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알프스의 은시대
새로운 등반 방식의 등장
영국에서 등산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부유 계층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돈으로 알프스 가이드들을 쉽게 고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등산은 중산 계급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고, 따라서 이들은 가이드를 고용할 능력이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 필연적으로 가이드 없는 등반이 발달하게 되었고 또한 이런 결과로 단독 등반이 성행하게 됐다.
당시 루트비히 푸르첼러Ludwig Purtscheller와 에밀 지그몬디Emil Zigmondy, 오토 지그몬디Otto Zigmondy 형제는 당대를 대표할 만한, 가이드리스 등반을 실천한 산악인이자 단독 등반가였다. 푸르첼러는 그의 생애 동안 1700좌 등정에 이르는 등반 활동을 했다. 에밀 지그몬디는 1885년 도피네의 라 메이주(La meije, 3983m) 남벽에서 추락사한다. 그의 죽음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고 이 일로 가이드리스 등반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남긴 <등산의 위험Hazards in Mountaineering>은 애독되었으며 후일 빌헬름 파울케가 증보판으로 출간하여 널리 보급한다.
시대가 외면한 단독 등반의 선구자들
당시 유명했던 단독 등반가로는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오스트리아의 게오르크 빈클러Georg Winkler를 꼽을 수 있다. 빈클러는 그 시대를 대표할만한 단독 등반가였으며, 1880년대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반가 중에서 그의 활동은 대담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단독 등반가로서 이름을 확고하게 해준 것은 그가 1887년 돌로미테Dolomites의 바욜레트 타워Vajolet Tower 초등을 단독으로 이루면서부터다. 아직도 이곳에는 '빈클러 샤르테'라는, 그의 이름을 붙인 바위가 그를 기리고 있다. 당시 단독행을 선호하는 다른 등반가들조차도 그와 함께 등반하는 것을 꺼려할 정도였다. 그는 1888년 8월 치날로트 호른을 오른 뒤 바이스호른을 향했으나 그 후 소식이 끊겼다. 그의 시체는 그로부터 68년 후인 1956년 바이스호른 빙하 하류의 얼음 속에서 19세 소년의 모습으로 발견된다.
당시 단독 등반의 기수라고 할 만한 대담무쌍한 등반가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반가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들은 가이드리스 등반의 발달과 함께 자연스럽게 단독 등반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탄생시킨다.
선구적인 단독 등반가인 게오르크 빈클러와 함께 오이겐 기도 라머Eugen Guido Lammer도 같은 시대에 이름을 떨친 단독 등반가이다. 그런가 하면 당시 빈클러와 쌍벽을 이룬 단독 등반가로 에밀 지그몬디와 그의 형 오토 지그몬디, 루트비히 푸르첼러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등반 도중 죽음마저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특히 라머는 전통적인 등반을 거부하고 극한적인 벽 등반을 단독으로 추구하면서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극단적인 등반 태도를 고수해 주위의 비난을 샀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들의 대담무쌍한 단독 등반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젊은 알피니스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너무나 과격했기 때문에 세간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보수적인 정통파 등반가들은 추락할 때 살아남을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위험한 단독 등반을 경원시하였다. 당시 영국 산악회의 연보 <알파인 저널>은 단독 등반 풍도를 빗대어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등산 풍조다"라며 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단독 등반은 매우 위험하나 많은 등반가들이 이 방법에 의한 등반에서 만족감을 얻었다. 근래에 와서 단독 등반은 일반화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그 맥락을 이어오고 있다.
한스 뒬퍼H. Dulfer, 에밀리오 코미치E. Comici, 헤르만 불H. Buhl, 체사레 마에스트리C. Maestri, 에릭 존스E. Jones 등이 저명한 단독 등반가로 알려져 있다.
근대에 와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단독 등반의 업적들이 속출한다. 1955년 발터 보나티W. Bonatti가 드뤼Dru의 보나티 필러Bonatti Pillar를 단독으로 초등하며, 1965년에 마터호른 북벽을 단독으로 직등한다. 오늘날 20세기의 신화를 만든 철인 메스너R. Messner는 알프스는 물론 히말라야에서도 무산소 단독 등반을 이룩해 그 업적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가까운 일본의 하세가와도 일본을 대표하는 단독 등반의 기수다. 그는 젊은 나이로 산에서 요절했지만 우에무라 나오미와 함께 전 일본의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은시대로 접어들면서 알피니즘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그동안의 등반은 안전하고 가능한 쉬운 루트를 통해서 오직 정상에 오르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았으나 은시대에 들어서면서는 좀 더 어렵고 가파른 절벽에 길을 내며 오르는 모험적인 등반이 시작된다. '더 어려운 루트를 통해서 오르는 새로운 등반 방식'이야말로 은시대를 대표하는 주된 풍조가 된다.
1881년에는 머메리가 샤모니 침봉 중에 가장 어려운 봉우리인 에귀유 드 그레퐁(Aiguille de Grepon, 3489m)을 초등한다. 이때 새로운 등반 사조로 등장한 것이 머메리에 의해 제창된 머메리즘으로써, 능선이 아닌 벽을 통해 산을 오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등반 방식의 획기적인 전환이었으며, 벽 등반 시대의 개막을 예고한다.
황금시대의 스타가 에드워드 윔퍼였다면 은시대를 대표하는 스타는 머메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산에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순수 스포츠 등반을 중시했다. 당시 많은 등반가들이 등정주의 등반에 급급할 때 그는 '더 험난한 루트'를 통해서 정상에 오르려고 했다. 이런 산행을 등정주의에 대한 등로주의라고 했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머메리즘이라고도 하였다.
머메리는 자신이 제창한 머메리즘이라는 방식의 등반을 몸소 실천했으며, 머메리즘은 오늘날의 등반에까지 영향을 미쳐 암벽, 빙벽 등반의 행동규범이 되고 있다. 오늘날 그를 가리켜 근대 등산의 비조라 부르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머메리즘의 탄생은 알피니즘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그의 등반 정신은 1세기 이후 헤르만 불과 메스너에게까지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 시대를 대표한 머메리의 주요 등반 연보를 살펴보면, 1879년 마터호른 츠무트 리지Zmutt Ridge를 23세의 나이에 초등하고, 뒤이어 1880년에는 에귀유 뒤 샤르모Aiguille du Charmoz를, 1881년에는 샤모니 침봉 가운데 가장 어려운 봉우리인 에귀유 드 그레퐁을 가이드리스 등반으로 성공하여 암벽 등반의 새로운 기준을 확립했다. 이 봉의 등정으로 머메리즘이 탄생한다.
이 시대에 활동했던 등반가로는 구이도 레이G. Rey, 더글러스 프레시필드, 윌리엄 콘웨이W. M. Conway, 무어, 윌리엄 쿨리지W. A. B. Coolidge , 제프리 윈스럽 영 등이다. 이들은 등반 기술의 발달 외에도 가이드 없는 기술 등반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고 등반에 대한 윤리도 정립한다.
현대 알피니즘을 지배하고 있는 머메리즘
머메리가 1880년에 등반한 마터호른의 브로켄 능선 루트는 1911년 이탈리아 등반대가 재등할 때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알프스 최난의 루트로 평가되었다. 머메리는 1895년 낭가 파르바트(Nanga Parbat, 8126m)에서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남긴 불후의 명작 <알프스에서 카프카즈로My Climb in Alps and Caucasus>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등산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정상에 오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다."
그가 제창하고 몸소 실천해 왔던 머메리즘은 이 저작과 함께 영원히 살아 현대의 알피니즘을 지배하고 있다. 그가 남긴 저서는 윔퍼의 <알프스 등반기Scramble Amongst the Alps>와 더불어 불멸의 산악 문학 명저로 남아 있다.
은시대를 대표하는 주요 등반 기록을 살펴보면, 1868년 그랑드 조라스 동봉이 호르스 워커Horace Walker와 유명 가이드인 멜히오어 안데레크에 의해 초등반되었으며, 1871년에는 영국 여성 산악회장을 지낸 루시 워커Lucy Walker에 의해 여성 최초로 마터호른이 등정된다. 1882년에는 비토리오 셀라Vittorio Sella가 마터호른 동계 등반에 성공하였고, 같은 해 7월에는 당 뒤 제앙(Dent du Geant, 4013m) 쌍봉 중 하나를 알레산드르 셀라Alessandro Sella 형제가 등정하였으며, 뒤이어 8월에는 그레이엄W. Graham이 이 쌍봉 중 높은 봉을 등정하면서 등산의 은시대는 마감한다.
당 뒤 제앙은 일찍이 머메리가 "정당한 방법으로 오를 수 없는 곳"이라고 선언했던 봉우리다. 셀라 형제는 케이블과 로프를 이용해서 이곳에 올랐는데, 이후 등반에서 '정당한 방법'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남겼다.
은시대는 1865년 마터호른 첫 등정 이후부터 1882년 당 뒤 제앙의 초등정까지 17년 동안을 말하며, 황금시대와 다음에 도래할 철시대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다. 물론 이런 기간의 구분은 편의적인 것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더 힘들고 어려운 길로 오르는 본격적인 암벽등반이 시작되었으며 가이드의 안내 없는 등반이 성행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실천한 사람이 은시대의 주연 머메리였다.
(계속)
첫댓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등반 변화가 새롭습니다
알파니즘 역사의 대단한 등반가들 이야기를 접하다보면
산은 목숨걸고 도전하는 지구 돌출 부분의 커다란 스포츠 경기장 으로 느껴진다.
이들의 알파니즘 정신과 철학? 을 외람되게 몇자로 표현하는 나의 손꼬락이 떨리기는 하지만 ,
도전과 정복 기록 명성 자부심 등등과는 무관한 소박한 나의 산놀음이 새삼 행복하고 감사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