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0:12-21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열왕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살 때 쓰인 책입니다. 책의 첫 독자였던 포로민들은 열왕기서를 통해 자신들의 죄를 직면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불신실했음입니다. 이때 이들이 하나님을 외면한 원인을 따지면 백성을 잘못 다스린 왕들 책임이 큽니다. 그래서 열왕기서에는 수없이 많은 왕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실책이 여과 없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비교적 연대기 순으로 기록된 열왕기서에서 열왕기하 18장에 등장한 왕 히스기야는 그간의 왕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꼭 붙들고 계명을 지킨 신실한 자였습니다(열왕기하 18:5). 게다가 오늘 본문 바로 앞 단락에서 그는 오래전 가나안 정복을 이뤄낸 지도자 여호수아도 경험 못 한 기적의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죽을병에 걸렸던 그의 생명이 15년 연장되고, 해 시계 위 그림자가 10° 뒤로 물러간 일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비록 책의 결말을 알더라도 독자들은 작은 기대에 부풀 것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15년 동안 히스기야 어떤 통치를 펼칠지 말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지만, 그 기간을 안다면 그가 맞는 매일의 무게는 분명 남들과 다를 것입니다. 더욱이 이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심을 이토록 생생히 경험했다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의 인생 추가시간에 그가 보인 첫 모습입니다.
히스기야와 바벨론 사절단의 만남(12-13절)
(12)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15년의 수명 연장을 받은 그때, 바벨론 왕 브로닥발라단이 예루살렘으로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벨론은 유다를 멸망시킨 나라이자, 요한계시록이 수없이 악의 제국 대표로 비유하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바벨론은 히스기야 당시엔 그리 강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호시탐탐 유다까지 노리는 앗수르의 속국이었습니다.
바벨론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단 소식을 듣었습니다. 히브리 원문에는 병들었다고 번역된 단어가 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바벨론 왕은 히스기야가 병을 극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절을 보냈습니다. 아마 그가 보낸 편지에는 축하와 함께 또 다른 메시지가 있었을 걸로 추정됩니다. 바로 동맹 제안입니다.
앗수르 동쪽에 자리한 바벨론과, 서쪽에 있는 유다가 연합하면 앗수르를 견제할 수 있었고, 혹 이집트까지 여기에 합류한다면 그 나라를 지도상에서 지우는 일까지 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왕은 유다의 왕에게 사절을 보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13) 히스기야가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더라
히스기야는 사절단을 환대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는 손에 펜을 들고 답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약 1,500여km의 긴 길을 온 이들에게 숙소를 제공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보물고와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열왕기 기자는 곧바로 한 문장을 덧붙여 독자들이 혹시라도 히스기야의 행동을 가볍게 지나치지 않게 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나라에 있는 모든 것 중 사신들에게 보이지 않은 게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13절은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히스기야는 왕궁만 아니라 나라를 다 자기 소유로 여깁니다. 그의 보물고, 그의 군기고, 그의 창고, 그의 나라 등 겨우 한 절 안에 반복해서 쓰인 소유격 표현이 이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금은, 향품, 보배로운 기름 등 히스기야가 보인 많은 귀한 것 중 무언가 빠진 게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히스기야가 사자들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활짝 드러내 보인 것에 관한 평가는 뒤에 하겠습니다. 히스기야가 편지 내용에 기뻐 사자들을 환영하기로 했다면, 그가 가장 먼저 보여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그의 하나님이어야 했습니다. 나라 보물도, 군 장비도, 그리고 그의 권력도 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 아닙니까. 무엇보다 이 모두를 누릴 수 있게 그에게 15년이라는 삶을 더해 주신 분이 하나님 아닙니까.
그런데 히스기야는 이때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15년 길이의 생의 첫발을, 그 길의 주인 되신 하나님 없이 떼는 히스기야입니다. 이는 분명 헛발질입니다. 히스기야가 이때 왜 이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1순위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어쩌면 그는 허락된 새 삶을 국력 강화에 집중하기로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벨론 사신을 무척 반겼고, 그들과 속히 동맹을 맺어 앗수르라는 악을 없애고자 했는지 모릅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단단히 착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와 더 깊이 교제하고 그가 하나님을 더 신뢰하길 바라며 은혜를 주셨지, 일에 빠져 하나님을 뒷전에 두길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삶이 혹 이렇지 않은지 돌아보십시다. 삶이 형통하다고 하나님을 후 순위에 두지 않았는지, 맡겨진 일에 충성한다고 그 일로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리지 않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그 무엇도 두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곧바로 이어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창문을 열기를 말입니다.
한편 히스기야가 이렇게 하나님은 뒤로하고 자기 모든 소유를 드러내 보인 건 그의 ‘자랑’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역대기 기자는 이 대목을 역대하 32장 25절에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어느새 히스기야는 나라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신이 이뤘다고 여겼고,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얼마나 우둔합니까.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그저 ‘네 집을 정리하라’라는 몇 마디 말로 생을 마감할 존재입니다. 이는 곧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소유임을 알려주는 동시에 과연 우리에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음도 깨우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자랑합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가 자랑할 것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도리어 우리와 같이 되셨고, 친히 우리와 연합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전부이심을 잊지 마십시다. 그때 우리는 작은 바울이 되어 악화일로를 걷는 이 세상에 생명을 전하는 작은 창이 될 것입니다.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대화(14-19절)
(14)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이르되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하니
바벨론에서 온 사절단이 돌아가자 이사야가 왕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왕에게 질문했습니다. 사절단이 무슨 말을 했고, 어디서 왔는지를 말입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이들이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다며 한 가지만 답합니다. 이때 이사야가 곧바로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15)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하더라
이사야는 사절단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그들이 모든 것을 다 봤다고, 보지 않은 게 없다고 답했습니다.
사실 이사야가 몰라서 히스기야에게 질문한 게 아닙니다. 이사야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히스기야에게 전할 말까지 받고 온 상황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질문에 다 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감춘 사자들의 말, 즉 동맹 제안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가 사절단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잊은 걸 하나님께 들켰단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행동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닮았고, 그의 장자 가인과 닮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이 하신 말씀 역시 그 선조들이 받은 답과 일맥상통합니다.
(16-18)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우리말 번역은 존대어를 사용해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들으소서’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원문 속 단어는 명령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심각하고 엄중하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그 뒤 그가 전한 하나님의 신탁은 충격적입니다. 왕궁 모든 게 지금 히스기야가 의지하려고 하는 바벨론에게 강탈당하고, 히스기야의 직계 자손이 그 나라 환관이 된다니 말입니다.
이 대목은 열왕기서를 관통하는 질문 “유다가 바벨론에게 왜 멸망당 했나”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답입니다. 히스기야의 실책이 그 이유였습니다. 어쩌면 겨우 한 번의 실수에 대한 징벌치고는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북왕국의 멸망도 하나님보다 외세를 의존하며 하나님을 뒷전 삼았기 때문임을 기억하면, 이는 매우 공정합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신탁을 들은 히스기야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19)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신 말씀, 즉 유다의 멸망 선고가 선하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15년의 생을 보장받은 상황이기에 그 기간만큼은 심판이 임하지 않는다면, 즉 자신이 사는 동안엔 태평과 진실이 있다면 이 역시 선하다고 답했습니다.
히스기야의 이 말은 여러 해석을 낳습니다. 먼저는 그가 이기적이다라는 겁니다. 자신만 괜찮으면 됐다며 뒷일은 상관 안 하는 듯한 어조라는 게 그 이유입니다. 또 다른 해석으론 그가 즉각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를 언약에 따라 마땅히 심판하려고 멸망을 선고하신 하나님이 선하시다 인정하고,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자신에게 그 일을 연기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고백을 드렸다고 말입니다.
교우님들은 히스기야의 본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히스기야 때에 이스라엘이 평안했기에 하나님이 그의 뉘우침을 받아 주셨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성경이 히스기야를 선한 왕이라고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선한 왕으로 기억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죄를 짓고도 이기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공의의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리는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가 이룬 업적을 후대가 잊지 않게끔 이렇게 전해주십니다.
히스기야의 마지막(20-21절)
(20-21)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히스기야는 생전에 예루살렘 성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수도를 만들었습니다. 이 물길은 성 밖 기혼샘 물을 성내 실로암 저수지에 연결하는데, 땅속에서 약 500여m 길이로 이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기자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이런 업적도 있다는 걸 후대가 잊지 않게 하셨습니다. 비록 그가 실수는 했더라도 하나님이 그를 이렇게 기억해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열왕기하 18장부터 시작하는 히스기야 일대기를 자세히 읽으면 발견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건 열왕기하 20장 사건이 사실 18-19장 이야기, 앗수르의 침공에 히스기야가 응전하는 것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열왕기하 18장 16절에서 히스기야가 앗수르에게 조공으로 바친 금들이 20장에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열왕기하 18-19장이 증언하는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히스기야 모습은 그가 오늘 본문 사건에서 진정으로 뉘우치고 돌아섰음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히스기야가 다시 하나님만을 1순위로 두고 바른 방향으로 그의 연장된 인생 15년 중 첫해를 걸었다고 말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죄를 인정하고 방향을 바꿔 걷는다면, 하나님은 우리 발자취를 기억해주실 뿐만 아니라 후대가 보고 따를 진면교사로 기억해주십니다. 이는 유한한 세상에선 누릴 수 없는 영광입니다.
동시에, 열왕기 기자가 일부러 히스기야의 실책을 그가 마치 변질한 것처럼 의도적으로 성경 후반에 배치한 것의 의미를 놓치지 마십시다. 어쩌면 히스기야가 후대에게 오해받아 억울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이 또한 회심한 히스기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예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를 통해 진정한 왕, 유한한 인간 왕 아닌 메시아-그리스도를 대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히스기야는 명시적으로 허락받은 생의 기간 첫 사건에서 유혹에 넘어졌지만, 이스라엘을 구원할 진짜 왕은 더 짧은 3년의 생을 허락받고도 유혹에 넘어지지 않으셨습니다. 동시에 그분은 어떠한 거짓도 없으시면서도 히스기야의 후손이 받아야 할 모욕과 수치를 다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홀로 받고 자신을 믿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더 큰 히스기야, 진정한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결국 히스기야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통로였고 창이었습니다.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히스기야보다 훨씬 더 실수합니다. 그때 히스기야처럼 말씀 앞에 서십시다. 그리고 그 말씀이 고발하는 나의 연약함을 수용하십시다. 나아가 우리의 걸음을 고쳐 걸으십시다. 그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영원히 기억해주시는 영예를 누릴 것입니다. 나아가 점점 더 짙은 어둠이 드리워 가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참 빛, 예수님을 투과하는, 조금 얼룩져 있어도 없어선 안 될 한 창이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히스기야의 생을 통해 공의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해주심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세상에서 하나님을 잊을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돌아선 우리를 기억해주십니다.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이런 우리를 최종적으로 구하시고, 우릴 통해 세상에 생명을 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릴 위해 준비하신 이 영예를 우리가 언제나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오늘 하루 우리 앞의 길을 바르게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히스기야는 비보를 듣고는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낭보를 듣고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에 비춰 오늘 나의 믿음은 어떠한지 돌아봅시다.
2.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에게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했습니다. 오늘 내가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걸 자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의 죄를 지적하자 그는 자기 죄를 인정했습니다. 말씀 앞에서 찔리고 부끄러울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돌아봅시다.
4.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억해주신 것을 볼 때, 오늘 내가 하나님께 기억될만한 자녀로서 가야할 길과 걸음은 무엇입니까?
(작성: 이종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