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류향전기ㅡ50

생사(生死)의 기로(岐路)          비파공주는 그의 옆에 누워있었는데 그보다 더욱  가련해  보였     다. 그녀의 비단 옷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 옥같은 다리에는  먼지     와 선혈이 뒤엉켜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은 이미 서산으로 기울었     으나 여전히 무더웠고, 쥐꼬리만한 태양은 그들의 목숨을 뺏지 못     한 것이 끝내 아쉬운 듯 그들의 온몸을 내리쬐고 있었다. 멀지 않     은 곳에 그늘진 곳이 있었으나 그들은 더이상 그 곳으로 갈  힘이     없었다.       호철화는 두 손으로 햇볕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내 평생에 그 빈대 새끼는 찾을 생각을 말아야겠구나.]       비파공주는 망연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원래 이 길로 오지 말아야 했어요.]       호철화는 두 눈에 노화를 뿜어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맞소이다. 우리는 원래 이 길로 가지 말았어야  하오.  하지만     그게 내 잘못이오? 사막에서는 나보다 당신이 더  쓸모가  있다고     하지 않았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늙은 개처럼 누워서 방법을  찾     지 못하는 것이오?]       비파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울먹였다.       [나는 정말 당신을 따라오지 말아야 했어요. 당신은 나  때문에     고생을 한 거예요. 그 물자루의 물을 당신이 혼자 마셨더라면  더     오래 견딜 수 있었을 거예요.]       호철화는 한동안 묵묵히 있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정말 나쁜 놈이구려. 이까짓 일로 당신을 나무라다니. 한     남자가 여자 하나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고서 무슨 낮짝으로  화     를 내겠소.]       비파공주는 갑자기 그의 몸에 기대어 목놓아 울었다.       [그건 당신을 나무랄 일이  아니예요.  나를  나무래야죠......     나는 지금 죽고 싶은 마음 밖에 없어요. 지금 당장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호철화는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죽으려 생각하지 않아도 살아나갈 수 없을 것 같소.]       사방은 누런 모래가 하늘에 닿아있었고, 하늘과 땅에는 온통 절     망의 황색(黃色)만이 존재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다.       비파공주는 천천히 머리를 들더니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하고 죽다니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예요.]       호철화는 껄껄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당신하고 죽는다면 정말 기쁜 일이지...... 당신은 정말  아름     다운 여인이오...... 당신...... 당신......]       그의 목구멍은 마치 무엇인가에 막혀있는 것 같았다. 그는 웃음     을 멈추더니 망연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며 쉰 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이왕 죽을 바에는 죽더라도 기쁘게 죽는 것이 좋지  않     겠소? 안그렇소?]       비파공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당신은 나를......]       호철화의 눈빛은 이미 그녀의 눈동자로부터 허벅지로 옮겨졌다.     그녀의 백옥같은 허벅지는 이미 피와 모래먼지가 엉겨있었지만 여     전히 매끄럽고 탄력있는 모습으로 사람을 유혹하기에 충분하였다.     호철화는 목젖을 아래 위로 움직이며 더욱 쉰 목소리를 냈다.  그     의 눈빛은 정염에 불타올랐고, 그는 더이상 참을 수 없는 듯 그녀     의 갸름한 허리에 다다르자 황급히 입을 열었다.       [나는 정말 당신을 원하오. 당신을 제외하고 나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소.]       비파공주는 계속 떨면서도 창백했던 얼굴은 점차  홍조를  띠었     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애써 드러난 허벅지를 가리려 했다.       그러나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옷은 아무 것도 가릴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손놀림은 더욱 유혹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점차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묘한 욕망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심장은 콩당콩당 뛰기 시작했다.       사람이란 정말 이상한 동물이었다.       사람의 욕망은 왕왕 나타나지 말아야 할 때 기어코 나타나는 법     이고, 육체가 피곤할수록 욕망은 더욱 강렬해지는 법이다.       호철화는 마침내 그녀를 껴안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가운데에서도 타오르는 욕망의 불길을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었다.       이미 비파공주는 체념하고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를 받아들     일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죽기 직전의 미칠듯한 환희(歡喜)! 이는 모든 사람들이  환상속     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래, 모래는 그렇게도 부드럽고 뜨거웠다.       호철화는 몸을 돌려 그녀의 몸을 덮었다. 그들의 상심,  그들의     비애, 고통과 절망은 모두 이 욕망 속에서 불태워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헐떡이던 호철화는 갑자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펄     쩍 뛰더니 두 손으로 자신의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놀란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파공주를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당신은 왜...... 왜 그러는거요? 그래 당신은 원하     지 않는단 말이오?]       비파공주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나직이 울먹였다.       [나는...... 나도 원해요. 나는 죽기 전에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치기로 결심했어요. 하지만 한 가지 일만은 당신에게  말씀드리     지 않을 수 없었어요.]       [무슨 일이요?]       비파공주는 눈을 내리뜨며 나직이 말했다.       [나의...... 나의 몸은 완전하지 못해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주었어요.]       호철화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쉰소리로 외쳤다.       [누구요?]       비파공주는 한자한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로 그 사람이예요.]       '그 사람'이라니? 호철화가 어찌 모르겠는가? 호철화는  한통의     차가운 물을 머리에 뒤집어 쓴 듯 멍해졌다.       비파공주는 처연히 말을 이엇다.       [나도 당신을 원해요. 모든 것을 잊고  당신의  품에서  죽는다     면...... 그러나......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나는 그 일을  당신     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호철화는 갑자기 펄쩍 뛰며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소리쳤다.       [더 말하지 마오! 더 말하지 마시오!]       그는 미친듯이 모래를 걷어찼다. 그는 한 번 걷어찰 때마다       욕을 해댔다.       [이 빈대 새끼! 이 빈대 새끼!......]       비파공주는 그윽한 눈길을 들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 그를 미워하는 거예요?]       호철화는 대답하지 않고 콧방귀만 뀌었다.       비파공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이 그를 미워한다 해도 나는 당신을  나무라지  않겠어요.     나도 어떤 때는 그가 미워요...... 하지만 누구든지 그와 함께 있     다면 언제나 행복하지요. 그는 누구든 한 번만 보면 상대의  마음     을 알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영원히 그의 마음을 알수 없지요.]       호철화는 발길질을 멈추더니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와 함께 있으면 결국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지 않소?]       [네, 그래요.]       [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하고 있소. 그는 우리     를 핍박하지 않았소, 안그렇소?]       비파공주는 고개를 숙이며 끄덕이기만 했다.       호철화는 갑자기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들은 서로 동병상련(同病相憐)인 것 같구려.  비     록 그를 미워는 하지만 또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것     이 아니오?]       [어떤 때는 나도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호철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은 빈대 새끼가 확실히 다른 사람이 좋아할만한  사람이기     때문이오.]       비파공주는 한동안 묵묵히 있더니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당신은 정말 부끄럽지 않은 그분의 친구네요......]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눈이 휘둥그래져 호철화를 바라보았     다. 그녀의 눈빛에는 놀람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입을  벌     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호철화는 웃으며 물었다.       [당신은 뭘 그리 빤히 쳐다보시오? 내 머리가 두 쪽으로 갈라지     기나 했단 말이오?]       그는 말을 하면서 머리를 만지더니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의     눈빛에는 경황실색한 빛이 역력했다. 호철화는 두 눈이  휘둥그래     진 채 자기 손만 들여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손에는 선혈이 묻어있었던 것이다.          口             口              口              口      호철화의 머리가 깨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피는 어디에     서 묻었단 말인가?       호철화는 머리를 들어 누런 먼지가 가득한 하늘에 두 개의 작은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 점은 빙빙 돌며 점점 낮게 선회     하는 것이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것은 바로 두 마리의 매였다. 의심할 바 없이 그  피는  매가     상처를 입고 매의 몸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만약 호철화의 감각이 정상이었다면 일찌기 알아차렸을  것이지     만 그는 단말마적인 욕정에 사로잡힌 상태라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비파공주는 놀라 물었다.       [저 매는 어디에서 날아온 것일까요2 어떻게 상처를  입었지요?     혹 이 부근에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까지 말을 하더니 그녀의 놀란 얼굴은 환히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근처에 있다면 그들은 살아나갈 희망이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호철화의 얼굴은 더욱 무거워졌고, 그의 머리 속에는 과     거 표객들의 몸에서 주보를 낚아채던 매의 모습이 스쳐갔다.       사막의 매는 석관음의 것임이 분명했다.       마침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마리의 매가 유성처럼  떨어졌     다. 호철화가 들어보니 그 매의 회백색 부드러운  털에는  선혈이     낭자한 것이 검에 찔린 상처가 분명했다.       그 매는 사람을 습격하는 순간 상대방의 검에 찔린 것이 분명해     보였다.       호철화는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빠른 검법이군!]       비파공주는 희색을 띠고 물었다.       [그가 아닌가요?]       [아니오. 만약 그가 손을 썼다면 이 매는 이렇게 멀리 날아  오     지 못했을 것이오. 더더구나 가볍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이  날짐     승을 그는 이렇게 무참히 찌를리가 없소.]       순간 다시 한 마리의 매가 떨어졌다.       그 매 역시 검에 찔린 상처를 입고 있었다.       비파공주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당신의 다른 친구가 한 일은 아닌가요?]       호철화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희빙안은 원래 검을 사용하지 않소.]       그는 갑자기 얼굴에 미소를 띠더니 중얼거렸다.       [어쨌든 간에 이 두 마리의 매는 때를 잘 맞추었구만.]       비파공주는 그가 말하는 뜻을 명백히 알 수 없었다.       호철화는 매를 한 마리 건네주며 말했다.       [먹으시오. 어서!]       비파공주는 놀라 되물었다.       [먹다니요? 이걸 어떻게 먹는단 말이예요?]       호철화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보며 단호히 말했다.       [당신이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이것을 먹어야 하오. 먹을  만큼     먹으시오. 가급적이면 많이 먹도록 하시오. 많이 먹을 수록 좋소.     알겠소?]         口              口              口              口      미식가(美食家)들이 하는 이야기로 육류 중에서 가장 맛이 없는     고기가 매 고기라고 한다. 익었다 하더라도 질겨  씹기가  힘든데     더더구나 날 것으로 먹으라니?       비파공주는 동그란 눈을 질끈 감고 한 덩어리를 칼로 베어 약을     먹듯 입에 넣고 씹었으나 번번이 토하고 말았다.       호철화는 매섭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렇게 먹지 못한다면 영원히 기력을 회복할 수  없소.     나처럼 이렇게 먹어야 하오. 자! 보시오......]       그는 피가 묻은 매 고기를 크게 한 점 베어내어 먼저 피를 빨아     먹더니 다음에 고기를 잘라 입에 넣고 몇 번  우물거리더니  꿀꺽     삼켰다.       비파공주는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나는 그렇게 먹을 수가 없어요. 난 먹지 못해요.]       호철화는 웃으며 말했다.       [눈을 감고 내가 먹는 것이 양고기에 양념을 한 구운  만두라고     생각하면 당신도 먹을 수 있을 것이오.]       매 고기는 비록 질기기는 했지만 매의 피는 비려도 그럭저럭 먹     을만 했다. 그것은 기아와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십전대     보탕(十全大補蕩)보다도 더 좋은 것이었다.       호철화의 안색은 점점 붉어지기 시작하였고, 비파공주도 기력을     되찾았다.       이때 갑자기 비명소리가 저쪽 사막 언덕에서 들려왔다.       호철화는 안색이 약간 변하더니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여기서 기다리시오. 내가 가보리다!]       [아니예요. 나도 가겠어요.]       호철화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갑시다...... 보아하니 그 빈대 새끼를  제외하곤  다른     사람은 당신에게 관심을 끌 수 없는 것 같구려...... 하지만 당신     은 반드시 조심해야 하오.]          口              口             口              口      모래언덕 뒤에서는 칼빛이 이리저리 번득이고 있었다. 모래위에     는 검붉은 피가 흩어져 있었고, 몇 구의 시체가 땅바닥에  널부러     져 있었다.       그곳에서는 십여 명의 흑의대한들이 두 사람을 에워싸고 악전고     투를 하고 있었다. 대한들은 모두 건장하고 날랜  몸놀림을  하고     있었으며 도법도 흉맹하기 이를데 없었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들의 얼굴에는 살기가 등등하여 마치  상대     방을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놓지 않고서는 성이 풀리지 않을  표정     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람들은 그들보다 무공이 고강     했고, 검광이 마치 고리를 이루며 종횡으로 흩뿌리며 끊임없이 새     하얀 빛을 번득였다.       그 검법은 놀랍게도 해내(海內) 명가의 화산(華山)  정종(正宗)     의 신법이었다. 그러나 보기에 그들은 기력이 쇠하여 억지로 맞받     아내고 있었다.       상대방은 숫자가 많고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것이 그들이  설령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곧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다.       비파공주와 호철화는 모래 언덕 뒤에 숨어서 자기도 모르게  소     리쳤다.       [보세요. 저 사람은 당신들의 마부가 아니예요?]       호철화도 당연히 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한사람     은 신법이 좀 무디고 손을 쓰는 것이 늦었는데 그는 놀랍게도  석     타(石駝)가 아닌가?       다른 한 사람의 검법은 가볍고 날렵하며 독랄했는데 그는  바로     석타를 암암리에 살피고 쫓아가 소식이 없었던  왕충(王沖)  이었     다.       흑의대한들은 의심할 바 없이 석관음의 수하 사람들일  것이다.     호철화는 한동안 바라보더니 참을 수 없는 듯 불쑥 입을 열었다.       [이번에 당신은 반드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오.]       비파공주는 입술을 살포시 깨물며 물었다.       [하지만 여기로 도망쳐 오는 사람이 있다면 보고만 있을 수  없     잖아요.]       호철화는 실소를 하더니 머리를 끄덕이고는 갑자기 미친듯이 호     통을 치며 몸을 날렸다.       흑의대한들은 반나절 동안 죽도록 싸워 적지 않게 죽거나  다쳐     지친 몰골이었다. 그들은 이제 좀 우위를 차지하여 며칠 동안  쫏     아온 두 사람을 난도분시할 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누가 알았겠는가? 갑자기 뇌성같은 호통소리가     사위를 찢으며 한 사나이가 하늘에서 덮쳐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공중에서 내려오며 한 대한의 머리를 한 발로 걷어차더니 동     시에 다른 대한을 삼장 밖으로 걷어찼다. 그는  발놀림과  동시에     주먹을 격출하여 세번째 대한의 이빨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그 대     한은 이미 얼굴이 일그러져 손으로 얼굴도 감싸지 못한 채 쓰러져     버렸다.       순식간에 세 사람이 쓰러졌다.       이런 바람같은 솜씨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     하여 대한들은 놀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수세에 몰리고 있던 석타와 왕충은 정신이 번쩍들어 두  자루의     검을 교차하며 검광을 번득이자 다시 두 대한이 동시에 쓰러졌다.       호철화는 대갈했다.       [이 호 아무개는 죄없는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으니 칼을  놓는     다면 너희들의 목숨만은 빼앗지 않겠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대한들은 그의 호통을 듣지도 못한 듯 미친     듯이 덮쳐들었다.       왕충은 장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 사람들은 정신이 완전히 나갔으니 죽이는 길밖에 없소!]       호철화가 한숨을 짓는 순간 두 자루의 칼이 호철화에게  바람결     처럼 찍어왔다. 두 대한의 눈은 이미 뒤집혀 있는 것이 정신이 없     는 것 같았다. 그들은 두 마리의 미친 개와 다름이 없었다.       호철화는 상체를 누이며 그 칼빛 속에서  뛰쳐나와  왼팔꿈으로     뒤로 내리찍고 오른손을 위로 뻗치자 오른쪽에 있는 대한의  칼이     이미 그의 손에 들어왔다.       우지직! 하는 소리가 나더니 왼쪽에 있던 대한의 갈비뼈도 그의     팔꿈치에 부서지고 말았다. 그는 몇 발자국 뒤로 주춤하더니 고통     을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시 미친듯이 칼을 휘두르며 덮쳐들었다.       호철화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이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은 핏구덩이에 쓰러지고 말았     다.       비파공주는 멀찌감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한들은     쓰러지는 것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한 사람도 도망치는  사람     이 없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우리나라에 만약 저런 용사가 있었다면 어찌 오늘의 참담한 결     과를 가져왔겠는가? 참으로 가련한 신세구나.]       그녀는 그 대한들이 이미 석관음에게 목숨이  장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피와 살이 있기는 하지만 기실 그것은 걸어다니는  시체     에 불과한 것이었다.          口             口             口              口      혈전은 마침내 끝났다. 누런 모래에는 붉은 피가 뒤엉겨 있었고     어지러이 시체들이 널려있었다.       석타는 두 손으로 검을 부여잡고 끊임없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나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왕충이 호철화에게 다가오더니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고 긴한숨     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커다란 은혜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호대협이 대장부의 의기(義氣)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우리  형제     는 죽어도 묻힐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호철화는 그와 석타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들은 형제지간이오?]       [피가 섞인 형제는 아니지만 수족과 같은 사이지요.]       호철화는 놀라며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당신은 저 사람을 일찌기  알고  있었단  말이     오?]       [소인이 천하를 떠돌아다닌 것은 바로 그를 찾기 위해서였지요.     벌써...... 벌써 이십 년이나 되었구려.]       호철화는 그의 손에 쥔 검을 바라보며 갑자기 웃었다.       [이십 년 내에 강호 중에는 이미 정통 화산검법을 다시  볼  수     없었소. 귀하가 펼친 그 일초는 '경흥관일(驚虹貫日)'이라는 초식     인데 그것은 무림절향(武林絶響)이라 할 수 있소이다.]       왕충은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호대협은 너무 과찬하십니다.]       호철화는 눈빛을 반짝이더니 그의 얼굴을 넌즈시 바라보며 미소     를 지었다.       [소인이 알기로 과거 화산검파의 전성기일 때 그 '경홍관일, 일     초를 이렇게 정묘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인데 화산의 명검객 중에서 왕충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소이다. 귀하는 지금 진짜 이름을 알려 줄 용의는  없으신     지요?]       왕충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소인은  강호의  무명소졸에  불과한데  귀하께서는  하필이면     ......]       호철화는 그의 말을 가로채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에 와서까지 귀하의 진면목을 알려주지  않겠다는  말입니     까? 한 사람이 이름은 속일 수 있을런지 몰라도 검법은 사람을 속     일 수 없는 것이오.]       왕충은 한동안 묵묵히 있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     다.       [소인의 미천한 목숨을 호대협이 구해주었으니 사실 더 이상 속     일 수가 없는 것 같구려.]       그는 말을 멈추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 소인의 성은  유(柳)이고,  이름은  연비(煙飛)지     요......]       호철화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유연비? 과거 화산검파의 장문인의 수산제자(收山弟子)란 말이     오? 화산칠검 이외에 가장 명성을 날린 신룡소검객(神龍小劍客)이     란 말이오?]       유연비는 처연히 웃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흐르는 세월에 사람은 어쩔 수 없구려. 과거의 젊은이가  오늘     날에는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되었구려.]       호철화는 눈빛을 번득이더니 석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귀하가 유대협이라면 그는.......]       유연비는 내심 작정을 한 듯 또박또박 말했다.       [그는 바로 나의 대사형인 황보고(皇甫高)이외다.]       호철화는 얼굴을 움찔하더니 놀라 물었다.       [아니, 화산칠검의 우두머리로서 팔주(八州)에 의협으로 명성을     떨치고 천하무림의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던 인의검객(仁義劍客)     말입니까?]       유연비는 다소곳이 말했다.       [바로 그렇소이다.]       호철화는 다시 석타를 힐끔 바라보았는데 그는 망연히 멀리  바     라볼 뿐 귓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과거 풍채당당한 명검객이 어찌 이 모양이 되었는가?       호철화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더니 참을 수 없는  듯  물었     다.       [그 석관음은 황보고 대협과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습니까?  어     떻게 저리도 처참하게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속의 우여곡절을 말하자면 길지요. 황보 대형이 그녀의  손     에 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산파의 수백 년 가업도 모두  그     녀에게 무너져버린...... 그 악마의 손에서......]       호철화는 한동안 묵묵히 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당신은 그를 찾았는데 어떻게 할 참이오?]       유연비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나는...... 나는......]       그는 목이 메어 더이상 말하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내     릴 것만 같았다.       호철화는 그의 손을 덥썩 잡으며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보복할 생각을 하지 않는단 말이오?]       유연비는 중얼거렸다.       [보복...... 보복......]       그는 그 보복이라는 두 글자를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의 눈에서는 마침내 눈물이 흘렀고, 갑자기 호철화의 손을 뿌     리치며 쉰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나의 황보 대형이 무엇 때문에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낙     타와 말을 친구로 삼았는지 알고 있소?]       호철화는 한숨을 내쉬며 그 말을 받았다.       [나도 그가 말하기 어려운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가 이름을 감추고, 모욕을 참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바로 보복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오.]       호철화는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무엇 때문이오?]       [그는 우리의 역량으로 보복을 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     는 격이라고 생각하고 화산파의 일맥을 없애기 원하지  않았으며,     남아있는 화산검파의 제자들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요.]       순간 모래언덕 뒤에서 비파공주가 걸어오더니 그 말을 받았다.       [화산제자? 아직도 살아있단 말이예요?]       [있다고 해도 몇 명 되지 않소이다.]       비파공주는 냉랭히 입을 열었다.       [원래 몇 사람은 남아있었군요. 나는 모두 죽었는가 하고  생각     했는데.]       유연비는 안색이 변하더니 쉰 소리로 더듬거렸다.       [당신......]       비파공주는 그의 말을 가로채며 냉소했다.       [흥! 과거 화산칠검(華山七劍)이 강호를 종횡할 때 얼마나 위세     등등했나요?  강호에서 화산파(華山派)라는 세 글자만 들어도  누     구나 삼푼 정도는 뒷걸음질쳤지요. 나같이 무지한 백성도  화산검     파의 풍채를 오래 전부터 흠모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       그녀는 머리를 가로젓더니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강호에서는 '화산파'라는 이름조차 거의 잊어  버     렸고, 화산제자가 살아있다 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