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 피어나는 꽃, 민주지산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
막다른 산골마을에 눈이 내린다.
황룡사를 뒤로하고 계곡을 가로지른 작은 현수교를 지난다.
연 나흘을 추적추적 내리던 차가운 겨울비가 물한계곡으로 들어서니 약한 눈발로 바뀌었다.
어떡하나? 산 능선에 올라서도 조망이 트이지 않을텐데...
친구와 처남 내외를 동행한 겨울 조망 산행인데 약간의 실망감이 앞선다.
그러길레 평소에 기대치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고 하지 않았던가.
눈 내린 산길은 고독하다.
풀조차 자라지 않는 길 위의 눈만 대지로 스미지 못한다.
인간이 그 길을 만들었다.
직립하지만, 나무처럼 무심히 설 수 없는 인간은 어디론가 가야 하므로, 그래서 슬프다.
걷지 못하면 더 슬플 것 같아서, 나는 또 눈 위에서 길을 찾는다.
잣나무 숲에서 삼도봉으로 오르는 길을 버리고 오른쪽 골짜기로 파고 든다.
계곡의 대부분은 얼어 있고 눈으로 덮여 있다.
민주지산의 높이와 깊이는 질펀한 겨울을 용납하지 않는다.
산길 가의 나무들이 적당히 차례를 바꾸면서 길동무를 해 준다.
내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길이 나를 데리고 간다.
약간의 갈증을 느낄 즈음 계곡으로 내려가 손바닥으로 계곡물을 떠먹는다.
병아리 마냥 고개를 젖히자 회색빛 하늘을 배경으로 사스레나무가,
바람결에 몸을 다 내준 듯한 특유의 몸짓으로 서 있다.
계곡 산행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겨울이라고 산 속에 피어나는 꽃이 없으랴.
지난 가을에 미처 땅바닥으로 떨어지지 못한 마른 나뭇잎에 하얀 백설기 떡가루가 묻었다.
낙엽은 한 호흡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워낸 나무의 지난 삶이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나는 겨울을 견디고 있다.
춥지만 그래서 더 따뜻한 계절, 겨울은 말한다.
춥고 힘든 건 계절에 딸린 게 아니라 바로 마음에 딸린 거라고...
산길은 잠시 숨을 고르고 쉬어 간다.
이어진 산길은 순백의 산호초 바닷 속으로 이어진다.
황홀하다. 튼실하게 채워진 삶의 빛깔이다.
눈 쌓인 산길은 바람이 먼저 걸어 본다.
이 길은 찾을 수도 있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오름길은 어느덧 하늘로 이어진다.
올라갈수록 욕심을 버리라 한다.
그래서 우린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길 속에 겨울이 머물고 있다.
묻는다. 당신의 꿈과 기억은 아름다운가?
대간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한 줄기, 시간의 기억은 생생했다.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바람이 거세지고 눈보라가 몰아친다.
길은 눈보라 속에 있었고 흐르는 구름 속에 있었다.
기실 인간의 본성이란 허공 같은 것일까?
경계가 지워진 눈보라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찾은 무인대피소다.
9년 전 겨울인가? 나는 이곳에서 하룻 밤을 묵은 적이 있다.
그러나 민주지산은 현대사의 아픔이 스민 산이다.
6.25동란 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보급로가 끊긴 인민군 주력부대가 철수를 시작할 무렵
속리산에 있던 인민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지리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1998년 4월1일 천리행군을 하던 육군 특수전 사령부(5공수) 대원들이
갑자기 몰아친 한파 속에 탈진하여 사망 6명, 실종 1명이 발생하는 불상사가 생겼다.
이 후(2001년) 이 장소에 주검이 된 특전사 대원들을 기리기 위해 무인대피소가 지어졌다.
창밖에는 눈이 오고 있었다.
대피소 안에 서려오는 한기가 식어버린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당신에게는 달콤했을 눈송이가 내 마음을 시리도록 아프게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가슴은 저리도 작은 눈송이 하나 녹여줄 수 없는 걸까?
보름 전에 가깝게 지내던 50년지기 친구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산다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때론 기가 막힌다는 생각이다.
어쨌거나 사람의 일 가운데 무엇 하나 허망하지 않은 것이 없다.
영원한 건 오직 자연. 시간을 먹고 시간에 먹히는, 천연 본성의 산하대지뿐이다.
겨울 산정에 서 보았는가?
소리쳐 부를 이름 조차 없을 만큼 삶이 혼탁할 때
산골짜기 어디에선가 있을 것 같은 그리움을 향해 흐느껴 본 일이 있는가.
차갑고 얼얼한 끝에 얻는 해방감은 얼마나 상쾌한 일인가.
얼어 붙은 귀를 가리고 언 볼을 부비며 넘어가는 이 산길에서
알싸하게 정화된 의식들의 명징함은 또 얼마나 설레이는가.
눈길은 경계를 지운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우고, 가야 할 길을 지우고, 가는 사람의 경계를 지운다.
내심 기대했던 바는 아니지만 눈보라 속에 '혹시'했는데 '역시' 조망은 꽝이다.
산 전체가 온통 흰눈으로 덮여 순백의 세상으로 변했다.
여름 산이 아무리 울창하여도 겨울의 산 만큼 장대하지 못하다.
가던 길 멈추고 망서리다가 예정된 삼도봉을 포기하고 쪽새골로 내려 선다.
주능선에서 골짜기로 들어서자 바람이 잦아 든다.
나목들 사이로 시계가 조금씩 트이면서 길을 열어준다.
눈썰매가 있으면 엉덩이 미끄럼 타기가 참 좋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보라에 지워졌던 나무들이 살아난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갓 태어난 길이다.
한 호흡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워낸 나무의 지난 삶을 내 몸 속에 채운다.
몸과 마음의 감정은 본질적으로 하나다. 그리고 사람도 자연의 일부다.
각자 개별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들은 서로 다르게 보일 뿐 모두 같은 본질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계곡을 걷는 즐거움의 반 이상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폭포를 만나는 일이다.
소와 폭포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계곡을 장엄한다.
물이 얼어붙은 계절이라 하여 표정까지 굳지는 않는다.
얼어붙은 골짜기의 표정은 섬세하다.
대지와 바람의 은밀한 속삭임까지 다 새겨져 있다.
텅 빈 충만함,
사람이 그립다가도 불현 듯 사람이 지겨울 때가 있다.
북적거리는 거리도, 친구와의 수다도 다 귀찮고 그저 잠깐 사라지고 싶은 순간이 있다.
'한겨울에도 아이와 장독은 얼지 않는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어릴 적, 온 겨울이 그랬다.
보잘 것 없는 입성으로도 오그라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모두들 곧장 남극으로 가도 좋을 옷을 입고서도 쩔쩔맨다.
조만간 고드름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격세지감이다.
오늘 하루 종일 경계도 없는 산에서 눈을 맞았다.
겨울산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무리 껴안려 해 봐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살아오는 동안 가슴 한 쪽에 저미거나 혹은 아린 기억을 서너 개쯤 묻어 두고,
이제 누구라도 넉넉하게 얘길 나눌 정도의 나이를 먹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세월의 속도는 마음의 속도를 따라 간다.
조급하게 살면 한 없이 모자라지만, 느긋하게만 따라 가면 아직도 넉넉하기만 한 삶이다.
첫댓글 겨울 민주지산 아름답습니다
님 산행기를 읽고보니 저는 암생각도 없이 산에 다니는 거 같아요
헥헥 거리며 올랐다가 하하하! 웃고 내려옵니다
민주지산 아품을 간직한 산이네요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조만간에 만나보고 싶어 지네요
생각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글 잘보구 갑니다...^^
저도 아직 아껴두고 있는 곳이랍니다^^
좋은 글, 멋진 사진 감동 산행기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슴이 순간 멍 ...공감 입니다~~그래서 산길 을 찾는 것인가 봅니다^^
또 한편의 파노라마.. 동안 머물다, 감동 받구 갑니당~
감사합니다^^
작가선생님이시군요.
몇년전 겨울 민주지산을 갔던 기억이
가슴안에서 꾸물거립니다.
좋은 글 가슴에 잘 묻어 두었다가
산에 오르면 꺼내보겠습니다.
수고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