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어머니
2장 나는 독생녀로서 이 땅에 왔습니다
9.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간 푸른 섬광
"전쟁이 터졌대요!"
"글쎄 북한군이 삼팔선을 밀고 내려왔답니다."
내가 여덟 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마당 한 켠에 봉숭아꽃이 빨갛게 피어오르고 길목의 버드나무와 플라타너스가 한컷 우거진 초여름 아침이었습니다. 그 초록빛 여름날이 무색하게 아침부터 삼삼오오 모여 걱정하는 주민들로 골목이 가득했습니다. 남한으로 내려와 그나마 생활이 조금 안정되나 싶었는데 북한 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결국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허둥지둥 대전으로 후퇴하고 북한군을 막기 위해 한강 다리를 폭파하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서울 사수를 부르짖었습니다.
이틀 후 새벽녘에 문득 어머니가 잠에서 깨어나 피란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습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나는 눈을 감고 두분의 대화를 가만히 들었습니다.
"우리도 피란을 가야 해요. 공산당이 여기까지 내려오면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렇긴 해도 여자들을 험하게 다루기야 하겠니?"
"우리가 북에서 내려 온 것을 알면 그 자리에서 해칠지도 몰라요."
어머니는 오로지 주님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늘 정성을 들이셨는데 공산당이 밀고 내려온다는 소식에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1950년 6월 27일 저녁, 부슬부슬 비가 내렸습니다. 다급한 피란 행렬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쏟아져 내렸습니다. 우리도 서둘러 보따리를 안고 골목을 나섰습니다. 밤비를 맞으며 한강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한강 인도교가 어둠 속에서 어숨푸레하게 보일 때 나는 불현듯 어떤 예감이 들어 외할머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습니다. 외할머니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어머니가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외할머니는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숙여 잠시 나를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집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순정이가 올지도 모르겠구나. 혹시 연락이 올 수도 있으니 다시 돌아가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 셋은 터벅터벅 걸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불을 대충 펴고 쪽잠을 자다가 요란한 스리쿼터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창호지 문으로 새벽빛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문이 급하게 열리고 군복을 입은 외삼촌이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왔습니다.두 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제는 떠나도 되겠구나' 안심이 되었습니다.
"서둘러야 해요. 빨리 떠나야 합니다."
육군본부에 근무하던 외삼촌은 전시 상황을 면밀히 지켜보다가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다는 정보를 접하자 가족들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차를 몰고 집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싸놓은 보따리를 들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왔습니다. 희부연 골목에 스리쿼터 한 대가 시동이 걸린 채 세워져 있었습니다. 외삼촌은 우리를 태우고 급히 한강 쪽으로 내달렸습니다. 한강 일대는 새벽인대도 이미 많은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한강 인도교로 향했으나 길목이 인파로 꽉 막혀 좀처럼 앞으로 나아 갈 수 없었습니다. 외삼촌은 육군 장교였고 다리 통행증을 지니고 있었기에 스리쿼터의 경적을 울리며 피란민 사이를 헤치고 겨우겨우 한강 다리를 건넜습니다. 처절한 공포와 혼란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습니다.
한강을 건너자마자 외삼촌이 소리쳤습니다.
"엎드려요!"
"꽝!"
한강 인도교를 빠져나와 얼마 못 가 갑자기 뒤에서 '꽝' 소리가 났습니다. 그 순간 푸른 섬광과 함께 굉음이 터졌습니다. 차를 급히 세우고 우리는 허겁지겁 내려서 길가 낮은 곳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얼른 보니 한강 다리가 폭파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 불빛을 역력히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악마의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과 같았습니다. 한강 다리를 건너오던 수많은 사람과 군인, 경찰들이 강물에 빠져 숨졌지만 우리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불과 몇 미터 차이로 생과 사가 갈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감았습니다. 사람들은 왜 전쟁을 일으키는지, 죄없는 사람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하늘은 왜 우리에게 이토록 큰 아픔과 시련을 주시는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정확한 답을 떠올리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눈을 뜨자 두 동강으로 파괴된 다리가 어둠 속에 흉한 몰골로 남아 있었습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3시였습니다.
정부는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호언장담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인민군이 내려오기도 전에 유일한 한강 다리를 미리 폭파했습니다. 자유를 찾아 피란길에 올랐던 무고한 사람이 무수히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우리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생명을 무사히 지켰습니다. 목숨이 촌각에 달린 순간 하늘이 보호하사 위험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지금도 한강 다리를 건널 때면 그때의 푸른 섬광과 피란민들의 아비규환과 같았던 비명이 떠올라 가슴이 아파 옵니다.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목격했으며, 난민생활을 처절하게 겪었습니다. 순박한 사람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 나갔고, 부모 잃은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거리 이곳저곳을 헤맸습니다. 여덟 살의 어린 소녀였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강 다리가 맥없이 무너지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벌써 7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목울대가 먹먹해집니다.
몸을 겨우 추스른 우리는 낯선 길을 걷고 또 걸어 남으로 향했습니다. 때로는 차를 얻어 타기도 하면서 전라도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군인 가족 피란민 수용소에 머물다가 9.28수복 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빈 적산가옥에서 지냈습니다. 그것도 잠시, 50만의 중공군이 두만강을 건너 침공하면서 1951년1.4후퇴 때 또다시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군인 가족은 특별열차를 탈 수 있어 무사히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그 고행의 노정은 필설로 다 할 수 없겠지만, 굶어 죽고 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나는 삶과 죽음을 넘나들던 피란 노정에서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실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족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올 때도, 남한에서의 피란 와중에도 늘 함께하며 우리를 보호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