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六 章. 타승(打勝), 관현에 이는 바람
( 一 )
타다다닥...!
복면인의 손 놀림은 무척 빨랐다.
일 수에 십이 변을 일으키며 전신 혈도를 가격했다.
"혈도는 풀어 주었다. 하지만 혈맥을 원활하게 하자면 잠시 동
안 운신할 수 없을 게다."
말을 마친 복면인은 등을 돌렸다.
"자, 잠깐! 왜 당자인의 목숨을 구해 줬소?"
단비하는 다급하계 복면인을 저지했다. 이 복면인은 두 번 다
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를 죽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군."
의외로 복면인은 단비하의 말에 대꾸를 해줬다. 비록 등을 돌
리고 있는 상태였지만.
"당신이 나서지만 않았더라면."
"그런가? 그런데 네 목소리에는 분노가 스며 있지 않아. 내가
밉지 않나? 네 목적을 방해했는데 말야."
"이미 지나간 일이오. 나는 지금 여기서 굳어진 혈맥이 풀리기
를 기다리고 있고, 당자인은 종적을 감췄을 테니까. 내가 궁금
한 것은 당신의 정체. 무엇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을 방해했소?"
'분노(忿怒)는 적(敵)으로 알라'
단비하가 마음속으로 되뇌고 있는 말. 마음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꾹 눌러 참는 인내, 그런 것들을 복면인이 알 까
닭이 없었다.
"알 필요 없다. 한 가지 명심할 점은...앞으로 당문 일에 나서
지 마라. 개죽음만 당할 뿐이야. 아까만 하더라도...조문덕이
라는 그친구...이 여자를 단번에 죽이고 자네까지 죽일 수 있
었어.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은 철부에 대한 공부는 높은데 행
동은 그다지 민첩하지 않았다는 거야."
"후후후! 조문덕이 갈 소저와 나를 죽일 수 있다고 했소? 천만
에 당시 조문덕은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소. 당신은 그
점을 알고 나타난 것 같은데?"
복면인은 고개를 돌렸다. 복면 사이로 쏟아지는 차가운 눈빛이
모골에 스며들었다. 이런 종류의 눈빛은...살기(殺氣)였다.
"똑바로 알아 두시오. 당자인은 같은 하늘에 머리를 둘 수 없
는 원수. 그를 죽이는 것은 내가 할 일이오. 다음에 다시 방해
한다면 용서하지 않겠소."
단비하는 무표정한 안색으로 복면인을 쏘아보며 말했다. 복면
인의 놀라운 신위를 목격하고도 전혀 기죽은 모습이 아니었다.
"네가...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얼마든지...내 눈앞에만 있다면."
"허허허! 명심하지. 절대 네 눈앞에 있으면 안 되겠군."
휘익!
복면인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공중으로 신형을 띄웠다.
일 다경이 지날 무렵, 갈홍아의 내력은 말끔히 회복되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단비하의 상세를 염려했다. 그에게
자꾸 끌리는 마음을 이해할수 없었지만 좋은 사람인 것만은 틀
림없었다.
"몸에 이상은 없어. 마혈을 짚힌 후유증일 뿐이야."
"그런데 아까는 무슨 말이야? 조문덕이 제 몸 하나 건사할 수
없었다니, 나는 철부를 피하기도 급급했는데..."
단비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자르르 저려 오는 손발을 주물렀
다. 혈맥이 정상으로 유통되면서 찾아오는 현삼이었다.
"조문덕은 당자인과 마찬가지로 독에 중독되었어. 발작 시기가
예상외로 늦게 나타났지만...조금만 더 버텄다면 조문덕이 먼
저 쓰러졌을 거야. 그래서 그쪽은 염려하지 않고 당자인을 죽
이려고 했지."
"너의 독술이..."
갈홍아는 말을 입 안에서 오물거렸다. 혹여 단비하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해서. 언제나 하독 즉시 쓰러지던 사람들.
복면인들이 그랬고 청성오수 중 일인이라는 무도심창이 그랬고
당자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조문덕만은...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후후후! 네 말뜻 알겠어? 조문덕에제 살포한 독은은 사심독이
야. 그놈은 멧돼지 같아서 자신이 중독된 줄 알면 선불 맞은
것처럼 달려들테니까, 그러면 너와 나는 끝장이었지."
갈홍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내뱉는 단비하를 보면서 입
을 쩍 벌렸다. 사심독은 조모의 독이니 만치 그 성능이나 하독
방법을 잘안다, 하지만 할머니조차도 발작 시기를 조정할 수는
없다.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발작을 유도해 내려면 꼭 그만큼
의 독분을 살포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단비하는 천재란 말인가?
"그런데...그 많은 독 중에서 왜 하필이면 사심단이나 섬백단
같이 독성이 약한 독을 쓰는 거야? 다른 절독들도 많은데
..."
"가장 만들기 편하니까. 약재도 구하기 쉽고...근거리 접전에
서 독을 하독하는 데는 절독이 필요없어. 청성에 와서야 깨달
은 거지. 복면인들과의 싸움이 많은 도움을 줬어. 후후후! 어
떤 독이든 치사량이 있거든 그만큼만 살포하면 돼."
"피이! 말은 쉽지."
갈홍아는 말을 나직이 흘렸다.
이 순간 이경화가 부럽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이유가 무엇일
까? 밝은 달빛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든 단비하의 옆얼굴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전에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조문덕...그는 나와 체질이 비슷해. 아니 나보다 더 강한 체
질이야. 나야 어려서부터 당문의 여독에 길들여진 몸이니 내성
이 강하지만 조문덕은그런 것도 없이 사심독을 견녀 냈어. 무
슨 말인 줄 알아? 내가 예측했던 시간보다 더 오걔 버텼다는
말이야. 그건 내공과는 무관해. 기본적인 체력이지, 내공을 운
기하여 배출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거든...내력으로 독기를 묶
어 둘 수 있을 정도라고는 보기 어렵고..."
단비하의 말이 무심결에 들려 왔다. 그저 고개를 끄덕여 동조
의 뜻을 전달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녀는 자신과 이경화를 견주어 보고
있었다.
'나는 복수에 눈이 먼 원귀. 이경화는 지순한 사랑을 보이는
여자.'
사랑을 원하는 사람들은 이경화를 택할 것이다.
'나는 더렵혀진 몸, 이경화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 침을 삼킨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껴안으
려고 든다. 하지만 그 다음은 전부 당철휘와 같지 않을까? 하
지만 이경화의 용모는 특이한 점이 없다. 선뜻 달려들지도 않
지만 쉽게 멀어지지도 않는다. 나의 매력이 몸에 있다면 이경
화의 매력은 마음씨...'
얼굴 생김새나 몸매로는 얼마든지 자신이 있는 여자. 하지만
한없이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당철휘라면 서슴없이 나를 택하겠지만 단비하라면...그는 과
연 누구를 택할까?'
다시 한 번 단비하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무산을 떠나온 후로 그는 내내 말끝을 잘라먹었다. 그렇다고
동생대하듯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편한 친구처럼 스스럼없
이 대해 주었다. 북풍한설에 얼어붙은 마음이 이만큼 풀린 것
도 그의 영향 때문이었다.
갈홍아는 단비하를 유혹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말 자신의 몸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일까? 지순한 사랑
을 원하는 사람도 아닌 것 같았다. 이경화가 그렇게 열렬히 사
모의 정을 나타내는데 무심했던 것을 보면...사내는 모두 짐
승. 육욕이 없을 리는 없을 텐데.
"저...나 말야..."
그러나 갈홍아는 나머지 말을 마음깊이 삼켜 버렸다.
자신의 말에 관심을 보이며 고개를 돌리는 단비하 그의 맑은
눈을 보는 순간 유치한 발상 자체를 후회했다. 그의 눈에는 어
느 구석에도 욕념이 보이지 않았다. 친한 친구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이것이 틀려. 당철휘와 단비하는...'
지금 만약 옛날로 다시 돌아가 사람을 선택하라면 멍청한 단비
하를 선택할 텐데. 잠시 미장부의 얼굴에 현혹되어 천추의 한
을 남긴 자신이 새삼 원망스러웠다.
"복면인이 누군 것 같아?"
황급히 말꼬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청성파 사람이겠지. 그 정도의 무공이면 당문 십절을 능가했
어. 모모는 물론 사망산검까지도...아마 청성오수 중 일인일
거야."
"뭐? 청성오수! 그사람들은 호의적이었잖아?"
"하하하! 나는 제갈문과 청성이 연계된 것도 몰랐어. 친형이
삼절진인이란 것은 더 더욱 몰랐고..."
"하지만 무도심창이 너를 찾아왔잖아?"
"그래서 알았어. 나는 단지 제갈문에게 당자인의 목적올 듣고
청성으로 달려왔을 뿐이야."
"그렇구나. 이제는 어떻게 할 거야? 청성이 방해한다면 쉽게
죽이지 못할 텐데."
"후후후! 아까 말했잖아. 누구든지 내 앞에 있다면 자신있어.
일 장만 떨어져 있다면...시진으로 들어가자. 분명히 청성파
도장들이 당문을 감시하고 있을 거야. 그곳만 찾으면 방법이
생겨. 너도 준비해야 될걸? 당철휘도 그곳에 있을 테니까..."
"나는 걱정하지 마."
갈홍아는 내심을 숨기기 위해 일부로 눈을 부릅떴다.
* * *
조문덕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코앞에서 바락바락 악을 써대는
볼품없는 늙은이를 바라봤다. 더도덜도 말고 딱 한 대만 후려
갈기면 명줄을 놓쳐 버릴 그런 늙은이.
"셈을 해보시오. 은자를 얼마나 주면 되는지."
악을 쓸 기운도 없었고 으름장을 놓을 기분도 아니었다. 주루
주인 허유라 이름을 밝힌 늙은이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썼다.
"아, 사람들이 양심이 있어야지. 나는 뭐 땅 파먹고 사나? 장
사 밑천을 그렇게 부숴 놨으면 변상을 해주고 가야 할 게 아
냐? 그냥 꽁무니 빼면 못 찾을줄 알았어? 순 도둑놈들 같으니
라고..."
서로 언쟁을 벌일 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종루(鍾樓)에서 이경
(二景)을 알리는 종 소리가 울렸으니 제법 밤이 깊었다.
비루먹은 늙은이에게 당문도들이 묵고 있는 객사에 불쑥 뛰어
들 배짱이 있을 리 없었다. 아니 백주대낮이라 할지라도 무인
들에게 파손된 기물을 변상하라는 말은 감히 하지 못하는 세
태, 하물며 야심한 시간에...문가에 어슬렁거리는 청성 도장들
의 농간이란 것은 불문가지였다.
"셈을..."
"아, 이 도둑놈들아! 우선 잘못했다고 사과부터 해야 될 거 아
냐? 그래 돈 많다 이거지? 얼마줄래? 나팔자 좀 펴보자."
허유는 악을 써대면서도 연신 문가를 힐끔거렸다. 가까이에서
보니 거한은 커도 너무 컸다. 굳은살이 가득 박힌 손바닥은 족
히 머리통만한 게 한 대 맞으면 즉사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아무 연관이 없을때는 그냥 저렇게 큰놈도 있구나 했는데...
"조용히 해라. 한마디만 더 떠들면 입을 확 찢어 버릴 테니
까."
푸악거리를 듣다 못한 조문덕은 기어이 고리눈을 치켜 떴다.
"아, 알았..."
허유는 기가 질려 소변을 찔끔거렸다.
"변상은 해준다. 값을 말해 봐?"
"으, 은자 이십 냥..."
차마 입 밖으로 내뱉기 싫은 말이었다. 그까짓 탁자와 의자 몇
개 부서진 값은 받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청성산을 발판으
로 생계를 유지하는 몸이 청성 도장들의 눈밖에 난다면...그때
는 차라리 다른 고장으로 이사가는 편이 나으리라.
"흐흐흐...다시 말해 봐 얼마라고?"
투박한 철부가 이렇게 흉악스럽게 느껴지다니 사실 자신이 말
했지만 너무 어처구니없는 금액이었다. 다 합쳐도 은자 반 냥
도 안 되는 기물 값을 이십 냥이나 달라고 했으니, 하지만 여
기 온 목적은 은자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잖은가. 자신은 도화
선에 불만 지펴 놓고 싸움은 청성이 알아서 할 테니 상관없었
다.
허유는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뱃심좋게 폭언을 내뺕었다.
"흥!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성도에서는 무지막지하게 힘으
로 밀어붙여도 되는가 보지? 은자 이 십냥이라고 했다. 왜?
귀가 먹었냐? 다시 한번 말해 줄까? 은자...헉!"
겁없이 나불거리던 허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일어서는 거한의
기세에 눌려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이 정도 거리를 둔다
면 안심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는 무인들이 일 장 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선다는 사실을 몰랐다.
"흐흐흐...! 은자 이십 냥이라..."
거한은 음흉스런 옷음을 터뜨리며 손에 철부를 움켜잡았다.
"허억! 사, 사람 살려!"
허유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주르록 싸버린 소변이
바지를 적시며 흘러 내렸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
었다. 아무리 청성이 고맙고 혹은 무서울지라도 우선 목숨부터
살리고 볼 일이었다.
"초문덕 물러서라!"
젊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을때 허유는 지옥문턱에서 빠져
나온 기분을 절감했다. 다른 건 몰라도 거한의 철부가 얼마나
위력적이고 무서운가는 주루에서 봤던 터, 조금만 늦었더라도
머리통이 잘 익은 수박처럼 갈라질 뻔했다.
'개새끼들...'
문가에서 서성이는 청성 도인들에게 내뱉은 욕지거리였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극히 태연하게 어슬렁거
렸다. 이 순간만은 아무리 정답게 지냈던 청성 도인들일지라도
오만 정이 떨어졌다.
"은자 이십 냥이라고 했나?"
낭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주루에서 보았던 곱상한 얼굴의 주
인공이었다. 어쩐지...거한이 꿈쩍못하는 걸로 보아 그의 상전
이 틀림없다는 판단을내렸다.
"그, 그정도면 충분..."
지금 심정을 무슨 말로 표현하랴? 은자 이십 냥이 아니라 한
냥만 준다해도 얼싸 좋다고 어깨춤을 추면서 사라질 판국이었
다.
"조문덕 은자를 내줘라."
곱살한 청년은 의외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순순히 받아들였
다. 그런데,
"은자 이십 냥은 없습니다. 주공이 저에게 열 냥을 하사했으니
남은 것은 열일곱 냥 뿐이오."
거한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반면에 청년의 얼굴은 냉막
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서로 한동안 말없이 눈싸움을 지속했
다. 험악해진 분위기...엄동설한이라 할지라도 지금보다는 따
뜻할 것 같았다.
"할수없지. 지금 열일곱 냥밖에 없다는데, 그거면 되겠소?"
되고 안 될 게 있나? 허유는 급히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조...문덕 내가 하는 말을 들었을 텐데?"
거한은 망설이지 않고 족히 한 냥은 나갈 것 같은 말굽은 한
뭉치를 내던졌다.
"가지고 꺼져라."
조문덕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허유는 벌써 말굽은을 집
어 들고 달음질치고 있었으니까. 그는 주루에 돌아가 말굽은을
세는 순간 열일곱 개가 아니라 스물일곱 개라는 데 놀랄 것이
다. 그리고 횡재했다고 기뻐하겠지.
등을 돌려 계단을 밟으려던 당자인은 신형을 우뚝 세웠다. 그
의 전신이 미비하게 떨려 내심의 격분을 말해 주었다.
"주공 돌아가겠습니다."
느닷없이 들려 온 말, 예측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적들이 사
방을 에워싼 시점에서...당자인은심한 배반감에 치를떨었다.
"이유가 뭔가?"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조문덕은 당자인의 냉랭한
음성에서 서로간의 인연이 끝났음을 절감했다.
'여우 같은 년...그년 때문이야.'
한연지, 처음보는 순간부터 기분이 나쁘더니만...
"아내 얼굴을 본 지 오래됐습니다. 소파산은 험한 지형이라 잘
들 있는지..."
"그런가....그러면 떠나는 것도 좋겠지."
당자인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주공, 안녕히..."
조문덕은 당자인의 객방을 향해 재배(再拜)했다. 살아생전 언
제 또 만날 수 있을지, 소파산으로 들어가면 잠시 동안의 무림
생활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하며 살아 가리라. 영원히...영
원히 무림에는 나오지 않으리라. 자식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몸에 배인 무공을 전수할 대상이 없으니...
볼품없는...초부(樵夫)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철부지만, 몇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도끼를 끌러 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주공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무림을 떠난다는 사실만이
라도 알려 주고 싶었다. 떨치고 싶었던 영웅의 기개, 못다 한
미련의 종결을 다짐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남들이 단잠에 빠진 야반 삼경 조문덕은 객사를 벗어나 정처없
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의 붉게 충혈된 눈에서는 눈물이 소
리없이 흘러내렸다.
* * *
삼절 진인은 장문이 내미는 전서를 받아 읽으며 안면근육을 꿈
틀거렸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예상치 못한 변화의 조짐
이 나타날 때 보이는 버릇이었다.
< 급보(急報).
부공(斧功)의 고수 조문덕이 관현을 벗어나 문천(汶川)으로 향
했음. 뒤를 추종하는 자들은 없음. 간편한 행장차림으로 멀
리 갈 것 같지는 않음. >
중요한 보고였다. 당문도들이 두더지처럼 객사에 웅크리고 있
는 한 치기가 힘들었는데 정말 잘된 일이었다. 우선 이 속에
무슨 음모가 없는지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사제, 어찌 생각하시오?"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이상합니다. 듣기로 한연지라는 여자의
지략이 뛰어나다는데 이 정도를 몰라서아..."
"함정이란 이야기요?"
"함정이란 말은 치명적인 상처를 가할 수 있을 경우에나 해당
되는 말입니다. 청성 부근에서 감히 함정을 팔 수는 없습니다.
쳐도 좋을겁니다. 그러나...."
"왜 그러시오? 걸리는 일이라도 있소?"
삼절 진인은 하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와 선풍도골(仙風道骨)
의 인상을 풍겨 내는 장문을 쳐다보며 남 모를 한숨을 내쉬었
다. 언제나 의견을 묻는 장문, 이쪽이 좋다하면 이쪽으로, 저
쪽이 좋다하면 저쪽으로...어찌 보면 자기 생각이나 주장은 하
나도 없는무골호인이었다.
언제나 장문을 이기며 살아왔다.
대사형(大師兄)이면 별것인가? 무공이 뛰어나면 선택받는 거
지. 침식을 잊고 무공 수련에 몰두했다. 남들이 편히 잠자는
야심한 시각에도 검 한자루에 인생의 모든것을 걸고 피땀을 쏟
아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자 대사형은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저
멀리 떨어졌다.
무공은 오성(悟性)과 근골(根骨)과 실전 감각, 그리고 인내와
믿음을 고루 갖춰야 대성한다.
오성은 따를 사람이 없어 청성 무공의 요체를 파악하는 데 가
장 빨랐다. 아무리 난해한 무공일지라도 손에 잡히기만 하면
한지에 먹물 스며들 듯 빨아들였다. 근골에도 자신있었고 실전
감각을 익히기 위해 목숨을 내건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인
내와 믿음이야...
그러나 그렇게 바라던 청성 장문은 대사형이 차지했다.
왜? 왜? 왜...?
무공을 버리고 글과 그림과 다도에 몰두하기 어언 삼십 년...
'세월이 많이 흘렀군.'
이제야 전대 장문 영송(永松) 진인(眞人)이 대사형을 장문에
앉힌 이유를 어렴풋이 알았다. 세월의 연륜은 사람 보는 눈을
확실히 넓혀주었다. 전에 보지 못했던 장문의 매력이 보이니.
장문은 사람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알았다. 그런 점은 능력
만 약간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문제는 조화...어
느 한 군데 빠짐이 없도록 균형을 맞추는 일.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중용(中庸)의 도.
흔자서 할 수 없는 일은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렸다. 장문이라고
교만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았다. 그 힘은 무
엇일까? 충직함이었다.
언제나 영송 사부가 일러준 말을 마음에 새기고 자문자답(自問
自答)했다. 자신만 들을수 있는 말...장문의 마음에 사부는 타
개하지 않았다. 사부가 가라면 가고, 물러서라면 물러서고, 돌
아가라면 돌아갔다.
역지사지(易之思之), 사부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지금도 장문은 사부를 떠올리고 있을 게다.
확실히 청성은 굳건한 반석을 토대로 무섭게 번창했다.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보였는데, 답답해 보였는데, 새삼 현실
을 깨달으니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장문이었다면...?
오늘의 청성보다 더 나은 문파를 만들지 않았을까?
"사제! 허허허! 오늘은 사제답지 않게 왜 머뭇거리오?"
삼절 진인은 상념을 접었다.
"제가 그랬습니까?"
"응! 허허허..."
"죄송합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지요. 조문덕을 쳐서 발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도하려던 계획은 생이빨을 뽑는
것...그것보다는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단 이쪽도 준비할 게
있습니다."
삼절 진인은 자신의 계획을 나지막하게 설명했다.
"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당문이 비록 크게 세를 형성했지만 아직은 상대가 아니었다.
각종 암기와 절독...당문이 자랑하는 독술이나 무공은 조령신
공(鳥靈神功)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청운적하검법(靑雲赤霞劍
法), 칠십이로(七十二路) 파검식(破劍式), 대라산수(大羅散手)
등 청성의 신공절기를 감당하지 못했다.
사람은 위를 향해 달리는 존재. 청성을 목표삼아 일로 매진하
는 것은 당문뿐 아니라 중원 군소문파들의 숙명이었다. 그런
점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신경 쓰지도 않았다. 오로지 도(道)
와 무(武)에 매진할 따름.
간혹 지금처럼 오만 방자하게 대드는 무리들이 나타나기도 했
다. 설득으로 혹은 무력으로 다스렸다. 그 어떤 경우든 간에
다시는 청성을 넘볼수 없도록 따끔한 교훈을주었다.
당문도 마찬가지. 대든다면 징계하면 그만이다. 굳이 삼절 진
인이 말한 대로 제자를 상하게 하면서까지 애송이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사부 영송 진인이라면 어떤 결단을 내렸을까?
"아무래도 제자를 상하게 한다는 것이..."
"그 방법이 아니면 일양자를 움직이지 못합니다. 조문덕을 확
실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옥양 진인은 삼절 진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
게 사도(邪道)와 다름없는 방법을 제안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언제나 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타진한 후에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삼절 진인이
니까.
"치려면 빨리 쳐야합니다. 전서를 읽어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삼절 진인은 결단을 촉구했다.
호응정에서 회동을 끝내고 돌아온 후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날아온 전서는 삼절 진인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다.
< 당문. 한가주를 필두로 후위대 사십칠 명, 관현 남동쪽 진
입. >
< 당문. 만가주가 총책(總責). 만채실 사십칠 명 복익산(伏翼
山)에서 야영. >
< 당문. 전위대 칠십이 명. 관현 남쪽에서 발견. 종적을 놓쳤
음. >
< 당문. 풍가주,사가주를 필두로 오십여 명 청성 서남방 이십
오 리 지점에 모습을 드러냄. >
전서를 받고 한나절이 지났다.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지 않아도 청성산 입구에 도착하고도 남
을 거리였다. 그러나 그들 이백이십여 명은 조용히 숨죽이며
움직이지 않았다. 가장 강적은 전위대 칠십이 명, 그들은 하늘
로 솟은 듯, 땅으로 꺼진 듯, 흔적없이 사라졌다.
"관현에는 많은 당문도 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하지만 당자인
일행은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운집할 기회를 주지
않고 속전속결로 끝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질이 급하고 행동
이 민첩한 사람이 적격이죠."
"일양자(日陽子)! 흐흠! 이번 일은 삼절이 알아서 처리하시
게."
옥양 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아! 검끝에 기가 죽어 있어. 그런 썩은 검을 휘두르려면
일찌감치 때려치워."
면도같이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체격은 보통이지만 단단해 보였고 얼굴은 역삼각으로 하관이
빠르게 돌았다. 눈은 뱀눈으로 가늘고 길었으며 예리한 안광이
연신 쏟아졌다.
반골 기질이 대단히 강하고, 남에게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
하는 사람, 대체적으로 무공이 약하면 물러서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오히려 그런 점을 치졸하게 여겼다.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부딪쳤다.
일양 진인이라는 도명보다 적수광인(赤手狂人)이라는 무명으로
더 알려진 사람이기도 했다.
"청운(淸雲)! 이리 와!"
눈뜨자마자 들볶이기 시작한 청운은 급히 검을 거두고 한달음
에 다가섰다.
"잘 봐라! 검은 이렇게 휘두르는 거야."
일양 진인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칠십이
로 파검식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 흰구름과 어울리며
화폭처럼 아름다운 검공이었다.
"아!"
청운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탄성이 새어나왔다.
같은 검공인데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소림(小林)이 중(重)
을, 무당이 유(柔)를, 화산이 환(幻)을 중시한다면, 청성은 쾌
快)를 검결로 삼았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수없이 들어야하는소리였다.
쉬리릭! 쉬익! 쉬이익!
섬전처럼 노도처럼 쏟아지는 검의 빛살...
강보에 쌓인 채로 길가에 버려져 죽어도 일찍 죽었을 목숨이었
다. 그런 못난이를 거둬 준 것만도 고마운데 일양자는 청성의
놀라운 절학을 연마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정식으로 청성
문도가 된 것이다.
검을 잡은지 벌써 십육년이나 지난 일.
하지만 일양자의 기대는 덧없이 무너졌다.
아무리 검공을 갈고 닦아도 진보가 없었다.
늦게 들어온 사제들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사제들의 눈은
존경에서 경멸로 바뀌어갔다. 그럴수록 일양자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은 한이 없었다.
'저런 검법을 전개할수만 있다면...한번만이라도...'
그러던 한 순간이었다.
"아악!"
청운은 왼쪽귀가 불로 지진듯 화끈거림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
다.
"이, 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뜨뜻한 붉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귀가 잘라졌으며 바
로 존경해 마지않던 일양 진인의 검공에 의한 것임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귀를 붕대로 감고 침상에 누워 있던 청운은 삼절 진인의 방문
을 받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문인들의 무공 수련은 물론 대소
사에 관한 일에도 전혀 관여를 않으며 고고한 학처럼 살아가는
삼절 사숙이, 이렇게 누추한 곳을...
"상처는 어떠냐?"
"견딜 만 합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숙."
"견딜 만 하다니, 일양자가 손에 사정을 둔 모양이구나. 휴우!
하기는 그처럼 강직한 인물도 없으니까."
"사숙 무슨 말씀이신지..."
"부상을 당했는데 안됐다만 휴양은 나중에 해야겠구나. 당문도
들이 관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을 터... 네
가수고 좀 해야겠다."
"네에? 자세히 좀..."
잠시 후 청운은 삼절 진인 앞에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못난 저를 이렇게 믿어 주시니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허허허! 누가 너더러 죽으라고 했느냐? 너는 그저 가만있으면
된다. 가만있으면..."
* * *
조문덕의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강호를 질타할 생각에 파묻혔을 때는 전혀 생각나지 않던 아내
의 얼굴이 달덩이보다 더욱 환하게 떠올랐다.
남들보다 배는 큰 덩치를 가진 자신과 유약하기만 했던 아내,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지만 부부 금실만은 더없이 좋았다.
남달리 부부간의 정이 깊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옆에 끼고
살았던 아내. 언제나 몸이 약해 사람 다음을 아프게 했었지.
'여보 내가 돌아가고 있어. 여보...!'
아무리 머리를 쥐어박아 봐도 미련곰퉁이 같은 짓이었다. 야망
이 뭐라고, 강호가 뭐라고 그 착한 아내를 산중에 팽개치고 돌
아섰던가.
노모(老母)에 대한 걱정도 뇌리를 스쳐 갔다.
워낙 연세가 많은 분이라 언제 돌아가실지 알 수 없던 양반이
었다. 그럴수록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그렇게 누누이
말했는데도 하루 종일 움직이는 거리라고는 두 평 남짓한 방안
구석을 벗어나지 않았다. 기억력도 점점 쇠퇴하여 방금 말했는
데도 다시 물어 오곤 했다.
가족들...세상 천지에서 벌거벗고 망가진 몸을 따뜻이 어루만
져줄 가족들에게 돌아간다 생각하니 발걸음이 급해졌다. 천지
를 떨쳐 울릴 쇄석부법도 사망산검과 일전을 벌이며 얻었던 자
신감도 손바닥처럼 작아 보이던 무림도 일장춘몽...미망(迷妄)
에 불과했다.
'저기서 좀 쉬었다가...'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사람인 이상 쉬어야했다. 관현에서부터
소파산까지는 말을 타고 달려도 보름은 걸릴 거리, 한달음에
달려갈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휴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옷소매로 쓱 문질러 닦았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관도에서 신법을 전개할 수는 없었다. 빨
리는 가야겠는데 말 살 은자마저 없으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낮에 잠자고 밤길을 재촉하는 것이 좋았다. 마음껏 신법을 전
개할수 있으니까.
조문덕은 아침 이슬이 촉촉이 젖은 풀잎 위에 주저앉았다.
"여기서 한잠자고 오후에...응? 청성?"
청성 도인이었다. 아무리 당자인의 결을 떠났다고 하지만 촉각
이 곤두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관현에 온 목적이 바로 청
성파 중에서도 핵심 인물인 삼절 진인을죽이기 위함이 아니었
던가.
아직은 길을 나서기 이른 새벽녘,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도를 지닌 청성 도인이 무슨 일로 이런 새벽에 길을 나서는
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휴우! 그만두자. 무림과는 연을 끊었으니...'
조문덕은 풀밭 위에 길게 드러누웠다. 그런데,
"네가 조문덕인가?"
강직하면서도 싸늘한 말투였다.
조문덕은 실눈을 뜨고 청성 도인을 바라봤다.
'주공...'
당자인 생각이 떠올랐다. 눈앞에 서 있는 청성 도인은 당자인
과 비슷한 기도를 지녔다. 수하를 소중히 여기고 손익에 관계
없이 약자편을 들어 줄 줄 아는 강직하고 의협적인 성격의 소
유자.
다른점이 있다면 당자인이 권력에 집착하는 성격인 반면 이 도
인은 그런 것에 초연할 것 같았다.
원래 타인에게 의지하거나 아부하는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 감
에 따라 교활해지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이 도인은 오십이 훨
씬 넘었을것 같은데도 강직해 보였다.
"조문덕이라면 일어서라. 누워 있는 자를 죽이기는 싫다."
그 말에 조문덕은 실눈마저 감아버렸다.
"돌아가 주시오. 나는 무림을 떠났소."
"무림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오. 전처럼 사냥이나 하면서 살아 갈
생각이오. 조용히 가게 해주시오."
"으음! 그래서 혼자 길을 나섰군. 하지만 안 되겠네. 네 목이
필요하니까."
"무림을 떠났다고 하지 않았소?"
"허허허! 무림에 몸을 담는 것은 자유지만 빼는 것은 어렵다
네. 강호란 은원이 분명한 듯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가 더 많
다네. 단 하루를 살아도 무림인은 무림인, 무림에 몸담는 순간
운명의 쇠사슬은 전신을 칭칭 감아버리지."
도인의 말투는 약간 부드러워졌다.
딱히 할말이 없었다. 도장의 말은 옳았다. 부법을 배울 때만
해도 응지를 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림에 나와 한 일이라
고는 사람 몉명을 죽인 것뿐 그 흔한 무명조차 얻지 못했다.
그것도 업보라고 죽이러 왔는가.
"일어서지 않으면 지금 목을 베겠네."
스르릉...!
소름끼치는 검명이 들려 왔다. 청성파의 검은 다른파의 검보다
검신이 좁고 길었다. 손을 보호하는 호수 또한 절반쯤은 작았
다. 그래서 소리가 날카로울 뿐 아니라 검기도 거칠어 보였다.
조문덕은 눈을 뜨지 않았다. 하루 전만 같았어도 이런 때려
죽일하고 벌떡 일어서 투박한 도끼를 휘둘러 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저항
하지 않으면 베지 못하는 것이 정도 인물들의 특색, 잠시의 모
욕쯤은 참아낼 자신이 있었다.
"이십여 년 전 한 아이를 주웠네. 그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웠
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청성에 입문시켰네. 그런데 무공에
어찌나 자질이 없던지...늘 가슴 아파했었네. 어제 그 아이의
귀를 잘랐네, 보답으로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칠십이로 파검
식을 전력으로 펼쳐 보인 것뿐...이제 알겠나? 일어서서 검을
맞대야 하는 이유를?"
일양자는 말을 하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만약 청운의 귀를 자
르지만 않았어도 검을 집어넣고 돌아가고 싶었다. 조문덕은 진
실로 무림을 떠나는 모습이었다. 새삼스럽게 삼절 사형이 원망
스러웠다. 자세히 알아보기만 했어도 청운의 귀를 자를 필요는
없었는데...
삼절 진인의 계략은 조문덕이 아니라 일양자를 겨냥했다. 그것
이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조문덕의 신형은 미비하게 떨렸다. 청성은 이미 모든 사실을
직감하고 대비를 갖췄음이 틀림없었다. 자식 같은 제자의 귀를
자를 정도라면 대문파 그것도 정도 문파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처절한 준비였다.
'주공 잠자는 호랑이의 수염을 건드렸소. 어찌 감당하려오.'
조문덕은 신형을 일으켰다. 주공에 대한 마지막 보답으로 생각
하고 청성 도인을 죽일 심산이었다.
끝이 뾰족하고 무게가 적당한 돌을 주웠다 단단한 나뭇가지를
꺾어 다듬었다. 옷을 찢어 칭칭 동여 묶었다. 돌도끼, 삼황오
제(三皇五帝) 시절에도 사용하지 않았을 돌도끼를 만들었다.
하지만 쇄석부법을 전개하는 데는 하등 지장이 없었다.
"그걸로 되겠나?"
"무인이 병장기의 날카로움에 의지한다면 죽기 쉽지."
"옳은 말..."
"그럼!"
조문덕의 신형은 비조처럼 날아올랐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는 쇄석부법의 각종 초식들, 언센가 있을
사망산검과의 결전에 대비해 생각해 두었던 절초를 유감없이
펼쳐 냈다.
쉐에엑...!
돌도끼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마치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처
럼 날카로웠다. 전력이 깃들여 만근 거암처럼 묵직한 중압감을
쏟아 냈다.
맞받지 못할 게다. 분명히 물러서겠지, 사망산검이 그랬던 것
처럼 하지만 어림없다. 직부파석(直斧破石)에 이어 횡소천군
(橫掃千軍)으로 후려치면 피할 곳이 없다. 그렇게 만들려면 틈
을 없애야 한다. 지부파석과 횡소천군의 틈을. 그 점은 부단히
연마했다.
파앗!
날카로운 소리...순간 조문덕의 목젖이 화끈거리며 황소 같던
기력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여보...'
이렇게 빠를 수가...세상에 이런 검법이...사망산검보다 더욱
빠른 검법. 경물이 암흑속에 침몰하고 묵중한 몸이 거세게 땅
과 부딪치면서 떠오른 광경은 아내의 눈물 젖은 모습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
다녀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재밌게 잘 보았습니다
다음이 기다려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