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지봉유설』에 나온 왜군의 잔혹극
지난번 원전을 살펴보면 구적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구적(寇賊)은 쉽게 말하면 나라를 침범하는 외국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적을 말하지요. 설명은 비교적 선선하지만 한자를 한 글자 한 글자 보면 상당히 강렬한 글자입니다. ‘도적 구, 도둑 적’자이니까요. 일본 해적을 말할 때 왜구(倭寇), 왜적(倭賊)하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말이 바로 북망(北邙)입니다. 북망은 지리적으로는 중국 허난성[하남성(河南省)] 뤄양[낙양(洛陽)]의 동북쪽에 위치한 산 이름이지요. 그런데 이 북망(산)은 묘지가 많은 곳이나 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곳을 뜻합니다. 듣기만 해도 으스스해지는 지명이지요. 그런데 그 대불사(大仏寺) 즉 다이부츠지가 일본의 북망이라 하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습니다.
다이부츠지는 히데요시의 원당(願堂)이라 합니다. 원당은 기본적으로 소원을 빌기 위하여 세운 집이라는 뜻이 있지요. 그렇지만 보다 많이 쓰이는 의미는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던 법당이라는 뜻입니다. 법당은 간단히 말해 절입니다. 그것도 중심지역이지요. 히데요시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겠지만 궁중에 둔 것은 내불당 또는 내원당이라 하였지요.
어떻든 히데요시의 원당이 있는 곳을 이수광은 주저하지 않고 북망이라 했으니 얼마나 원성의 대상이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의 윤리적 감각이 아니라 그 당시 시점에서도 그렇지요. 당시 시대상을 볼 때 전과를 확인하기 위해 사살한 적 군인의 귀나 코를 베는 일은 나름 흔했습니다. 조선의 경우 이전 한국사나 중국의 관례를 따르기는 했지만 비슷했지요.
가령 조선의 경우도 왜군의 머리를 베어 전과를 확인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살아있는 민간인에게 저지른 짓은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렵지요. 적어도 공식명령을 내리는 경우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 귀 무덤은 교토국립박물관 북쪽에 있는 도요쿠니 신사, 호코지[방광사(方広寺)] 건너편으로 가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하지요.
다소 벗어난 이야기지만 호코지는 교토[경도(京都)]의 히가시야마[동산(東山)]에 있는 천태종 사찰로 대일여래(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합니다. 천태종 어쩌고 하면 저뿐만 아니라 머리가 지끈거리시는 분들도 있겠지요. 저도 아는 것은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 정도입니다. 혹은 이전 스투파의 숲 글에서 용수 보살이라는 양반을 떠올리면 다행일 정도겠지요.
② 에비야의 기원은 귀무덤?
'에비'라는 말은 귀무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어비’, ‘에비야’, ‘이비야’, ‘어비야’ 등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요. 에비는 아이들에게 무서운 존재를 뜻한다고 합니다. “계속 울면 에비 온단다”, “에비, 이런 거 만지면 안 된다.” 등의 경우로 쓰인다고 하지요. 에비는 ‘이비야(耳鼻爺)’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는 「경남매일」, 2014.12.03. 21:59 기사고요.
이비야는 귀(耳), 코(鼻), 사람(爺)이 합쳐진 말로 귀나 코를 베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정유재란 때 종군한 승려 케이넨이 쓴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도 나오는 내용이지요. 일제강점기에도 일본 순사를 에비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출처가 「괴산타임즈」, 2021.10.12. 10:10 기사이고요. 「경남매일」, 2014.12.03. 21:59 기사에서도 언급이 있습니다.
아울러 귀무덤 관련 내용은 서기 2018년 7월 8일자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821회에서 다뤄졌습니다. 여기에 대한 출처는 「MTN 뉴스」, 2018-07-08 20:31:10 기사이고요. 이후 조선인들의 귀와 코 일부는 서기 1990년, 1992년 경상남도 사천시와 전라북도 부안군으로 이장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완전한 이장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지요.
이 코무덤(귀무덤이라 쓰고 이렇게 읽습니다)에는 조선인 12만 6,000명 분의 코가 묻혀 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별도의 관리 예산이나 정부의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지요. 이것은 침략자 측이니 그렇다 해도 문제는 한국 측입니다. 한국에서도 별도의 예산 지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서 3대째 개인이 관리했지요. 나중에서야 교토시에서 관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귀무덤은 하필 토요쿠니 진쟈[풍국신사(豊國神社)] 건너편 공원에 있어서 묘한 대조를 보입니다. 풍국신사는 임진왜란의 원흉 히데요시를 받드는 곳이지요. 진쟈는 신토신코우[신도신앙(神道信仰)]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종교시설을 말합니다. 서기 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이부츠덴[대불전(大佛殿)]과 다이부츠[대불(大佛)]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이는 히데요시가 나라[나량(奈良)]의 도다이지[동대사(東大寺)]를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개인 절인 다이부츠지 즉 대불사에 대한 허영심이 있었지요. 히데요시는 모든 면에서 일본 최고가 되려던 인물이었습니다. 서기 1595년에는 대불전이 거의 완성되었고, 높이 약 19m의 목제 대불이 안치되었지요.
조선은 자신의 야욕으로 인해 황폐화되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일본도 전쟁 중에 건설까지 해야 하는 중노동에 시달리는 상황이었지요. 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의문스러울 뿐입니다. 여하간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 백성들의 원성이 닿아서였을까요? 서기 1596년에는 지진으로 인해 대불이 무너지고 깨여졌습니다.
이때, 히데요시는 대불을 향해 ‘네 몸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가’라 말했다 합니다. 몹시 분하고 노여운 감정이 북받쳐 올랐던 모양이고요. 그것도 모자라 대불의 미간에 화살을 날렸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서기 1598년에 히데요시는 대불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사망했지요. 다만 같은 해에, 대불전만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③ 귀무덤은 교토에만 있지 않았다 Ⅰ
교토에 있는 귀무덤이 유명하지만, 사실 일본 여러 곳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고 합니다. 가령 서기 1992년에는 오카야마현 비젠시 가카토 구마카와산 기슭에서 귀무덤이 발견되었지요. 근거 자료는 「내일신문」, 2015-08-06 10:42:28 기사입니다. 한편 서기 1995년 오카야마현 쓰야마 시에서도 귀무덤이 발견되었지요. 출처는 「대전일보」, 2014.12.08. 06:12 기사입니다.
2014년, 쓰시마시 가미쓰시마 히코텐성 남쪽에서 적석묘로 된 귀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출처는 「메트로 신문」, 2014-12-05 19:56:20 기사이고요. 다음 글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