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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오원(Robert Owen, 1771~1858, 영국)은 프랑스의 생시몽, 푸리에 등과 함께 사회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있다. 그의 뉴라나크의 협동조합과 공장 특히 공장학교는 사회주의 교육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다. 마침 로버트 오언의 삶과 업적을 잘 알 수 있는 라이프인(lifein.new)의 로버트 오언과 '뉴라나크' 글과 한국노총의 칼럼이 있어 함께 살펴본다(글 하나 더 추가함). 참고로 뉴라나크(New Lanark)는 영국 글라스고에서 동남쪽으로 40KM 떨어진 라나크에서 다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병호 남북교육연구소 소장·교육학 박사
스코틀랜드 뉴라나크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의 고향 - 한국노총-고정칼럼 - 한국노동조합총연맹 (inochong.org)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동남쪽으로 40킬로미터 내려오면 인구 9천 명의 소읍 라나크가 있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자리한 클라이드 강을 끼고 2킬로미터 쯤 내려가면 강 북쪽으로 자리 잡은 큰 건물들이 보인다. 뉴라나크(New Lanark)다. 데이비드 데일(1739~1806)이 면방적 공장과 노동자 기숙사로 1786년 세운 마을로 클라이드 강의 수력을 이용해 방적기계를 돌렸다.
18세기를 거치며 활짝 핀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개인의 소유로 집어삼켰다. 스코틀랜드에서도 고지대 정리법 때문에 산이나 골짜기에 자리한 전통적 공유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사람들이 집과 땅을 잃고 쫓겨났다. 자선가이기도 했던 자본가 데일은 이들이 살아갈 터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건설된 동네가 뉴라나크였다.
데일에겐 캐롤라인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웨일즈 출신의 똑똑하고 재능 있는 사업가 로버트 오언(1771~1858)과 사랑에 빠져 1799년 결혼했다. 젊은 부부는 뉴라나크에 신혼집을 차렸다. 20대 초반부터 공장경영자로서 실력을 쌓던 오언은 계몽주의 개혁사상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그는 공장노동자들의 건강과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당시 뉴라나크에 세워진 공장들과 관계된 사람은 노동자와 그 가족, 그리고 인근 도시에서 데려온 고아까지 2천 명에 달했다. 생활조건은 나빴고, 교육과 위생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도둑질과 술주정을 비롯해 나쁜 짓들이 가득했다. 청년 오언은 바꾸고 싶었고,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하여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창시자 중 한 명이 세상에 나타났다. 1810년 하루 10시간 노동을 내걸었던 오언은 1817년 하루 8시간 노동을 내세웠다. Eight hours labour, Eight hours recreation, Eight hours rest가 슬로건이었다. 계몽주의적 박애가였던 오언은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로 변신했고, 1834년 영국 최초의 노동운동 전국조직인 전국노동조합대연합 건설에 깊이 관여했다. 1813년에 쓴 <새로운 사회관>에서 오언은 노동자보호법, 아동노동 금지, 빈민구호법을 제안했다. 사회복지의 역사에서 볼 때, 그는 어린이집의 창시자이자 생활공간계획과 도시계획의 주창자기도 하다.
작자를 알 수 없는 그림은 언덕 위에서 뉴라나크를 내려다본 것이다. 클라이드 강을 끼고 공장과 주거용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공장은 1968년까지 가동됐다고 하는데, 일부는 요즘 호텔로 쓰인다. 뉴라나크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주간조선] 200년 된 스코틀랜드 오언 공동체를 가다 - 조선일보 (chosun.com)
권석하 IM컨설팅 대표
입력 2013.10.04 15:52 | 수정 2013.10.0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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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래너크 밀’ 마을 전경
세상을 바꾸는 데는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강철 같은 단 한 사람의 신념과 의지만으로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국 사회개혁가 로버트 오언(1771~1858)의 ‘뉴래너크 방직공장(New Lanark Mill)’을 보고 든 느낌이다. 오언이 활동하던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의 영국 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그냥 일손(helping hands)으로 취급받았을 뿐이었다. 흑인 노예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존재였다.
고용주들은 물론 사회 누구도 노동자들의 권익이나 노동조건, 근무환경 등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노동환경은 필설로 다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열악했다. 그런 시대에 오언은 노동자들의 복지를 개선하면 노동자들이 더욱 열심히 일해 결국 더 많은 경영성과를 낸다는, 지금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노동자 복지’라는 개념을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시험해 성공한 위대한 선각자이다.
오언은 자신의 성공을 세상으로 들고 나갔다. 노동자의 권익에 관한 사회 각 부문의 개혁을 위해 투쟁에 가까운 노력을 했기에 더욱 위대하다. 영국 노동자들이 지금 누리는 각종 노동환경과 근무조건은 그의 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원히 바뀌어졌다.
오언이 이룬 개혁의 자국은 지금도 영국 각 곳에 남아 있다. 단풍이 곱게 물든 스코틀랜드 뉴래너크(New Lanark) 계곡 기슭에 위치한 10여동의 아주 절제된 조지아 양식의 단아한 석조 건물들이 오언이 자신의 이론을 시험한 공장과 노동자의 숙소, 학교들이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장들은 지금은 박물관과 호텔로 개조되어 방문객을 받고 있다.
세상을 살면서 존경의 대상을 가지는 것도 큰 행복 중의 하나다.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접한 오언의 생애는 알수록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고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오랜 존경의 대상이 이룬 ‘성지’로 순례를 떠난 때문인지 런던에서 글래스고 바로 밑 뉴래너크 마을까지의 8시간 자동차 운전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와 보고 싶었다는 마음 때문이었는지 박물관과 공장을 돌아보는 내내 경건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다. 공장 중 하나를 개조한 호텔은 깊은 산골에나 들어앉은 듯 잡소리 하나 안 들려 오랜만에 중간에 한 번도 깨지 않고 편안하고 깊은 잠을 잤다. 존경과 경건한 마음가짐 때문이었던 듯했다.
로버트 오언이 ‘뉴래너크 방직공장’을 운영할 당시 공장(아래)과 노동자들의 숙소(위)를 재현한 전시물.
오언의 뉴래너크 방직공장은 오언이 떠난 이후 계속 운영되다가 1960년대 더 이상 외국과의 경쟁을 견디다 못해 문을 닫은 이후 지금은 뉴래너크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공장 건물에 여유 있게 만들어진 박물관에는 당시의 직접적인 흔적은 별로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공장 한편에 있는 구식 직조기계로 소량의 제품을 옛 방식대로 생산해 박물관 상점에서 팔고 있어 그나마 당시의 공장 분위기가 좀 살기는 한다.
2000명이 살아서 움직이던 때의 활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결국 어느 유적지를 가나 느끼는 거지만 이런 곳에서는 그냥 상상 속에서 그려야 할 뿐이다. 그나마 방 하나에 모아 놓은 오언의 저서와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에서 대여해 온 오언의 귀한 유화 초상화와, 자료에 많이 등장하는 컬러 펜화 초상화 원본이 전시되어 있어 반가웠다. 한때 귀청이 떨어지게 돌아가던 공장이 너무 조용해 쓸쓸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도 이 박물관에만 연간 8만명이 방문하고, 단지에는 20만명이 들러 간다니 결코 잊혀진 사적지는 아닌 듯했다. 재단 홍보 담당자인 제인 마스터씨는 “뉴래너크 방직공장의 관리와 보존은 이런 수입으로 충분해 정부의 보조는 받지 않는다”고 했다. 아직도 전 세계 특히 미국에서 방문객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로버트 오언 초상화
공장 뒤 언덕에 있는, 노동자들이 살던 5층의 아파트들에는 지금은 공장과는 관련 없는 불과 200여명의 주민이 산다. 어떻게 이 정도 크기의 건물에 한때 2000여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이 살았는지 의아했다. 19세기 초 산업혁명 절정기에 글래스고, 리버풀, 맨체스터 같은 공업대도시들은 몰려든 노동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 포화 상태였다. 부모와 자식이 한 방에서 밥해 먹고 잤다. 많은 경우에 7~8명이 한 방에서 지내야 했다. 삶은 비참했다. 당시를 재현해 놓은 전시관에 가보면 오언이 제공한 뉴래너크의 노동자 아파트는 그나마 방 두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 하나는 부모가 자고 나머지 방에는 부엌을 겸하면서 아이들이 자게 되어 있다. 대도시 노동자들의 상황과 비교하면 이런 뉴래너크의 1가족 1주택의 주거 시설은 천국 같은 곳이었다니 200년 전 노동자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쉽게 이해가 간다.
당시 노동환경은 열악했다. 노동자들은 보통 일주일에 6일간 70~80시간을 일해야 했다. 통풍 시설이 안 된 공장 안에는 목화 먼지가 날아다니고 있어 공기는 탁했다. 여름에는 기계들의 열기로 노동자들이 질식해 실신하기도 했다. 기계 소음에 그대로 노출되어 귀가 먹는 것은 보통이었고 안전장치가 미흡해 작업 중 부상은 다반사였다. 부상을 당해도 보상은 전혀 없었다. 그냥 일을 못해 해고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병이 나서 결근하면 일당은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병이 나건 부상을 당하건 돈이 필요하면 나와서 일을 해야 했기에 노동자들은 건강을 더욱 해쳤다.
당시 어린이들의 노동환경은 더욱 처참했다. 유아원이 없으니 아이를 맡길 데가 없는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공장에 와서 옆에 놓고 젖을 먹이면서 키웠다. 걸음마를 하는 나이가 되면 기계들 사이에서 놀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서너 살만 되면 엄마를 도와 일을 시작했다. 여섯 살부터는 정식 노동자가 되었다. 작은 몸집으로 전속력으로 돌아가고 있는 위험한 방적기계 밑을 곡예사처럼 돌아다니며 떨어진 실이나 천 조각을 줍는 소년소녀들의 모습은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몸집이 작아야 기계 밑을 잽싸게 돌아다닐 수 있고 손가락이 가늘어야 끊어진 실을 잇기 쉬워 섬세한 원단 직조에 유리하다고 해서 아이들을 고용했다. 당시 공장 내부 모습을 재현한 뉴래너크 박물관의 3D 영상을 보면 이런 현장이 생생하게 나온다. 그때는 어린이 노동이 전혀 문제가 안 되던 시절이었다.
10살에 견습공으로 노동을 시작해 20살에 맨체스터 최대의 방직공장 공장장이 될 때까지 오언은 이런 노동현장의 참상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1800년 그의 나이 29살에 장인 데이비드 데일의 공장을 인수할 때까지 오언은 관리직으로 근무하면서 노동자들을 지켜봤다.
당시 노동자들의 근무 태도도 근무환경만큼 나빴다. 술로 인한 폐해를 비롯해 절도, 태만, 기만 등을 보면 도저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고용자와 피고용자 어느 한쪽만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오언은 이 악순환을 깨는 방법으로 노동환경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품성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Not made by him but for him)”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착하게 태어나는데 환경이 나쁘다 보니 악하게 되어 버렸다고 믿었다. 그래서 오언은 공장의 경영 상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정신 상태와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고는 안 되며, 그 시작은 노동자들의 복지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근무환경, 복지후생제도 등을 바꾸면 노동자들이 바뀌고 그러면 더 열심히 일해 결국 이익을 더 많이 내는 경영 성과가 나오게 된다고 오언은 믿었다. 뉴래너크에서 오언은 그 간단한 이론을 시험했고 결국 성공했다.
오언은 우선 노동자의 신뢰를 얻어야 했다. 첫 번째로 그가 개선한 제도는 생필품 조달문제였다. 당시 공장들은 공장 내 상점에서 조악한 물건을 비싸게 팔아 노동자들을 이중으로 착취했다. 오언은 양질의 상품을 공장에서 대량으로 직접 구입해 가격을 낮추었다. 최소한 25%는 저렴하게 노동자들이 생필품을 구입하게 되었다. 금방 노동자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고 옷도 깨끗해지고 가정 내의 상황도 좋아졌다.(나중에 이 제도는 생필품 공동구매조합 형태로 남아 지금도 Co-op슈퍼마켓을 영국 시중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또 오언은 ‘영국 생협운동의 창시자’로 불리게 된다.)
그렇게 해도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들의 오랜 의심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1806년 미국이 목면 수출을 금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목면 값은 금방 천정부지로 올라 직물 생산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노동자를 해고할 수도 없었다. 어디 갈 데도 없는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비인간적인 일을 오언은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공장이 돌아가지 않는 동안에도 노동자들에게는 월급 전액을 지불했다.
그런 일로 인해 노동자들이 오언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기 시작하자 오언은 다음 단계의 개혁을 시작했다. 생산 증대와 양질의 제품 생산을 위해 ‘무언의 모니터(silent monitor)’ 제도를 고안했다. 4면에 다른 색깔을 칠한 나무를 해당 노동자 작업대 위에 그 전날의 실적에 따라 달아 놓은 것이다. 검은색은 나쁜 실적, 푸른색은 그저 그렇고, 노란색은 좋고, 흰색은 아주 좋다는 평가였다. 아무런 통제 없이 작업에 임하던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긴장하게 되고 작업에 집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의가 다 흑색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색깔이 바뀌어 나중에는 흰색이 아주 많이 등장했다. 결국 생산이 늘어 생긴 이익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투자를 보상하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가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복지에 대한 투자, 특히 노동자들과 아이들 교육을 위한 학교 건물 건설 같은 투자에는 파트너들의 반대가 심했다. 전혀 들어보지도 못하고 결과도 모를 교육에 대한 거액의 투자를 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결국 오랜 법정 투쟁을 거치고 은행의 융자를 통해 오언은 그들의 주식을 다 사들였다. 모든 법적 절차를 끝내고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뉴래너크로 돌아오는 길에 오언은 영원히 잊지 못할 광경과 대면하게 된다.
뉴래너크 수십 리 밖에 주민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말에서 마차를 분리해 자신들 손으로 끌고 가기 시작한 것이다. 진정한 감사의 표시이다. 언덕을 올라가는데도 말 네 마리가 끄는 것보다 더 빨리 올라갔다. 마을의 모든 창문과 문에는 동네의 모든 아이와 어른들이 달라붙어 손을 흔들고 있었다고 했다. 그들의 감사와 사랑과 환희가 정말 몸으로 느낄 정도였다고 오언은 고백했다. 200년 전의 얘기를 쓴 글을 읽으면서도 진한 감동이 전해 와서 콧마루가 찡할 정도였으니 당사자들은 어떤 감정이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오언의 전적인 경영하에 공장은 엄청난 성과를 거둔다. 그동안 투자한 금액의 4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익이 4년에 걸쳐 나왔다. 비판하고 빠져나간 전 동업자들은 정말 땅을 칠 일이었다. 이 수익으로 오언은 다시 학교와 유아원 같은 환경 개선을 위한 투자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오언이 믿어온 간단한 이론을 성공으로 세상에 증명한 셈이다.
오언은 특히 아동들의 노동 시작 연령을 6살에서 12살로 올리고 10시간 이상 일하지 못하게 했다. 12살 이하는 유아원을 가게 하고 그 이상은 일과가 끝나면 학교로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올해가 출판 200주년이 되는 오언의 유명한 저서 ‘신사회관(新社會觀·A New View of Society)’에는 ‘아이들에게 매일 운동을 하게 해야 하고 중요한 과학 과목, 가정경제, 농업, 공업, 상업을 비롯한 다른 산업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쳐 나중에 아이들이 택하게 될 직업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게 해야 한다’ ‘읽고 쓰고 셈하는 것과 문법, 그림을 가르쳐야 한다’라는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다. 거의 현대 아동교육법을 읽는 듯하다.
뿐만 아니다. 오언은 ‘아이가 걷기 시작하자마자 유아원으로 보내져야 한다. 인간의 행복은 주로 자신의 감정, 품성, 그리고 주위 환경에 의해 정해진다. 유아일 때 이런 좋은 환경이 주어져야지 좋은 감정과 품성을 가지게 된다’라고 책에서 얘기한다.
그런 교육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했다. 부모로부터 나쁜 버릇을 배우기 전 좋은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본 것이다. 심지어는 집안 청소, 방 정리, 요리, 재봉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영국이 이런 유의 교육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시작하기 70년 전에 오언은 이미 교육을 시작했다. 오언이 세운 유아원은 영국 최초의 유아원이다. 이래서 그를 ‘영국 최초의 조기교육자’라고 한다. 그는 공장 내 학교를 ‘성격형성 신학원(New Institution for the Formation of Characters)’이라고 이름 붙였다. 학교 교실에 들어서니 당시에 쓰던 교재들이 그대로 남아 있고 어린이들이 입었던 하얀 가운이 벽걸이에 걸려 있어 아이들이 수업을 하다 금방 집으로 간 듯하다.
어떻게 오언이 당시로는 놀라운 신사고를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비밀의 열쇠는 오언이 맨체스터에 온 후 공장을 인수해 직접 운영하기까지의 9년간에 있다. 오언은 당시의 사회개혁가 중에는 특이한 존재였다. 웨일스의 마구상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계속된 광적인 독서로 자신을 단련했다. 이런 독서가 그를 나중에 탁월한 이론가를 겸한 지식인으로 만들었다.
거기다가 오언은 다른 중상층 이상 출신의 동료 지식인들과는 달리 직접 현장에서 10년간 일한 노동자 출신이었다. 옆에서 보고 직접 겪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은 젊은 오언으로 하여금 깊은 사명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오언의 사명감에 이론적 뒷받침을 할 중요한 삶의 계기를 나이 23살에 맞는다. 맨체스터 문학철학협회 회원 추대가 바로 그것이다. 소위 ‘Lit & Phil’이라 불리는 맨체스터 문학철학협회는 영국에서도 유명한 지식인 모임이다. 여기에 무학(無學)의 하류계급 노동자 출신이 회원이 된 것이다. 맨체스터로 온 지 단 2년 만에 맨체스터 최고의 지식인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의 사명감에 불타는 수많은 영국 엘리트 이론가들과 접하게 되고 그들로부터 많은 깨달음을 받는다. 특히 그중에도 당시 영국 최고의 지성인으로 평가받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 오언은 벤덤의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그의 시대를 앞선 독창적인 사상이 완성되는 것이다.
뉴래너크의 성공으로 오언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과 유럽을 비롯해 미국에까지 명성이 퍼져 나가게 되었다. 유럽 각국의 정치인, 개혁가, 왕족들의 방문으로 오언은 일을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심지어는 러시아의 니콜라스 황제가 직접 방문했고 자신의 총신을 공장에 6개월간 머물게 해 모든 것을 배워 가게 할 정도였다.
오스트리아제국의 왕세자도 마차를 타고 순례오듯 찾았다. 이런 반향에 고무된 오언은 자신의 공장만이 아니고 다른 공장들의 개혁운동을 시작했다. 오언은 자신의 공장 운영 방식을 다른 공장들이 따라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개혁을 선전해야만 했다. 1813년부터 이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인격의 형성’(1813년)과 ‘신사회관’(1814) 등의 저서를 냈다.
올해가 그 200주년인 셈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고 자신의 연설문을 인쇄해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사회 유력 인사들에게까지 보냈다. 첫 두 달 동안 4000파운드(현재 15만파운드, 2억6000만원 상당)의 사재를 털어 넣었다. 하지만 이런 투어 중에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비롯해 사유재산, 결혼제도 같은 당시 일반적인 사회 통념을 비판했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그의 활동은 동력을 잃었다. 결국 자신의 꿈을 시도해 볼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827년 오언은 이미 모든 시도를 해 본 뉴래너크 공장에 흥미를 잃고 주식을 판 다음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거의 전 재산을 들여 인디애나주 뉴하모니에 부동산을 구입한다. 뉴하모니 실험, 즉 자신이 꿈꾼 ‘커뮤니티(Community)라고 부른 신공동체’를 시작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공산(共産) 공동체’를 실제 시험해 보려 한 것이다.
이 실험은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빈털터리로 영국으로 돌아온 오언은 런던을 중심으로 급진적 개혁론자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영국 노동조합운동, 협동조합운동의 시작 단계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1832년 런던의 전국공정노동교환소 설립, 1834년 전국노동조합대연합, 1839년 퀸우드 협동사회건설, 공장법 창설, 빈민법 제정에 주도적으로 관여하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공산 공동체 시험 때문에 그를 공산주의자라 하는 경우가 있지만 오언은 절대 러시아 10월혁명 식의 폭력적인 혁명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언은 인류는 점진적으로 제도권 안에서 개혁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한 ‘노동자에 의한 독재’는 귀족과 자본가에 의한 독재와 절대 다르지 않다고 봤다. 동시에 그는 노동자는 자신들을 직접 관리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서 자기와 같은 사람이 노동자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1848년 공산당선언에서 오언은 부르주아이자 ‘유토피안 사회주의자’라고 매도당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한다.
오언은 죽기 수년 전부터 빅토리아 시대 진화론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처럼 심령학에 빠져 지냈다.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같은 이미 죽은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는 주장도 했다. 1858년 11월 17일 88세의 나이로 우연하게도 자신의 생가 바로 옆 호텔에서 위대한 개혁가로서 마지막 숨을 거둔다.
그의 저서를 읽어 보면 볼수록, 행적을 찾아보면 볼수록 놀라울 뿐이다. 어떻게 200년 전에 이런 형안을 가질 수 있었는지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세상은 이렇게 밝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이끌어 가는가 보다라고 감탄하면서 다시 8시간을 걸려 런던으로 돌아왔다. 위대한 몽상가와 같이한 행복한 1박2일이었다.
원문보기 : 로버트 오언의 꿈, ‘뉴라나크’를 가다 - 라이프인 (lifein.news)
뉴라나크(New Lanark), 널리 알려진 이야기
뉴라나크(New Lanark)는 이름에서 보듯 라나크에서 새롭게 마을이 생겨난 곳으로 글래스고(Glasgow)에서 버스나 기차로 갈 수 있다. 우리는 글래스고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라나크역으로 가서 뉴라나크까지 버스를 이용했다.
‘뉴라나크’는 잘 알려진 것처럼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이 1800년부터 1813년까지 당시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고 특별한 교육을 하며 협동의 원리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준 커다란 실험실과도 같은 곳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수력 방적기를 발명한 리처드 아크라이트(Richard Arkwright)와 협력한 데이비드 데일(David Dale)이 클라이드강(Clyde) 인근에 1786년 면직공장을 건설한 뉴라나크라는 계획도시의 영향이 크다. 훗날 데일의 사위가 된 로버트 오언은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며 물질적 도덕적 환경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 뉴라나크 생산공동체에서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된다.
뉴라나크는 1968년까지 공장이 운영되다 쇠퇴하게 되는데 1974년 뉴 라나크 보존 트러스트(New Lanark Conservation Trust, NLCT. 이후에는 NLT)가 설립되어 복원을 시작하여, 이후 2001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유럽산업유산루트(ERIH)가 특별한 관리를 하면서 매년 40만 명 이상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뉴라나크 전경
21세기 아이쿱 활동가들이 만난 뉴라나크
뉴라나크에 들어서면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에 놀라고,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라고, 짜임새 있는 견학 프로그램에 또 한 번 놀란다. 뉴라나크 트러스트(NLT)는 커다란 옛 제조 공장시설들과 오언의 집, 오언 학교 등의 건물들을 각종 전시실과 숙박, 카페, 레스토랑 등의 시설들로 바꾸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먼저 방문자 센터에서 뉴라나크 전체 지도를 확인하고 관람을 시작하는데 맨 처음 19세기 산업혁명기 영국의 현실과 이를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해결했던 뉴라나크 산업공동체의 이야기를 재밌는 방식으로 만날 수 있다.
애니 맥레오드 체험 여정(Annie McLeod Experience' Ride)이라는 프로그램은 개방형 캡슐을 타고 10여 분간 캄캄한 내실을 돌면서 19세기 초 이곳에서 정말 살았을 법한 ‘애니’라는 캐릭터의 설명을 들으며 군데군데 나타나는 영상과 조형물들을 관람하는 것이다. 시각, 청각, 후각을 모두 자극하는 이 체험 여정은 아이도 어른도 쉽게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잘 꾸며져 있었다.
애니와의 여정
애니와의 여정이 끝나면 뉴 라나크 방직공장 기계를 재현하면서 당시 면방직 산업의 세계적인 현황과 노동 현장의 모습을 함께 전시한 ‘사람과 면 그리고 방직 기계실(People & Cotton/Working Textile Machinery)’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회전 방적기계(Spinning Mule)가 계속 작동하는데 지금은 면 대신 양모를 생산하며 여기에서 생산된 양모와 양모 제품들을 기념품가게에서 직접 사거나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있다.
방적기계
공장시설들은 이렇듯 여러 관람시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동을 위한 나선형 통로 중앙에는 옛 증기엔진이 있고 상세한 정보들이 벽마다 게시되어 있다. 밀 3(Mill 3) 옥상에는 뉴라나크 전경을 볼 수 있는 옥상 정원(Roof Garden)이 있다. 이곳은 19세기부터 조성된 것은 아니지만 뉴 라나크를 개발하면서 더글라스 콜타트(Douglas Coltart)가 로버트 오언의 환경과 자연에 대한 견해를 기반으로 디자인했다고 한다. 쾌적한 환경이야말로 행복하고 건강한 지역 사회에 필수적이라고 여겼던 오언의 생각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옥상 정원
오언은 혁신적인 교육 시스템을 구축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인간의 성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환경과 교육의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언은 뉴라나크에 아동 교육 시설을 마련했고, 이것은 지금도 역사적 교실(historic classroom)로 복원되어 있다. 오언은 단순히 교과 공부가 아니라 음악, 무용 등 전인적인 인격 형성을 위한 특별한 커리큘럼으로 학교를 운영했다고 한다. 오언의 교실에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소품과 교구 등을 볼 수 있으며 의상을 직접 입어볼 수도 있다.
어린이를 위한 학교
제조 공장을 개조한 전시실을 둘러 본 후에 당시 노동자들의 삶을 직접 볼 수 있는 노동자들의 집과 로버트 오언의 집으로 갔다. 공장 노동자의 집(Millworkers' House)은 1820년대와 1930년대의 주거 방식을 함께 보여주는 곳인데 19세기 초 빅토리아 시대 직전의 뉴라나크의 노동자들은 가정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사진이 아닌 실제 가구와 인형들을 배치한 전시실에서 볼 수 있었다.
로버트 오언의 집(Robert Owen's House)은 실제로 오언이 살았던 곳이라고 하는데 노동자들의 집과는 확연히 다른 규모와 환경을 보여준다. 오언의 사상과 그의 실천들에 경의를 표하지만, 한편으론 노동자 계급과의 구별의식, 가부장적인 면모가 사생활에서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했다. 오언의 서재, 침실, 거실 등이 재현되어 있고 각 공간에는 로버트 오언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오언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 전시물에는 오언의 저술 외에도 뉴하모니(New Harmony), 노동교환소(National Labor Equitable Exchange), 건설공 길드와 노동조합 운동의 역사까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마을 상점
뉴 라나크 내에는 1813년 오언에 의해 설립된 마을 상점(Village Store)도 있는데 여기에서는 과거 협동조합 상점의 모습, 협동조합 운동과 공정한 거래에 관한 전시를 하며 다양한 뉴 라나크 관광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역사 속의 뉴라나크, 진정한 새로움
협동의 원리로 새로운 사회가 가능함을 보여준 로버트 오언의 발자취는 지금도 우리를 자극한다. 게다가 현재의 뉴라나크는 그 이야기가 효과적으로 현세대에게 전달되게 문화유산을 개발, 관리하고 있었다. 뉴라나크 트러스트(New Lanark Trust)는 18-9세기 공장을 복원하고 거주 시설로 바꾸면서 TV 안테나와 위성 접시 등을 허용하지 않고 지하 케이블로 전화와 전기를 이용하도록 설계하여 뉴라나크가 원형에 가깝게 유지하였다. 또한, 다양한 프로그램들로 오래된 이야기를 현세대에게 들려주는 특별한 힘을 보여주었다.
뉴라나크에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새로운 생산-소비 공동체를 실현하며 전국의 아이쿱 조합원을 이어주는 우리의 자연드림 파크가 떠올렸다. 산업시설에서 훌륭한 관광과 교육의 장으로 변모한 뉴라나크! 우리가 만들어 가는 자연드림 파크의 모습도 그러하기를 바라며 더 많은 사람들이 파크를 방문하고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도록 재미있고 새로운 콘텐츠를 준비하고 실천해야겠다는 마음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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