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은 온돌이 우리 것임을 증명해 주는 열쇠
- 재단법인 한국등잔박물관 김형구 관장
박숙현(작가)
“우리나라에서 온돌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을 하려는데, 중국이 반대해서 못했어요. 중국 사람들은 1500년 전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처음 기록이 세종실록에 나와요. 그렇지만 현재 일상생활 속에서 온돌 쓰고 있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어요. 중국은 온돌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있어요. 요새 우리나라 50층짜리 아파트도 다 온돌이에요. 온돌이라는 것은 방바닥을 덥히는 시스템이에요. 초창기에는 밑에서 직접 불을 땠지만, 지금은 스팀으로 하잖아요. 그것만 바뀌었지, 밑에서 덥히는 것은 전 세계에서 우리밖에 없어요. 우리나라 주거의 95%가 온돌 주거에요.”
김형구 한국등잔박물관 관장은 최근 등잔 문화를 바탕으로 온돌문화가 우리 것임을 증명하는 이론 작업을 완성했다. 김 관장은 만나자마자 거두절미하고 온돌이 우리 것임을 증명하는 외에 다른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며 온돌에 대한 말씀만을 이어나갔다. 김 관장은 온돌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마음이 급하고 바쁘신 것이다.
“온돌이 처음 시작된 게 등잔부터 시작해요. 등잔은 좌식문화에서만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거예요. 그러면 온돌은 어디서 왔나. 구들장이 중요한데 그걸 추적하다 보니 고인돌과 연계되고, 그걸 쓴 사람이 누구냐 봤더니 8,000여 년부터 잡히는 예맥족부터 만든 거예요. 그 후예들이 지금 여기 한반도에 사는 거예요.”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정몽주 선생 묘역을 지나 500여m 올라가다 보면 한국의 등잔을 한곳에 모아놓은 세계 유일한 등기구 역사박물관인 재단법인 한국등잔박물관이 나타난다.
이곳 김형구 관장은 온돌이 우리 것임을 학문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으로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7, 8년 전부터 이론 작업을 시작했다. 이같은 이론이 나올 수 있던 것은 등잔으로부터였으니 등잔박물관 관장을 맡은 김형구 관장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온돌이 우리 것임을 학문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학문적으로 세계에서 나예요. 7, 8년 전부터 주장했는데 그것을 연구해서 한 게 아니라 내가 등잔박물관을 함으로써 등잔과 연결이 된 것이죠. 우리나라 등잔, 우리가 소장하고 있는 등잔은 전부 키(높이)들이 비슷하게 같아요. 왜냐면 그것은 온돌에 사는 사람만이 쓰게 발달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등잔에서 제일 중요한 게 잔이에요. 전 세계 사람들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는 잔을 썼어요. 간장 종지 같은 것을 다 썼어요. 종지에다 동물성기름, 식물성 기름을 붓고 거기에 심지를 담가 쓰는 거예요. 잔은 흙으로 빚어요. 그게 기초에요. 미국이나 아프리카나 세계 어느 나라나 다 똑같아요. 다만 주거 형식에 따라서 우리나라처럼 대가 있는 등잔이 발달해요. 우리는 방바닥에 앉아서 사는데 잔을 바닥에 놓으면 빛의 효율이 없잖아요. 빛의 효율을 올리기 위해서 잔을 끌어올린 거예요. 방바닥에 앉은 상태에서 눈높이보다 조금 낮게 놔야 바느질도 하고 책도 보지 않겠어요. 우리나라만 받침이 있고 대가 있어요. 같은 좌식이어도 동남아는 집이 형편없으니까 만일 쓰러지면 집이 다 타버리잖아요. 일본 역시 주거생활이 다다미에요. 풀을 말려서 방석 짜서 놓은 것 아니에요. 우리 것과 같은 등잔을 쓰다가 쓰러뜨리면 안 되잖아요. 중국은 시원찮아도 테이블과 의자를 사용했어요. 테이블에 올려놓으면 대가 있을 필요가 없어요. 결국 우리가 온돌을 쓰는 주거 형태이기 때문에 대가 있는 등잔이 발달한 것이 증명되는 것이에요.”
김형구 관장은 결국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던 등잔은 온돌문화를 증명해 줄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
온돌 구들장의 뿌리는 예맥족의 고인돌… 독특한 좌식문화 등잔 발달
“온돌은 뭐가 제일 중요하냐 하면 구들장이에요. 그 구들장은 삼국시대부터 쭉 썼는데 구들장이 전부 돌이잖아요. 어디서 주워다 쓴 게 아니라 채석장에서 깼어요. 그 당시 돌 깨는 기술은 우리나라가 세계적이었어요. 우리가 그게 가능한 게 우리나라 산에 있는 돌의 지질이 화강암이에요. 화강암은 결이 있어서 쐐기를 박고 몇 명이 같이 짝 때리면 결이 쫙쫙 나가는 돌이에요. 돌 깨는 기술이 있어야 온돌이 되잖아요. 그렇다면 돌 깨는 기술은 어디서 나왔냐. 우리 민족이 어디서 왔나 그걸 추적해보면 예맥족에서 시작해요. 그 사람들이 이동한 게 8000년 전부터 잡혀요. 그때부터 한반도로 들어온 게 한 3000년이에요. 뿌리가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수 남쪽에 살던 사람들이에요. 수천 년 동안 흘러서 이리로 들어왔어요. 그사이에 당연히 통과해서 오다 보면 마찰도 있었겠죠. 일부가 그쪽에 남은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주류는 한반도까지 온 거에요. 물론 여길 찾아온 게 아니라 오다 보니 반도로 막혀있고 지형상 동굴이 많다 보니 집합해서 살게 된 거죠. 근데 4000년 전부터 예맥족만의 독특한 장례문화가 있었어요. 그게 고인돌이에요. 고인돌이 세계적으로 많이 나오는 데가 우리나라, 프랑스, 영국인데 프랑스와 영국은 재료가 대리석이에요. 톱으로 잘라야 하죠. 우리나라 전체에 5만여 점 발견되는데 고인돌이 채석장에서 깬 것에요. 즉, 고인돌 깨는 기술을 만들어낸 게 예맥족이에요. 그 고인돌 깨는 기술이 곧 구들장 깨는 기술이었어요.”
김형구 관장은 “납작납작 다 비슷하게 깬 돌이 구들장이고 그것이 바로 온돌”이라며 “온돌에 살다 보니까 이렇게 생긴 등잔이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관장은 “세계에서 등잔으로 박물관 한데가 여기밖에 없다”라며 우리 문화의 뛰어난 우수성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김 관장은 “중국은 만주 북쪽에 고인돌이 700개가 있다”라며 “그게 고구려 땅인데 중국 측은 거기에 고구려 사람들이 살았다고 해서 왜 너희 거냐며 인정하지 않아요. 왜 너희 땅이라고 할 수 있냐는 거에요. 우리 땅이었던 걸 무시하는 거죠”라면서 “중국 사람들이 온돌을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데에 대응할 이론이 등잔 하나밖에 없다”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백 년, 천년, 만년 이걸 가지고 싸워야 해요. 이론이 없으면 안 돼요. 독도도 마찬가지예요. 왜 그런지 이론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고, 그 이론을 가르쳐야 해요.”
김형구 관장은 중국과 수백, 수천 년을 싸울 가장 든든한 이론을 만들어 놨다고 자부했다.
김형구 관장은 “이 이론을 가지고 계속 후손이 연구를 덧붙여가면서 우리 민족의 주거문화에 긍지를 가지고 왜 온돌이 우리 것인지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라고 강조했다.
김형구 관장은 온돌문화연구소를 만들 계획이다.
“용인 모현읍 이장들에게 다 사인을 받아놨어요. 근데 시에 돈이 없는 거예요. 돈이 많이 들어가요.”
우선 연구소를 발족부터 시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동참해야 하니 이어서 건물을 마련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다.
김형구 관장은 부친인 고 김동휘 전 관장의 뒤를 이어 등잔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97년에 취임한 김형구 관장은 이미 99년에 박물관 전 재산을 국가에 기증했다. 현재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김 관장이 운영만 맡아서 하고 있다. 당연히 운영비를 국가에서 줘야 하지만 그렇지를 못하다 보니 결국 사비를 연간 1억여 원씩 들여가면서 여전히 박물관을 운영해 오고 있다. 그만큼 세계에서 유일한 등잔박물관의 문화적, 학술적 가치를 크고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미 온돌을 놓고 중국과의 지난한 싸움에서 이길 이론 정립을 마친 상태이고 내년에 취임 25주년을 기해서는 온돌문화연구소를 박물관 내에 오픈할 계획이다.
한국등잔박물관은 수원 최초의 산부인과인 보구산부인과 원장으로 지낸 김동휘 박사가 사비로 설립했다. 전체 4층 건물 가운데 1, 2층은 등잔 전시 공간이고, 지하는 작은 무대공연, 미술 전시, 심포지엄 등을 할 수 있는 다목적 문화공간이다.
이곳에는 부친 김동휘 박사가 생전에 아들 김형구 관장과 함께 50여 년 동안 수집한 등기구 진품 2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고대로부터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어둠을 밝히던 등잔들로써 이곳 수장고에 보관한 것까지 합하면 1,000여 점에 이른다. 이곳은 귀한 도자기와 고가구 등 할아버지 대로부터 김형구 관장까지 3대가 수집해온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 또한 지난 99년 박물관 기증할 때 모두 국가에 기증했다.
고가구와 도자기 등은 박물관의 입체적 전시를 위해 등잔과 함께 전시돼 있다. 부엌, 마루방, 사랑방, 안방 등 조상들의 생활양식을 방방이 꾸며 그곳에 잘 어우러지게 배치했다.
“요즘 사람들은 등잔만 진열해 놓으면 어떤 환경에서 어찌 사용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당시의 생활 모습을 옮겨놓았죠.”
전시된 모습을 보면 무엇보다 등잔이 좌식문화, 온돌문화에서 사용했던 물건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중국의 ‘온돌 공정’에 맞서 필승이론 정립… 온돌문화연구소 오픈 계획
김형구 관장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 김동휘, 할아버지 김용옥으로부터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피부로 느끼고 배우면서 성장했다.
원래 안성분들이었는데 지손지손으로 이어지면서 땅 한 마지기 없이 촌수만 높아지다 보니 증조할아버지가 수원으로 이사 나와서 밑천이 덜 들어가는 솜틀집을 시작했다. 아들 둘이었는데 첫째는 대장간에 취직했고, 둘째인 김용옥 할아버지는 두뇌가 명석해서 나이가 좀 든 상태에서 수원에 삼일학교가 설립되자 전체 일 등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 당시 서울에 도청이 소재해있던 경기도공무원시험에 합격하니 수원에서 경사가 났다. 도청에 다니다 보니 스스로 일본 놈 앞잡이 같은 생각이 들어서 공무원을 그만두고 수원으로 내려와서 수원에서는 최초로 수원 행궁 자리에 정찰제 문방구를 열었다. 일본이 하는 것 중에 정찰제만큼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정찰제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인심으로는 깎아주는 게 정서상 맞는데 십 원도 안 깎아주자 인심이 나쁜 미친놈이라고 욕을 했다. 그러나 정찰제 가격 자체가 안 깎아줘도 다른 문방구보다 싸다는 것을 알게 되고부터는 장사가 잘돼 백화점같이 발전했고 수원상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 아들이 김동휘 박사다.
김동휘 박사는 당시 제일고보(현 경기중고교, 김형구 관장과 선후배)에 합격을 할 정도로 머리가 명석했다. 아들 김형구 관장과는 수원 신풍초등학교도 선후배(20회, 45회) 사이다. 김동휘 박사는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이북에 있는 기독교 계통의 구세병원 산부인과 의사로 발령받아 근무하던 중 당시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직장인 은행에 근무하고 있던 재원 어머니 장영숙을 만나 결혼했다.
그 후 김동휘 박사는 경기도립병원에 근무하다가 김용옥 할아버지가 행궁사거리인 종로에 수원 최초로 지은 이층집의 1층에 수원 최초의 산부인과 병원인 보구산부인과 병원을 6·25 이전에 개원했다. 보구산부인과 병원은 수원, 평택, 오산, 용인 등 경기도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산부인과로 명성을 얻었다.
할아버지는 워낙 검소해서 당시 가구가 불쏘시개로 버려지는것을 안타까이 여겨 고가구 위주 수집에 뛰어들었다. 아버지 김동휘 박사는 민간에서 사용하던 등잔을 위주로 수집을 했다. 생전에 김동휘 박사는 등잔을 보면 등잔불 아래서 밤늦도록 바느
질하는 어머니가 떠오른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잠을 깨면 수집한 가구며 등잔이 가득했어요. 어린 마음에 창피했어요. 왜냐하면 우리 집은 도깨비집 같았거든요. 어린 내가 볼 때는 너무 헌것들만 잔뜩 싸놓은 거예요. 딴 집 가면 오마이카장도 있고 깨끗하잖아요. 친구들을 우리 집에 데려오기가 싫었다니까요.”
어린 시절부터 우리의 문화유산을 아끼고 수집하는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란 김형구 관장도 이미 중학교 때부터 수집에 눈을 떠서 도자기를 사서 모았다.
“모두 하찮아 보여서 모은 거예요. 할아버지, 아버지는 하찮은데서 귀한 것을 보는 안목이 있으셨어요. 두 분이 수집하지 않았으면 모두 아궁이 불쏘시개로 다 사라져버렸겠지요. 나도 평생 수집했어요. 중학교 다닐 때부터 좋은 것 있으면 샀어요. 그땐 비싸지 않았죠. 내가 수집한 것만 해도 70년 모았어요. 왕실의 능에서 나오는 것은 사용하지 않은 새것이지만 내가 모은 도자기는 민간이건 관이었건 일상에서 쓰던 도자기들이에요.”
김형구 관장은 태어나면서부터 골동품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안목이 뛰어나다. 한 번만 보면 다 안다.
원래 김형구 관장은 20대 후반의 어린 나이부터 우리나라 산업발전에 다양하게 공헌한 경제통이었다. 20대 후반에 무역협회에서 하는 무역연수원 교수까지 할 정도로 우리나라 산업발전을 이끌던 리더였다. 당시 돈도 최고로 많이 벌었다. 그 같은 재력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박물관을 지탱해 올 수 있었다. 개인사에 대해서는 알 필요 없다면서 굳이 말씀을 피하셨지만 경기중고교에서도 공부를 잘했던 뛰어난 인재였고 학맥 또한 탄탄했다.
원래 화공을 전공했지만, 개인적으로 고고학에 관심이 많아 50년 넘게 고고학 공부를 했다. 음악, 미술, 문학 등 미적 안목과 문화예술에 대해 다방면으로 조예가 깊다. 등잔박물관장으로 있으면서 20여 년간 5만여 명을 대상으로 박물관, 대학 등에서 10개의 테마를 놓고 강의를 펼쳤다. 아마 김형구 관장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조예가 가장 깊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실제 악기 연주는 물론 이론과 감상에 막힘이 없다.
원래 한국등잔박물관은 69년 ‘고등기전시관’으로 출발했다. 보구산부인과 병원 2층에 등잔과 민속품을 수장고 식으로 모아두다 보니 유물이 많아져서 보관 활용을 고민해야 했다. 그때 종종 병원에 들렀던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황수영 선생과 미술과장을 하던 최순우 선생이 강력하게 권유해 전시관을 개관하게 됐다. 당시 사립박물관으로는 1964년에 설립된 제주민속박물관 등 몇 안 되는 소규모박물관만이 있을 뿐이었다. 개관할 때 할아버지 김용옥씨가 개관식 테이프를 끊었다. 그러던 것이 1997년 9월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의거한 박물관으로 정식 등록됐다.
용인 처인구 모현에 문을 열게 된 것은 부친인 김동휘 박사가 이곳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아무 연고가 없던 곳이었는데 김동휘 박사가 오지 중의 오지였던 이곳 모형 능원리를 수원에서 두 달에 한 번씩 자전거를 타고 대지 고개를 넘어와 진료를 봐줬다. 당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놀고 있던 소녀들을 데려다가 보구병원에 취업을 시켜주기도 했다. 이곳 등잔박물관 동네 할머니들 가운데는 지금도 김형구 관장에게 오빠 오빠라고 부르는 분도 계시다.
김형구 관장이 20대 때인 1975년에 부모님을 위해 이곳에 부지를 마련하고 집을 지어드렸다. 현재 박물관 내에 그대로 남아있는 부모님이 사시던 집을 도서관으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 박물관은 95년 김홍식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 설계로 수원 화성의 공심돈을 본떠 건축했다.
유물 수집부터 박물관 건립까지 모두 자비로 했고, 99년에 이 모든 것을 국가에 기증한 후에도 10년 넘게 자비 운영을 하다 보니 최근 다소 힘에 부치시는 것 같기에 도자기라도 한 점 팔아서 박물관 운영비에 보태 쓰시라고 속이 상해서 말씀드렸다가 혼쭐이 났다. 김형구 관장은 펄쩍 뛰시며 일침을 가하셨다.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박물관인데 후세 사람들이 그걸 다 가지고 있어야 박물관이 발전이 되는 거예요.”
박숙현|이사주당기념사업회 회장. 이사주당과 태교신기를 널리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음. 저서로는 『태교는 인문학이다』, 『쉬운태교 명품태교』 등이 있고, 기타 논문으로 『출산정책의 문제점 및 향후 개선방향 연구』 등이 있음. 현재 지역 대학에서 태교신기와 함께 처인성 등을 강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