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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의하면 구들이 지금처럼 방 전체에 놓이고 아궁이를 방 밖에 두게 된 것은 고려중기부터라고 한다. 고려시대까지는 빙돌, 화돌, 온기돌, 돌구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다가, 성균관의 동·서재를 수리하면서 온돌 5칸을 만들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온돌'이란 단어를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가 되면 제주도에서도 온돌이 널리 보급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부터 온돌이 우리 주거에 완전히 정착되어 안방과 아궁이, 그리고 부뚜막이 하나의 완전한 시설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중국기록으로는 5세기말에 씌어진 『수경주 水經注』란 책에서 관계산(觀鷄山)이란 곳에 승려 1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계사(觀鷄寺)란 절을 만들었는데 이 절의 밑바닥을 가로 세로로 소통이 되도록 돌로 연결하고 그 위를 흙으로 발라 밖에서 지피는 뜨거운 불기운이 온 방안을 덥혀 겨울을 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이 고구려의 기록보다는 100여 년 앞서 있기는 하지만 이 절이 중국 문화중심지와는 멀리 떨어져 있고 고구려와 접촉이 잦은 국경부근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와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식 온돌은 방 전체에 대한 전면온돌이 아닌 일부분에만 시설한 부분온돌이었다는 점에서 흥미가 있다. 따라서 당시 중국 사람들은 입식생활을 했고 전면온돌을 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좌식생활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고구려의 벽화에 나타난 그림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는 일부 사람들이 입식생활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까지 온돌은 일반 민중들이 선호하는 시설이었을 뿐 지배계층은 온돌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중국이 입식생활을 한 관계로 우리나라 지배층도 입식생활을 선호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다시 말해 노약자나 병자를 위한 공간, 즉 집의 일부분만 온돌을 들이다가 조선 후기가 되어서야 온돌이 일반화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인정과 접촉본능은 바로 온돌에서 연유한 것이다. 일제시대 한국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야나기[柳宗悅]는 그의 책에서 한국인들은 무엇보다도 정에 약하여 한국의 모든 예술은 인정에 넘쳐 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것도 바로 이 정에 의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확실히 서구인들과 비교할 때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정이 많고 정에 약하다. 이규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을 '접촉본능'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모와 아이들의 정은 말할 것도 없고 아는 사람끼리의 악수도 유난히 그 흔드는 폭이 큼과 동시에 양손으로 상대방의 손등을 잡고 그것도 모자라 상대방의 어깨까지 두드린다. 귀한 물건이나 새롭고 신기한 것이 있으면 눈으로 확인하기보다는 꼭 만져봐야 직성이 풀린다.
이렇듯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촉각에 예민한 이유의 상당 부분은 온돌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온열기를 통한 난방방법을 취하고 있는 데 반해 온돌의 특징은 열을 직접 피부로 접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온돌은 바닥 자체가 가열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습관은 될 수 있으면 바닥과의 접촉을 넓히는 방향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촉각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온돌이 생활에 자리 잡음에 따라 우리 생활의 여러 요소들도 파생되었다. 우리의 양반앉음새, 즉 둔부와 다리를 바닥과 최대한 접촉하는 앉음새는 이러한 온돌습관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비하여 온돌이 발달하지 않은 일본에서는 바닥과의 접촉을 최대한 차단하기 위하여 꿇어앉는 습관이 생기고 서양은 아예 바닥과의 접촉을 차단한 의자생활이 습관화된 것이다.
또 이러한 앉음새에 맞게 배려한 것이 한복이다. 양복바지를 입고 바닥에 앉으면 무릎부분이 나오고 스커트를 입고 바닥에 앉아도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이다. 따라서 남, 여 한복 모두 위의 저고리는 몸에 맞추되 바지나 치마의 경우는 온돌에 앉아 생활하는 우리들의 습관을 고려하여 많은 여유를 둠으로써 실용성을 우선하였다 할 수 있다.
서양식 난방구조에서는 침대를 둔 침실이라는 공간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온돌환경에서는 이불과 요를 필요한 때에만 펴고 걷기 때문에 방의 공간활용의 효율성이 더욱 높아져 다용도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밥을 먹으면 식당이요, 손님이 오면 응접실이요, 가족이 모이면 거실이고 주부가 작업을 할 때는 작업장이 되고 앉은뱅이책상을 놓고 공부를 하면 공부방이 된다. 그러나 지금의 서양식 가옥구조는 방의 용도에 따라 그 기능을 독립시키다 보니 각각의 방은 하나의 용도만을 위한 단일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넓은 평수의 빌라나 아파트의 경우에는 안방을 두고 그 뒤에 부부침실이라는 독립된 공간을 별도로 두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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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옥에서는 아궁이를 두어 취사와 난방을 하면서 부엌을 한 단 낮춰 중층구조로 만들어 위에는 수장공간을 두었다.
여기에는 대개 음식물을 보관하는데 높은 곳에 위치해서 음식물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장점과 부엌과 가까워 주부들의
동선이 짧아지는 합리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가옥구조는 결국 가족끼리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가령 어린아이가 자다가 무서운 꿈을 꾸어 한밤중에 깨어났을 경우에도, 자기 옆에 있어야 할 어머니는 보이지 않고 차가운 콘크리트 벽과 바닥만을 보게 될 때에 이 어린이는 부모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인가?
안방을 건너 침실이라는 불가침의 깊은 곳에서 생활하는 부모 밑에서, 즉 자신의 무서움을 주체 못한 어린이가 큰 소리로 울어도 들리지 않는 곳에 부모가 있는 환경에서 자라난 어린이는 비록 서양식 교육시각으로는 주체적이고 독립심이 강한 어린이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인의 끈끈한 가족애는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한두 자녀만 두는 요즘에는 어느 집 아이나 남에게 양보할 줄 모르고 자기만을 고집하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합리적인 주거평면의 발전과 과학적인 난방방법의 발달이야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서양식 주거형식으로 인해 온돌에서 연유된 우리의 끈끈한 인정마저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요사이에 생긴다.
출처_[네이버 지식백과] 『한옥』(박명덕), 2005.10.17, ㈜살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