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행의 묵계서원과 만휴당
안동시내에서 길안천을 따라 영천으로 내려가는 35번 국도는 호젓한 옛길이다. 옛날에는 내륙속의 오지여서 묵계리에 있던 역(驛)이름이 거무역(居無驛),즉 사람이 살지않는 곳이었다.이런 궁벽한 산골의 입향조는 안동 김씨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21)임
보백당은 나이 50세에 등제(登第)하여 삼사(三司)의 청직(淸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과 교분이 깊었던 탓에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심한 고초를 겪었고, 나이 70세 때 또 구금됐다가 5개월 만에 풀려나자 이곳 묵계리로 내려와 우거(寓居)해 버렸다. 이 집이 묵계종택이다.
보백당은 앞산 깊은 계곡에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를 걸쳐놓고 만휴정(晩休亭)이라는 환상적인 정자를 짓고는 이름 그대로 만년의 휴식처로 삼아 나이 87세까지 여기서 지냈다.
입구에는 볼만한 폭포도 있고 위쪽에는 수십명이 앉아 쉴만한 넓직한 바위들도 있다.
▶ 보백당 김계행 [金係行, 1431~1521]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김득우(金得雨)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김혁(金革), 아버지는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김전(金腆)의 딸이다.
김계행은 5세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하여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재목이니, 학문은 염려할 바가 아니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1447년(세종 29)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과 교유하였다. 이 인연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금부(禁府)에 갇혔다가 장형을 치르고 풀려났다. 1461년 30세 되던 해에 안동부 길안(吉安) 묵계에 별도의 생활 근거를 마련하고 만년의 휴식처로 삼고자 하였다.
49세 되던 가을 식년 동당시에 합격하였는데, 많은 나이가 고려되어 바로 6품직에 올랐다가 이어 사헌부감찰을 제수 받았다. 그러나 강직한 성격이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52세 되던 해 고령현감으로 나아갔다.
고령현감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돌볼 때는 엄숙히 하고 백성을 돌볼 때는 자애로웠고 그 결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교화가 이루어지고 기강이 바로 서 관민 모두가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홍문관에서 부제학을 지냈고, 사간원에서는 대사간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사헌부장령, 승정원동부승지, 승정원도승지, 성균관대사성 등 요직을 두로 섭렵하였다. 연산군 초기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 잡을 것을 몇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였다. 68세에 풍산 사제(笥提)에 있는 집 곁에 서재를 짓고 ‘보백당(寶白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71세에는 송암(松巖)의 폭포 위에 만휴정(晩休亭)을 지어 만년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삼았다.
김계행은 76세 되던 해인 1506년 자신이 섬겼던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종묘사직의 대계(大計)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임을 잘 알지만 그래도 10여 년을 섬겨온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며 인간적인 고뇌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계행은 벼슬길에 있으면서 조정이나 왕실의 병폐에 대해서는 직간을 서슴지 않았고 그 일로 여러 차례 사직과 복직을 반복하였다.
그는 김종직과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충주향교교수에서 물러나 풍산 고향집에 돌아와 있던 때인 40대 중반 시절에는 당시 상주에 있던 김종직과 서로 왕래하면서 『주역(周易)』과 『근사록(近思錄)』을 직접 강론하기도 하였다. 김계행은 굳은 의지와 명석한 자질에 힘입어 늙어서까지 경학(經學)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성리(性理)의 문제에 침잠하여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이치를 깊이 궁구하였다. 문집으로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 4권 2책이 있다. 1732년(영조 8) 초간이 이루어졌으며, 1901년(광무 5) 중간되었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1706년(숙종 32) 지방 유생들이 김계행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 10)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묘소는 예천군 용문면 직리에 있다.)
문집으로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
"우리 집엔 보물이 없다. 있다면 청렴[淸白]이 있을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라는 유훈
(遺訓)을 남긴 청백리 보백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훗날 묵계서원이 세워졌다. 이리하여 사람도 살지 않던 묵계리가 오늘날에는 비경(秘境)의 문화유적지로 남은 것인데 안동에는 이런 마을이 수십 곳이나 된다.
또한 안동(安東)은 목조건축의 보고(寶庫)다.
봉정사를 비롯한 고찰, 도산,병산 등 서원, 수많은 종택들 목조건축과 한옥(韓屋)의 참 멋을 안동만큼 풍부하게 보여주는 곳은 없다. 국가 및 지방문화재의 수는 안동이 경주보다 많다.
안동에 이처럼 문화재가 많은 것은 전통 있는 가문마다 한 마을에 종택(宗宅)·정자(亭子)·재실(齋室)·서원(書院) 등을 경쟁적으로 갖추었고, 그 후손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이 목조건축들을 보존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벼슬하던 선비가 낙향하여 한 마을의 입향조(入鄕祖)가 되면 그 후손들이 재실과 서원을 세우면서 가문을 일으키는 과정은 길안면(吉安面)의 묵계서원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묵계서원(默溪書院)
묵계서원은 안동김씨묵계종택 (默溪書院 및 安東金氏默溪宗宅)과 함께 1980년 6월 17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묵계서원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과 응계(凝溪) 옥고(玉沽:1382∼1436)를 봉향하는 서원으로 1687년(숙종 13)에 창건되었다. 1869년(고종 6)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후에 강당과 문루인 읍청루와 진덕문, 동재(東齋) 건물 등을 복원하였다.
서원 옆에는 후대에 세운 김계행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팔작자붕건물로, 가운데 6칸을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방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이다.
서원 왼쪽에는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ㅁ자형 주사(廚舍)가 있다. 서원 중 다른 건물은 모두 후대에 복원한 것이나 주사는 서원이 훼철될 때 헐리지 않고 남은 것이다. 고건물답게 부재를 다룬 수법에 격조가 있어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종택은 서원에서 멀지 않은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침과 사랑채인 보백당,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ㅁ자형의 팔작지붕 집으로, 보존 상태가 좋다. 보백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우물마루를 깐 4칸 대청과 2칸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이며, 대청의 왼쪽 측면과 뒷벽에는 판벽에 문얼굴을 내어 미세기 창을 달았다.
문루인 읍청루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팔작자붕건물로, 가운데 6칸을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방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이다.
서원 옆에는 후대에 세운 김계행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집으로, 앞쪽에는 삼문이 있고 낮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강당에서 내려다 본 읍청루
묵계서원과 만휴정 사이의 약 700m 길은 <안동도보여행길 3選> 중 하나이다.
(나머지는 병산서원-하회마을, 도산서원-청량사)
지금은 그 사이에 35번 국도도 있고 시멘트다리도 있긴 하지만 정겨운 시골길이다.
묵계서원에서 만휴당으로 가는길
▶ 만휴정(晩休亭, 명승 제 82호)
만휴정은 얼마전에 끝난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세조의 공주 세령공주와 김종서의 아들 김승유의 필담을 나누던 곳에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만휴정은 '저물 만(晩)’에 '쉴 휴(休)’를 현판으로 내걸고 있다. 너럭바위를 비단처럼 휘감는 물길을 두고 자연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단아한 정자의 풍광을 그려주고 있어 조금 더 늦은 가을에 찾으면 좋은 여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통나무를 포개어서 만든 제법 긴다리를 건너 쪽문을 열고 만휴정 대청마루에 앉아서 그저 추임새처럼 ‘아, 좋다’는 말만 되뇌이며 한참을 그렇게 앉아서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흔들리면 낙엽과 그리고 시원한 바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자연과 동화됨을 느낄 수있다.
다른 곳의 정자들은 대개 ‘문화재’라는 이유로 문을 꼭꼭 닫고 있지만, 만휴정의 문과 대청마루는 다른 안동의 정자들처럼 늘 열려 있다. 인적 드문 계곡의 만휴정에서는 누구든 잠깐이나마 정자를 통째로 소유한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휴당
만휴당 입구에 있는 작은 폭포
개울위에 놓인 좁고 긴 다리를 건너 만휴정으로 들어간다.
2011.11 현재 안동에는 모두 299건의 문화재가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78건, 도지정문화재 132건, 문화재자료 79건, 등록문화재 1건.
경주보다 숫자로는 더 많다고 한다. 대단한 전통문화의 도시이다.
정헌공 보백당 김계행 선생
왕건을 도와 고려개국의 공신 삼태사중 한분이신 안동 김문의 시조 김 선평(諱 金 宣平)의 10세손에, 형제분이 계셨는데 형 되시는 분이 김 계권(諱 金 係權)이시고, 그 동생 되시는 분이 김 계행(諱 金 係行)입니다. 김 계행선조는 서기 1431년(세종13년)에 탄생하시어 1517년(중종12년)에 87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어른이시니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며, 시호(諡號-임금이 내린 칭호)는 정헌공(定獻公)입니다.
보백당은 조선 전기 영남 유림에 몇 안 돼는 중량급 인사이시며, 성종, 연산양조에 걸쳐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등 청요직(淸要職)을 지내신 명신이시며, 당대의 거유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선생과 함께 영남 유림을 이끌며 도덕과 학문으로 덕망이 높으셨습니다. 조정으로 나아가서 임금(성종)을 보필하며 명관으로 조야에 성망이 높으셨습니다.
보백당 선생님은 흔히 장동김씨로 불리는 (신)안동김씨 김상헌 조부 김생해 가문의 여명기에 안동김씨의 문호를 연 중 시조(정헌공파)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조 전기 안동김씨 초기에 가문을 이끌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보백당은 "청백"의 표상입니다. 자작 당호인 “보백당(寶白堂)”이 선생의 인품을 잘 나타내 줍니다. 보백당이란 청백을 보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즉,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 내 집엔 보물이 없고, 보물이란 오직 청백 뿐이다.” . 서애 유성룡선생 등은 "보백당은 강직한 분"이라 칭송했습니다.
성종 때 1480년 문과하여 1498년(연산군4년)에 대사간으로 잘못되는 국사를 바로 잡으려 애를 썼습니다. 권간들의 횡포를 극간하다가 무오사화에 세 번이나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여생은 황학산 아래 길안 묵계에서 보냈습니다. 만휴정에서 말년을 보내며 후진을 양성하고 후손들에게 우리 집안의 보물은 오직 "청백" 뿐이라 노래하며 산천을 벗 삼아 학처럼 살았습니다.
1706년(숙종32년) 영남 유림에서 안동 길안 묵계리에 묵계서원을 지어 보백당의 덕망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1859년 이조판서의 벼슬이 추서되었고 시호(諡號)는 정헌(定獻)이며, 어명 불천위로 향사하고 있습니다.
보백당은 비안현감 김삼근의 둘째 아들입니다. 맏집의 형은 김계권이며 맏조카는 학조대사입니다. 학조는 당대의 학식이 높은 고승으로 임금의 신임이 두터워 국사로 추앙되었습니다.
학조대사와 보백당과의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보백당 선생께서 성주향교 교수로 계실 때 국사(國師)로 있던 학조대사가 성주를 찾아와 보백당을 만나려 했습니다. 고을 원은 그 뜻을 알고 [국사께서 친히 거동할 필요 없다]며, [자신이 보백당을 불러 오겠다]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를 듣고도 가지 않은 보백당은 [공무(公務)로 오지 않은 이상 어찌 삼촌이 조카를 보러 가겠느냐]며 학조대사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때렸다고 합니다. 당시 학조대사가 보백당에게 [출세가 늦으니 자신이 힘써 보겠다]고 말하자 [내가 어찌 조카의 천거로 출세를 바라겠느냐. 또한 너의 도움으로 출세를 한다한들 무슨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겠느냐]며 물리쳤습니다. 요즘 공직자들과 다른 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보백당은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두었습니다. 맏은 참봉, 둘째 세째는 진사로 아버지가 물려준 가보 "청백"을 지키며 사랑했습니다.
딸 하나는 예천 금당실 박눌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다섯을 낳아 오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 시켰으며, 오형제 모두 현달했습니다.
그 중에서 아들 박종린의 후손들이 문한으로 예천을 빛내었습니다. 문집이나 유고가 있는 선비가 약 40-50명이 나왔습니다. 의병장 박주대도 여기 출신입니다.
딸 또 하나는 안동 하회 유자온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아들 네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급제 하였고, 특히 손자 유중영을 키워 관찰사를 시키고 임진왜란 때의 명재상 증손자 류성룡을 태어나게 하여 위기의 조선을 건졌으니 이 또한 우리 안동 김문의 딸들이 위대함을 보여 주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