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가져갈 것은 바벨론에 살 때 준비해야 한다
성경본문 : 에스라 3:1-13
3장에서는 성전 터를 닦고 모든 백성이 제사를 드렸고, 초막절도 지켰고, 시돈 사람들과 두로 사람들과 기술자들을 동원해서 성전 기공식을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어떤 기사는 토막토막 끊어져가지고 연결이 잘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적으로 보면 그것이 다 신앙 사상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을 하지 못하면 다음 것을 못하게 되어 있다 그 말이요. 마태복음 5장도 그렇습니다. 역사적으로 사건적으로 순서가 없이 되어 있는 것 같으나 전부는 그것이 계시적으로 그렇게 기록이 된 것입니다.
1장에서는 ‘바벨론에서 종노릇 하면서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살다 가느냐?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어떻게 살다 가느냐’ 그게 있었고, 2장에 보면 ‘성지로 돌아올 때에 너와 함께 따라오는 자손이 얼마냐? 한 가지 종류의 사람이냐, 각양의 사람이냐?’
우리는 2장에서 구원에 대한 다양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화구원면에서의 말이지요. 또 2장 마지막에는 자기가 그동안 시온주의로 살면서 성전 짓는 데에 투자한 것이 있습니다. 역량대로 드리게 되는데, 포로로 살 동안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먹고 마시자’ 하는 그런 주의로 살지를 않고, 바벨론의 정신은 다 버리고 바벨론의 재산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짓는 데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그리고 또 바벨론의 것을 가지고는 안 되니 꾸어가지고 금은보석으로 마련을 했다 그 말이요. 이것은 보이지 않는 재산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으로 바벨론을 떠날 것인데 바벨론에 정이 붙은 사람은 그날에 고향에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을 바벨론에다 건설하고 확장하고 투자하면서 바벨론에서 인정을 받고 대우를 받고 살겠지요?
이런 것은 바벨론 건설 확장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그렇게 건설하는 것은 가식적이다 그 말이요.
명예와 부요 존귀를 목적하며 바벨론에 투자를 하며 바벨론 주의로 살면 대우 받고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장차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가지고 갈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하지만 바벨론에서 시온주의 정신을 갖고 살다가 보면 고향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 거기에 가서 쓸 수 있는 것을 가지고 갈 수 있게 된다 그 말이요.
돈이 많을 때에 성전을 짓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생활 70평생 동안에 모으고 또 모으고, 마치 조개 속의 진주모양 서서히 서서히 키워나가는 거. 이를 위해 바벨론에서의 낭비는 아깝게 여기고, 고향 예루살렘에 가져가서 황폐해 있는 성전 터에다가 제사를 드릴 때에 바칠 수 있게 하는 것.
그래서 바벨론 70년 동안 유대인들이 산 그 때 그 정신을 이어받은 유대인들은 지금도 돈을 쓰되 외국에서 함부로 물 쓰듯 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돈을 써도 외국에 나가서 쓰지 않고 자기 나라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쓴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지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어떻지요? 외국에 나가서 물 쓰듯 합니까? 그러니 나라꼴이 뭐가 됩니까?
드디어 스룹바벨의 인도로 고향에 돌아옵니다. 옛날 솔로몬의 성전을 본 노인들은 그 성전에 너무나 초래해서 펑펑 울었지요. 그런데 청년들은 자기 손으로 성전을 지었다고 해서 막 좋다고 그랬지요.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다윗이 이방을 칼로 정복을 해서 정복한 자들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을 가지고 지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솔로몬의 재산은 하나도 없이 지었다 그 말이요. 재료는 전부는 외국 것이었다 그 말이지요.
그러나 스룹바벨의 성전은 포로생활을 하면서 중노동을 해서 많은 임금을 받아서 먹고 쓰고 남아돌아가서 그 돈으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노예이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보다도 아주 저임금이라 그 말이요. 70년간을 하루하루 피를 짜고 뼈를 깎고 죽도록 노동을 해서 임금을 푼푼이 저축을 하고 모은 돈으로 성전이 되어졌다 그 말이요. 그야말로 이것이 성전이라 그 말이요. 백성들의 피와 땀방울이 아니더냐 그 말이요.
중노동에 저임금을 받아가면서 모든 돈으로 먹고 쓰고 입고 구경 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저것 다 무르고 70년간이나 고향에 돌아갈 것을 소망하던 사람이 고향에 돌아와서 중노동을 하면서 모은 그 돈으로 성전의 터를 놓을 때에 그 감격은 지금의 돈으로 말한다면 수십 억 수백억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이요.
우리가 구약의 성전을 가만 보면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고, 지금 여기 본문에 나오는 스룹바벨의 성전이 있었고, 후에 예수님 당시에 헤롯이 지은(수리한)성전이 있습니다. 이 성전이 각각 다릅니다.
스룹바벨이 성전을 지을 때에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는 무엇을 바쳤을까? 내 투자가 얼마나 되었느냐’ 하는 그게 있을 거란 말이요. 먹고 마시고 남은 것으로 성전을 지었다면 그 성전은 다 못 짓습니다. 지을 수가 없어요.
귀국령이 내릴 그 때를 생각을 하면서 ‘예루살렘을 떠나 70년이 되면 귀국을 한다. 그러니 오늘의 생활을 바로 하고 가자’ 하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 때 당시에 귀국하기 전에 바벨론에서 죽은 부모들이 있을 거라 그 말이요. 죽을 때에 유언하기를 ‘나의 재산을 헛으로 쓰지 말고, 낭비하지 말고, 먹고 마시고 낭비하지 말고 나의 재산을 성전을 짓는데 써라’ 하는 그런 유언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 때 당시 피를 짜고 뼈를 깎아 모아놓은 그 유산보다 더 좋은 것은 신앙 믿음의 유산을 넘겨주는 것이지요. ‘오늘날 성직자들이 이것을 물려주고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요즘 들어서 자꾸 생각을 하는데, 성경대로 볼 때에 앞으로 분명히 조용하지는 않습니다. 말세가 되어 올수록 나라와 나라끼리 민족과 민족끼리 싸우고, 집안끼리 식구끼리 원수가 된다. 이제 그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걸 가만히 생각해 보며 테레비에 나오는 목사님들 설교를 들어보면, 그래도 유명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나오는 건데 내가 볼 때는 도무지 진리사상 정신이 나오지를 않고, 하나님의 뜻이 없는 거고, 사회구원을 외치고 있다 그 말이지요. 성경하고는 뜻이 멀어요.
그리고 현재 우리교회 교인들의 신앙이 이 모양인데 앞으로 우리 자녀들의 신앙이 참 큰일이겠다. 세상 이 바람이 부니 이렇게 날려갈 거고, 저 바람이 부니 저렇게 날려갈 거고. 그렇게 날려가다가 소돔 고모라처럼 유황불을 만나는 그런 생각을 하니까 아주 걱정이 태산 같아요.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볼 때는 지금 진리의 교회를 보기가 참 힘들어. 진리 받는 교역자들도 다 변질이 되었고 세상과 믹샤가 돼 있고. 그래서 ‘바로 나가는 교회가 없을 텐데 앞으로 참말로 큰일이겠다. 요한계시록의 사건들이 일어날 때에 휘말리겠구나’ 자꾸 그런 생각을 해요. 어쨌든 신앙 믿음의 유산 이걸 넘겨주고, 이걸 또 넘겨받으려고 해야 되겠는데 그 말이요. 성전을 지을 때에 자기의 역량대로 갖다 넣어라.
귀국령이 내려질 때에 이스라엘이라도 부요한 자들은 다 바벨론에 남아 있었을 겁니다. 정신이 남아있으니까 몸뚱이도 남아 있을 테지. 바벨론에 정 붙이고, 자손들에게 유산도 넘겨주고, 자기의 출세도 넘겨주고. 스룹바벨이 성전을 지을 때에 너는 어떤 자로 살다 가겠느냐?
우리가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을 두 종류로 볼 수가 있어요. 하나는 바벨론 주의로 사는 유대인, 하나는 시온주의로 사는 유대인 이 두 종류가 있다.
우리가 계시정신으로 영의 눈을 가지고 볼 때에 바벨론에서 허물어진 내 속의 성전 이게 보여져야 될 거라 그 말이요. 이게 보이지 않는 것은 눈이 어두운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허물어진 내 속의 성전이 어디에 가서 보면 보여지느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보면 내 속에 허물어진 성전이 보여집니다.
보이지 않는 이 성전을 위해서 어떻게 살겠느냐? 어떻게 살고 갈 것이냐? 성전은 쑥밭이 되고, 들짐승이 날뛰고 있는데 나는 고향 돌아갈 생각은커녕 바벨론에서 빌딩을 짓고 살지는 않는가?
이제 우리가 조상들이 짓지 못한 성전, 부모가 짓지 못한 성전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내 손으로 짓자 그 말이요. 그 때 당시 역사적으로 보면 젊은이들이 가서 지었다 그 말이요. 얼마나 값진 성전이냐? 이 무형의 성전을 우리가 지을 줄 알아야 됩니다. 어디서 지어야지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최고의 도덕성, 최고의 신앙성 거기에 올라가서 성전을 지어야 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자는, 신앙의 도덕성에 올라가서 보는 자는 바벨론에서 허물어진 성전을 볼 수가 있다. 그 사람이 허물어진 성전을 볼 수가 있다 그 말이요.
우리는 주님을 바로 믿고, 영의 눈을 가지고 우리 속에 허물어진 성전을 볼 줄 알고, 이걸 잘 짓고 가야 되겠어요.