라갔는데 어떻게 던졌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야구 인생 중에서 가장 떨렸던 경기 중 하나로 기억에 남는 대회였다.’)
<세계선수권대회의 중계를 맡은 방송사가 MBC였고, 해설은 허구연 위원이 맡았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감독상 까지 거머쥔 다음에는 동아대 감독을 거쳐 MBC 청룡 사령탑에 올랐습니다. 당시 동아대에서는 감독님의 프로행을 막기 위해 종신 감독직을 보장해줬다고 하던데요.
“종신 감독은 물론 집까지 얻어줬는데 그걸 뿌리치고 나왔지. 동아대 가기 전에 원래는 롯데 자이언츠 초대 감독 후보로 거론됐었어. 롯데호텔 사장을 만나 계약을 확정지었고, 인사차 신격호 회장과의 독대만 남은 상태에서 갑자기 없던 일로 하자는 롯데호텔 사장의 전화를 받게 된 거야. 무척 황당했지. 동아대 부임 후 1년 만에 대통령배대회에서 우승을 시키자 이번에는 MBC에서 연락이 왔어. MBC 청룡팀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더라고. 그래서 지도자 중 최고의 계약금인 4500만 원을 받고 생애 첫 프로팀 감독에 올랐지. 그 후 롯데 감독을 거쳐 이웅희 씨가 제 3대 KBO 총재에 선임됐을 때 총재 특보로 추천되면서 더 이상 현장으로는 돌아가지 못했어. 난 역대 KBO 총재 다섯 분과 인연을 맺었어. 참 희한한 일이었지. 보통 새 총재가 선임되면 총재 특보가 바뀌는 게 당연한 거잖아. 그런데 난 계속 그 자리에 있었고 총재만 바뀌는 거야. 당시 KBO 총재는 장관들이 맡는 게 관례였는데 전 문공부장관 이웅희 씨, 전 국방부장관 이상훈 씨, 전 국방부장관 권영해 씨, 전 과학부장관 오명 씨, 전 법무부장관 김기춘 현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차례대로 모시며 행정 일을 맡았었지.”
(어우홍 감독은 1988년~1989년 롯데 자이언츠 제 4대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당시 팀의 에이스 투수였던 최동원의 계약을 둘러싼 잡음이 불거지면서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1988년 윤학길이 18승을 올렸고 팀타율 0.270의 성적을 올렸지만, 팀은 또다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결국 이듬해인 1989년에 롯데자이언츠 유니폼을 벗어야했다.)
![]() 어우홍 감독이 한국전력을 맡은 지 4개월 만에 6연승을 내달리며 독주하고 있다는 내용의 신문 기사. |
#5. 해설위원 시절의 ‘돌직구’ 그리고 파문
그 이후에는 방송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도 활약하셨는데, 박찬호, 이승엽 등 해외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에 대한 쓴소리로 파장이 일기도 했습니다. 특히 방송 중 이승엽에 대해 “당시 프로가 있었다면 박현식 씨가 이승엽보다 훨씬 홈런을 많이 쳤을 것”이라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속한 이승엽 선수가 손가락 부상으로 뛰지 못하는 데 대해 영양가가 없다며 혹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인해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었고요.
“나에 대해 조사를 정말 많이 했네(웃음). 그 말로 인해 아주 오랫동안 야구 팬들에게 씹혔었지. 우리 집 애들이 걱정할 정도로 악성 댓글들이 줄을 이었고, 신문 기사에 그와 관련해 좋지 않은 내용이 실리기도 했어. 프로 선수는 몸 관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였는데, 내가 조절을 못하고 말하는 바람에 파장이 커졌어. 나중에 김응용의 딸이 시집간다고 해서 결혼식장을 찾았다가 내 옆에 이승엽 아버님이 앉아 계시더라고. 눈 인사만 하고 서로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했는데, 그래도 아버님은 별다른 감정을 노출하지 않으셔서 호인은 호인이시구나 싶었지. 나는 프로 선수들이 담배 피우는 것도 뭐라고 야단 친 사람이야. 그건 선수보다 코치들 잘못이 더 커. 담배를 끊지 못하게 만든 책임이 코치한테 있는 거니까. 투수에게 니코틴은 몸 상태를 망치는 주범이야. 지금은 젊어서 모르겠지만, 30대 이후에는 절감할 거야. 몸의 회복 속도가 담배 안 피는 선수에 비해 더디다는 것을.”
KBO 총재특보로 계실 때 연세대 임선동의 일본 다이에 호크스와의 계약을 가장 앞장 서서 막은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선수 임선동은 1차 지명구단인 LG와 오랜 법정 소송을 벌였고, 긴 공방 끝에 LG와 합의 후 입단했지만 LG와 현대를 거쳐 잦은 부상으로 2007년 은퇴했습니다. 대학시절 박찬호, 조성민과 함께 92학번을 대표하는 투수였는데, 임선동의 해외 진출을 막은 데 대해선 후회하지 않나요?
“그때는 일본야구기구와 협정을 맺지 않은 상태였어. 프로야구가 성장해야 하는 판에 해외로의 선수 유출은 한국 프로야구의 질적 저하를 불러오는 상황이었지. 그래서 일본에서 열리는 아시아퍼시픽 슈퍼베이스볼대회 참관 차 출장을 갔다가 다이에 호크스의 세토야마 단장을 만나 강력하게 항의를 했어. 이미 일본에서는 우리가 항의 차 방문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바람에 취재진들이 100여 명 정도는 모여 있었던 것 같아. 기자들이 보는 데서 세토야마 단장에게 ‘당신들은 송아지를 잡아 먹지 말고 소를 잡아 먹어야 한다. 그러려면 송아지를 더 키워서 소가 될 때까지 기다려줘야 하지 않느냐’라고 일본말로 큰소리를 쳤었지. 또한 ‘당신들은 한국보다 일찍 프로야구를 시행했다. 당신들이 대학생이라면 우린 유치원 수준 정도이다. 유치원생인 우리가 대학생 쯤 됐을 때 좋은 선수들을 서로 교환하자’는 말도 전했어. 일본 내에서도 여론은 한국과 정식으로 협정을 맺기 전에는 선수 빼오기를 하지 말라는 분위기였다고. 내가 잘못한 부분은 임선동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구속했다는 것이고, 잘한 점은 일본의 선수 빼가기에 공식 항의를 함으로써 그들에게 나름 경종을 울렸다는 것이겠지. 프로 야구 저변이 뿌리내리지 않은 상황에서 무분별한 선수 유출은 한국 야구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어. 하지만 임선동한테는 개인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6. 어우홍에게 야구란 무엇인가?
감독님은 프로야구 10구단 유치에 가장 먼저 앞장 선 분입니다. 2012년 7월 서울의 한 호텔에서 ‘10구단 창단을 위한 역대 프로야구 감독 기자회견’에 생존하는 전직 감독 가운데 최고 연장자로 나서 10구단 창단을 촉구하는 한편 반대하는 구단이 있다면 구단주가 직접 나와 야구 팬들에게 납득이 갈 수 있는 해명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던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노력을 기울인 10구단 창단이 이미 이뤄졌고, kt 위즈가 내년 시즌부터는 프로 1군 무대에세 뛰게 되었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네요.
“먼저 9구단으로 프로야구가 진행될 경우 파생되는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프로에 진출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수백 명 넘게 실업자가 되는 상황에서 일자리 창출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10구단은 반드시 창단돼야 한다고 믿었지. 10구단 창단이 결정되기 까지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신생팀이 kt로 선정됐고, 조범현 감독이 선임되면서 2군리그를 거쳐 팀을 만들어 가면서 1군 진입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감격스럽긴 해. kt가 개막전을 치를 때는 꼭 수원야구장을 찾아가 직접 경기를 지켜보고 싶은 바람이 있어. 그동안 칭찬보다는 욕을 더 많이 먹으며 살았지만, 그래도 세상 떠나기 전 야구 팬들에게 선물 하나는 해드린 것 같아 뿌듯하긴 하네.”
오랜 시간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점은, 여전히 감독님의 가슴에는 ‘야구’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감독님에게 야구는 무엇입니까?
“야구는 내 인생의 전부야. 지금은 원로로 존재하지만, 선수였든, 지도자였든, 뒷방 할아버지가 됐든, 야구는 항상 내 심장에 있었어. 난 원래 야구하다가 그만두고 의사가 되려 했었어. 그런데 내가 적녹색맹이라고 하는 거야. 의사가 될 수 없대. 그래서 다시 야구에 매달렸지. 그때부터 야구가 내 인생의 전부가 됐어.”
어우홍 감독에겐 두 아들이 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아들 모두 야구를 좋아했다. 그러나 장남이 초등학교 때까지 야구를 한 게 전부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야구하는 걸 반대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후배들에게 아쉬운 소리하기가 싫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식이 야구를 하면 아무래도 감독을 하는 후배들에게 이런 저런 부탁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 신세지기 싫어서 아이들이 원해도 야구를 못하게 했어. 원망 많이 들었다. 아들 중 한 명 정도는 야구인으로 남아도 됐는데 내 성격 때문에 못하게 했으니까.”
어 감독은 야구인들이 야구가 아닌 돈 문제나 사생활 문제로 구설에 오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적어도 ‘야구인’이란 수식어를 달고 있는 사람은 그 수식어에 먹칠하지 않게끔 생활면에서도 잡음이 없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야구인, 야구 원로로서, 누구보다 야구를 사랑하는 그는 2년 전 골든글러브 시상식장에서 이런 건배사를 외쳤다.
“여러분! 야구 팬들이 프로야구의 주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팬들을 섬기면서 팬들을 위한 야구를 하기 바랍니다!”
한국시리즈 5차전 시구를 앞두고 그가 본부석 뿐만 아니라 관중석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 한 모습은 프로야구에 대한 그의 애정을 대변한 장면이었다. ‘야구=어우홍’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의 야구 사랑에 대해 이 시대의 야구인이라면 한 번쯤 귀 기울여봐야 하지 않을까.
<이영미의 '레전드 톡'-어우홍 원로의 야구 이야기>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불멸의 스타>는 한국 스포츠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을 찾아 갑니다. 혹시 꼭 만나고 싶은 인물, 반드시 소개해야 할 스포츠인이 있다면 댓글을 통해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편집자 주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불멸의 스타<1> ‘73세 농구청년’ 방열의 60년 인생 기록
기사제공 이영미 칼럼
첫댓글 어디든 그 분야의 원로님들은 노고를 인정받으셔야죠~
인상도 좋으시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