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어둠 속으로
열차가 섰다.
그는 눈을 뜨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플랫폼에 서있는
이정표에 대전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큰 글씨로 쓰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계는 오후 8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가씨가 커피통을 들고 지나갔다.
그는 아가씨를 불러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청년이 석간신문을
잔뜩 들고 지나갔다. 그는 청년을 불러 석간신문 두 가지를
샀다.
종이컵에 들어 있는 커피의 감촉이 손바닥에 따뜻하게 전해져
왔다. 커피는 너무 달았다. 그러나 그는 그 따뜻함을 즐기면서
커피를 입 속으로 조금씩 흘려넣었다.
연휴로 3일 동안 쉬었던 신문은 4일자 지면에 많은 뉴스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홍콩 마약밀수 살인사건 기사가
단연 톱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기사에는 수사진이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 부산으로 급파되었다는 내용도 실려 있었다.
그는 커피잔을 창가에 올려놓고 다시 한 번 그 기사를
읽어보았다. 읽고 나서 그는 신문을 내려놓고 커피잔을
집어들면서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어떻게 부산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다시 눈을 감았다. 열차가 움직였다.
미스터 Y가 경찰에 고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점은
배제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았을까?
비로소 홍일란의 집에 숨어 있다가 그녀와 함께 차를 타고
골목을 빠져나올 때 검문에 걸렸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검문
경찰관은 그의 주민등록증을 보고 주소가 부산이냐고 물었었고,
그를 대신해서 홍일란이 부산에서 이사온 지 얼마 안 된다고
대답했다. 주민등록증을 돌려주고 난 그 경찰관은 차를
통과시키기 직전에 생각난 듯 그의 이름을 물었었다. 그때에도
홍일란이 얼른 김동민이라고 둘러대어 위기를 넘길 수가 있었다.
주민등록증을 돌려주고 난 뒤 나중에 가서야 이름을 물었다는
것은 경찰관이 주민등록증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고 건성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거기에 적혀 있는 추동림이란
이름은 보지 못한 것이다.
수사진이 부산에 급파된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그들은 부산에서 김동민이라는 이름을 찾고 있을까. 홍일란이
사실대로 경찰에 말하지 않았다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고 만일 홍일란이 그날 밤의 일을 경찰에 신고하고 그때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모두 털어 놓았다면 경찰은 다른 방향에서
수사를 전개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녀를 통해 몇 가지
단서를 포착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범인한테는 인하라는 이름을 가진 세 살짜리 아들이
있으며, 그의 아내는 충격으로 얼마전에 유산한 적이 있고,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조그마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등의
단서가 그것이다. 그것을 근거로 경찰은 얼마든지 수사를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동림은 홍일란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것은
경험이 미숙한데서 온 실수이다.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그는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마시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도시의 마지막 불빛들이 어둠의 바다 속으로 드문드문
흘러가고 있었다.
열차는 10시 30분이 지나서야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 광장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바람이 너무
세찼기 때문에 얼굴을 똑바로 쳐들고 걷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코트깃 속에 얼굴을 묻은 채 빠르게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택시 정류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그는 택시
타는 것을 포기하고 주위를 휘둘러보다가 공중전화 부스가
늘어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공중전화 부스는 거의 비어 있었다. 그는 장거리 자동전화기가
설치되어 있는 칸으로 들어가 동전을 집어넣고 아내가 있는
충무의 장모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아내가 그의 전화를 직접
받았다.
큰일 났어요!
그것이 아내의 첫 마디였다. 그녀는 속삭이는 소리로 재빨리
그렇게 말했다.
어머님 계셔?
그는 장모가 아내의 말을 듣고 있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어머님은 건넌방에서 주무시고 계세요. 경찰이 가게에 들러
저하고 당신을 찾았대요. 수희가 그러는데...... 가게를
쑥밭으로 만들고 갔나봐요. 수희한테 마약 관계를 캐물었대요.
집에도 갔었나봐요. 가게에 혹시 마약이 숨겨져 있지 않았나
해서 그렇게 뒤졌나봐요. 지금 어디 계세요?
여기 서울이야.
그는 전화를 끊고 싶었다.
더이상 숨어 있을 필요가 없지 않아요. 경찰이 알게 됐는데
더이상 도망다녀서 무슨 필요가 있어요. 우리 자수해요.
남화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눈앞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느꼈다.
경찰은 나에 관한 것만 알고 있는 게 분명해. 당신을 찾은
것은 나를 잡기 위해서 그런 거야.
아무튼 우리 자수해요. 잠도 잘 수 없고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어요.
그러지 마. 자수하자는 말은 하지 마. 지금 와서 자꾸 그런
말을 하면 어떡 해.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 나는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있었어.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야. 우리가
자수하면 인하는 어떻게 되겠어.
어머님한테 맡기는 수밖에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꺼지는 것처럼 들려왔다.
만일 어머님이 돌아가시면?
그의 물음에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런 말해서 안 됐지만 장모님은 고혈압으로 고생하고 계시지
않아?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실 수 있는 가능성이 많으신 분이란
말이야. 그런 분한테 어떻게 인하의 장래를 맡길 수가 있어.
건강이 좋으시다해도 노인한테 어린애를 맡긴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야. 인하한테도 물론 잔인한 짓이고. 당신이나 나나
일단 자수한다 해도 금방 석방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10년이
될 지 20년이 될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무기형을 받을 수도
있고 사형언도를 받을 수도 있어. 제발 자수하자는 말은 더이상
하지 마. 외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빨리 알아보겠어.
경찰의 수배를 받게돼서 어렵긴 하겠지만 방법은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만일 경찰이 여기까지 찾아오게 되면 어떻게 하죠?
경찰이 찾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나야.
혹시 모르지 않아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놈이 입을 다물고 있는 이상 당신은
안전해. 그놈은 헤로인 때문에 함부로 입을 열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경찰이 당신을 찾아온다 해도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들은 내가 있는 곳을 대라고 할 거야. 당신이 내가 있는
곳을 모른다고 해서 경찰이 당신한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야.
당신이 주의해야 할 상대는 경찰이 아니라 미스터 Y일당이야.
하지만 놈들은 거기까지 찾아내지는 못할 거야.
갑자기 남화는 침묵했다. 그는 아내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가
인하는 잘 있어?
하고 물었다.
할머니하고 자고 있어요. 할머니를 유난히 따라요.
잘 있어.
몸 조심하세요.
그녀의 울먹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게된 이상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은 이제 어렵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경찰의
감시망이 번득이고 있을 것이다. 만일 불심검문이라도 걸리는
날에는 끝장이다. 그는 위조증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하도로 내려가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로 향했다.
을지로 1가에서 내려 지하 광장에 설치되어 있는 물품보관함
속에 헤로인이 들어 있는 가방을 집어넣었다. 그것을 가지고
다니는 동안에는 언제나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보관함 속에 넣고 나자 마치 큰 짐을 벗고 난 기분이 들었다.
광장에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밤 늦은 시간이라 행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벤치 여기저기에 오갈 데 없는 거지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거나
새우잠을 자고 있다. 그들한테는 추위가 제일 무서울 것이다.
조금이라도 추위를 막으려고 어떤 노인은 종이 박스를 풀어
그것을 뒤집어쓰고 있다.
어깨가 구부러진 노인 한 사람이 쩔룩거리고 다가와 그에게
손을 내민다.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었고, 조그마한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이다. 말라죽은 나무가지
같은 손을 벌려 담배를 한 대 구걸한다. 동림은 반쯤 남아 있는
담배갑을 아예 노인에게 주어버린다. 노인이 불을 청한다.
동림은 라이터까지 그에게 주었다. 그에게는 또 한 갑의 담배와
한개의 라이터가 있었다. 노인은 맞은 편 그의 자리로 돌아가
자꾸만 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동림은 서울 운동장 쪽으로 향해 지하도를 걸어갔다.
지하도 양켠에 자리잡고 있는 가게들은 이미 문을 닫고
있었다.
그는 당장 잠자리를 구해야 했다. 그렇다고 아무 숙박업소에나
들어가 방을 구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싸구려 여관에
들어갔다가는 검문에 걸릴 것이다. 그는 형님댁을 생각했다가 곧
지워버렸다. 형을 만나지 않은 지는 벌써 수년이나 되었다. 형
내외는 불쑥 찾아온 그를 반겨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계속 어디로 갈까 하고 생각하면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대로 계속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지하도에 설치되어 있는 벤치에 다시 앉았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나 걷다가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 택시를 잡았다.
서대문으로 갑시다.
어쩌면 내일쯤 신문에 자신의 사진이 게제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자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차비를 치르고 다시
택시에서 내려 눈보라를 맞으며 찬바람을 가슴 깊숙이
들여마셨다.
다시 택시를 타려고 서성거리고 있는데 저만치서 경찰관 두
명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밤 늦은 시간이라 보도에는
그들만 보일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동림은 그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딴 데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구둣발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그들이 지나쳤다고
생각되어 돌아보는 순간 경찰관 한 명과 시선이 마주쳤다.
동림은 당황해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걸음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동림은 목덜미가 뻣뻣이 굳어지는 느끼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손으로 바람을 막으면서 라이터불을 켜는데
실례합니다.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제발 그대로 돌아가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뒤돌아보았다.
키가 큰 경찰관 한 명이 그에게 거수경례를 보냈다. 또 한
명은 그 옆에 바싹 붙어서 있었다. 그들은 방한모에 방한복
차림이었다. 방한모를 눌러쓰고 있는 모습들이 아주 비슷해
보여서 마치 쌍동이 같았다.
주민등록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들은 M16을 어깨에 걸고 있었다. 저 총 속에 실탄이 들어
있을까 하고 동림은 생각했다. 만일 실탄이 장전되어 있다면
도망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은 검문에 불응하는 사람들
사살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동림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몸을 조금 흔들어 자신이 술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주민등록증? 그런 거 없어요.
순찰 경관들은 젊어보였다. 그들은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런 거 없다니요? 주민등록증은 반드시 휴대하도록 되어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그래? 난 그런 거 관심없어요.
그는 비틀거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주민등록증 있으면 보여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저희들하고
잠깐 가셔야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 주민등록증은 술집에 맡겨놨어.
그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다가 그중 한 명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갑시다.
이거 놔!
그는 경찰관의 손을 홱 뿌리쳤다.
가긴 어딜 가?
파출소까지 잠깐 갑시다. 거기 가서 신분이 확인되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웃기지 마!
그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들은 양쪽에서 그의 팔짱을
끼고 잡아끌었다.
그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그들을 뿌리치면서
소리쳤다.
이거 놔요! 갈테니까 이거 놓으란 말이야! 창피하게 팔은 왜
잡아끌어!
그가 순순히 응할 뜻을 보이자 그들은 그의 팔을 놓아주고
그의 양쪽 옆에 바짝 붙어서서 걸었다.
이쪽으로.
지하도 앞에 이르자 경찰관은 지하도로 내려가는 그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그는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가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내려가자 그들은
뛰어내려가 그의 앞 길을 가로막았다.
도로 올라가요!
경찰관이 태도를 고쳐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림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계단에다 버리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가슴팍을
힘껏 밀었다. 무방비 상태에 있던 그들은 계단 아래로 한데
뒤엉켜 굴렀다. 그들이 일어나 계단을 올라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것이 동림의 계산이었다.
동림은 재빨리 계단을 올라온 다음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서라! 서지 않으면 쏜다!
그가 백여 미터쯤 달려갔을 때 뒤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길 위에 쌓인 눈때문에
마음대로 뛸 수가 없어 안타까왔다.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외침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가 일정한
크기로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그들과의 간격은 좁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 정말 이런 생활은 싫다! 그는 달리면서 속으로
외쳤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아들을 데리고 해운대 바닷가를
거닐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아들을 데리고 바닷가를 거닐던
일이 아주 옛날처럼 생각되었다. 아마 그 시절은 오기 힘들겠지.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말 테다.
틀림없이.
골목을 빠져나오자 큰 길이 나타났다. 큰 길을 가로질러 다시
골목 안으로 뛰어들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열심히 뛰어갔다. 숨이 턱에 차서 더이상 달릴 수
없을 때까지 달려갔다.
더이상 달릴 수 없게 되자 그때부터는 걷기 시작했다. 될수록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미로 같은 골목을 누비다 카페를
발견하고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그마한 카페로 한쪽 테이블에 손님 한 팀이 앉아 있을 뿐
한산했다.
그는 스탠드 앞으로 가서 의자 위에 가만히 엉덩이를
올려놓았다.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한동안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손님 기다리시나요?
여자 바텐더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꼬냑 한 잔 주시오.
경찰관들이 카페에 나타나면 그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들어오실 때 보니까 얼굴이 무척 창백하셨어요.
그녀가 스탠드 위에 술잔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밖에는 너무 추워요. 얼굴이 얼어붙어 버렸어요.
그는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술을 입 속으로 흘려넣기 전에
냄새부터 음미했다.
향내가 진하고 감미로왔다. 향내를 깊이 들여마시다가
혀끝으로 액체를 건드렸다.
입 안에 향내가 가득 들어왔다. 그는 아주 조금씩 향내를
마셨다.
어떻게 혼자 오셨어요?
바텐더가 말을 걸어왔다. 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였지만
그에게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귀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나가다가 추워서 들른 거요.
자주 찾아주세요. 미스 박이라고 해요.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관들이 카페 안으로 뛰어드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창백하고 우울해 보여요.
바텐더가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그는 그말에
쓸쓸하게 웃었다.
무슨 고민이 있으세요?
아니오.
30분이 지나 그는 꼬냑 한 잔을 또 청했다.
그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닦았다.
안경을 도로 끼고 화장실에 다녀와서남은 술을 마저 마신 다음
카페를 나왔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지나 1월 5일로 접어들고 있었다.
차도로 나오니 택시가 어쩌다가 하나씩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눈은 여전히 바람을 타고 미친 듯 날리고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차들은 몹시 조심스럽게 굴러가고 있었다. 보도에는
행인들의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런 밤에 돌아다닌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는 호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호텔은 특급은 아니지만 1류급은 되는 호텔이었다.
프런트맨은 그에게 증명을 제시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름과 주소를 모두 엉터리로 적고 나서 요금을 지불하고 열쇠를
받아들었다.
그는 더블 침대가 놓여 있는 10층 방으로 들어가 탁자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관과는 달리 호텔에는 좀처럼 경찰이 투숙객들 방을 일일이
조사하는 법이 없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싼
호텔에 들었던 것이다.
자연 그의 시선은 전화통에 가서 머물렀다.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견딜 수 없는 말을 듣겠지만 그래도 아내와
통화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으려니 마치
심한 고문을 견뎌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도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2시가 지났을 때 그는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 속에 따뜻한 물이 차오르는 동안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그의 눈에 익은 그 얼굴이
아닌 낯선 얼굴이었다.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빨리 변해 버린데
대해 그는 자못 놀랐다. 그것은 끊임없이 쫓기고 있는
얼굴이었다. 불안하고 초조한 빛이 얼굴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
그는 억지로 웃어보였다. 웃는 게 아니라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그는 욕조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침대 위에서 눈을 뜨는 것과 함께 스탠드의 전등을 켜고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아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새벽 3시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불을 끄고 다시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그는 한동안 뒤척이다가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떳을 때는 6시 5분전이었다.
호텔을 나와 청진동 해장국 집으로 향했다. 거기서 청진동
골목까지는 가까운 거리였다.
눈은 그쳐 있었지만 바람은 차가왔다. 거리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어느 해장국집 문을 밀고 들어가니 서너 명의 손님들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해장국을 열심히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쪽으로 들어가 해장국을 시킨 다음 잠자코 앉아 있는데
신문배달 소년이 신문을 던져놓고 간다. 종업원 아가씨가 신문을
집어들고 카운터에 앉아있는 뚱뚱한 중년 남자에게 가져간다.
종업원이 해장국을 가져오자, 그는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 식사도 걸렀던 참이라 그는 몹시 배가 고파 있었다.
정신없이 국밥을 퍼먹다가 카운터 쪽을 힐끗 보니 뚱뚱한 사내가
신문을 대강 훑어보고 나서 그것을 한쪽으로 접어놓는다.
동림은 종업원에게 신문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신문을 펼쳐보던 그는 사회면에 실려 있는 큼직한 얼굴
사진을 보고는 멈칫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그의 얼굴
사진이었던 것이다. 예상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숨을 죽인 채 한동안 그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카운터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뚱뚱한 사내는 막 안으로 들어선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동림은 다시 자신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외국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사진을 본
순간부터 외국으로 도망가야 한다는 그의 결심은 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신문 기사에는 가족관계를 비롯해서 그의 신상에 관한 것들이
비교적 소상하게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과거에 대한 것은
실려 있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경찰과 기자들이 아직
밝혀 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맨 먼저 아내를 생각했다. 신문에 난 그의 사진을 보고
경악하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뒤이어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는 더이상 해장국을 먹을 수 없었다. 사진 옆에는 홍콩 마약
밀수 살인사건의 유력한 살인용의자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신문을 접어 탁자 위에 놓으려다가 의자 위에 슬그머니 내려놓고
의자를 탁자 밑으로 밀어넣었다.
안경을 벗어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신문에 실린 그의
사진은 안경을 끼고 찍은 것이었다. 안경만 벗어도 인상은
달라보인다. 그대신 그는 눈 앞에 안개가 낀 듯 침침해 보였다.
그는 심한 근시였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 새 어둠이 걷혀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그는 택시를 잡아
타고 서대문 B아파트로 가자고 했다.
거기서 B아파트까지는 불과 20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는 제법 커보였다. 그 40대 여인은 202동에 살고
있다고 했다. 구두닦이의 말이 맞는다면, 그녀는 202동 805호에
살고 있다. 바로 그녀가 사진관에 가서 그의 사진을 찾아갔던
인물이다. 그는 그녀를 한번도 보지 않았지만 그녀를 미행했던
구두닦이의 말을 듣고 그녀의 특징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이는
마흔 서넛, 안경을 끼고 있고, 다리는 약간 절며, 자가용을 몰고
다닌다--이것이 그가 구두닦이 청년으로부터 얻어들었던 그
수수께끼 여인에 대한 특징이었다.
그녀는 왜 사진관에서 내 사진을 찾아갔을까? 물론 미스터 Y의
지시나 부탁을 받고 찾아갔겠지만 그걸 가져다가 무엇에 쓰려고
그랬을까? 미스터 Y는 나의 명함판 컬러사진 20장이 왜
필요했을까? 그가 알기로는 그 정도의 사진이 필요한 데는
여권을 발급받는 데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미스터 Y는
내 여권을 만들기 위해 사진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 여권은 물론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발급되는 것이 아닌 위조여권일 가능성이
크다. 놈은 나에게 위조여권을 만들어준 다음 나로 하여금
외국으로 헤로인을 운반하려 했던 게 아닐까? 여기까지는 추리가
가능하다.
그 다음, 그러니까 위조여권과 다리를 약간 저는 그 40대
여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추리도 현재에는 통하지
않는다. 그 여인의 역할은 무엇일까? 단지 사진만을 찾아다 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인물일까? 아니면 위조여권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일까?
그는 단지 안으로 들어가 아파트 건물들 사이로 나있는 길을
걸어갔다.
202동 앞을 지나갈 때는 그 앞에 주차해 있는 차들을 눈여겨
보았다. 눈앞이 흐릿했기 때문에 될수록 가까이 접근해서 차를
살폈다. 서울 마 541× --구두닦이 청년이 가르쳐 준 차번호가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출근 준비를 하느라고 차를 닦고 얼어
붙은 엔진을 거느라고 법석이다.
그는 202동 앞을 그대로 멈춰 서지 않고 지나쳤다가 20분쯤
지나 다시 그쪽으로 가보았다.
서울 마 541×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 차는
국산차로서는 상당히 고급에 속하는 은색 중형차였다.
202동 건물은 꽤나 길어보였다. 단지 안을 돌아다니면서보니,
아파트 건물마다 경비실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입구에만
경비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일단 단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아파트에 침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202동 앞을 지나쳐 그 옆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놀이터 저쪽 켠에는 철책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국민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철책 너머는 바로 학교
운동장이었다. 운동장에서는 그 일대의 주민들로 보이는
남자들이 공을 차고 있었다. 이른바 조기축구 회원들인 것
같았다.
그는 철책에 기대서서 202동 쪽을 바라보았다. 시야가 흐려서
그쪽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안경을 꺼내
끼었다. 미끄럼틀이 가로막고 있어서 저쪽에서 이쪽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몹시 추운 아침이었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으면 견딜 수
없이 추웠기 때문에 그는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기다림은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기다린 보람은 있었다. 두 시간 가까이 기다렸을때
202동에서 안경을 낀 중년 여인이 나오는 것이 보였는데 가만
보니 다리를 조금 저는 것이 아무래도 그가 기다리고 있는 그
여인 같았다.
그녀는 허리를 죄는 보라빛 코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퍼머
상태였고, 몸치장은 꽤나 사치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뒤를
건장한 사내가 따르고 있었다. 그는 30대로 보였고, 누런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은빛 승용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인이 차 문을 열고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건장한 연하의
남자는 그 옆자리에 올라앉았다. 두 남녀가 뭐가 우스운지 입을
벌리고 웃는 것이 보였다.
동림은 안경을 벗고 급히 어린이 놀이터를 빠져나왔다. 10시
가까운 시간이었기 때문에 단지 안을 지나가는 빈 택시가
많았다. 그는 늙은 남자가 운전하는 택시를 잡아탔다.
저 차를 좀 따라가 주십시오.
그는 공손하게 부탁했다.
미행하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되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늙은 운전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은빛 승용차는 이미 202동 앞을 벗어나 단지 출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늙은 운전사는 그 차의 시야에 들어가지 않게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갔다.
은빛 승용차는 시내로 향하고 있었다. 동림이 미터 요금의
배를 지불하겠다고 하자 운전사는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미행을 시작한 지 40분쯤 지나 동림이 탄 택시는 P호텔을 조금
지나쳐 멈춰섰다. 동림은 약속대로 미터 요금의 배를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은빛 승용차는 P호텔 앞에 세워져 있었다. 차 속은 비어
있었다.
동림은 로비로 들어섰다.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커피숍으로 가보니 그들은 거기에 따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아침인데도 커피숍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동림은 구석진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났을 때 한 남자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오더니 그 절름발이 여인 쪽으로 곧장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호리호리하게 생긴 남자였는데 그는 고개를 끄덕하고
나서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안경을 벗은 상태에서는 그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동림은 주위를 살피고
나서 얼른 안경을 끼었다가 도로 벗었다. 불과 2,3초 사이였지만
그는 그 남자를 충분히 볼 수가 있었다. 30대 안팎으로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동림은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싶었다.
마침 여인의 뒤쪽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동림은 전표를 들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위험한
짓이었지만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는 여인과 등을 대고 앉았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될수록 상체를 바로 하고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바싹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 대로 남자 목소리가 좀 컸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아주 급합니다...... 일 주일 내로
해주십시오......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부탁드리는 거 아닙니까. 물론이지요...... 그만큼 생각해
드려야지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염사장님은 너무 짜세요...... 제가 그렇게 성의껏
해드리는데도.......
여인이 갑자기 볼멘 소리로 대꾸하는데 뒤에 가서 말소리를
줄이는 바람에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염사장이라는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들었기 때문에 동림은 숨을 죽이고 계속 귀를
기울였다. 그가 살해한 거한의 말에 따르면 염사장이 바로
미스터 Y라고 했다.
......사장님한테 전해 드리겠습니다...... 굉장히
바쁘십니다. 그러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우리 관계야 바늘과 실 같은 관계 아닙니까...... 서로 공존
공생하는 거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자, 여기 필요한
서류 있습니다.......
여인이 체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씀하시면 안 되죠......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모님께 걸고 있는 기대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닌데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솔직한 심정이에요...... 언제까지고 이런 일만 할 수
없잖아요.
그들이 일어서는 기척이 났다. 그들이 커피숍에서 나간 것을
확인하고 동림은 일어섰다.
로비로 나가면서 그는 어느 쪽을 미행할까 하고 망설였다.
그리고 호텔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마음이 결정되어 있었다.
절름발이 여인이 탄 차가 먼저 호텔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이어서 호리호리한 청년이 모는 승용차가 움직였다. 동림은
재빨리 빈 택시를 집어탔다.
그런데 청년이 모는 자가용 승용차를 따라가기 시작한 지
10분쯤 되었을 때 갑자기 택시가 속도를 줄이면서 도로 우측에
가서 섰다. 운전사가 펑크가 났다고 투덜거리면서 차에서
내렸다. 동림도 급히 밖으로 나와보니 오른쪽 앞바퀴가 찌그러져
있었다. 하필 고가도로 위였다.
동림은 손을 들어 차를 불렀지만 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달려갔다. 청년이 운전하는 차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손을 들고 서있었지만 그 앞에 서주는
차는 하나도 없었다.
조금만 걸어가면 밑으로 빠지는 길이 있으니까 걸어가는 게
빠를 겁니다.
운전사가 바람 빠진 타이어를 빼내려고 기를 쓰면서 말했다.
동림도 차도 오른쪽에 붙어서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그는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먼저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안과에 가서 눈에다 콘택트 렌즈를
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문득 자신이 마치 몽유병자처럼
꿈속을 걸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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