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경림의 장편서사시
신경림 시인은 1987년 세 편의 장편서사시를 모은 장편서사시집 『남한강』을 출간하여 서사시 창작방법을 확장하였습니다.¹⁴⁴⁾ 그의 시집에는 세 편의 장편서사시가 실려 있는데, 「새재」(1978년), 「남한강」(1981년), 「쇠무지벌」(1985년) 등입니다. 이 시집에 수록된 각 시편의 역사적 배경은 1910년 한일합방, 1919년 삼일운동, 1945년 해방이라는 직선적 흐름으로 구성됩니다. 「새재」(1,032행), 「남한강」(1,341행), 「쇠무지벌」(1,661행)은 각각 독립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민중의 투쟁이라는 일관되고 공통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집 『남한강』은 일제강점기 민중의 참담한 현실을 형상화한 「국경의 밤」(1925년)과 강렬한 민중의 저항의식을 형상화한 「금강」(1967년)을 전통으로 하는 강한 역사의식이 발현되는 동일 계열의 서사시입니다. 그러나 신경림은 이들 앞선 서사시들이 갖는 서술방법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에 노래와 놀이를 결합하거나 집단적 인물 배치와 대립을 통해 기존의 서사시 서술방식을 지양하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 것입니다.
신경림은 '책 앞에' 글을 통해서 남한강을 서구적 의미의 서사시라기보다는 새로운 형식으로서 연작 장시로 파악하고 있으며, 세 편 모두 시간과 장소, 기술방법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세 편의 연작 장시는 모두 때와 곳과 나오는 사람이 다르다. 기술방법도 세 편이 모두 다른데,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 이 세 편의 시는 서로 이어진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의 장시로 읽어도 좋고 따로 떨어진 시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¹⁴⁵⁾
민중의 수난과 저항을 서술한 『남한강』을 읽어가다 보면 서경, 서사, 서정이 유기적으로 배합되는 가운데 민요나 무가 등 전통 민중시가와 공동체 놀이 등이 시의 진행 과정에 효과적으로 수용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시에 나오는 인물들이 대립하며 갈등과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이 발견됩니다.
장편서사시집 『남한강』은 이야기에 민요와 무가 및 놀이의 삽입, 화자의 이동, 등장인물의 대립과 사건의 연쇄 등 여러 가지 서사 기법이 혼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 서정과 집단 서사가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신경림은 『남한강』의 창작동기와 창작방법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 고장에 흩어져 있는 많은 얘기와 노래를 들으면서 자랐다. 시를 쓰게 되면서 이 얘기와 노래를 시로 만들어보자는 것이 내 꿈이었다. 얘기와 노래를 수용하자니 장시라는 형식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이 시를 구상하면서 나는 서사시라는 서구적 개념의 문학형식을 무시하기로 했다. 내가 들은 것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게 가장 많은 얘기와 노래를 들려주었고 또 가장 감동적이었던 창돌애비라는 반박수의 방법을 크게 참작했다. 그는 얘기 속에 노래를 섞기도 하고 노래 속에 얘기를 섞기도 하면서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뛰어난 얘기꾼이요 노래꾼이었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목대목 청중을 얘기꾼과 노래꾼으로 동원하는 방법이었다.¹⁴⁶⁾
위의 인용을 창작방법과 관련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시에 이야기와 노래를 수용하자니 장시라는 형식이 부득이 하였다.
② 서사시라는 서구적 개념의 문학형식을 무시하기로 했다.
③ 창돌애비라는 반박수의 방법을 크게 참작했다.
④ 연작 장시는 의도적으로 모두 때와 곳과 나오는 사람이 다르며 기술방법도 다르게 했다.
시인은 “서사시라는 서구적 개념의 문학형식을 무시”¹⁴⁷⁾하였다고 하였으나, 『남한강』은 당연히 민족과 민중의 고난에 찬 생활과 투쟁사를 이야기한 서사시입니다.¹⁴⁸⁾ 신경림 시인이 자신의 시집 『남한강』에 “창돌애비라는 반박수의 방법”을 참작하였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반박수의 방법’이란 이야기와 노래를 섞으면서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방법입니다. 신경림은 단시를 창작하는 경우에도 민중의 생활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민요와 무가 등 전통적인 민중시가 양식을 수용하였습니다.¹⁴⁹⁾
전통적 민중시가 양식의 수용은 서사시 『남한강』에서 자주 발견되며 어떤 경우는 시가의 원래 모습이 그대로 채용되기도 합니다. 채용되는 민요형식의 시들은 서사적 구조에 적합하게 변용 또는 활용되면서 사건의 전개와 인물 행위의 서술에 그때그때마다 독특한 기능을 맡으며 작품 전체의 서사적 전개를 축약 또는 비약시키거나 단조로운 흐름에 정서적 공간을 부여합니다.¹⁵⁰⁾
그러면 이야기에 노래와 놀이가 어떤 양상으로 결합하는지 작품 「새재」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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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공광규,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연구』, 푸른사상, 2005, 122~199쪽 참조.
145) 신경림, 「책 앞에」, 『남한강』, 창작과비평사, 1987, 3쪽.
146) 앞의 책.
147) 서구의 서사시(epic) 또는 영웅시(heroic poem)란 개념은 긴 설화체시(narrative poem)로서 위대하고 진지한 주제를 지니며, 고양된 문체로 말해지고, 행동 여하로 한 종족이나 국가나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영웅적 또는 거의 신에 가까운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서사시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앵글로색슨 서사시인 「베어울프」 등 전통적 서사시(일차적 서사시 또는 민속 서사시)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밀튼의 「실낙원」, 키츠의 단편서사시 히페리온」, 블레이크의 여러 서사시 등 문학적 서사시(또는 이차적 서사시)로 나뉘는데 르네상스 비평가들은 서사시를 모든 장르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보았다. 서구의 문학적 서사시는 궁극적으로 호메로스의 전통적 서사시에서 유래한 다음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① 주인공은 국가적으로나 심지어는 우주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② 스케일이 세계적일 수도 있고 그보다 더 크다. ③ 행위에서 일부 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초인간적 행동이나 험난한 여행 등을 한다. ④ 주인공의 위대한 행동에 대하여 신들과 다른 초자연적 존재들이 관심을 가지거나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⑤ 일상 언어와 거리를 둔 문제로 영웅적 주제와 서사시적 건축의 위대함과 양식(樣式)에 알맞은 의식적 문체로 서술된다. (이명섭 편, 세계문학비평용어사전』, 을유문화사, 1985, 231~233쪽 참조)
148) 신경림의 『남한강』이 장시인가 서사시인가가 논란이 될 소지가 있는데, 장르 명칭으로서는 서사시이며, 형태와 길이의 개념으로서는 장시들이 모인 연작 장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장시와 서사시를 혼재하여 쓰기로 하였다.
149) 신경림은 “장시 『남한강』을 쓸 때, 너무 긴데 가락이 없으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 민요조를 도입한 거죠.”(신경림 • 박시교 대담, 앞의 책, 287쪽)라고 하였다.
150) 신현준, 「신경림론-신경림 시의 민중적 서정성과 그 방법론」, 서울교대논문집 《초등국어교육》(제4호), 1994.2, 21~22쪽 참조.
공광규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2024. 6. 14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