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 학자· 정치가 이제현(李齊賢,1287~1367)이 역사·인물의 일화, 시화와 세태담 등을 4권 1책 목판본으로 수록한 시화집 및 잡록집이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저자의 춘추 56세에 환로(宦路)에서 은퇴하여 자기 집에 거처하면서 저술한 책이다.
이 책의 《초간본》은 저자 이제현(李齊賢)의 77세 때인 1363년(공민왕 12)에 막내아들 창로(彰路)와 장손 보림(寶林)이 편집(編輯)하여 이색(李穡)의 서(序)를 받아 경주에서 처음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초간본은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그 후 1432년(세종 14) 세종(世宗)의 명(命)에 의하여 《익재난고(益齋亂藁)》와 함께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간행하였다《중간본》. 당시 김빈(金鑌)의 발문에 의하면 '간행기구 미면결오(刊行旣久 未免缺誤)'라고 하여 초간사실을 추인(追認)하고 있는데 이때, 아울러 초간본에 빠지고 잘못된 부분의 일부를 바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 중간본은 현재 일본 봉좌문고 조선목록(日本 蓬左文庫 朝鮮目錄)에 보이는 10행 17자의(四周雙邊, 匡郭 17.5~18.7×13.5㎝) 板本이 아닌가 여겨진다.[청분실서목淸芬室書目] 이후 1600년(선조 33)에는 저자의 11대 손인 경주부윤 이시발(李時發)이 경주에서 다시 중간하였다《삼간본》.
이때 「익재난고(益齋亂藁)」10권,「역옹패설(櫟翁稗說)」4권과 아울러 족조(族祖) 이광윤[李光胤-진사 잠(潛)의 차자로 서계(西溪) 덕윤(得胤)의 아우]이 가장하고 있던 「효행록(孝行錄)」 1권까지 함께 간행하였다.
이때 이시발(李時發)은 난고(亂藁)와 패설(稗說)ㆍ효행록(孝行錄) 3부를 모두 자신이 직접 교수(校讎)하였을 뿐아니라, 효행록(孝行錄)의 경우는 여가에 선사(繕寫-잘못을 바로잡아 다시 고쳐 베낌)까지 담당하였다. 또한 구본(舊本)에 빠져있던 시문(詩文)의 일부를 수집(收輯)하여 권말에 붙이고, 구본에 비하여 자체(字體) 또한 확대하여 간행하였다.
계유(癸酉) 1693년(숙종 19)에는 후손 이세석(李世碩)이 찬(撰)한 저자의 년보(年譜)를 붙여, 경주부윤(慶州府尹) 허영(許穎)이 목판(木板)으로 간행하였으며《사간본》. 1698년(숙종 24)에는 후손 이인엽(李寅燁-이시발의 손자로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이 황해도 관찰사로 재임중 해주(海州)에서 간행하였다《오간본》.
이 본은 권말에 재사당 이원(再思堂 李黿(1471년 추정)∼1504년(연산군 10)의 「재사당산고(再思堂散藁)」가 부집(附集)되어 있으며 현재 서울에 사는 발행인 이인엽의 10대손 이정희(李晶熙)씨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401A)에 소장되어 있다.
그후 1814년(순조 14) 년보(年譜)에 사실(事實)을 추가하고 습유(拾遺)를 첨록(添錄)하여 경주에서 보판(補板) 간행하였으며《육간본》, 병인(丙寅) 1923년 에는 19대손 이규석(李圭錫)이 하겸진(河謙鎭)의 서(序)를 받아 연활자(鉛活字)로 안동(安東) 노림재(魯林齋)에서 간행하였고《칠간본》는데, 이 책의 체재는 전집 · 후집으로 나누어 각 집이 다시 1 · 2권으로 되어 있어, 모두 합하면 4권이 되는 셈이다.
전집에는 저자 자신의 서문이 있고, 권1에 17조, 권2에 43조의 역사 · 인물일화(人物逸話) · 골계(滑稽) 등이 있다. 후집에는 저자 자신의 서문과 권1에 28조, 권2에 25조의 시화와 세태담(世態談)이 있다. 이 책에 나타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이제현은 고려가 몽고, 즉 원나라로부터 치욕을 당한 것에 대해 반성하는 한 방법으로 부당한 사대주의에 저항하고 있다.
전집 권1에서 그는 조정의 중신이 몽고어를 능숙히 구사할 줄 아는 역관 출신이라 해도 공식석상인 합좌소(合坐所)에서 역관의 통역도
없이 직접 몽고어로 원나라의 사신과 대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민족 자존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던 그의 주체적인 자세를
반영한 것이다.
② 그는 전통성, 즉 민심의 기반이 없는 위조(僞朝)의 영화로운 생활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이 책에서 삼별초 정권을 부정적 입장으로 보아
위조라고 생각한 것에 기인한다. 즉 삼별초가 고려의 백성들을 협박하고 부녀를 강제로 이끌어 진도에서 비상 정부를 구축하였으므로
민심을 거역한 위조라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문감(鄭文鑑)이 삼별초 정권에서 승선이 되어 국정을 맡게 되자, 위조에서의 부귀보다
죽음으로써 몸을 깨끗이 지키고자 하였던 행위를 마땅한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③ 무신정권의 전횡을 폭로하고 그 폐단을 고발하고 있다. 이제현은 오언절구의 시를 인용하여 주먹바람[拳風], 즉 무신의 완력이 의정부를
장악하는 공포정치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이러한 현실인식 태도는 무인정권의 폐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 같다.
그는 예전에는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에 필적할 만큼 융성하였으나, 근래에 산중에 가서 장구(章句)나 익히는 조충전각(雕蟲篆刻)의
무리가 많은 반면 경명행수(經明行修)를 하는 사람의 수효가 적게 된 이유를 바로 무신의 난에서 찾고 있다.
곧, 학자들이 거의 다 무신의 난이 일어나자 생명 보존을 위하여 깊은 산으로 찾아들어 중이 되는 이가 많았다. 그래서 문풍(文風)이 진
작되는 시점이 되어도 학생들이 글을 배울 만한 스승이 없어 도피한 학자였던 중들을 찾아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적은 무신집권기가 초래한 반문화적 폐해를 단적으로 밝혀준 좋은 예일 것이다.
④ 이 책에는 고려 말기 문학론에 있어서, 용사론(用事論)과 신의론(新意論)의 현황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이제현은 한유(韓愈) · 이백(李白) 등의 당대(唐代) 시인들을 비롯한 유명한 중국 문인들의 시를 거론하기도 하고, 정지상(鄭知常)을 비
롯한 우리 나라 시인들도 거의 망라해서 그들의 시에 대한 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배척이나 악평은 삼갔다. 용사에 있어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단어의 사용은 권장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였
다. 그래서 지명의 사용도 실제정황과 일치하지 못할 경우에는 호된 비판을 가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평태도는 시어의 현실성을 강조하
였다는 측면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다.
『역옹패설』은 저자가 스스로 뒤섞여 어수선한 글로 열매 없는 피 같은 잡문이라 말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후대인들에게 작자 당대의
현실과 문학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남겨 준 요긴한 책이다. 또한, 『파한집(破閑集)』이나 『보한집(補閑集)』의 성격을 계승하였으면서도,
이 책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양한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은 목판본 외에 1911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활자 · 양장본으로 출판된 바 있고, 1913년 일본 동경에서 영인되
기도 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