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정하상 바오로(1795 ~ 1839)
생애>
정하상 바오로는 1795년 6월 5일 경기도 양근군(현 양평군)에서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어머니 유 체칠리아(?~1839)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복자 정철상 가롤로는 이복형이며 성인 정정혜 엘리사벳은 여동생이다. 정약전 정약용의 조카이다. 부친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회의 처음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할 만큼 학문과 글재주가 모두 뛰어났는데, 아들 정하상도 《상재상서》를 저술하여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1801년 박해로 아버지 정약종과 이복형 철상이 참수당하고, 재산이 몰수되어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정하상은 어머니 유소사(체칠리아, 1761년-1839년)와 여동생 정정혜(엘리사벳, 1791년-1839년)와 같이 숙부인 다산 정약용의 고향 마제에서 살았다. 친척들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는 정하상의 가족을 심하게 냉대하여 곤혹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샤를 달레의 천주 교회사 참조)
“여러 사람이 아직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정씨 일가는 천주교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며, 그런 교를 계속 믿으려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척들은 정하상과 그 집안 식구들이 천주교를 버리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통렬한 비난, 협박, 멸시, 조소, 심지어 학대까지도 모두 동원되었다.”(<한국천주교회사> 달레, 86~87쪽)
그럼에도 정하상의 모친 유 체칠리아는 자녀들에게 철저하게 신앙을 지키도록 교육하였다. 그러나 교리를 연마하는데 한계를 느낀 정하상은 20세 때 단신 한양으로 상경하여 교우 조증이(趙曾伊)의 집에 의지하며 성장하였고 한국천주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 후 더욱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기 위해 1801년 박해시 함경도 무산(茂山)에 귀양가 있는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를 찾아가 수년 간 학덕을 닦은 후, 한양으로 귀환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한 초석으로 종횡무진 활동하였다. 교회 재건의 목적을 위해 양반 신분을 감추고 어떤 역관의 집에 종으로 들어가 살았는데, 이는 밀사의 사명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북경을 왕래하며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다.
성직자 영입 운동>
정하상의 성직자 영입 운동은 마침내 세계 교회로까지 확대된다. 즉 북경 주교를 대상으로 하는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움을 체험적으로 간파하게 된 정하상은 마침내 세계 가톨릭의 최고 수위권자(首位權者)인 교황청의 교황에게 청원하기로, 세계적 경륜(世界的 經綸)의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825년 정하상은 유진길과 의논 후 “저희는 교황 성하께 2가지 일을 겸손되이 제안하옵는데, 이 2가지가 똑같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나이다. 이 2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옵니다. 사제를 보내 주심이 저희들로서는 큰 은혜요, 크나 큰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오나, 이와 동시에 저희들의 욕구를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신적 구원을 보장하여 줄 방법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일일 것입니다.” 라는 내용을 담은 대교황 청원문(對敎皇請願文)을 올렸던 것이다. 성직자의 파견만인 아니라 "영속적인 구원을 보장할 적극적 대책"을 청구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서 정하상이 청구한 '영속적 구원을 보장하는 적극적 대책'은 조선인 출신의 천주교 사제를 교육, 양성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유학 및 귀국을 통해 현실로 되었다.
이 청원문은 1827년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고, 마침내 1831년 9월 9일자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교구 설정을 세계에 선포되었다. 당시 교황청의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정하상의 편지 번역본을 읽고 "동방에 주님의 기적이 일어났다"라고 말하며 매우 큰 감동을 받았으며, 이러한 '기적'은 후대 교황들이 한반도의 전교 활동에 매우 공을 들이고 수많은 순교자들을 시성한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당시 교황청에게 있어서 동방의 조선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이 일이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일단 조선에도 가톨릭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비오 6세 때도 알려져 있었는데 당시 비오 6세는 나폴레옹에게 체포되어 유배 생활 중이었는데 이 소식이 어찌나 기뻤던지 힘든 일이 생기면 이 사실로 마음을 추스렸다고 한다.
정하상과 조선교회의 이러한 활약으로 1831년 두 번째 중국인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가 밀입국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교 담당 주교인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방해하였고 조선교회에서 사목활동에서도 비위 사실이 드러나 1836년 강제 귀환 조치당하였다.(주교의 입국을 방해한 것은 조선교구 관할권이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어 파리 외방전교회로 넘어가자, 양자 간에 알력이 생겨 북경교구를 맡고 있던 포르투갈 출신 성직자들이 뒤에서 이를 조종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1836년 1월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 모방 신부는 정하상을 지도자로 삼고 숙소도 그의 집으로 삼았다. 뒤를 이어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와 함께 입국하여 활동하였다.
1838년 9천여 명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수가 늘어나자 선교사들은 조선인 천주교 신부를 키우고자 하였다. 성 정하상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긴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가 그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던 중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다. 사제 양성의 때를 놓쳐 평신도로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여 “상재상서”(上宰相書, 재상에게 올리는 글)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조선교회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이다. 그는 이 글 속에서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 때문에 조정에서까지 이 글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모방 신부는 조선 천주교회를 지도해 온 정하상의 도움을 받아, 1836년 김대건·최양업·최방제를 천주교회 신부 후보로 선발하여 파견하였다.
순교>
그는 기해박해 때인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45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그보다 2달 늦게 79세의 노모 유 세실리아도 옥사 순교하였고, 다음 달에 누이동생인 정혜마저 순교하였다. 이 3명의 순교자는 1925년에 복자로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평가>
가톨릭에서는 "정하상의 일생은 오로지 천주만을 위한 고귀한 것이었다"라고 높이 평가한다. 일가가 모두 혼인하지 않거나 혼인했어도 모두 순교하여 정약종의 대는 끊겼고, 정약종의 남동생 정약용의 자손을 양자로 하여 정약종의 대를 잇게 했다.
정하상 바오로는 한국 가톨릭교회에 여러 업적을 남긴 인물이며, 19세기 동아시아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인정되며 연구된다.
첫째, 그는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진보적이고 세계적 안목을 가졌던 박해 시대 한국교회 평신도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둘째, 정하상 바오로는 조선교구 설정 이후 조선교구로 부임해 오는 성직자를 계속 영입해 들였고 그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인 회장직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여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즉, 1834년 말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비밀리에 영입하였고 1835년 모방(Maubant) 신부, 1836년에 샤스탕(Chastan) 신부, 그리고 1837년에 조선 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였다. 이리하여 조선 교회가 교구장인 주교, 전교자인 성직자 그리고 교구 신자를 가지는 교회로의 교회 체제를 갖추게 했으며 이들 성직자를 협조하여 한국 천주교회 발전을 위해 몸바쳐 일하였다.
셋째, 그는 앵베르 주교로부터 속성 신학 교육을 받고 성직자(聖職者)가 되기 위해 선택된 한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적 열성과 교리에 대한 지적 이해, 그리고 놀라운 신덕에 탄복한 앵베르 주교가 베트남의 베리트(Beryte) 주교의 예를 따라 박해 하의 조선 교회에 필요한 방법인 성직자 양성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학지(學知)와 수덕(修德)과 신망(信望)의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고 정하상 자신도 순교하게 되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최초의 신부 타이틀은 신학생으로서 외국으로 파견나간 김대건 안드레아가 가지게 된다.
넷째,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상재상서(上宰相書)》로써 박해자에게 천주교의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체포되기 전에 미리 저술하였고 체포 후 박해 당국자에 제출된 《상재상서》는 불과 2,000여 자의 단문이나 가장 요령 있게 주장한 명문으로 이름 높은 소책자이다.
다섯째, 정하상 바오로는 순교함으로써 천주에 대한 신앙을 증거하고 영생의 영광을 얻었으며 한국인의 신앙을 굳게 실증하였다.
참고:가톨릭 굿뉴스 성인 자료, 인터넷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