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그 본질적 뜻은 인종, 민족, 문화, 종교 따위를 초월해서 인간성에 대
한 존중과 인간다운 삶의 실현이다.
그 인식론적 뜻은 우리는 모두 주체적 인간, 즉 자신의 생각과 말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중국철학의 전 역사를 단 한마디로 특징지우면 휴머니즘이다. 이 휴머니즘은, 서양의 휴머니즘처럼 단순히 초인적 힘을 거부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천인합일(the unity of man and Heaven)을 믿는 것(profess)이다.” (W. Chan, trans. & compile, 1963, p. 3)
<중용>의 맨 첫 마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명제는 유학 최대의 형이상학적 전제로서 사람은 누구나 천(天) — 생명과 도덕의 형이상학적 근원자 — 으로부터 부여된 본성을 자신의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W. Tu, 1979, p. 7). 따라서, 그 명제는 우리 모두가 본성적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적 인간임을 선포한 것이다.
이 선포와 동시에 공은 인간에게 넘어온다: “인간이 능히 도를 넓힌다. 도가 인간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논어> 15: 28). 사람이 하늘과 땅과 더불어 삼재(三才)를 이루어 영위하는 천인합일적 삶은, 어떤 초인간적 존재에 의지해서 또는 무슨 현실초탈적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주체적 노력에 의해 달성된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우리들 각자의 주체적 노력에 의해 주희가 <인설(仁說)>에서 설파했던 바 ‘천으로부터 부여된 사람 마음의 본성 즉 인’이라는 전덕(全德)이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4가지 도덕적 품성 곧 사덕(四德)으로 실천되는 삶이 바로 천인합일적 삶이라는 것, 그리고 이 천인합일적 삶이 바로 상기 형이상학적 전제를 인간사회에 실제로 구현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에 맹자는 우리 모두가 본성적으로 하늘의 시민 즉 천민(天民)이며 동시에 인간사회의 시민이라고 했다. 또한 후대의 장재(張載)는 그 유명한 서명(西銘)에서 — 장재가 초학자를 위한 길잡이로 쓴 <정명(正名)>의 제7장[그가 공부하고 강의하던 방의 서편 벽에 새겨져 있어서 서명(Western Inscription)이라고 이름 되었다] — 참 유학인은 이승(this-worldliness)과 저승(other-worldliness)을 동시에 영위하고 죽음이 오면 편히 쉰다고 했다.
천인합일적 삶을 살았음에도, 다시 말해, 주체적 노력으로써 상기 사덕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음에도 또한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때로는 어려움과 손해를 감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오면 편히 쉰다’. 그럼 죽으면 그 뿐이란 말인가? 그렇다, 그 뿐이다. 살아서 이승과 저승을 동시에 영위했는데 — 대승불교로 말하면 이승과 저승이 따로 없는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의 삶을 영위했는데 — 죽는다고 해서 다시 저승이 따로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공자의 인(仁)-도덕우주관(이하 도덕우주관)에 기반된 유학휴머니즘(Confucian humanism)의 진면목이다. 요컨대, 유학에 있어 휴머니즘은 천인합일적 휴머니즘(anthropo-cosmic humanism), 달리 말해, 인에 기반한 도덕휴머니즘(moral humanism)이다.
도덕우주관인 공자에 의하면, 세상은 순자(荀子)가 말하는:
순자가 볼 때 결코 인간이 선한 것도 아니고, 천이 생명과 도덕의 형이상학적 근원자도 아니다. 그는 앞서간 공맹에 반대해서 천은 현실에서 자연세계이고, 천명은 객관적 자연법칙이라고 했다. 자연법칙으로서의 천명은 운동주기가 있을 뿐, 선한 왕을 세우고 혹은 나쁜 왕을 폐하는 형이상의 어떤 절대존재 혹은 절대원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해 자연법칙으로서의 천명을 이해하고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천을 위대하다고 간주해서 칭송하는 대신에
왜 그것을 하나의 사물로 돌보고, 규율하지 않느냐?
천에 복종해서 노래 불러 칭송하는 대신에
왜 천명을 컨트롤해서, 사용하지 않느냐?
계절들을 바라만 보고 기다리는 대신에
왜 그것들에 대응해서, 활용하지 않느냐? (W. Chan, trans. & compile, 1963, 앞의 책, p. 122)
또는 순자와 같은 맥락인 오늘날의 과학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히 자연과학적 원리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인이라는 도덕의 원리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져야 할 최고의 목적, 사람이 추구해야 할 궁극의 가치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 즉 천명지성(天命之性)인 인을 실제로 구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논어>에 보면 공자가 굳게 믿는 생명과 도덕의 형이상학적 근원자 천은 사후의 징벌 또는 보상을 전혀 약속하지 않는다. 상기 사덕을 실천함으로써 인을 인간사회에 구현하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해서 어떤 보상이나 보장된 성공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인이라는 도덕은 ‘천명으로서의 도덕’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반드시 추구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공자의 가르침 속에 함의된 가장 근본적 메시지이다. 그 어떤 초인간적 존재나 힘, 그리고 이것에 의한 징벌이나 보상에 의존하지 않는 그야말로 백퍼센트 주체적 휴머니즘인 유학휴머니즘으로 인해 유가는 고대 중국의 그 어떤 학파와도 구별된다. (D. C. Lau, trans., 1983, pp. x~xi)
법가에 의해 강성해진 진(秦)이 중국을 통일함으로써 공자 이후 약 3백 년에 걸친 제가諸家들 간의 각축은 법가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법가는 묵가와 내부적으로 손잡고 진시황을 움직여 기원전 212년 유가를 절멸하고자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원전 138년 공자의 천사상과 유학휴머니즘에 기반한 유가가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여 한(漢)의 국가이념이 됨으로써 제자백가 중에서 “최후의 영원한 승자”가 된다. (A. C. Graham, 1989, p. 31)
유학휴머니즘에서 볼 때, 그 어떤 초인간적 존재나 힘에 의해 천당이나 극락에 가기 위해서, 또는 지옥이나 연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서 선행을 하고 나쁜 일을 삼가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휴머니즘의 주체적 삶일 수 없다.
칸트의 윤리체계는 신, 불멸의 영혼, 자유의지라는 3가지 실천가정으로 떠받쳐져 있다: 자유의지에 의한 — 즉, 백퍼센트 주체적인 — 도덕의 실천은 불멸인 우리의 영혼이 궁극의 세계 곧 ‘천국’에서 영생한다는 것을 신이 보장한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신앙을 전제로 하는 철학적 윤리체계를 세운 칸트는, 세속의 도덕을 종교적 차원의 절대도덕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서양문명 최고의 도덕율을 세웠다고 서양철학사에서 드높이 받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유학휴머니즘이 내면화된 참 유학인에서 볼 때, 서양문명 최고의 도덕율이 내면화된 서양인의 삶은 근본에 있어서 주체적 삶과 거리가 멀다. 당연히 참 유학인에게는 자신의 도덕적 행위에 대한 어떤 보답, 보장 따위의 생각이 없다. 그는 천으로부터 부여된 자신의 도덕적 본성 곧 인의 길을 온전히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사람이 진정 사람 답게 사는 것이다. 만약 개가 사람다운 삶을 살았다면 특별한 상찬賞讚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았을 뿐인데 죽음 이후에 그 삶에 대해 무슨 상찬을 바란단 말인가.
유학휴머니즘이 내면화된 유학인의 삶은 서양문명 최고의 도덕율이 내면화된 서양인의 삶과 차원이 다르다. 참 유학인의 삶은 상기 그 ‘동시적’ 삶이라는 전혀 새로운 삶의 의미(significance)가 구체적으로 구현된 삶이기 때문이다. 그 삶의 의미는 중용(中庸)의 용, 즉 형이하의 평범/일상의 삶 자체가 형이상의 인이 구현된 삶이라는 것이다. 대승의 선(禪)불교 역시 일상에서 ‘장작 패고, 물 깃는 데에 도가 있다’는 전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역점적으로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플라토니즘과, 플라토니즘과 결부된 기독교에서처럼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해서 후자를 잡기 위해 전자를 놓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당시 유학자들은 전자를 위해 후자를 놓아야만 한다는 소승의 불교, 소승적 도교를 비판했다.
상기 장재의 기(氣)론에 의하면, 태허(太虛)는 동정취산(動靜聚散) 이전의 기이다.
이 기가 응축되어 만물이 된다. 이 만물은 흐트러져서 다시 태허가 된다.
이러한 기 운동 사이클은 불가피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참 유학인은 이것을 깨달은 사람, 즉 생生이라고 해서 더 얻는 것도 없고 사死라고 해서 더 잃는 것도 없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사이클을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으며 육신의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이러한 깨달음이 가져다 주는 삶이 바로 인간사회의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하늘의 천민으로서 살다가 죽음이 오면, 그의 서명(西銘)에서처럼, 편히 쉬는 삶이다.
“중국철학의 전 역사를 단 한마디로 특징지우면 휴머니즘이다. 이 휴머니즘은, 서양의 휴머니즘처럼 단순히 초인적 힘을 거부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천인합일(the unity of man and Heaven)을 믿는 것(profess)이다.” (W. Chan, trans. & compile, 1963, p. 3)
<중용>의 맨 첫 마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명제는 유학 최대의 형이상학적 전제로서 사람은 누구나 천(天) — 생명과 도덕의 형이상학적 근원자 — 으로부터 부여된 본성을 자신의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W. Tu, 1979, p. 7). 따라서, 그 명제는 우리 모두가 본성적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적 인간임을 선포한 것이다.
이 선포와 동시에 공은 인간에게 넘어온다: “인간이 능히 도를 넓힌다. 도가 인간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논어> 15: 28). 사람이 하늘과 땅과 더불어 삼재(三才)를 이루어 영위하는 천인합일적 삶은, 어떤 초인간적 존재에 의지해서 또는 무슨 현실초탈적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주체적 노력에 의해 달성된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우리들 각자의 주체적 노력에 의해 주희가 <인설(仁說)>에서 설파했던 바 ‘천으로부터 부여된 사람 마음의 본성 즉 인’이라는 전덕(全德)이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4가지 도덕적 품성 곧 사덕(四德)으로 실천되는 삶이 바로 천인합일적 삶이라는 것, 그리고 이 천인합일적 삶이 바로 상기 형이상학적 전제를 인간사회에 실제로 구현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에 맹자는 우리 모두가 본성적으로 하늘의 시민 즉 천민(天民)이며 동시에 인간사회의 시민이라고 했다. 또한 후대의 장재(張載)는 그 유명한 서명(西銘)에서 — 장재가 초학자를 위한 길잡이로 쓴 <정명(正名)>의 제7장[그가 공부하고 강의하던 방의 서편 벽에 새겨져 있어서 서명(Western Inscription)이라고 이름 되었다] — 참 유학인은 이승(this-worldliness)과 저승(other-worldliness)을 동시에 영위하고 죽음이 오면 편히 쉰다고 했다.
천인합일적 삶을 살았음에도, 다시 말해, 주체적 노력으로써 상기 사덕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음에도 또한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때로는 어려움과 손해를 감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오면 편히 쉰다’. 그럼 죽으면 그 뿐이란 말인가? 그렇다, 그 뿐이다. 살아서 이승과 저승을 동시에 영위했는데 — 대승불교로 말하면 이승과 저승이 따로 없는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의 삶을 영위했는데 — 죽는다고 해서 다시 저승이 따로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공자의 인(仁)-도덕우주관(이하 도덕우주관)에 기반된 유학휴머니즘(Confucian humanism)의 진면목이다. 요컨대, 유학에 있어 휴머니즘은 천인합일적 휴머니즘(anthropo-cosmic humanism), 달리 말해, 인에 기반한 도덕휴머니즘(moral humanism)이다.
도덕우주관인 공자에 의하면, 세상은 순자(荀子)가 말하는:
순자가 볼 때 결코 인간이 선한 것도 아니고, 천이 생명과 도덕의 형이상학적 근원자도 아니다. 그는 앞서간 공맹에 반대해서 천은 현실에서 자연세계이고, 천명은 객관적 자연법칙이라고 했다. 자연법칙으로서의 천명은 운동주기가 있을 뿐, 선한 왕을 세우고 혹은 나쁜 왕을 폐하는 형이상의 어떤 절대존재 혹은 절대원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해 자연법칙으로서의 천명을 이해하고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천을 위대하다고 간주해서 칭송하는 대신에
왜 그것을 하나의 사물로 돌보고, 규율하지 않느냐?
천에 복종해서 노래 불러 칭송하는 대신에
왜 천명을 컨트롤해서, 사용하지 않느냐?
계절들을 바라만 보고 기다리는 대신에
왜 그것들에 대응해서, 활용하지 않느냐? (W. Chan, trans. & compile, 1963, 앞의 책, p. 122)
또는 순자와 같은 맥락인 오늘날의 과학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히 자연과학적 원리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인이라는 도덕의 원리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져야 할 최고의 목적, 사람이 추구해야 할 궁극의 가치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 즉 천명지성(天命之性)인 인을 실제로 구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논어>에 보면 공자가 굳게 믿는 생명과 도덕의 형이상학적 근원자 천은 사후의 징벌 또는 보상을 전혀 약속하지 않는다. 상기 사덕을 실천함으로써 인을 인간사회에 구현하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해서 어떤 보상이나 보장된 성공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인이라는 도덕은 ‘천명으로서의 도덕’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반드시 추구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공자의 가르침 속에 함의된 가장 근본적 메시지이다. 그 어떤 초인간적 존재나 힘, 그리고 이것에 의한 징벌이나 보상에 의존하지 않는 그야말로 백퍼센트 주체적 휴머니즘인 유학휴머니즘으로 인해 유가는 고대 중국의 그 어떤 학파와도 구별된다. (D. C. Lau, trans., 1983, pp. x~xi)
법가에 의해 강성해진 진(秦)이 중국을 통일함으로써 공자 이후 약 3백 년에 걸친 제가諸家들 간의 각축은 법가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법가는 묵가와 내부적으로 손잡고 진시황을 움직여 기원전 212년 유가를 절멸하고자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원전 138년 공자의 천사상과 유학휴머니즘에 기반한 유가가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여 한(漢)의 국가이념이 됨으로써 제자백가 중에서 “최후의 영원한 승자”가 된다. (A. C. Graham, 1989, p. 31)
유학휴머니즘에서 볼 때, 그 어떤 초인간적 존재나 힘에 의해 천당이나 극락에 가기 위해서, 또는 지옥이나 연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서 선행을 하고 나쁜 일을 삼가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휴머니즘의 주체적 삶일 수 없다.
칸트의 윤리체계는 신, 불멸의 영혼, 자유의지라는 3가지 실천가정으로 떠받쳐져 있다: 자유의지에 의한 — 즉, 백퍼센트 주체적인 — 도덕의 실천은 불멸인 우리의 영혼이 궁극의 세계 곧 ‘천국’에서 영생한다는 것을 신이 보장한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신앙을 전제로 하는 철학적 윤리체계를 세운 칸트는, 세속의 도덕을 종교적 차원의 절대도덕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서양문명 최고의 도덕율을 세웠다고 서양철학사에서 드높이 받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유학휴머니즘이 내면화된 참 유학인에서 볼 때, 서양문명 최고의 도덕율이 내면화된 서양인의 삶은 근본에 있어서 주체적 삶과 거리가 멀다. 당연히 참 유학인에게는 자신의 도덕적 행위에 대한 어떤 보답, 보장 따위의 생각이 없다. 그는 천으로부터 부여된 자신의 도덕적 본성 곧 인의 길을 온전히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사람이 진정 사람 답게 사는 것이다. 만약 개가 사람다운 삶을 살았다면 특별한 상찬賞讚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았을 뿐인데 죽음 이후에 그 삶에 대해 무슨 상찬을 바란단 말인가.
유학휴머니즘이 내면화된 유학인의 삶은 서양문명 최고의 도덕율이 내면화된 서양인의 삶과 차원이 다르다. 참 유학인의 삶은 상기 그 ‘동시적’ 삶이라는 전혀 새로운 삶의 의미(significance)가 구체적으로 구현된 삶이기 때문이다. 그 삶의 의미는 중용(中庸)의 용, 즉 형이하의 평범/일상의 삶 자체가 형이상의 인이 구현된 삶이라는 것이다. 대승의 선(禪)불교 역시 일상에서 ‘장작 패고, 물 깃는 데에 도가 있다’는 전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역점적으로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플라토니즘과, 플라토니즘과 결부된 기독교에서처럼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해서 후자를 잡기 위해 전자를 놓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당시 유학자들은 전자를 위해 후자를 놓아야만 한다는 소승의 불교, 소승적 도교를 비판했다.
상기 장재의 기(氣)론에 의하면, 태허(太虛)는 동정취산(動靜聚散) 이전의 기이다.
이 기가 응축되어 만물이 된다. 이 만물은 흐트러져서 다시 태허가 된다.
이러한 기 운동 사이클은 불가피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참 유학인은 이것을 깨달은 사람, 즉 생生이라고 해서 더 얻는 것도 없고 사死라고 해서 더 잃는 것도 없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사이클을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으며 육신의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이러한 깨달음이 가져다 주는 삶이 바로 인간사회의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하늘의 천민으로서 살다가 죽음이 오면, 그의 서명(西銘)에서처럼, 편히 쉬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