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오름’
가을 소풍날이다. 여동생과 함께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걸어가는 등굣길 발걸음이 가볍다. 파란 하늘엔 솜사탕 뭉게구름이 떠 있고, 선선한 바람도 살살 불어와 내 마음도 날아갈 듯이 즐겁고 행복하다. 아이들은 운동장에 모여서 담임선생님의 주의사항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서 줄지어 가마오름을 향했다. 길가에 핀 코스모스도 아이들의 소풍길을 배웅하며 살랑살랑 흔들어 댄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허공에 퍼진다.
가마오름에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동굴진지가 있다. 굴속은 오르락 내리락 경사가 심하고, 여러 갈래 길이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동네 어르신들의 말에 따르면 청수리 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 사람들이 강제 동원되어 피땀으로 동굴 진지가 만들어졌다. 작업 중에 굴이 무너져 희생된 사람도 여럿이라고 한다. 동굴 입구 쪽에는 평화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태평양전쟁 때 사용되었던 각종 군수 물품과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마오름에 도착해서 반별로 노래를 부르며 게임을 했다, 이어서 전체 보물찾기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점심을 얼른 먹고 나서 동굴을 탐사할 아이들을 모았다. 가마오름 굴에 신기한 물건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었다. 선생님이 동굴은 위험하니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건만 동굴에 대한 호기심을 이길 수 없었다. 동굴탐사에 일곱 명이 동참하였다. 나를 필두로 나보다 한 살 어린 창남이가 뒤를 따랐고 다섯 명의 또래 아이들이 뒤를 따라 동굴로 들어섰다. 20여 미터쯤 들어가니 깜깜해서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벽을 더듬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가다가 돌아보니 따라오던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창남이만 나 뒤에 바짝 붙어있었다. 깜깜한 동굴 속에서 아이들을 불러보았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따라 들어오다 깜깜해지기 시작하자 무서워서 되돌아 나가버린 것이다.
‘창남아. 우리도 나가자’
나와 창남이는 되돌아 나오기 시작했다. 미끄럽고 경사가 심한 길을 기어 나오는데 앞을 가로막은 벽에 이마가 부딪쳤다. 동굴이 무너진 것일까. 동굴 속에 갇혀 죽는 건 아닌가. 겁에 질려서 가슴은 벌렁거리고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밀려오는 공포에 나와 창남이는 울음이 터졌다. 넋이 빠진 상태로 한참을 울다 보니 창남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벽에 가만히 기대어 있었다. ‘창남아’ 어깨를 흔들어도 무반응이다. 기절한 것일까. 순간 극도의 공포로 나도 정신을 잃어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나를 흔들었다. 창남이가 ‘형! 형!’ 나를 부르며 깨운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었다. 우리를 뒤따라오던 아이들이 나가서 선생님께 알렸을 것이다. 우리를 찾으러 올 것이란 생각이 스쳤다.
‘창남아! 동굴 안에 갇혀 있지만 정신 차리자. 우리가 없어진 걸 알면 선생님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우리를 구하러 올 거야. 며칠만 버티면 살 수 있어.’
창남이를 안심시키느라 한 말인데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깜깜한 동굴 속에서 그렇게 서너 시간을 버텼다. 조바심 때문에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나는 앞장서서 벽을 더듬으며 막힌 반대쪽으로 되돌아 기어갔다. 가다 보니 다시 앞이 막혀 있다. 앞뒤로 막힌 상태가 아닌가. 사방이 막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구조하러 오기만 기다려야 할 판이다. 한참 지났을까. 어둠 속에서도 어렴풋이 다른 길이 보이는 것이다. 천천히 벽을 더듬어보니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창남이와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 갈래 길을 택하여 앞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기어가다 보니 또다시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다시 한쪽을 선택하여 가다 보니 또 막혀 있었다. 되돌아 나와 다른 갈래로 가기를 반복하며 계속 굴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때 멀리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허겁지겁 빛을 향하여 기어갔다. 동굴 입구를 가리고 있는 가시덤불 사이로 들어온 한 줄기 빛이었다.
“창남아! 살았어. 우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가시덤불을 헤쳐나오느라 손과 팔에 피범벅이 되는 줄도 몰랐다. 밖으로 나와보니 소풍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로 나온 것이었다. 동굴 입구는 무성하게 자란 풀과 가시덤불로 꽉 채워져 밖에서 보면 동굴 입구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며칠 동안 굴속에 갇혀 있다 멀리 있는 엉뚱한 곳으로 굴을 빠져나온 것으로 착각했다. 천천히 둘러보니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풍경이다. 아! 가마오름 뒤편이다. 창남이와 나는 환호를 질렀다. 서둘러 오름을 돌아 소풍 장소로 갔다. 아직도 아이들이 즐겁게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우리가 없어진 것도 모른 채 빙 둘러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찢어진 옷에 피투성이가 된 우리를 보고 친구들이 놀라 비명을 지른다. 동굴 벽에 이마가 깨져서 피범벅이 되어 있고 손과 팔에도 가시에 긁혀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놀란 선생님들도 뛰어와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다. 동생은 나를 보더니 무섭다며 뒷걸음쳐 도망간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으로 나에게는 최악의 소풍날이 되었다.
몇 해 전에 지역문화답사반 학생들을 데리고 평화박물관과 가마오름 일제진지동굴을 답사하게 되었다. 동굴 일부를 개방하여 역사교육 체험장소로 공개하고 있었다. 굴 내부는 희미한 전등 시설을 해 놓았고 일부 구간은 나무 테크로, 비탈진 구간은 계단식으로 흙을 다져 답사길을 만들어 놓았다. 굴 내부가 미로처럼 얽혀 있어 어둠 속에서는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는 구조였다. 당시 왜 굴속에서 길을 찾지 못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래된 소풍날의 기억이 가끔 나를 괴롭히고 있다. 닫혀있는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버렸다. 엘리베이터나 비행기를 타게 될 때, 깜깜한 영화관을 들어설 때면 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안정시킨 후에 들어간다.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폐소공포증이라는 생채기는 평생 보듬으며 함께 지내야 하는 트라우마인가 보다. (20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