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선 제123권 / 묘지(墓誌)
수태보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 치사 증시 문순공 묘지명 병서
(守太保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致仕贈諡文順公墓誌銘 幷序)
이수(李需) 찬(撰)
공의 성은 이(李)요 휘는 규보(奎報)요 자는 춘경(春卿)이며, 본관은 황려(黃驪)이다. 아버지의 휘는 윤유(允綏)인데 호부 낭중이요, 어머니 김씨는 본관이 금양(金壤)이며, 공(公)으로 인해 금란군군(金蘭郡君)에 봉하였으며 울진 현위(蔚珍縣尉)이던 휘 시정(施政)의 딸이다.
공은 9세 때에 능히 글을 지었으며, 15ㆍ16세가 되어서는 많이 알고 잘 기억하였다. 어떤 저술도 옛사람들의 묵은 말을 모방하지 않고 평생 □스스로 당백(唐白 당나라 문장 이태백이라는 뜻)이라 이름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지목하여 말하기를, “달리는 붓이 이당백(李唐白)이라.” 하였다.
기유년에, 이름난 재상 유공권(柳公權)의 주재하에서 있은 사마시(司馬試)에 제 1등으로 합격하였다. 다음 해에 예부(禮部) 시험에 나갔는데 3장(場) 시험날에 시험관이 그 명망을 중히 여겨, 어사주 너덧 잔을 마시게 하였는데, 좀 취해서 글이 정밀하게 되지 않아 그 과거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다. 사퇴하고 다음에 다시 보려 하였지만 부친의 간절한 책망이 있고 또한 전의 준례가 없으므로 사양하지도 못하였다.
축하하는 손님들이 말하기를, “과거 급제에는 하등이지만 어찌 이것이 서너 번 단련한 문하생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정사년에 총재(冢宰 이부 시랑) 조공영인(趙公永仁) 등 글하는 네 정승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공을 궐하에 천거하려 하였는데, 차자가 불평하는 자에게 절취당하여 그만 중지되었다.
과거에 합격한 지 10년에 나가서 전주 관기(全州管記)에 보직되었는데, 여러 번 통판(通判)의 불법한 일을 억제하다가 그로 하여 고소를 받아 해직되었다. 그후 한림학사 등 선비 관원이 사람을 천거할 때에는 보직되었다가 다음해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임신년 정월에, 천우위 녹사 참군사(天牛衛錄事參軍事)에 제수되어 한림원에서 나갔다가 6월에 직학사(直學士)의 겸직으로 다시 한림원에 복직되었다. 12월에는 7품관을 거치지 않고 사재 승(司宰丞)이 되었으며 그대로 한림원에 겸직하였다.
을해년에 바로 우정언(右正言)에 임명되고 좌우사간(左右司諫)을 역임하였으며 기묘년에 나가서 계양부 부사(桂陽府副使)가 되었다가 1년 만에 예부 낭중 기거주(起居注)로 부름을 받았다. 그후에 태복소경 보문각대제 장작감 국자좨주 한림시강학사 판위위사(太僕少卿寶文閣待制將作監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判衛尉事)를 역임하였는데 9년간 전임한 것이 이러하였다.
경인년에 의외의 일로 위도(猬島)로 귀양 갔는데 그때 같은 죄로 귀양 간 사람 세 명이 모두 정직하여 굽히지 않고 말하는 이름난 달관(達官)이었다. 신묘년에 사함을 받아 서울로 돌아왔는데, 이때 몽고가 침노하였는데 공이 산관(散官)으로 있으면서 강화(講和)에 관한 문서를 모두 맡아 하였다.
임진년 4월에 등용되어 정의대부(正義大夫)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첨사(判秘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詹事)가 되었는데, 참관으로 들어와서 이 관직에 이르기까지에, 외직으로 나가 있던 1년간을 제하고는 모두 전고(典誥)의 직책을 겸하였다.
계사년 6월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부사 우산기상시 보문각학사(樞密院副使右散騎常侍寶文閣學士)에 임명되었다. 12월에 상부(相府)로 들어가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知門下省事戶部尙書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가 되었으며, 을미년 12월에 참지정사 수문전대학사 판호부사 태자태보(參知政事修文殿大學士判戶部事太子太保)가 되었다.
10월에, 표문을 올려 퇴직하기를 청원하니 임금이 근신을 보내어 권고하며 다시 나오게 하므로 공은 부득이 나와 있다가 또 퇴직 청원하기를 간절히 하니, 임금은 그 뜻을 어기기 어려워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로 퇴직하게 하였다.
한 번 성균 시험을 주재하고, 세 번 예조 시험을 열었는데 뽑은 인재는 시문 짓는 선비가 많았다. 관직에서 물러나면서는 시와 술로 스스로 즐기며, 《능엄경(楞嚴經)》읽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찬송문이 문집 제 9권에 실려 있고, 또 국가에 큰 책봉이 있거나 외국 조정의 서(書)나 표문 등에 대해서도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신축년 7월에 몸이 좀 불편해지자 당시 정사를 맡아 하는 대신이 잇따라 유명한 의원을 보내어서 진단 치료하며 공이 지은 문집을 가져다가 공인을 시켜 판을 새겨 공의 눈으로 문집의 출판을 보게 하려 하였지만 일이 거창하여 미치지 못하였는데, 9월 2일에 자기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4세였다.
임금이 애도하여 유사(有司)에게 칙명하여, 백관들이 모여 장사 지내게 하고 시호를 내려 문순공이라 하였다. 슬프다. 공이 지낸 관직 작위의 차례는 이미 앞에서 열거하였거니와 그 상서로 나타난 일들의 자취를 감히 뒤에 적지 않으랴.
공은 생후 두어 달에 나쁜 종기가 온몸에 나서 얼굴이 모두 헐었으므로 유모가 내어다 문밖에 두었더니, 어떤 노인이 지나다가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를 어찌 만금의 값으로 의논할 것인가. 잘 보호 양육하여야 한다.” 하니, 유모가 달려 들어가서 아버지에게 고하였다.
아버지가 그것이 신인(神人)이 아닌가 하여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지만 만나지 못하였다. 이것은 곧 신이 공을 포대기 속에서 보호한 것이다. 공이 사마 시험에 나가려 할 때에는, 꿈에 다듬이질 한 검은 베옷을 입은 사람들이 당상에 모여 술을 마시는데 곁의 사람이 말하기를, “이들은 28수(宿)라.” 하거늘, 공이 놀라고 송구스러워서 두 번 절하고, 금년 과거보는 자리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를 물으니, 그중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이가 규성(奎星)이니, 가서 물어보라.” 하였다.
공이 가서 물었는데, 그의 말을 듣기 전에 잠이 깨었다. 좀 있다 다시 꿈을 꾸니 그 사람이 와서 알려 주기를, “그대가 반드시 장원을 차지할 것이다. 이것은 천기(天機)이니 누설하지 말라.” 하였다. 전의 이름은 인저(仁底)이었는데, 이래서 지금 이름(규보(奎報))으로 고쳤다.
시험에 나가 과연 제 1등으로 합격하였으니, 이것은 신령한 별이 공을 명교(名敎) 중에 돌보아 준 것이다. 임술년에 동경(東京 경주)에서 반란이 일어나 3군을 보내 토벌하는데, 군중에서 산관(散官) 중에 급제한 이로 수제원(修制員)을 충당하려 하였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라, 모두들 꾀를 써서 피하였다.
공이 홀로 개연히 나서서 말하기를, “내 비록 나약하고 겁이 있기는 하지만 국난(國難)을 피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하며 드디어 종군하였으니, 이것은 공이 의(義)에 용감한 것이다. 무인년 팔관회(八關會)에서 어연(御宴)을 뫼셨는데 예법 절차가 아직 반도 안 되어서 한 재상이 독촉하여 피하니, 공은 말하기를, “임금이 주시는 것이라, 되는 대로 처분할 수 없다.” 하였다.
비록 이것으로 유배형을 당하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공이 법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던 한 증거이다. 이른바 몽고족들은 완악하기가 금수 같아서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더라도 그 가슴을 열어주지 못하고, 수후ㆍ화씨의 구슬[隨珠和璧]을 주더라도 그 얼굴을 □하지 못하는데, 공의 글 사연을 보고 측연히 감동하여 효유하는 것이라면 모두 좇았으니, 이것은 공의 지성이 능히 정 없는 자도 움직인 것이다.
대부경(大府卿) 진승(晉昇)의 둘째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다. 맏이는 관(灌)인데 공보다 먼저 죽었으며, 함(涵)은 지금 지홍주사 부사(知洪州事副使)가 되었고, 징(澄)은 경선점 녹사(慶仙店錄事)이고, 제(濟)는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이다.
맏딸은 내시관인 액정 내알자감(掖庭內謁者監) 이유신(李惟信)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내시 경희궁 녹사(內侍慶禧宮錄事) 고백정(高伯梃)에게 출가하였다. 아, 묘지명을 지은 유래는 오래되었다. 그 공명이 밝게 드러나서 세상의 숭상하는 바가 된 후에야 하니, 이것은 대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출중하게 위대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려 함이다.
또 비록 그 사람됨은 위대함이 보통이 아니더라도, 명문 짓는 데 있어서 그 적임자를 만나지 못하면 없는 것이 도리어 낫다. 내가 글을 짓는 데 졸렬하지만, 공이 평상시 조용할 때면 언제나, “내가 죽으면 자네가 명문을 지으라.” 하였다. 그 사자(嗣子) 함(涵)이, 공의 뜻을 말하면서 글을 써 가지고 와서 명문을 청구하므로 부득이 아래와 같이 명문을 짓는다.
강좌분양이요 / 江左汾陽
해동의 공부자라 / 海東孔子
온량하고도 공검하니 / 溫良恭儉
살아 생전 영광이요 돌아가시니 애통하여라 / 哀榮終始
70 이전엔 / 七十已前
세상에서 어진 이 / 與世爲賢
백옥루(白玉樓) 기문을 지음은 / 玉樓作記
공에게는 작은 일이나 / 於公細事
원기를 돌려놓으니 / 斡旋元妃
이것이 공의 지위로다 / 是公之位
70 이후엔 / 七十以後
하늘나라 오른 몸 / 爲天所有
사람들의 바람 끝이 없는데 / 人望未猒
하늘 어이 빨리 데려가셨나 / 天取不廉
하늘은 정기를 뺏고 / 天奪其眞
땅은 신체를 감추어 / 地得厥身
어이타 둘로 나뉘어 / 焉得爲二
하늘에도 땅에도 있는가 / 在天在地
사람은 볼 수 없고 / 其人茫茫
남은 것은 문장이로다 / 所留文章
그나마도 육정 육갑(六甲) 신장들 / 亦恐六丁
뇌성ㆍ번개로 가져갈까 / 雷電取將
두려워 공인들 모아 / 鳩集工徒
금석(金石)에 새겨보네 / 勒之金石
큰 거울 없어지니 / 一鏡云亡
천자께서 측은히 여기사 / 天子憫惻
이에 관원들을 명하여 / 爰命有司
명산 곁에 모신다네 / 宅名山側
언덕과 들판 펼쳐 있고 / 原野畇畇
봉우리 높고 높아 / 峯巒翼翼
산이 이미 영산(靈山)이니 / 山旣靈兮
억만자손 창성하리 / 子孫萬億
<끝>
ⓒ한국고전번역원 | 김용국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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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守太保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致仕。贈謚文順公墓誌銘。幷序 - 李需
公姓李諱奎報字春卿。黃驪縣人也。考諱允綏。皇戶部郞中。母金氏。金壤縣人也。以公故封金蘭郡君蔚珍縣尉諱施政之女也。公九歲能屬文。至十五六。洽聞強記。凡著述。不倣古人陳語。平生▣自名唐白。時人指之曰。走筆李唐白。歲己酉。於名宰相柳公權座下。中司馬試第一。明年赴禮部試於三塲。試日貢擧員重其名。令飮宣醞數四盃。稍酣下筆未精。其科稍劣。欲辭之更擧。以嚴君切責。亦無舊。倒辭不得。謂賀客曰。科第雖下。豈不是三四度鑄門生者乎。丁巳冢宰趙公永仁等文儒四相。聯名上箚子。薦公於闕下。箚子爲不平者所竊。遂寢。登第之十年。出補全州管記。屢抑通判不法。因被訴解職。後舘翰等儒官薦人。每以公爲之首。故於丁卯。權補翰林院。明年卽眞。壬申正月。除千牛衛錄事參軍事出院。六月以兼直復院。十二月不踐七品爲司宰丞。仍兼直院。乙亥直拜右正言。歷左右司諫。己卯出爲桂陽府副使一年。以禮部郞中起居注見召。自後歷大僕少卿,寶文閣待制,將作監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判衛尉事。於九年之間。其遷轉如此。庚寅以無妄流于猬島。其時以同罪被流者三人 。皆正直敢言之達官也。辛卯蒙宥還京師。時達旦來侵。公以散官。凡講和文字。皆任之。壬辰四月。起爲正議大夫。判秘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詹事。自入參至於是職。除補外一年。皆兼典誥。癸巳六月。拜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右散騎常侍,寶文閣學士。十二月入相。爲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戶都尙書,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乙未十二月。爲參知政事修文殿大學士,判戶部事,太子太保。冬十月上表乞退。上遣近臣敦諭。令復起。公不得已起視事。又乞退固切。上重違其志。以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致仕。甞一典成均。三闢禮闈。所選多韻士 。自解位來。以詩酒自娛。尙讀楞嚴。頌在九卷。亦國有大冊異朝書表等事。無所不爲。越辛丑七月。得微恙。時之當國大臣。連遣名醫問診。取公所著文集。命工雕刻。欲令公眼見。事巨未畢。至九月初二日。卒于私第。享年七十四。上哀悼。勑有司令百官會葬。贈謚曰文順公。噫。公之官爵次序。旣列於前。其瑞應行事之迹。敢闕于後。公之生數月。惡瘡滿身。面目皆爛。乳嫗出置門外。有一老父過視之曰。此兒不啻萬金。宜善護養。嫗走報家君。君疑其神人。數路追之不得。此神物護公於襁褓中也 。公之欲赴司馬試。夢見着碪鍊緇布衣人。群飮堂上。傍人曰。此二十八宿也。公驚悚再拜。問今年試席捷否。有一人。指一人曰。彼乃奎星。宜就問之。公就問。未聞其言而寤。俄復夢其人來報。子必占魁頭。此天機。但勿洩耳。前名仁底。因改今名。赴試果中第一。此靈曜之攝公於名敎中也。壬戌東京叛。遣三軍討之。軍幕欲以散官。及第充修制員。戰者危事。皆以計避之。公獨慨然曰。予雖懦怯。避國難非人也。遂從軍。此公之勇於義也。戊寅於八關會侍御宴。禮數未半。有一宰相促罷之。公曰君賜也。不可取次處分。雖因此被流。此公之執法不撓也。所謂達旦者。頑如禽獸。奏之以鈞天廣樂。而不足以開其胷。投之以隋珠和璧。而不足以▣▣顔。及聞公之文字事意。惻然有感。所諭皆從。此公之至諴能動無情者也。娵大府卿晉昇第二女。生四男二女。長曰灌。先公沒。曰涵今爲知洪州事副使。曰澄慶仙店錄事。曰濟西大悲院錄事。女長適入內侍掖庭內謁者監李惟信。次適內侍慶禧宮錄事高伯梴。於戲。墓銘之作尙矣。其功名顯顯。爲世所尙然後爲之。蓋將使後之人。知曠世之上。有雄偉不常者矣。雖其人雄偉不常。而銘不得其人。則不若無之之爲愈也。予拙於爲文。公於平日從容之際。每稱吾之沒也。子其銘乎。其嗣子涵。述公之意。書來請銘。不得已銘之曰。
江左汾陽。海東孔子。溫良恭儉。哀榮終始。七十已前。與世爲賢。玉樓作記。於公細事。斡旋元氣。是公之位。七十以後。爲天所有。人望未猒。天取不廉。天奪其眞。地得厥身。焉得爲二。在天在地。其人茫茫。所留文章。亦恐六丁。雷電取將。鳩集工徒。勒之金石。一鏡云亡。天子憫惻。爰命有司。宅名山側。原野畇畇。峯巒翼翼。山旣靈兮。子孫萬億。<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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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이규보선생 묘 /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산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